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레드
AN94
......
여기는 AN94. 안젤리아, 응답 바람.
예비 플랜 B에 따라 철수를 완료했다. 관련 자재의 위치는 공용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드했다.
지금부터 그쪽과 합류하면 되나? 다음 지시를 대기 중.
알았다. 임무 완료. 즉시 해당 구역을 이탈하도록.
즉시 실시하겠다.
이탈 후...
자유 활동해.
...잘 못 들었다?
이번 임무는 이걸로 끝이야.
하루 정도 시간이 비니까, 자유 활동할 수 있어.
휴가라 생각하고 푹 쉬어.
하지만...
가끔은 휴가를 즐기는 것도 괜찮겠지.
...응.
어느 세이프 하우스.
AN94.
듣고 있다.
아까 안젤리아가 내린 명령이 뭐였지?
이번 임무 완수 후, 약 24시간 동안 자유 활동이다.
그래서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오는 게 네 자유 활동이야?
불편한가, AK12?
미안하다.
아니, 딱히 불편하진 않아.
내 말은, 인형은 저마다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잖아?
그렇다. 난 널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 말을 자연스럽게 끊다니... 많이 영리해졌구나, AN94.
그리폰의 지휘관에게서 배운 대화법이다. 하지만 칭찬받을 일은 아니군.
됐어, 난 상관없으니까.
AK12... 내가 잘못한 건가?
왜 잘못했다고 생각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넌 지금 컨디션을 조절할 필요가 있어. 싸울 땐 전력으로 싸우고, 아닐 땐 한껏 풀어질 줄도 알아야 해.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풀어지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캐시 메모리 정리라도 하면 되는 건가?
하아... 정말 몰라서 그래?
표정을 보면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난 항상 표정 관리를...
...지금 유도 심문하는 건가?
와,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그래도 난 네가 어떻게 해야 풀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봐. 지난번에 그리폰과 만났을 때도 잘했잖아?
......
나는 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진다.
자유 활동이라지만, 내겐 이것밖에 없다.
그것밖에 없다고? 그건 네 생각이지.
그것 때문에 내 기분이 상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AK12, 난 네가 바라는 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만약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만 하겠다.
아니 아니, 네가 그리폰과 어울리면서 뭘 배웠는지 엄청 궁금해서 그래.
...아,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리해서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알았다.
그런 점은 여전히 알기 쉽다니까.
아무튼, 이거 받아.
...?
안젤리아가 준 연회 초청장이야. 갔다 와.
임무 목표는?
그런 거 없어.
그럼 잠재적 위협 제거인가?
잠재적 위협도 없어.
그냥 편하게 놀다 오는 거야. 그리폰도 거기 참석한대.
걔네랑 다시 만나는 거, 기대돼?
......
예복도 예쁜 걸로 미리 준비해놨으니까, 가서 노는 법 좀 배우고 와.
나보다는 네가 이런 장소에 어울린다고 본다.
난 이미 충분히 사교성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연습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넌 달라.
잘 들어, AN94. 갓난 새처럼 한곳만 바라보지 마.
스스로를 둥지 속에 가두면 마인드맵이 녹슬 뿐이야. 평소에는 접촉하지 못하는 걸 좀 더 많이 봐야 해.
하지만...
이게 나의 요구 사항이야.
......알았다.
시간 맞춰 참석하겠다.
연회 전날 밤.
쫓아다니지 말라고 한소리 들은 것도 모자라, 연회에 혼자 가라고 등을 떠밀린 AN94는 홀로 세이프 하우스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AK12는 어디 간 거지? 임무 외 시간에 좌표를 동기화할 수는 없어. 들켰다간 AK12가 싫어할 거야.)
(하지만 AK12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니, 마인드맵이 진정되질 않아...)
극복해야 하는 건가...
(AK12 없이 혼자서 연회에... 나 혼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AN94는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AK12 없이 단독 활동이라니, 상상만 해도 불안해.)
(AK12에게 들키면, 분명 화를 내겠지만...)
(돌발사태를 대비해 세이프 하우스에 예비 소체를 배치했다고, 안젤리아가 말했어...)
(...들키지 않게 조심하자.)
AN94는 구석에 쪼그려앉아 바닥의 장판을 들췄다.
그리고 거기엔 예비 소체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것이 AK12의 소체.)
(참 편안한 표정이구나, 그녀답지 않게.)
AN94는 조심스럽게 AK12의 예비 소체를 꺼내, 미리 준비한 캐리어에 넣었다.
끝나면 다시 돌려놓을 테니...
이번만 같이 있어 줘.
때마침 발소리가 들려오자, AN94는 허겁지겁 캐리어를 닫고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 왔어.
응,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 캐리어...
......
벌써 다 준비한 모양이네?
그럼 오늘은 내가 불침번을 설게. 넌 내일 연회가 있으니 어서 푹 자.
휴우... 알겠다. 이만 쉬겠다.
(소체를 가리도록 다른 걸 덮어놔야 했는데,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럼 수고해라, AK12.
잘 자, AN94.
...정말 재밌는 방법이네.
좋아, 준비한 것보다 더 큰 서프라이즈를 줄 수 있겠어.
다음날 밤, 연회장.
그리폰 직원이시군요. 이쪽입니다.
고맙다.
(이런 치마는 전투에 불편할 뿐인데... 그리고 구두굽도 너무 높아. 균형 유지 때문에 연산량이 늘어났어...)
(이것이 축하 연회인가. 확실히 안전한 것 같군. 다들 편안해 보이고.)
아가씨! 제 신작 디저트 맛 좀 보고 가세요!
...? 아, 나 말인가?
예 와인색 드레스가 아름다운 당신이요!
보아하니, 이런 연회는 처음이신가 보군요? 기념으로 부디 제 신작을 평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감사히 받겠다.
...음, 새콤달콤한 딸기가 생크림의 느끼한 맛을 잡아 주고, 밑의 컵케익의 고소함과도 잘 어울리는군. 정말 맛있다.
오, 안목이 있는 분이셨군요!
"세 번째 절색"이라 이름 붙인 겁니다.
"달빛과 눈빛 사이, 그대는 세 번째 절색이어라"... 오래전의 시에서 따온 이름인가?
와, 출처도 아시는군요?
가만 보니, 이름을 붙여준 손님과도 분위기가 꽤 닮으셨네요.
셰프가 지은 이름이 아닌가?
저쪽의 저 아가씨께서 지어 주셨답니다.
요리사는 한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리폰의 지휘관과... 데이터베이스 검색... 전술인형 썬더.)
(고전 문학을 보는 인형이 그리폰에도 있다니. 저 인형도 AK12와 잘 어울릴까?)
저기, 손님?
다른 것도 드셔보시겠어요? 이것도 제 자신작이랍니다, 저쪽의 아가씨께서 "씁쓸한 로큰롤"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죠!
......
아니, 미안하지만 다른 용무가 있어 이만 가보겠다.
아,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잠깐 한눈판 사이에 AK12의 소체를 담은 캐리어가 사라졌어...!)
(어떻게 내 탐지를 피하고 캐리어를 탈취한 거지? 내가 너무 풀어진 건가? 안 돼, 반드시 찾아내야 해!)
AN94는 온 정신을 집중해 캐리어에 장착한 발신기의 신호를 탐지했다.
(...목표 위치 확인. 찾았다!)
AN94는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가 캐리어를 붙잡았다.
(다행이다, 누가 가져간 게 아니었...)
(잠깐, 무게가... 안에 넣어둔 소체가 사라졌어?!)
(누가 가져간 건가... 설마 여기에 인형 소체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는 건가?)
(빨리 찾아야 하는데...!)
거기 예쁜 언니~!
그 드레스 정말 예쁘다~! 붉은색 그라데이션이 지~인짜 마음에 들어! 같이 사진 찍어도 돼?
파티 끝나면 나도 같은 옷 한 벌 장만할까 싶어서 말이야~
(데이터베이스 검색... 전술인형 MDR.)
(하필이면 이런 때에... 빨리 따돌려야겠어.)
어... 그... 지금 사진은 조금 곤란하다...
에이, 쑥스러워하지 말고! 분명 사진발도 엄청 잘 받을 거야!
정 부끄러우면 같이 찍자! 어때?
미안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아, 캐리어... 어떡하지...
MDR,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아아, 마침 잘 왔어 지휘관. 지금 조사 중인데――
어...? AN94? MDR, 너 AN94랑 아는 사이였니?
아... 반갑다, 지휘관.
캐리어...
어떡하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AN94가 친구를 사귄 모양이네?
AK12?!
AK12는 AN94에게 윙크했다.
하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AN94는 그 눈짓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AN94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고, AK12는 화제를 돌려 주변 인물들의 주의력을 그녀에게 돌렸다.
(AK12는 뭐든지 손쉽게 해내는구나.)
(이참에 사라진 소체를 찾아야 하는데, 소체의 전원은 꺼진 상태이니 신호를 추적할 수가 없어... 육안으로 찾는 수밖에...)
AN94?
...무슨 일이지?
텍사스 홀덤은 플레이어가 여럿 있어야 재밌으니까 너도 껴.
또 멋대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역시 너와 AN94가 여기에 나타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겠지?
(이런, 이래서는 찾으러 다닐 수가 없어.)
(시간을 끌수록 소체를 찾지 못할 확률이 높아질 텐데, 어떡하지?)
(하지만 AK12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고...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텍사스 홀덤 관련 자료 검색...)
AN94는 초조해하면서도 AK12를 따라 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예상한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연회가 끝나고, AK12가 지휘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AN94는 텅 빈 캐리어를 밀면서 연회장의 바깥을 수색했다.
(아, AK12의 연락이다. 5분 후 주차장에서 합류.)
(이제 시간이 없어, 5분 안에 찾아내지 못하면...)
안녕, AN94.
(지휘관이다.)
(그리폰이 이번 연회의 보안을 담당했지... 지휘관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지도 몰라.)
다시 봐서 반갑다, 지휘관.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혹시 인형 소체를 가지고 떠난 사람 있었나?
인형 소체를...?
그런 걸 연회장에서 들고 다니면 엄청 눈에 띌 텐데? 아니, 적어도 난 보지 못했어.
그럴 수가...
설마 벌써 가지고 떠난 건가...?
설마 너희들 또 무슨 사건을 조사 중이었던 거야?
...아, 아니다.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해 주기 바란다.
...좋아, 어차피 너한테서 정보를 캐낼 수도 없을 테니.
아무튼, 연회에서 재밌게 놀았어?
즐거웠다.
인간과 인형이 풀어지는 방법에 대한 데이터도 많이 수집했다.
괜찮았다는 뜻 맞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아직 내가 그런 방식으로 풀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경쟁과 계산 과정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AK12가 할 듯한 말이네.
그런가?
AK12는 내가 지휘관을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누구를 닮아가고 있든, 예전의 너와는 조금 달라진 건 사실이야.
좋은 뜻인가?
좋은 뜻이지.
그럼 다행이다.
...미안하다, 지금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물건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다.
찾는 거 도와줄까?
지휘관의 도움은 충분히 받았다.
고맙다. 또 보자.
또 보자... 좋지.
느닷없이 이상한 대결이나 하자는 거 아니면 언제든지 놀러 오렴.
그 말에, AN94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보았다.
...아마, 그럴 기회가 또 있겠지.
나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다.
입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눈빛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웠다.
...저게 AN94가 웃는 표정일까?
그럼, 이만 가보겠다.
AN94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어째 불안정한데, 하이힐이 익숙치 않은 탓일까?
다음에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기대하며, 나는 눈으로 그녀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