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에
K2
연회장.
갑작스러운 불청객과의 대결이 끝났고, 그리폰의 대표들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잔뜩 풀이 죽은 M99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G28, 그리고 한창 준비 중인 무대를 바라보며, K2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기분이 영 아니네... 하긴,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지면 괴롭단 말이지...)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대결 같은 거 하지 말걸...)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몇 시간 전.
K2는 군침을 흘리며 온갖 간식들로 가득한 테이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아, 이거 꽃처럼 생긴 게 깜찍하네! 맛은 어떨까?
한 입 먹어봐야지~
으음~! 상쾌하면서 달콤하네~
흐음... 넌 단 걸 좋아하는구나?
읍읍!! 누, 누구야?!
뒤에서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K2는 하마터면 음식이 목에 걸릴 뻔했다.
겨우 꿀꺽 삼키고 뒤를 보니, 눈앞에는 눈부신 은발인 인형이 서 있었다.
실눈을 뜨고 있음에도, K2는 그녀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음을 느꼈다.
데이터 갱신.
그리폰 인형 K2는 매운 걸 밝히지만 사실 잘 못 먹고, 오히려 단것을 좋아한다.
누, 누가 단 걸 좋아한대?!
그런데... 넌 누구야? 어떻게 날 알아?
난... 그리폰 상층부의 비밀 병기야. AK12라고 해.
그리폰 상층부...?
넌 본 적도 없고, 데이터베이스에도 기록이 없어. 너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비밀 병기니까 관련 정보도 당연히 기밀이지.
네 권한으론 열람도 못 해.
비밀 병기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돌아다녀선 안 되는 거 아니야?
지금은 휴가 중이니까.
정 못 믿겠으면 네 지휘관에게 물어보렴.
으음... 역시 수상한데.
그럼 친목 도모나 할 겸, 게임 한 판 어때?
게임?
카드 게임으로 겨뤄서, 진 쪽이 이번 연회의 마무리 공연을 하는 거야.
그건... 난 별로 흥미 없어.
물론 우리 둘이서만 하자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부를 거야. 네 동료가 공연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다른 애들도 장기자랑 같은 거 잘 못하는걸? 대뜸 무대에 오르라고 하면 오히려 실례라고.
흐음~? 왜 벌써부터 못 이긴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윽...!
너 자신과 동료들을 그렇게 못 믿으면 안 되지.
"ATK"의 대장은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구나.
뭐?! 어떻게 그런 것까지...!
그런데 이상하네...
"ATK"의 대장은 사실 갈색 머리가 아니란 정보도 있었거든.
정말 이상해... 데이터를 수정해야 하나?
어디서 그딴 헛소문을 들은 거야!?
나, 이 K2가 ATK의 대장이라고!
가볍게 게임 한판 하자는 것도 무서워서 못 하는 인형이? 계속 그렇게 우겨대면 오해만 더 심해져.
......
싫다면야 억지로 시키진 않을게. 다른 사람을 찾지 뭐. 너 대신 그리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설 용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하지만 너희 모두 후방 부대니까, 대부분은 너처럼 도전 정신이 부족한 인형들밖에 없겠지.
거기 서!
K2는 붉으락푸르락하며 AK12를 불러 세웠다.
뭔데?
나는 놀리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내 친구들, 그리폰의 내 동료들을 그렇게 깔보는 건 절대 용납 못해!
그깟 카드 게임,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어!
............
으으...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다 AK12의 함정이었어!
상층부의 인형은 다 이렇게 교활한 녀석들 뿐인 거야?!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이지. 반칙도 하지 않았는걸?
그리고 너희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잖아. 이제 와서 그렇게 따지는 건 조금 추하다는 생각 안 드니?
앗!?
또 어느새 온 거야...
계속 옆에 있었어.
네 마인드맵에 잡생각이 너무 많아서 내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거지.
그, 그럼 다 들었어...?
그 정도 푸념이야, 승자로서 관대하게 받아 줄게... 네가 약속을 지킨다면 말이야.
그... 그럼 관대하게 함께 공연하는 건 어때...?
그래도 분수라는 게 있지.
지니까 배 째고 드러누우려 하고, 그러지도 못할 것 같으니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이려 하면 남들이 보기 좋을까, 안 좋을까?
애꿎은 사람이기는!
그렇게 따지면, 차원이 다른 엘리트 인형이면서 그런 게임으로 겨루자고 하는 건 우릴 괴롭히는 거랑 뭐가 달라?!
괴롭히다니? 에이, 그건 아니지.
아까 그 속임수를 쓰던 녀석이랑은 다르게, 우린 진지하게 승부에 임했어. 전력을 다하는 것도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이란다.
우리가 일부러 봐줘서 너희를 이기게 했다면, 과연 너희가 기뻐했을까?
그건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스위트 아가씨?
누가 스위트 아가씨야!
네 동료들이 기운 없어서, 나까지 무대에 끌어들여서라도 기분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너무 체면에만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괴로워질 때도 있는 법이야.
네가 매운 걸 잘 못 먹으면서도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 나 매운 거 잘 먹거든!?
너야말로 못 믿겠으면 연회 끝나고 어디 가서――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슬슬 무대 준비가 끝나가고 있어.
K2는 세팅이 거의 다 된 무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아, 약속한 건 지켜야지?
으으... 알았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긴장 풀고 생각을 바꿔 봐. 이건 벌칙이 아니라, 모두의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 말이야.
누... 누가 뭐래? 다 후배들한테 결과를 승복하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야.
그리고, 난 한 도시의 리듬 게임을 제패했던 몸이라고!
혼자서 춤추는 것쯤이야, 매운 거 먹기 도전이나 마찬가지인걸!
...몇십 분 후.
드디어 끝났다...
K2의 벌칙 무대와 함께 연회도 막을 내렸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 연회장은 텅텅 비었다.
무대 위에서의 흥분도 가라앉은 K2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공연을 선보였던 무대를 바라보며 자조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헤... 나 정말 바보 같아.
AK12도 못 끌어들였지, 순순히 춤췄지...
이래선 대장으로서의 면목이 없잖아...
씁쓸해 하는 K2의 뒷모습을 보며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협력사의 책임자가 눈에 띄었다.
...마침 잘 됐다.
나는 책임자에게 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K2를 불렀다.
K2, 잠깐 와보렴.
지휘관?
내 부름에 K2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협력사의 책임자가 함께인 것을 보고 잠깐 흠칫 하긴 했지만, 곧바로 예의 바르게 꾸벅하고 인사했다.
이분은 이번 연회를 우리 협력사의 책임자이셔.
안녕하세요, 그리폰의 전술인형 K2입니다.
예정에는 없었던 깜짝 이벤트였는데, 정말 훌륭한 공연이었습니다.
K2 양, 춤 솜씨가 상당하던걸요?
네?!
아...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손님들도 매우 만족하는 분위기였답니다.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
책임자와 인사를 나눈 후, 우리도 연회장 바깥의 집합 장소로 향했다.
기분이 많이 좋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무슨 뜻이야?
AK12한테 골탕 먹어서 속상해하는 줄 알았거든.
그건... 솔직히, 그렇게 꼴사납게 져서 분하긴 해.
나도 상대하기 벅찬 녀석들이니까 말이지. 정말 고생했구나.
아니야, 지휘관.
사실... 춤출 때 보니까, 손님들과 우리 동료들이 즐거워하는 걸 봐서 이젠 그렇게 속상하지 않아.
처음 겪어보는 거니까, 나름대로 꽤 신선한 경험이었어.
정말로?
정말이야. 돌아가서 다른 애들한테도 연회에서 있었던 일 전부 다 말해 줄 거야.
그 텍사스 홀덤이란 카드 게임도 무지 스릴 있었어.
어... 그렇다고 도박에 빠지면 안 된다?
하하하... 명심할게.
도박의 위험은 오늘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아 참, K2. 너... 사실 춤추는 거 좋아하지?
응?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아까 무대에서의 네 모습,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거든.
다른 느낌?
뭐랄까, 엄청 자연스러웠어. 마치 춤추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야.
무대 위의 넌 그런 유명한 아이돌처럼 빛났어.
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부끄럽잖아...
하지만... 응, 솔직히 나도 춤추는 게 좋아. 평소엔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그럼 이런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어?
어? 그 말은 설마...
사실 오늘 그리폰의 인재를 스카웃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났거든?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고 또 춤추는 너를 보고 나니까...
만약 그런 기회가 있다면, 네게 더 어울리는 일을 하게 해주는 게 어떨까 싶었어.
......
지휘관, 설마 날 해고하겠다는 거야?
그 정도로 내 일처리가 엉망이었단 거야...?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넌 언제나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오늘 네 공연을 보니 대스타가 될 인재를 우리가 전술인형이나 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푸훗.
애써 해명하는 내 모습에 K2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휘관도 나처럼 어리바리할 때가 있구나.
상관한테 어리바리라니 요 녀석 보게.
헤헤, 미안. 그래도 난 춤추는 것 말고도 좋아하는 게 엄~청 많은걸!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싸우는 것도 좋아해.
매운 거 먹기도 좋아하고, 그리폰의 모두와 함께 지내는 것도 정말 좋아.
그리고... 지휘관이랑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해.
알았어? 난 내가 좋아서 그리폰에 있는 거야. 만약 내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준다 해도, 난 그리폰을 선택하겠어.
네가 그렇다니 나도 안심이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나저나 너 오늘 연회에서 별로 먹지도 않은 것 같던데, 디저트가 맛이 없었니?
아니, 다 하나씩 먹어봤어. 엄청 맛있더라.
많이 먹지 않은 건 따로 이유가 있어.
무슨 이유?
전부 다... 너무 달았어. 매운 음식 애호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
아, 그래도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걸 많이 봤어. 이참에 카페에서 몇 종류 만들어 보려 해. 매운맛으로!
...뭐? 매운 디저트...?
응, 매운 디저트! 분명 무지무지 인상적일 거야!
만들면 지휘관도 꼭 맛봐야 해, 알았지? 한 입 먹어 보면 다시는 날 다른 직장에 보낼 생각은 들지도 않을 테니까!
......
그건 부디 선처를...
......
1년이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와 함께 또다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서프라이즈와 함께, 새로운 1년이 시작된다.
어떤 서프라이즈든지, 전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훗날 다시 떠올릴 때, 함박웃음이 이어지는 밤의 추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