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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 세로변형

1 열차 시간표

이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기적을 목격하는 것은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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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3세기에 걸쳐 완성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약 1만km를 잇는 초대형 프로젝트.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결코 자연의 은총이 아닌, 인류가 빚어낸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였다."

"이 철도는 전쟁과 오염, 고통과 탄식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려지는 듯했다."

"허나 인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붉은 깃발로 이 토지에 다시 불을 지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시베리아 생명선에 다시금 우뚝 선 대동맥 위에서, 미래호가 기적을 울린다!"

"그리고 이 기적을 목격하는 것은 바로 당신! 새로 쓰이는 역사의 위대한 산증인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

신소련, 바르샤바 중앙 전철역.

세월이 엿보이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썰렁한 승강장에 울려퍼지며 안내 방송이 시작됐다.

방송

<color=#00CCFF>각 부서 주의, 각 부서 주의.</color>

<color=#00CCFF>모스크바발 베를린행, EN440-13M 열차가 6번 승강장으로 진입합니다.</color>

<color=#00CCFF>열차 맞이 준비 바랍니다.</color>

<color=#00CCFF>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color>

<color=#00CCFF>지금, 베를린으로 향하는 EN440-13M "미래호" 열차가 우리 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color>

쿠우웅...

친절한 여성의 안내에 맞춰, 움직이는 성채가 승강장을 따라 미끄러져 끄트머리에 멈춰섰다.

치이익...

열차가 완전히 멈추자, 탑승문이 금속음을 내며 열리기가 무섭게 진지한 표정에 제복 차림인 철도 경찰들이 내렸고, 그 뒤를 한 승무원 인형이 따랐다.

여정을 마친 승객을 배웅하듯, 승무원 인형은 탑승문 앞에 서서 질서 있게 나란히 늘어선 철도 경찰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승무원 수잔나

여기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근무표는 독일 행정부의 철경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철경팀 대장

마음대로 해, 어차피 볼 사람도 없으니.

난 벌꿀주나 마시러 가려는데, 너희는?

철경A

저도 가겠습니다.

철경B

전 안 되겠습니다, 바로 다음 열차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해요.

아들놈 생일에 같이 있어 주겠다고 저번 달에 약속해서, 늦기라도 하면 큰일나요.

철경팀 대장

빠듯하겠네. 얼른 가고, 다들 고생했다.

철도 경찰 팀의 대장은 손짓으로 부하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뒤돌아, 승무원 인형을 스치며 지나가듯 당부했다.

철경팀 대장

포즈난에서 그 독일인들이 타기 전에 일 터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수잔나.

요즘 들어 국경이 도통 조용한 날이 없어.

수잔나

알겠습니다.

"수잔나"라는 이름의 승무원 인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발길을 돌리는 철도 경찰을 눈으로 배웅했다. 하지만 일이 끝난 그와는 달리, 그녀의 일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

대륙간 열차 "미래호", F02호 객차.

고급스런 커피향으로 가득한 멋들어진 일등칸 객차에서, 한껏 차려입은 승객들은 각자 자신의 좌석에서 자신의 일에 신경쓰고 있었다.

서로 대화도 거의 않고 눈치껏 거리를 두어서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승무원의 업무가 편해지는 일은 없다. 어떨 때는 과묵한 승객이 승무원에게 더욱 성가신 존재가 되기도 한다.

수잔나

안녕하세요.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최고의 선택, 미래호 열차에 오르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현대화된 고속 대륙간 열차에서 편안한 여행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여정에서 손님을 성심껏 모실 승무원 수잔나라고 합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으신가요?

...손님?

복장을 더욱 단정히 한 수잔나는 공손히 몸을 낮춰, 일등칸의 통로 한가운데에서 휠체어에 탄 채 길을 틀어막고 있는 노부인에게 대화를 시도 중이었다.

???

............

하지만 이 노부인은 대답은커녕 수잔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수잔나도 이 노부인이 대답할 마음이 들기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그냥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옆으로 지나가는 승객들이 있는 만큼, 이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승객들의 불편함과 혹시 모를 컴플레인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수잔나

손님, 성함이... 아, 발레리야 부인이시군요. 제가 부인을 A18번 좌석으로 모셔도 되겠습――

???

저리 꺼져!

이 "발레리야 부인"에게 다시 대화를 시도한 그때, 뒤에서 듣기만 해도 불한당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마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그녀라는 듯, 우람한 몸집의 남성은 수잔나를 옆으로 홱 밀치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노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수잔나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남자는 예상밖으로 공손히 허리를 숙이더니 노부인의 손을 들어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여태까지 꿈쩍도 않던 노부인은 그제서야 자상한 얼굴로 남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야 부인

수고했다, 다니엘.

나 좀 밀어 주련? 다른 손님들이 난처해하는구나.

우람한 남성

그럴 리가요, 부인을 위해 몇 초라도 더 할애하는 게 저들에게도 영광이죠.

거한이 발레리야 부인의 휠체어를 부드럽게 밀어 A18번 좌석으로 옮긴 것을 본 뒤에야 수잔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다만, 숨 돌릴 틈은 없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뒤로 돌자마자 또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거의 부딪힐 뻔했기에, 수잔나는 황급히 사과했다.

그리고 허둥지둥 이 승객의 정보를 확인했다.

수잔나

기다리시게 해 정말 죄송합니다, 류드밀라 교관님.

류드밀라

...괜찮아.

수잔나

금방 오늘의 메뉴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류드밀라"라는 이름의 여성은 손목시계를 보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수잔나가 비킨 통로를 따라 자신의 좌석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수잔나는 한숨을 푹 쉬고 속으로 투덜댔다.

수잔나

<color=#A9A9A9>같은 인형인데 누군 일등석에 앉고, 누군 와인이나 따라야 하고.</color>

<color=#A9A9A9>인형도 다 팔자가 따로 있다니까...</color>

......

잠시 후, 일등칸 객차의 준비실. 수잔나는 승객들에게 제공할 와인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때, 눈치 없는 통신이 들어왔다.

??

<color=#00CCFF>우리 귀여운 수잔나아~ 네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 매기야.</color>

<color=#00CCFF>좀 이따 9호차에 갈 일 있으니까 나 대신 단거리 표 좀 끊어 줄래? 포즈난 가는 걸로.</color>

수잔나

매기 폰지...? 너 진작에 죽은 줄 알았더니?

매기

<color=#00CCFF>걱정 꽉 붙들어 매셔~ 못된 놈이 오래 산다고, 난 아직은 죽고 싶어도 못 죽걸랑.</color>

수잔나

9호차... 식당차잖아? 또 "장사"하려고?

이번엔 몇 명이나 호구 잡을 셈이니?

매기

<color=#00CCFF>아잉~ 그러지 말구. 이번 건의 3할 줄게, 어때?</color>

수잔나

엣휴... 그러셔, 사르디스 골드를 봐서라도 참아야지.

...그 전자 신용카드 쓰면 돼?

매기

<color=#00CCFF>응, 전에 썼던 그거 그대로 써. 그리고 이따 누구랑 같이 2호차 가서 사람 좀 만나려 하는데, 그때 나 봐도 검표하지 말아 줘~</color>

수잔나는 인상을 팍 쓰고 끙끙대다... 마음을 먹었다.

수잔나

...알았어.

나 곧 준비실에서 저녁 식사 준비할 거야.

삑.

통신 종료.

......

일등석 객차 안.

발레리야 부인을 좌석으로 모시고 온 남성은 정성껏 부인의 좌석 주위를 정리한 다음, 옆에 서서 소리 낮춰 속삭였다.

우람한 남성

화물은 안전하게 뒀습니다.

발레리야 부인

그래... 잘 했다.

다니엘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니콜라스... 그 애는 어딨어?

노부인의 질문에, 남성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니엘

니콜라스는... 열차에 탔습니다.

다만 지금은 9호차에 있습니다, 거기에도 자리를 하나 잡아서...

발레리야 부인

걔 혼자서?

다니엘

......네.

발레리야 부인

...흥.

버릇을 못 고치는군.

온화하던 노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다니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오한에 떨었다.

발레리야 부인

불러 와.

다니엘

...예.

행여 화풀이라도 당할까 봐 무서운 듯, 다니엘은 허리를 꾸벅 숙이곤 냉큼 자리를 벗어났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승객들 덕분에, 열차 안은 진작에 평소와 같은 분위기를 되찾은 뒤였다.

때문에 객차를 빠른 걸음으로 가르지르는 두 사람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젊은 남성은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발레리야 부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옆에 서, 적어도 겉보기엔 순종적인 태도를 취했다.

니콜라스

정말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부인, 곧장 인사를 드리러 와야 했는데.

약간의 일이 생겨서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부디 괘념치 마시길.

부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노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긴 해도 별다른 말은 없었다.

반면, 니콜라스 옆의 여성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발레리야 부인

니콜라스... 널 혼낼 셈은 아니란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니콜라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무, 물론 맡은 일을 게을리할 셈도 아닙니다.

제 고객 타레우스 양이 대신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 전했습니다.

니콜라스가 급히 함께 온 여성에게 눈치를 주자, 여성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공손히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히죽 웃으며 상자를 열어, 속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막 피기 시작한 한 송이의 꽃이었다.

발레리야 부인

...그래, 알았다.

"허가"가 떨어지자, 니콜라스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니콜라스

그리고... 이번에 매기는 타레우스 양의 심부름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내쫓기는 좀 어렵겠습니다.

발레리야 부인

네가 내쫓기 싫은 거겠지.

발레리야 부인은 태연하게 뚜껑을 다시 덮곤 상자를 숨겼다.

발레리야 부인

10분 주마.

눈에 띄기만 해도 기분이 심히 언짢아지는 년이 있거든.

매기

......

여전히 니콜라스의 곁에 서 있는 매기는 말없이 모자의 챙을 눌렀다.

발레리야 부인의 눈길은 아직도 그녀에게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니콜라스

...알겠습니다.

발레리야 부인

이만 가 봐, 쉬어야겠어.

그 말을 듣자마자, 니콜라스는 매기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노부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상자를 꺼내 보인 시간보다 짧았다.

......

일등칸 객차의 문 밖에서, 니콜라스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곤 곁의 매기에게 불을 붙여 달라 내밀었다.

니콜라스

나 참... 대체 저 할멈 심기는 왜 건드렸어?

매기

응? 내가 심기 건드린 건 너 아니었나?

니콜라스

내가 뒤끝이 좀 많이 없는 편인 거야, 이 망할 자식아.

이 열차는 우리의 비즈니스야, 도전은 좋아하지만 일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사양이라고.

매기

뭐 어때, 서로한테 영향 가는 것도 아닌데. 넌 네 장사를 하고, 난 내 장사를 하고. 그럼 됐지.

그리고, 우리가 처음 손잡는 것도 아니잖아?

니콜라스

돈만 낼름 먹고 튀던 네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거든?

매기

어우 이런 짐승~

니콜라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진짜...

...하지만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널 봐주는 거야.

아무튼 포즈난에 도착하면 너도 같이 내려.

매기

미리 좀 말해 주지 그랬어, 너한테 표 구해 달라 했음 훨씬 편했을 텐데.

이런 열차는 나 같은 인형이 표 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니콜라스

네가 여태까지 나한테 사기 친 금액의 하루 이자만으로도 특등실 객차 하나 통째로 전세낼 수 있는 건 알고?

매기

사기라니~ 우리 사이에――

삐익!! 삐익!! 삐익!! 삐익!!

경보—— 경보——

매기

엥...? 수잔나, 뭔 일 터졌어?

니콜라스

수잔나는 또 누구야?

매기

쟤.

매기의 대답과 함께, 승무원 인형이 준비실에서 양은 쟁반을 들고 나왔다.

수잔나는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매기에게 눈을 흘기곤, 니콜라스에게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건넸다.

수잔나

니콜라스 씨, 받으세요. 발레리야 부인의 식사입니다.

니콜라스

아, 어... 승무원이네?

수잔나

네, 이 열차의 승무원 인형 수잔나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매기

이 먹음직스런 식사를 네가 가져가서 바친다면, 그 할망구도 기분이 좀 풀어지지 않을까?

니콜라스

...그럴싸하군.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스는 매기를 힐끗 보고선 쟁반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매기는 니콜라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 꼴을 본 수잔나는 눈을 굴렸다.

매기

머리 좋은데~? 역시 내 베스트 프렌드야!

매기가 엄지를 척 세웠지만, 수잔나는 또다시 눈을 굴릴 뿐이었다.

수잔나

헛소리는 됐고, 네가 말한 식당차에다 자리 하나 만들어놨어.

내 몫 잊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매기

당연하지~ 내가 언제 너 섭섭하게 한 적 있어? 없잖아!

근데... 저 일반석 쪽 경보 냅둬도 돼? 저기서 여기까지 거의 열 칸 넘게 떨어져 있는데도 엄청 크게 들리는데.

수잔나

레드존 들어가면 그냥 울리니까 내버려둬도 돼.

그리고 어차피 일반석 승객은 다 거지 아니면 인형인걸, 죽지만 않으면 되지.

매기

이야아 잔인하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인형인데, 동족한텐 잘 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수잔나

...내가 너 때문에 없는 닭살도 돋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해?

웃기지도 않아 진짜.

매기

역시 수잔나야, 가차없다니까♪

매기는 교활하게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