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모양 운명
"셀 수 없는 윤회, 셀 수 없는 망각, 그녀에게 남긴 것은 마지막 집념뿐."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 간다.
아직 끈을 놓지 않은 의식이 난동을 부렸지만 입가의 미소에 흩어졌다.
밝은 불빛이 반짝였다. 콩닥콩닥, 심장처럼...
......
......?!
의아함에 눈을 번쩍 뜬 M16A1이 천천히 일어섰다.
파도가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빛을 받아 찰랑이는 이곳.
발밑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이 텅 빈 공간이었다.
씁...
M16A1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에 숨은 하얀 빛을 꺼내 봤다.
다름아닌 한 장의 타로 카드였다.
【운명의 수레바퀴】의 축복——
쉬지 않고 순환하는 운명, 안개를 걷어내는 승리의 술.
투명한 주황빛 액체가 담긴 술잔 세 잔이 허공에서 경쾌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떨어지는 순간, 마치 사진처럼 그대로 멈춰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 표면에 찍혔다.
이건... 위스키?
문득 떠오른 것에 그녀는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레이나드 개즈"란 사람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어.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서...
이게 그 녀석이 말한... "모든 안개를 걷어내는 술"이야?
"레이나드 개즈"...
M16A1은 은근히 혀가 꼬이는 그 이름을 되뇌였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ㄹㅔㅇㅣㄴㅏㄷ ㄱㅐㅈ, 거꾸로 하면 "잭 다니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
이런 미친...
이게 바로 "운명의 수레바퀴"의 선물인가?
...아니면, 벌칙?
그때, 심해처럼 깊은 공간에서 은은한 진동이 퍼져 왔다.
발밑으로 깊고 어두운 동굴이 그 입을 천천히 벌리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M4.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
일말의 주저도 없이, M16A1은 씨익 웃으며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끝없이 추락해,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설령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몇 번이든, 그녀는 M4A1을 찾아내 그녀의 뒤를 따라 희망의 불씨를 남길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무수한 세월처럼, 그녀가 잊어버린 무수한 윤회의 세월처럼...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그녀를 혼수 상태에서 깨웠다.
천천히 눈을 떠, 익숙한 듯 낯선 실험실의 천장을 훑어봤다.
으음? 예상보다 10분 일찍 깨어났구먼?
......
몸에 명령을 내려봤지만 꿈쩍도 않았다.
있는 힘껏 몸부림쳐 봐도 치지직대는 전류음만 들렸다.
긴장 풀게, M16.
한정된 시야에 미소의 가면을 쓴 자상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하벨?
발성 모듈까지 망가졌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기계적인 목소리로 출력돼서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누가 나한테 잠수함 기지 인근 해역에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 했다네.
그런데 설마, 그게 자네일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M4A1... 그리고 지휘관은?
걱정 말게나, 자네들의 보스는 아주 쌩쌩하니까. 바로 며칠 전 아주 중요한 임무를 받아 멀리 출장을 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M4A1의 행방이라... 그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페르시카는?
내 소체를 언제 다 고칠수 있대?
그 아가씨는 지금 자네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네.
......
약간 경계하는 M16A1의 반응에, 하벨은 그저 싱긋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해봄세, 자네도 "누가 가동한 스타피쉬에서 살아 돌아왔다"란 소문이 퍼지는 건 원치 않겠지? 토실토실한 양을 굶주린 늑대 무리 한가운데 던져 넣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 아니겠나.
잠수함 기지를 지켜보던 그놈들이 이를 알게 되면... 과연 무슨 짓을 하려 들까?
......
그렇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네.
그래도 페르시카 말고 이 소체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지 의문인데.
그것도 맞는 말일세, 누가 뭐래도 I.O.P.는 민간 기업에 불과하니.
이런 건 군용 기술이 있어야 고칠 수 있을 게야.
그 말과 함께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M16A1은, 그저 발소리로 들어온 사람이 남성임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아아, 오셨습니까.
초기 수복 작업은 순조로워 보이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하벨 씨.
과찬이십니다.
하벨과 싱거운 인사를 나눈 남성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눈알을 굴리자, 예전에 신문에서 봤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국장?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다니 참 기쁘군, M16A1.
아직도 눈앞의 광경이 믿겨지지 않는지, M16A1의 시선이 하벨과 젤린스키 사이를 오갔다.
M16A1의 소체는 붕괴액과 해수로 인해 상당 부분 부식됐습니다.
I.O.P.의 기술력으로는 이 정도의 수복이 한계여서, 이거 부끄럽기 그지없군요.
각성시킨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혹시나 하여 묻겠습니다만, "전임 국장"께서는...?
이것이 그분의 의사입니다.
M16A1이 원하는 것은 전부 제공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협상 카드인 것처럼 들리는데.
AI의 합성 음성으로도 비꼬는 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젤린스키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다시 M16A1에게 시선을 향했다.
내 정중히 알려 주건대, 너는 협상 카드가 아니다, M16A1.
너는 예리한 "장기말"이지. 승리의 천칭을 기울일 정도로 중요한 장기말.
내가 댁의 뜻대로 움직여 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 나셨을까?
그것을 본 건 너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도 M4A1의 행방을 찾고 있지.
......!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거래라 생각되지 않나?
M16A1은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다, 다시 눈을 떴다.
뭘 하면 되는데?
...알았다.
삑.
통신 종료.
후우...
차가운 밤바람이 부는 높은 탑 위에서, 우뚝 선 그림자가 냉철한 시선으로 멀리의 공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지켜보는 밤하늘 아래의 공항 한가운데, 전술인형 부대가 바쁜 걸음으로 썰렁한 활주로 위를 가로질렀다.
......
기다려야 한다.
때가 머지않았다.
쾅!
윽!?
난데없는 큰 충격음과 함께 헬리콥터가 요동쳤다.
뭐야... 뭐지?!
쾅!
몰리도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같은 소리가 또 나고 헬리콥터도 다시 흔들렸다.
그제서야 몰리도는 무슨 소리였는지 깨달았다. 무언가가 헬리콥터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뭐야...?!
......
!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몰리도의 눈에도, 헬리콥터의 계기판의 수치를 봐도, 지금 헬기는 공중에서 비행 중이었다.
그런데...
뭐야... 대체 뭐냐고!!!
너... 너 대체... 어떻게 올라왔어?!
......
인형이었다.
밤의 소나기와 맹렬한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웬 인형이 헬리콥터 조종석 바깥에 달라붙었다.
한손으로 가느다란 와이어를 쥐고, 양발은 헬리콥터의 조종석 창을 밟아 균형을 잡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유리 너머로 그녀의 무정한 얼굴이 비쳤고, 번쩍이는 번개가 그녀의 은빛 머릿결을 마귀처럼 빛냈다.
자... 잠깐만!
......
창 너머로, 몰리도는 그 인형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온갖 소음에 묻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유만만한 모습의 그 인형이, 놀고 있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다――
퍼엉!
폭발이 일어났고, 헬리콥터의 계기판이 요란하게 경보를 울렸다.
몰리도는 저 인형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눈치챘다.
너 미쳤어?!
이 상황에서, 몰리도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기체를 이리저리 흔들어 저 정신나간 행각을 벌이는 인형이 떨어지길 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점착폭탄으로 로터를 파괴한 것이다.
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하지만 그 인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진작에 절대 고도까지 상승했던 헬리콥터는 프로펠러를 잃자마자 곧장 곤두박질쳤다.
그 하얀 머리의 인형은 여전히 한손으로 쥔 와이어만으로 외벽에 단단히 붙어있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텅!
!
양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멀리 밀어내더니, 반동을 이용해 기체로 돌진했다.
통제불능으로 추락하는 헬리콥터 안으로, 저 하얀 머리의 인형이 쳐들어오려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 따위한테...!!
쿠웅!
몰리도가 다 소리지르기도 전에, 그 인형의 2차 시도에 헬리콥터의 옆문이 부서졌다.
그 다부진 몸이 강렬한 충격과 함께 좁은 헬리콥터 안으로 침입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
............
으윽...
뒤이어 일어난 또 한 번의 폭발에, 몰리도는 완전히 깨달았다.
손 쓸 방도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치솟는 불길 밖으로 걸어 나오는 M16A1의 발걸음 소리는 마치 최후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처럼 몰리도의 심장을 두들겼다.
......
헤... 헤헤헤...
저항을 포기했는지, 몰리도는 몸을 돌려 뒤에서 다가오는 M16A1을 바라봤다.
불길을 등진 그녀의 창백한 머리카락이, 이번엔 붉게 빛났다.
기억났다... 그래... 넌 AR팀의...
......
M16A1의 주먹에, 몰리도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기절했다.
...또 짝퉁이군.
사냥감을 집어 든 M16A1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창고를 바라봤다.
......때가 됐구나.
다들 뭘 그렇게 긴장하냐?
단 한 명, M16A1만 구석에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M4가 깨어나질 않잖아, 너야말로 왜 그래?
언니! M4 언제 깨어나?
...정말 걔가 M4라 생각해?
그게 무슨...
M16A1이 탁상 위의 건빵 봉지를 뜯어 으적으적 씹어먹으면서 AR-15의 의문에 답했다.
너희가 M4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판단력을 흐리지 마.
갠 M4가 아니야.
어? 아, M16 언니는 아직 모르겠구나!
겉보기엔 니토긴 한데 내용물은 M4 맞아!
아니, 아니야... 최소한 우리가 찾는 "M4A1"은 아니지.
걘 M4이면서도 M4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지?
문자 그대로의 뜻이야.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 지휘관은 포기를 못하는구나?
인형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안으로 들어가고 나니, 밖에 남은 사람은 지휘관과 M16A1, 그리고 AR-15였다.
...그 "남들"에, 너도 포함이야?
나야 언제나 소수파지.
M16A1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곤 시원하게 소리를 냈다.
캬하~ 시원하다.
그리고 입가를 스윽 닦고 병뚜껑을 대충 닫아, 반쯤 남은 술병을 AR-15에게 휙 던졌다.
?!
뭐야, 위험하게!
전혀 예상 못한 패스에 AR-15는 허둥대며 술병을 받았다.
하핫, 꽤 좋은 거니까 너도 마시라고.
성질내는 동생에게, M16A1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잠깐 지휘관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먼저 들어가 있어.
......
인상은 잔뜩 구겼지만, AR-15는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임시 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
옆에서 지켜보던 지휘관은 AR-15가 안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M16A1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가려고?
말했잖아, 따로 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선수를 빼앗긴 M16A1이 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슈타지 요원이 내 목표를 언급했거든.
그러니 이만 출발해야 해.
말려도 소용없지?
하하하, 그야 모르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M16A1은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기고, 시선을 거리의 맞은편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맞은편 길가에는 특이한 외형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여전히 친구지?
당연하지.
...하지만, 이 세상엔 너무나도 쉽게 변하는 일이 너무 많아, 지휘관.
다음에 다시 만날 땐 각오하도록 해.
SOP2가 뭔 짓을 하려 해도 난 안 말릴 거니까.
풋... 그때 가서 봐야지 뭐.
눈으로 배웅하는 지휘관에게 싱긋 웃어 주며, M16A1은 거리의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미 M4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약속을 지키고 있어...
......너였냐.
그만 가세요.
당신이 찾는 것은 이쪽에 없어요.
......
M16A1은 손을 떨구고, 옆의 굳게 닫힌 차단문을 흘겨봤다.
그런 거 같네.
케헥... 콜록콜록...
잘 해 봐라.
바닥에 주저앉아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RPK-16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던진 M16A1은, 자신의 단말기를 확인하곤 자신히 왔던 방향 그대로 돌아갔다.
한편, 그런 M16A1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 안의 피를 음미하던 RPK-16은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죽음의 바다.
초록색 부스러기가 시꺼먼 타이어의 홈에 잔뜩 끼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배경 삼아, 비크의 바이크가 어마어마한 출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고속으로 가로질렀다.
M16A1은 마인드맵에 저장한 암호화 파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RPK-16의 "선물"을.
돌아가서 그 영감님들한테 보고하면 임무 끝이지?
맞아.
그런 다음엔 어떡할 거야?
......
질주하는 바이크가 격하게 흔들렸다.
시야 끝자락의 혼돈스런 지평선도 함꼐 흔들려, 마치 아무도 모를 폭풍을 불러오려는 것 같았다.
...기다려야지.
뭘?
어차피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야.
"그녀"가 강림해서, 우연 또는 필연의 결과가 찾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어쩌면, 운명을 기다린다고도 할 수 있겠네.
비크는 어리둥절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녀석은 매번 그랬듯이 침묵으로 일관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M16A1은 심호흡하고 눈을 감아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래, 틀림없어. 안젤리아는 동탑에 있어.
내 임무는 이걸로 끝이야. ...잘 해봐.
...응.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에서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
로그아웃 완료.
콰아앙——
묵직한 폭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의 아베르누스는 무너져 떨어진다는 운명에 도달했다.
M16A1은 창밖으로 불타는 아베르누스를 보았고, AR-15가 RO635와 SOP2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자.
베를린에서의 이야기는 끝났다. 허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오늘 밤은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전체 대사 보기 (189줄)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 간다.
아직 끈을 놓지 않은 의식이 난동을 부렸지만 입가의 미소에 흩어졌다.
밝은 불빛이 반짝였다. 콩닥콩닥, 심장처럼...
......
......?!
의아함에 눈을 번쩍 뜬 M16A1이 천천히 일어섰다.
파도가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빛을 받아 찰랑이는 이곳.
발밑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이 텅 빈 공간이었다.
씁...
M16A1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에 숨은 하얀 빛을 꺼내 봤다.
다름아닌 한 장의 타로 카드였다.
<color=#00CCFF>【운명의 수레바퀴】의 축복——</color>
<color=#00CCFF>쉬지 않고 순환하는 운명, 안개를 걷어내는 승리의 술.</color>
투명한 주황빛 액체가 담긴 술잔 세 잔이 허공에서 경쾌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떨어지는 순간, 마치 사진처럼 그대로 멈춰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 표면에 찍혔다.
이건... 위스키?
문득 떠오른 것에 그녀는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레이나드 개즈"란 사람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어.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서...
이게 그 녀석이 말한... "모든 안개를 걷어내는 술"이야?
"레이나드 개즈"...
M16A1은 은근히 혀가 꼬이는 그 이름을 되뇌였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ㄹㅔㅇㅣㄴㅏㄷ ㄱㅐㅈ, 거꾸로 하면 "잭 다니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
이런 미친...
이게 바로 "운명의 수레바퀴"의 선물인가?
...아니면, 벌칙?
그때, 심해처럼 깊은 공간에서 은은한 진동이 퍼져 왔다.
발밑으로 깊고 어두운 동굴이 그 입을 천천히 벌리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M4.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
일말의 주저도 없이, M16A1은 씨익 웃으며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끝없이 추락해,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설령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몇 번이든, 그녀는 M4A1을 찾아내 그녀의 뒤를 따라 희망의 불씨를 남길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무수한 세월처럼, 그녀가 잊어버린 무수한 윤회의 세월처럼...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그녀를 혼수 상태에서 깨웠다.
천천히 눈을 떠, 익숙한 듯 낯선 실험실의 천장을 훑어봤다.
으음? 예상보다 10분 일찍 깨어났구먼?
......
몸에 명령을 내려봤지만 꿈쩍도 않았다.
있는 힘껏 몸부림쳐 봐도 치지직대는 전류음만 들렸다.
긴장 풀게, M16.
한정된 시야에 미소의 가면을 쓴 자상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color=#00CCFF>...하벨?</color>
발성 모듈까지 망가졌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기계적인 목소리로 출력돼서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누가 나한테 잠수함 기지 인근 해역에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 했다네.
그런데 설마, 그게 자네일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color=#00CCFF>M4A1... 그리고 지휘관은?</color>
걱정 말게나, 자네들의 보스는 아주 쌩쌩하니까. 바로 며칠 전 아주 중요한 임무를 받아 멀리 출장을 갔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M4A1의 행방이라... 그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color=#00CCFF>페르시카는?</color>
<color=#00CCFF>내 소체를 언제 다 고칠수 있대?</color>
그 아가씨는 지금 자네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네.
<color=#00CCFF>......</color>
약간 경계하는 M16A1의 반응에, 하벨은 그저 싱긋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해봄세, 자네도 "누가 가동한 스타피쉬에서 살아 돌아왔다"란 소문이 퍼지는 건 원치 않겠지? 토실토실한 양을 굶주린 늑대 무리 한가운데 던져 넣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 아니겠나.
잠수함 기지를 지켜보던 그놈들이 이를 알게 되면... 과연 무슨 짓을 하려 들까?
<color=#00CCFF>......</color>
그렇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네.
<color=#00CCFF>그래도 페르시카 말고 이 소체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지 의문인데.</color>
그것도 맞는 말일세, 누가 뭐래도 I.O.P.는 민간 기업에 불과하니.
이런 건 군용 기술이 있어야 고칠 수 있을 게야.
그 말과 함께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M16A1은, 그저 발소리로 들어온 사람이 남성임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아아, 오셨습니까.
초기 수복 작업은 순조로워 보이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하벨 씨.
과찬이십니다.
하벨과 싱거운 인사를 나눈 남성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눈알을 굴리자, 예전에 신문에서 봤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color=#00CCFF>...국장?</color>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다니 참 기쁘군, M16A1.
아직도 눈앞의 광경이 믿겨지지 않는지, M16A1의 시선이 하벨과 젤린스키 사이를 오갔다.
M16A1의 소체는 붕괴액과 해수로 인해 상당 부분 부식됐습니다.
I.O.P.의 기술력으로는 이 정도의 수복이 한계여서, 이거 부끄럽기 그지없군요.
각성시킨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혹시나 하여 묻겠습니다만, "전임 국장"께서는...?
이것이 그분의 의사입니다.
M16A1이 원하는 것은 전부 제공하겠습니다.
<color=#00CCFF>...내가 무슨 협상 카드인 것처럼 들리는데.</color>
AI의 합성 음성으로도 비꼬는 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젤린스키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다시 M16A1에게 시선을 향했다.
내 정중히 알려 주건대, 너는 협상 카드가 아니다, M16A1.
너는 예리한 "장기말"이지. 승리의 천칭을 기울일 정도로 중요한 장기말.
<color=#00CCFF>내가 댁의 뜻대로 움직여 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 나셨을까?</color>
그것을 본 건 너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도 M4A1의 행방을 찾고 있지.
<color=#00CCFF>......!</color>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거래라 생각되지 않나?
M16A1은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다, 다시 눈을 떴다.
<color=#00CCFF>뭘 하면 되는데?</color>
...알았다.
삑.
통신 종료.
후우...
차가운 밤바람이 부는 높은 탑 위에서, 우뚝 선 그림자가 냉철한 시선으로 멀리의 공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지켜보는 밤하늘 아래의 공항 한가운데, 전술인형 부대가 바쁜 걸음으로 썰렁한 활주로 위를 가로질렀다.
......
기다려야 한다.
때가 머지않았다.
쾅!
윽!?
난데없는 큰 충격음과 함께 헬리콥터가 요동쳤다.
뭐야... 뭐지?!
쾅!
몰리도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같은 소리가 또 나고 헬리콥터도 다시 흔들렸다.
그제서야 몰리도는 무슨 소리였는지 깨달았다. 무언가가 헬리콥터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뭐야...?!
......
!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몰리도의 눈에도, 헬리콥터의 계기판의 수치를 봐도, 지금 헬기는 공중에서 비행 중이었다.
그런데...
뭐야... 대체 뭐냐고!!!
너... 너 대체... 어떻게 올라왔어?!
......
인형이었다.
밤의 소나기와 맹렬한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웬 인형이 헬리콥터 조종석 바깥에 달라붙었다.
한손으로 가느다란 와이어를 쥐고, 양발은 헬리콥터의 조종석 창을 밟아 균형을 잡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유리 너머로 그녀의 무정한 얼굴이 비쳤고, 번쩍이는 번개가 그녀의 은빛 머릿결을 마귀처럼 빛냈다.
자... 잠깐만!
......
창 너머로, 몰리도는 그 인형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온갖 소음에 묻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유만만한 모습의 그 인형이, 놀고 있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다――
퍼엉!
폭발이 일어났고, 헬리콥터의 계기판이 요란하게 경보를 울렸다.
몰리도는 저 인형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눈치챘다.
너 미쳤어?!
이 상황에서, 몰리도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기체를 이리저리 흔들어 저 정신나간 행각을 벌이는 인형이 떨어지길 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점착폭탄으로 로터를 파괴한 것이다.
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하지만 그 인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진작에 절대 고도까지 상승했던 헬리콥터는 프로펠러를 잃자마자 곧장 곤두박질쳤다.
그 하얀 머리의 인형은 여전히 한손으로 쥔 와이어만으로 외벽에 단단히 붙어있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텅!
!
양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멀리 밀어내더니, 반동을 이용해 기체로 돌진했다.
통제불능으로 추락하는 헬리콥터 안으로, 저 하얀 머리의 인형이 쳐들어오려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 따위한테...!!
쿠웅!
몰리도가 다 소리지르기도 전에, 그 인형의 2차 시도에 헬리콥터의 옆문이 부서졌다.
그 다부진 몸이 강렬한 충격과 함께 좁은 헬리콥터 안으로 침입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
............
으윽...
뒤이어 일어난 또 한 번의 폭발에, 몰리도는 완전히 깨달았다.
손 쓸 방도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치솟는 불길 밖으로 걸어 나오는 M16A1의 발걸음 소리는 마치 최후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처럼 몰리도의 심장을 두들겼다.
......
헤... 헤헤헤...
저항을 포기했는지, 몰리도는 몸을 돌려 뒤에서 다가오는 M16A1을 바라봤다.
불길을 등진 그녀의 창백한 머리카락이, 이번엔 붉게 빛났다.
기억났다... 그래... 넌 AR팀의...
......
M16A1의 주먹에, 몰리도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기절했다.
...또 짝퉁이군.
사냥감을 집어 든 M16A1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창고를 바라봤다.
......때가 됐구나.
다들 뭘 그렇게 긴장하냐?
단 한 명, M16A1만 구석에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M4가 깨어나질 않잖아, 너야말로 왜 그래?
언니! M4 언제 깨어나?
...정말 걔가 M4라 생각해?
그게 무슨...
M16A1이 탁상 위의 건빵 봉지를 뜯어 으적으적 씹어먹으면서 AR-15의 의문에 답했다.
너희가 M4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판단력을 흐리지 마.
갠 M4가 아니야.
어? 아, M16 언니는 아직 모르겠구나!
겉보기엔 니토긴 한데 내용물은 M4 맞아!
아니, 아니야... 최소한 우리가 찾는 "M4A1"은 아니지.
걘 M4이면서도 M4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지?
문자 그대로의 뜻이야.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 지휘관은 포기를 못하는구나?
인형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안으로 들어가고 나니, 밖에 남은 사람은 지휘관과 M16A1, 그리고 AR-15였다.
...그 "남들"에, 너도 포함이야?
나야 언제나 소수파지.
M16A1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곤 시원하게 소리를 냈다.
캬하~ 시원하다.
그리고 입가를 스윽 닦고 병뚜껑을 대충 닫아, 반쯤 남은 술병을 AR-15에게 휙 던졌다.
?!
뭐야, 위험하게!
전혀 예상 못한 패스에 AR-15는 허둥대며 술병을 받았다.
하핫, 꽤 좋은 거니까 너도 마시라고.
성질내는 동생에게, M16A1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잠깐 지휘관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먼저 들어가 있어.
......
인상은 잔뜩 구겼지만, AR-15는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임시 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
옆에서 지켜보던 지휘관은 AR-15가 안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M16A1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가려고?
말했잖아, 따로 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선수를 빼앗긴 M16A1이 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슈타지 요원이 내 목표를 언급했거든.
그러니 이만 출발해야 해.
말려도 소용없지?
하하하, 그야 모르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M16A1은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기고, 시선을 거리의 맞은편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맞은편 길가에는 특이한 외형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여전히 친구지?
당연하지.
...하지만, 이 세상엔 너무나도 쉽게 변하는 일이 너무 많아, 지휘관.
다음에 다시 만날 땐 각오하도록 해.
SOP2가 뭔 짓을 하려 해도 난 안 말릴 거니까.
풋... 그때 가서 봐야지 뭐.
눈으로 배웅하는 지휘관에게 싱긋 웃어 주며, M16A1은 거리의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미 M4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약속을 지키고 있어...
......너였냐.
그만 가세요.
당신이 찾는 것은 이쪽에 없어요.
......
M16A1은 손을 떨구고, 옆의 굳게 닫힌 차단문을 흘겨봤다.
그런 거 같네.
케헥... 콜록콜록...
잘 해 봐라.
바닥에 주저앉아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RPK-16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던진 M16A1은, 자신의 단말기를 확인하곤 자신히 왔던 방향 그대로 돌아갔다.
한편, 그런 M16A1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 안의 피를 음미하던 RPK-16은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죽음의 바다.
초록색 부스러기가 시꺼먼 타이어의 홈에 잔뜩 끼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배경 삼아, 비크의 바이크가 어마어마한 출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고속으로 가로질렀다.
M16A1은 마인드맵에 저장한 암호화 파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RPK-16의 "선물"을.
돌아가서 그 영감님들한테 보고하면 임무 끝이지?
맞아.
그런 다음엔 어떡할 거야?
......
질주하는 바이크가 격하게 흔들렸다.
시야 끝자락의 혼돈스런 지평선도 함꼐 흔들려, 마치 아무도 모를 폭풍을 불러오려는 것 같았다.
...기다려야지.
뭘?
어차피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야.
"그녀"가 강림해서, 우연 또는 필연의 결과가 찾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어쩌면, 운명을 기다린다고도 할 수 있겠네.
비크는 어리둥절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녀석은 매번 그랬듯이 침묵으로 일관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M16A1은 심호흡하고 눈을 감아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color=#00CCFF>그래, 틀림없어. 안젤리아는 동탑에 있어.</color>
<color=#00CCFF>내 임무는 이걸로 끝이야. ...잘 해봐.</color>
<color=#00CCFF>...응.</color>
<color=#00CCFF>아이네이아스 회의실에서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로그아웃 완료.</color>
콰아앙——
묵직한 폭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의 아베르누스는 무너져 떨어진다는 운명에 도달했다.
M16A1은 창밖으로 불타는 아베르누스를 보았고, AR-15가 RO635와 SOP2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자.
베를린에서의 이야기는 끝났다. 허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오늘 밤은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