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지마
MP5
섣달그믐밤의 오후.
인형 숙소.
MP5는 침대에 엎드린 채, 눈앞의... 생물을 바라보았다.
얘 정말로 돼지 맞지?...
그런데, 넌 어디서 온 거니? 인조 돼지도 인형처럼 만들어지니?
MP5가 인조 돼지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마침 밖에서 지나가던 56-1식이 발견했다.
56-1식은 열린 창문에 기대고서 MP5를 불렀다.
안녕 MP5! 새해 복 많이 받아! 같이 마작하러 가지 않을래?
다들 설날에 크게 한탕 벌 생각으로 혈안이 되어 있더라.
아, 56-1식 씨.
아뇨, 전 됐어요. 지금 얘를 돌봐줘야 하거든요.
오오, 며칠 못 본 새에 더 포동포동해졌네?
음음, 잘 키우고 있나 보구나!
어... 그런가요? 아무튼 칭찬 고마워요...
56-1식은 말을 마치고 떠났다.
56-1식 씨, 얘를 볼 때마다 눈빛이 달라지는 거 같아서 좀 신경 쓰이네...
MP5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하곤, 침대에서 뛰어내린 뒤 인조 돼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벌써 또 산책할 시간이네.
가자 돼지야. 몸을 안 움직이면 뒤룩뒤룩 살이 쪄서 나중엔 걷지도 못하게 될 거야.
어휴, 난 활동량이 너무 많은 건지 매일 꾸준히 우유를 마셔도 키가 크질 않는데...
아 맞다, 계속 "돼지"라 부르기도 이상하니까,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겠지? 뭐가 좋을까...
MP5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돼지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의 마당.
신나게 바닥에서 뒹구는 돼지를 보며, MP5는 잔디밭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정말 널 잘 돌볼 수 있을까?
지휘관님이 왜 널 나한테 맡겼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MP5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 지휘실.
MP5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휘관은 동글동글한 무언가를 손에 들고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휘관님, 부르셨나요?
(지휘관님 손에 저건 뭐지...?)
왔구나, MP5. 너에게 맡기고 싶은 아주 중요한 기밀 임무가 있어서 부른 거야.
중요한... 기밀 임무요?
서서서, 설마 그런 건가요, 지휘관님?! 드디어 저도 적의 소굴에 홀로 침투하는 첩보 임무를 맡는 건가요!? 혹시 변장해서 잠입해야 하나요? 아니면――
아니아니, 그런 기밀이 아니라...
이걸, 네가 "보관"해줬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휘관은 그 동글동글한 것을 MP5에게 떠넘겼다.
MP5가 허둥지둥 받아 안자, 따뜻한 체온과 포동포동한 느낌이 살결을 타고 느껴졌다.
지휘관님... 이, 이건 살아있는 돼지잖아요?!
"보관"하라는 건, 취사부에 전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하하, 너도 감쪽같이 속았구나.
네?
이건 인조 돼지야. 어때, 정말 감쪽같지?
당연히 취사부에 주지 말고, 네가 맡아주렴. 이 돼지에 관한 건 전부 기밀 사항이야.
그 기밀이 이런 기밀이었나요...
페르――... 크흠, 어느 연구 단체에서 나한테 이 돼지를 한동안 길러 달라 부탁했어. 무슨 데이터를 관찰해야 한다나 뭐라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이런 일에는 영 꽝이거든. 그러니 너에게 맡길게. 만약 누가 물어보면 밖에서 주웠다고 해, 알았지? 잘 보살펴야 한다!
......
MP5는 고개를 흔들며 회상에서 벗어났다.
아니야, 지휘관님을 의심해선 안 돼!
분명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 임무를 맡기신 거야! 틀림없어!
MP5가 스스로를 격려하며 기운을 내던 차에, 잔디밭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97식 산탄총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강아지풀을 흔들며 인조 돼지와 놀아주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호크 씨.
새해 복 많이 받아! 이야, 이 돼지 정말 잘 키웠구나.
폴짝폴짝 뛰는 게 정말 건강한 거 같네. 포동포동하니 아이구 귀여워라!
어, 그게... 고... 고마워요...
돼지의 해에 돼지가 식구로 들어오다니, 설날 분위기에도 딱이라니까! 행사 마스코트로 삼아도 되겠어!
아, 난 주방에 물자 운반하러 가야 하니까 먼저 갈게. 또 봐~!
MP5는 떠나는 97식 산탕총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MP5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잔디밭에서 햇볕을 쬐는 돼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호크 씨도 그렇고, 다른 분들이 돼지를 칭찬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설마, 벌써 눈독 들인 건 아니겠지? 소문으론 그쪽 소대는 다들 먹는 거에 눈이 뒤집힌다던데...
안 돼 안 돼, 이건 지휘관님께서 내게 맡기신 기밀 임무야. 반드시 돼지를 지켜내겠어!
MP5는 굳게 다짐했다. 그 무엇도 그녀의 각오를 꺾을 순 없었을 것이다.
허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MP5의 각오는 그녀의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아아아아아아앗!!!!
어디로 간 거야!? 내 돼지! 내 돼지 어디 갔어!?
섣달 그믐날의 저녁.
그리폰 기지.
MP5는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사태를 해결할 좋은 수도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숙소 문이 닫히지 않았다니...!
이럴 어쩌면 좋지? 설마 잠깐 한눈판 사이에 돼지가 나가버릴 줄이야...
MP5는 온 기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인조 돼지의 발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 돼지가 좋아하는 먹이로 유인해 보려는 시도도 허사였다.
어떡해, 설맞이 행사 때문에 여기저기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할 수 없지, 혹시 누구 본 사람 있나 물어봐야겠다...
MP5는 새해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속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라? 수색요정이 안 보이네...
그 사기꾼, 그저께에 분명 오늘 스킨 파우더 뿌리겠다고 했으면서!
수색요정이 없으면 돼지를 빨리 찾을 수가 없잖아!
그때, 둥실둥실 지나가는 요정 한 기가 MP5의 눈에 띄었다.
저기, 황금요정아!
잠깐만!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MP5가 부르는 소리에, 황금요정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데? 돈 빌려달라는 거라면 나 지금 땔감으로 쓸 분량도 부족해서 안 돼.
듣자 하니 이번 겨울은 더 추워진다던데, 과연 이 기지의 엉터리 난방으로 버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어휴, 이번엔 돈다발을 또 얼마나 태워야 할지...
누가 돈 달랬어!
크흠. 혹시, 수색요정이나... 내 돼지 못 봤어?
흥, 이 요정의 여왕님에게 겨우 뭘 찾는 일을 부탁하다니 한심하구나.
수색요정이야 분명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겠지 뭐.
그런데, 돼지라고? 돼지라면 주방에서 찾는 편이 더 빠를 텐데?
아니, 돼지고기가 아니라 돼지. 아주 작은 돼지야...
작은 돼지라. 본 적 없어.
그런데 언제 우리가 돼지까지 기르게 된 거야? 얼마 전엔 새를 들여오더니, 이러다간 내년에는 기린까지 키우는 건 아닌지 몰라...
황금요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MP5를 놔두고 다시 두둥실 날아갔다.
저게 무슨 요정의 왕이야?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응? 저기 옥상에 있는 건... 도발요정인가? 계속 저기 있었다면 혹시 돼지를 봤을지도 몰라.
MP5는 건물 밑으로 달려가, 옥상을 향해 소리 질렀다.
도발요정——! 내 말 들려——?
뭐야? 나 불렀어?
혹시—— 내 돼지—— 못 봤어——?
뭐야?! 지금 나보고 돼지라 했어?
누가 돼지라는 거야 이 꼬맹이가!!
엑? 아니아니, 네가 돼지라는 게 아니라——
꺄아아아 벽돌 던지지 마!!
MP5는 낙석 현장에서 헐레벌떡 도망쳤다.
무서워라...
역시 지휘관님의 말씀대로, 요정은 다 머리가 나쁜 것 같아...
아아, 정말 내 돼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까?
MP5의 마인드맵엔 불안감이 점점 쌓여만 갔고, 왠지 모르게 눈길이 주방으로 향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누가 잡아가서 저녁 반찬으로 만들었다면 큰일이야!
아, 아무튼 혹시 모르니 가보자. 어쩌면... 아직 살아있을지도...
MP5는 주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 구역을 지날 때,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MP5는 혹시 돼지를 보지 못 했냐고 물어보러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말 한마디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어머! 그냥 오면 될 것을 어디서 소시지를 그렇게 잔뜩 챙겨왔나요?
MP5는 반사적으로 옆의 벽에 몸을 숨기고, 귀를 쫑긋 세워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히히, 이 언니가 평소에 해준 게 없어서 말이지. 곧 설날이기도 하니까 뭐라도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렇다니까? 요 이틀간 56-1식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도 알잖아? 이 녀석, 요리할 때 맛 본다면서 다 먹어버리는 거. 마침 기지에 여분의 돼지고기가 없었다면 진짜 얘가 다 먹어치웠을 거야.
구석에 숨어 있던 MP5는 그 말을 듣곤 마인드맵에 오류가 발생할 뻔했다.
(여, 여분의 돼지고기...?! 설마...!)
어머나... 정말 수고하셨네요. 그럼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어디보자, 방에 베이컨이 있을 텐데...
뭐? 베이컨? 설날에 무슨 베이컨이야! 게다가 네가 만든 베이컨은 진짜 못 먹겠다고!
쉬잇,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요. 그리고 제 베이컨이 어때서요?
돼지의 해에 짠 돼지고기가 뭐 어떻다고 그래요?
MP5의 마인드맵은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만 같았다.
어떡해... 저 사람들이 내 돼지를 잡아먹었어...!
온갖 종류의 소시지로 요리된 게 분명해... 흑흑...
슬픔과 절망에, MP5는 그저 벽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고, 가로등의 하얀 불빛이 MP5를 비췄다.
64식 일행의 실랑이가 들리지 않게 되자, MP5는 천천히 일어나 이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가서 따질까? 하지만 다들 키가 커서 무서운데...
으으... 그리고 기밀 임무라서, 지휘관님이 맡긴 거라면서 따졌다간 지휘관님의 처지가 위험해지니...
MP5는 낙심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처럼 받은 임무인데, 망치고 말았어...
난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퍼엉!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의 불꽃이, MP5의 얼굴의 눈물 자국을 비추었다.
하아... 벌써 불꽃놀이를 할 시간이구나...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일 사부님께 부탁해서 함께 그 셋을 찾아가고, 지휘관님한테도 사과해야지... 훌쩍...
MP5는 닭똥 같은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마지못해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믐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인형 숙소의 바깥.
또다시 밤하늘을 밝히는 폭죽을 뒤로하며, MP5는 터덜터덜 힘없이 걸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방 문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앗, 설마 지휘관님이 벌써 사태를 파악하고 문책하러 오신 건가...?
아, K5 씨?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어어어? 이, 이건...!
MP5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눈앞에는 마당에 쪼그려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K5와...
돼지! 내 돼지!
쉬잇, 조용히.
방금 잠들었어.
MP5는 합 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K5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K5 씨, 여기서 뭐하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제 돼지는 어디서 찾으셨어요?
어휴, 정말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잡아... 잡아...
오늘의 운세를 점쳐보니, 밖을 돌아다니라 했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설 인사를 돌릴까 했어.
그런데 모두 진작에 나가서 없고, 이 돼지만 집에 있더라. 그래서 여기서 같이 놀아주고 있었어.
으으으,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요!
(그런데, 집에 있었다고? 그럼 애초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단 거야?)
후훗, 그런데 이 돼지의 주인이 MP5일 줄은 몰랐네.
정말 잘 보살폈나 보구나.
헤헤, 모두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잠깐, 그런데 다들 그렇게 말할 때마다 눈빛이 달라지던데...
호, 혹시 K5 씨도...?!
MP5는 안절부절하며, 새근새근 잠든 돼지 곁으로 몇 발자국 움직였다.
K5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애완동물"을 정말 소중히 여기는구나? 걱정 마렴, 내 이번 달 운세에 돼지고기를 피하라고 나왔거든.
뭐, 돼지의 해에 돼지고기를 먹을지 말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도 운명의 계시인 거겠지?
MP5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명의 계시 덕분에 살았어요! K5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훌쩍... 점괘는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K5 씨의 점은 영험해요!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새롭고 미지로 가득한 일 년이 다시 시작되었다.
종소리와 함께, 더욱 많은 폭죽이 쏘아 올려져 기지의 밤하늘을 밝혔다.
MP5와 K5는 숙소 마당의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그러면서 MP5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인조 돼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올해엔 나도 더 강해져서, 더 대단한 임무를 맡고 싶다.)
(그런데, 돼지의 해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점괘라리... 그리고 이 인조 돼지는 식용인 걸까?)
야~ MP5! K5! 우리가 만든 소시지 먹어볼래?
너희가 먹던 거랑은 차원이 다른 맛이라고!
지금 갈게요!
(모르겠다, 그냥 내일 아침에 지휘관님께 여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