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레인저
T5000
그리폰 기지.
이번 건은 상당히 까다로운걸...
기지 내를 산책하면서, 조금 전 받은 의뢰의 내용을 떠올렸다.
세계적인 신예 디자이너들이 기획하는 웨딩드레스 패션쇼를 위해, 그리폰에게 인형 몇 명을 모델로 대여해주기를 요청받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의뢰가 있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PMC의 전술인형을 빌리다니... 예술가의 머릿속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번에는 의뢰측에서 "개성 있는" 인형을 요구했다.
이런저런 추가 요구 사항 때문에 골치 아프지만, 의뢰를 수락한 이상 이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 건은 보수도 상당히 짭짤하니...
인선에 신경 쓰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하다.
지휘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매우 인상적인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휘관, 저희 소대의 군수지원 보고서를 제출하러 왔습니다.
너로 정했다!
네?
...몇 분 후.
그러니까... 저보고 패션쇼 모델을 하라고요?!
그래.
그런데, 왜 하필 저희죠? 저희는 전술인형이잖아요.
의뢰인이 이번 패션쇼의 테마에 전술인형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대.
하지만 그런 일은 해본 적 없는데...
딱히 어려울 것 없는 임무야. 저쪽의 전문가들이 다 지도해주기도 할 테고.
넌 그냥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돼. 어때, 평소 임무보다 훨씬 간단하지?
하지만...
이 임무는 전혀 다른 너로 "변신"할 기회야!
...그리고 보수도 두둑하게 준다고 하고.
네? 변신이라고요?
으음... 잠시만요... 아니, 그래도...
T-5000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꿋꿋한 눈빛으로 내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지휘관.
역시 이 임무는 내키지가 않아요.
뭐?! 어, 어째서?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사진도 찍고 방송에도 나간다면... 전 세계에 제 얼굴을 알리는 꼴이잖아요?
저격수에겐 아주 치명적인 일이라고요!
그렇게 널리 퍼질 방송은 아닌데...
눈에 덜 띄도록 노력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해요, 지휘관. 다른 사람을 알아보세요.
......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안 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래, T-5000이라면...)
T-5000이 지휘실을 떠나려던 찰나, 나는 일부러 다 들리도록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소리에 T-5000은 당연하다는 듯이 발걸음을 멈췄다.
(계획대로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지휘관, 왜 갑자기 한숨이시죠?
패션쇼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도 인원이 모자라니... 정말 난감하네.
차출 가능한 인형은 기지에 이렇게나 많은데요?
이런 건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임무야.
애당초 조건에 맞는 애들도 얼마 없는데, 그중 한 명이 또 이렇게 거절했으니...
......
아~ 늦어도 내일모레에는 의뢰측에 인원 명단을 제출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면, 보수는커녕 위약금까지 내야 하는데 말이야...
저... 지휘관?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응?
버닝 피버의 신조, "모든 이들의 미소를 지킨다!"
(작전 성공.)
어... 그래서?
지휘관이 고민하는 모습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이 임무를 맡겨주세요!
와! 정말 고마워, T-5000! 덕분에 살았어!
그럼 난 바쁘니까 먼저 실례할게!
엑, 지휘관?! 잠깐만요! 임무의 내용은 알려주셔야죠!
그렇게 허겁지겁 어딜 가세요!?
임무 내용은 나중에 전달해줄게!
난 히어로의 동료를 모집하러 가야 해서!
난 부리나케 복도에서 도망쳤다.
(미안하다, T-5000. 이렇게 널 놔두고 가는 건 미안하지만, 너한테 무를 기회를 줘서는 안 될 것 같아.)
(좋았어, 이걸로 한 명 더 확보. 또 누굴 보내는 게 좋을까...)
......
............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모델을 선발해 임무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모델로 선발된 인형들은 보름의 준비를 거쳐, 드디어 무대에 오르는 날을 맞이했다.
패션쇼가 시작되기 2시간 전.
T-5000은 무대 뒤의 분장실에서 자신의 의상을 점검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한 "변신"하곤 완전 다르잖아...
뭐가 다르다는 거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T-5000은 한 손의 부케를 냅다 던지곤 다른 손의 저격소총을 고쳐잡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겨눴다.
상대가 PKP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T-5000은 한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PKP... 옆에서 불쑥 나타나지 말아 줘.
저격수가 고작 이 정도로 놀라면 어쩌자는 거지?
놀란 게 아니라, 하마터면 널 쏠 뻔했다고.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 우리의 총은 사격도 불가능한 소품에 불과하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휴, 됐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별일은 아니다. 패션쇼가 코앞인데, 함께 무대에 오를 인형이 거울 앞에서 혼자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완벽한 임무 수행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보러 온 거다.
하아... 그냥, 임무를 받았을 때부터 계속 찝찝해서...
......
T-5000은 그녀가 지휘관에게서 이번 임무를 받게 된 경위를 PKP에게 짧게 설명했다.
그런 거였나...
우리에게 이 임무 수행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지휘관도 꽤 많은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역시 그때 한숨 쉬고 그런 건 연기였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어...?
지휘관이 널 속였든 아니든, 지금 너는 네 의지로 여기 있는 것 아닌가?
PKP의 말에 T-5000은 말문을 잃었다. 뭐라도 말하려는 듯 입만 뻐끔거렸지만...
스태프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PKP 씨! 머리 장식을 조금 더 손봐야 한다고...
알았다, 바로 가겠다.
PKP는 그대로 스태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곁눈질을 주면서 말을 이었다.
T-5000, 그 문제 때문에 집중할 수 없다면 본인에게 직접 따지도록 해라.
임무의 완수를 위해서라면, 지휘관도 흔쾌히 대답할 거다.
응, 고마워.
PKP가 떠나자, T-5000은 바닥에 떨어트렸던 부케를 다시 집어 들고, 무대로 통하는 복도의 귀퉁이를 응시했다.
지휘관, 언제까지 숨어계실 건가요?
하하... 역시 들켰구나.
나는 귀퉁이에서 나와, T-5000과 마주했다.
정말이지... 언제부터 엿듣는 취미까지 생기셨어요?
미안 미안,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어.
그저 PKP와 얘기하는 도중에 불쑥 끼어드는 건 실례라 생각했거든.
저도 PKP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아무튼, 지휘관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져서 잘 됐네요.
아... 그럼... 제가 빈정거리던 것도 다 들으셨나요...?
딱히 나쁜 소리는 안 했잖니.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가 너에게 사과해야 하는걸.
또 무슨 오해세요, 지휘관...
T-5000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지휘관께 따질 생각은 없어요.
정말? 그럼 왜...
방금 PKP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몇 가지 깨달았습니다.
그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생각돼서, 지휘관께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음? 뭔데?
비록 이번 일이 제가 상상한 "변신"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지휘관이 도움이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저에게 부탁하려던 거였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버닝 피버는 곤경에 처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아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그렇구나... 고마워, T-5000.
휴우... 속이 시원해진 것 같아요.
그럼 곧 패션쇼가 시작되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물론이죠. 지휘관은 안심하시고 제게 전부 맡겨 주세요.
T-5000은 부케를 껴안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럼, 지켜봐 주세요... 무대에서 "변신"한 제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