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안에 홍장미
98K
오전 9시. 마카로프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검은 옷의 인형을 응시했다.
분명 자신이 심문하는 입장이건만, 마카로프는 상대의 기세에 역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이 Kar98k란 인형에게 말이다.
마카로프 양, 어젯밤 저의 행적에 대해서라면, 말한대로가 전부예요.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싫지만, 자꾸 그렇게 끈질기게 군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한밤중에 지휘관의 방에서 포착된 사람이 카라비너가 아니어도 조사에 협조해줘. 그리폰의 전술인형으로서, 이 신원 불명의 인원의 정체를 조사할 의무가 있어.
다 지휘관과 그리폰의 안전을 위해서니까 조금만 더 잘 기억을 더듬어 봐, 그때 지휘관의 방에서 뭔가 유난히 신경쓰이던 점은 없었어?
하아... 어쩔 도리가 없군요.
Kar98k는 불쾌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새벽 2시 15분경, 그녀는 지휘관의 방 문에 노크했다.
지휘관님, 아직 일어나 계신가요?
...완전히 곯아떨어지신 모양이네. 정말이지, 그러게 왜 또 저녁 파티에서 무리하게 술상에 어울리셔선. 이래서 소란스러운 게 싫다니까.
아무래도, 사흘 뒤에 있을 임무의 전술 방침은 내가 미리 수립해 두고 내일 지휘관이 일어나시면 그때 토의해야겠어.
무심한 투의 혼잣말이었지만, Kar98k는 자신의 업무가 늘어난 것보다 지휘관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내심 지금 무방비한 지휘관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문고리를 툭 건드렸다.
어...? 문이 안 잠겼잖아? 지휘관님을 모신 애들이 깜빡한 건가?
Kar98k는 그대로 슬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깜깜한 방은 관리실의 전력 설비 상황이 보이는 모니터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비친,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지휘관의 얼굴은, 왠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애당초 통풍도 잘 안 되는 방인데, 에어컨도 적정 온도가 아니잖아...
...됐다. 그럼 편히 주무세요, 지휘관님.
Kar98k는 문 바로 옆의 제어 패널로 방의 실내 온도와 통풍을 조절했다. 이렇게 하면 방에 가득 찬 술냄새도 금방 빠져나갈 것이었다.
그래, 이건 다 지휘관님이 빨리 정신을 차리셔서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야...
마음속으론 그렇게 되뇌었지만, 방을 나서려던 Kar98k는 결국 발길을 멈추고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잠자는 지휘관의 얼굴을 돌아봤다.
흐음... 스테츠킨이, 증언을 들을 때 세세한 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 모순되는 점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랬지만...
역시 나한테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가 너무 어려운걸. 걔는 어떻게 한대?
그럼 힌트를 드리죠. 제가 지휘관님의 방에 갔을 때, 왜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기론, 파티가 끝나고 지휘관님을 방으로 모신 건 Zas 씨와 그리즐리 씨예요. 그 둘이 그런 간단한 일을 깜빡했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러고 보니, Zas가 방을 나서기 전에 도어 록을 다시 켰다고 했어.
하지만 제가 갔을 땐 아니었어요. 그러니, 분명 Zas 씨와 그리즐리 씨가 떠난 뒤와 제가 가기 전 사이의 시간에 다른 누군가가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단 뜻이죠.
아하... 중요한 단서네. 그날 밤 지휘관의 방을 지나간 인형이 몇 명 더 있는데, 걔네한테도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지휘관님께서 굉장히 난감해하시니 너무 당돌하게 캐묻고 다니진 마세요.
토의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도 아침 조례 후부터 계속 저희를 피하고 계시잖아요.
나랑 스테츠킨이 얼른 이 사건을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말고 우리만 믿어.
지휘관이 난감해해도 다 기지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야!
Kar98k의 위압감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원하는 정보를 얻은 마카로프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믿어 달라... 내가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네.
직접 확인해보고자, Kar98k는 홀로 다시 지휘관의 방 앞까지 왔다. 하지만 곧장 문을 열지 않고, 자신의 뒤를 밟은 그림자에게 툭 말을 던졌다.
거기, 할 말 있으면 나와서 하시죠.
와아, 과연 베테랑은 다르구나? 촉이 정말 예리해.
더는 당신과 마카로프 양의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 없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얌전히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여긴 왜 다시 왔어?
만약이란 게 있으니, 기지 내 인원 외의 누군가가 여길 출입했을 가능성을 확인하려고요.
흔해 빠진 변명이네. 말하기 싫음 내가 맞춰 볼까?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임무를 준비하는 일이겠지?
그리고 이번 사건은, 나랑 마카로프가 아니어도 카리나가 철저하게 조사할 테고.
네가 단독으로 조사할 이유는 없지 않아? 책임감 때문에 그래? 아니면... 명예?
그 말에 Kar98k는 눈살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스테츠킨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거구나. 하긴~ 고고하신 Kar98k가 움직일 이유가 명예 말고 또 뭐가 있겠어.
그러는 당신은 이렇게 남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취미인가요?
하하하, 누군진 몰라도 그불게에 감시 녹화 영상을 올리고선 별다른 증거도 없으면서 널 의심하다니, 참~ 나쁘지?
그런데 있잖아... 그 정체불명의 인물의 정체가 영영 수수께끼로 남는다면, 넌 어떻게 네 혐의를 벗고 명예를 되찾을 거야?
뭐 알아낸 거라도 있단 뜻인가요?
결정적인 단서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모두에게 일일이 물어봐서 알아낸 자잘한 것들이지. 자세히 안 보면 눈치채지 못할 "디테일".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강인한 병사를 찾는 중이거든? 내가 준비한 "탄"을 대신 "장전"해서..."
진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줄 병사를.
흥... 이미 눈여겨둔 인선이 있군요.
또 다음 날. 카노와 마카로프, 스테츠킨이 주최하는 성대한 웨딩드레스 시착 이벤트가 열렸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초청받아 참석하기로 했다.
내가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뒤, 로비로 떠나려던 그때였다.
지휘관님, 잠시 괜찮으실까요?
아, 카라비너? 미안해, 네 작전 방침은 오늘밤까진 꼭 검토해서 줄 테니까――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저 혼자였겠죠. 안 그런가요, 여러분?
그녀 말대로, 카라비너는 혼자가 아니었다. M950A에 스테츠킨, 마카로프, Zas까지 있었다.
그저께의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 다 모이진 않았지만, 모두의 알리바이를 확보했어요.
어... 이게 무슨 일이지?
그저 지휘관님께 사소하게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을 뿐이랍니다. 그저께 밤, 당신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회장의 무대 위에서, 검은 제복을 입은 카라비너가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군화의 굽이 또각또각 소리를 낼 때마다, 형용키 어려운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발렌타인 파티가 끝나고, 저는 기지의 감시 시스템이 점검 중이던 때에 지휘관님의 방에 들렀어요.
그때 제가 들어왔던 걸 아셨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라비너가 그 일을 물고 늘어지면 곤란한데...
미안해, 그날은 진짜 너무 많이 마셔서 누가 날 데려다줬는지도 전혀 몰랐어.
참 이상하군요. 제가 갔을 때, 지휘관님 방의 도어 록이 잠기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Zas 씨는 그리즐리 씨와 함께 지휘관님을 침실로 모신 뒤, 떠나기 전에 도어 록을 다시 켰다고 했어요.
아뿔싸... 그럼 카라비너는 이미...?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에요.
누군가가 억지로 도어 록을 해제하고 지휘관님의 방에 무단 침입했거나...
지휘관님 외에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Zas 씨와 그리즐리 씨가 떠난 뒤와 제가 들르기 전 사이의 시간대에 몰래 지휘관님을 방문하고 문을 다시 잠그는 걸 깜빡했단 거죠.
그러니 잘 떠올려봐 주세요. 정말 그날 밤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훌륭한 추리야, 카라비너. 자아, 이제 진실을 밝힐 때야.
카라비너의 함정에 보기 좋게 빠져, 말로 얼버무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주위의 다른 인형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이 사건의 흐름이 내 대답에 달렸다.
계속 취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우긴다면, 모두 그게 누구인지 신경쓰여서 더더욱 포기하지 않겠지...
역시, 이럴 때엔...
지휘관이 뭔가 결심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Kar98k도 다소 긴장했다.
너희가 본 그 긴 머리의 모습은 말이지... 사실... 카리나였어.
마침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생겨서, 파티에서 나오자마자 머리도 안 묶고 내 방으로 와서 보고한 거야. 자다 깨서 서류 결제한다고 혼났다니까.
카리나 씨요...? 확실히, 그녀도 지휘관님 방의 문을 열 권한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휘관의 말에 로비의 모두가 술렁였다. 하지만 그 와중, 스테츠킨이 슬그머니 Kar98k 곁으로 다가왔다.
<Size=35>카라비너, 그날 찍힌 사진 다시 확인했는데, 아니야. 나도 카리나가 머리 푼 모습 본 적 있는데 아무리 비교해 봐도 하나도 안 닮았어.</Size>
<Size=35>아무래도 그게 누구인지 끝까지 정체를 숨길 셈인가 봐.</Size>
<Size=35>지휘관님이 그토록 숨기시려는 비밀이라니... 대체 뭘까요?</Size>
<Size=35>알고 싶으면 사진을 대조한 결과로 지휘관의 마지막 방어까지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지 뭐.</Size>
카라비너, 스테츠킨, 더 물어볼 일 없으면 먼저 실례해도 되겠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이라서.
카라비너와 스테츠킨이 다음 공세를 준비 중인 게 확실했다. 이대로라면 점점 내가 불리해질 뿐이니, 서둘러 자리를 떠야 했다.
기다리세요, 지휘관님. 아직이에요.
그래, 그거야 카라비너! 그렇게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는 거야!
지휘관님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셨는데, 어떻게 카리나 씨가 들어온 걸 아셨나요?
?!!?!?!?
야, 야, 카라비너? 왜 사진을 대조해 봤단 건 안 말해?!
당황한 스테츠킨이 필사적으로 Kar98k에게 눈치를 줬지만,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건...
아 맞다, 지휘관을 데려다 놓고 보니 취기가 좀 가라앉았었지?
음?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때 그리즐리가, 지휘관이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들어하던 표정이 좀 부드러워졌다고 했어.
뒤쪽의 피팅룸에서 나온 그리즐리가 느닷없이 끼어들었고, Zas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이 예상치 못한 지원을 이용한다면 카라비너의 매서운 추궁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카리나가 급하게 보고할 게 있다면서 날 깨웠어!
카리나가 나간 뒤에 다시 바로 곯아떨어졌지만 말이지...
카라비너가 왔을 때 날 깨우거나 했다면――
하지만 열띤 공방은 사그라들 줄 몰랐고, Kar98k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의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그때, 누군가가 Kar98k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살며시 귓가에 속삭였다.
카라비너, 지휘관의 눈빛 좀 봐봐.
그리즐리의 말에 Kar98k는 곁눈질로 지휘관의 거동을 훑어봤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얻었다.
...아무래도 의미 없는 질문이었나 보네요.
말을 마치고, Kar98k는 곧바로 소란의 중심에서 떠났다.
엑!? 야, 잠깐! 그냥 이렇게 끝낸다고?!
기다려 카라비너!!
기세를 담당하는 Kar98k가 떠나자, 스테츠킨도 뾰족한 수가 없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카라비너의 방 문에 노크를 했다.
카라비너, 잠깐 괜찮을까? 역시 마주보고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잠시 고요함이 맴돌았지만, 이윽고 안에서 카라비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안 잠겼어요.
실례할... 응? 카라비너, 그 옷은...?
카노 양이 보내 준 건데, 꼭 한번 입어보라 해서요.
오늘은 모두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게 하는 이벤트였는데, 저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졌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구나. 아무튼 오늘 낮의 일 말인데――
카리나 씨가 아니었죠?
...역시 카라비너는 못 속이겠네.
스테츠킨 양도 속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그게 카리나 씨가 아니란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죠.
하지만, 지적하길 관뒀어요.
입장상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모습의 정체를 밝혀내면 너에 관한 루머도 완전히 풀리지 않아?
지휘관님, 낮에 했던 그 질문은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물론 제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예가 그런 헛소문에 더럽혀지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것보다, 지휘관님이 그 수수께께의 인물에 대해 어떤 입장이신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사과하러 온 거야, 미안하지만 그건 아예 없었던 일로...?
그때, 카라비너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카라비너의 강한 의지가 전해지는,가벼우면서도 강렬한 제스처였다.
...알았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옳다 여기는 걸 지키는 거지.
그 모습의 정체를 저희에게 밝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지휘관님께서 생각하신다면, 그걸 지키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희의 사명이니까요.
카라비너가 여기는 올바름과 그리폰의 올바름, 그리고 내가 믿는 올바름. 이 셋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나에겐 아직 할 일이 잔뜩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