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우가 내리는 밤
Grizzly
칫, 헛방인가? 이거 또 성가신 녀석이 달라붙었네.
저항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그리즐리 MkV. 난 너처럼 위험한 녀석과 같은 우리에 들어갈 생각이 없거든.
나도 직접 마주볼 배짱도 없는 겁쟁이랑 할 말 없어.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한 거야? 난 분명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서, 기분전환으로 사격 훈련이나 할 겸 훈련장에 왔더니...
발을 들이자마자 이런 밀폐 공간으로 바뀌다니 말이야.
눈치 빠른 건 인정하지만, 내 우리에서 빠져나갈 순 없을 거야.
에너지 바닥나서 땅바닥에 뒹굴기 싫음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해.
그리즐리는 난데없는 밀폐 공간에 갇혔고, 눈에 띄는 것이라곤 음침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나는 스피커뿐이었다. 확실한 건, 누군가 그리즐리를 그곳에 가두고 심문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고 확신하나 보네?
그리즐리는 저 목소리에 대꾸하며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두꺼운 훈련장의 자동문은 꿈쩍하긴커녕 스위치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여기의 유일한 출입구지. 이제 내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건 깨달았겠지?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군. 좋아, 어디 한번 말이나 들어보자고.
그럼 사실대로 얘기해――
이틀 전의 발렌타인 파티가 끝난 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그리폰 지휘관의 행적을 아는 대로 전부 말해!
뭐어...? 그런 건 왜 물어?
그날 밤, 너와 Zas M21이 지휘관을 데리고 파티장에서 나간 거 맞지?
자세히도 알고 있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전부 말해.
그런 시시한 얘기를 꼭 듣고 싶어?
그리즐리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날 밤 Zas M21과 함께 지휘관을 침실로 데려갔을 때를 얘기했다.
두 인형이 지휘관을 부축하며 들어간 그 방에는, 자료와 문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아니, 일과 업무가 끝나고 방에 돌아와서도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거야?!
괜찮아아... 아직 탄창 두 개 남았으어...
그리즐리의 어깨에 기댄 채 곯아떨어진 지휘관이 갑자기 잠꼬대를 했다.
어우, 술냄새... 정말 취할 대로 취한 모양이네.
생각보다 난잡하진 않은걸. 내가 좀 정리해야겠다.
그럼 난 지휘관을 침대에 눕히고 올게.
그리즐리는 자세를 바꿔, 잠든 공주님을 다루듯 지휘관을 침대에 눕혔다.
어질러진 방과는 정반대로, 각지게 개어진 이불과 깔끔한 시트는 지휘관의 전사로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휘관은 정말 열심이구나...
모처럼 풀어질 기회가 생겨서 이렇게 무리한 걸까나?
술에 취해 벌겋게 상기됐던 지휘관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걸 확인한 그리즐리는 한시름 놨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훗... 그럼 잘 자, 지휘관.
그게 다야? 정말로?
하아... 내가 진짜 너희처럼 얼빠진 납치범은 처음 본다. 더 이상 어울려 줄 생각 없어.
무슨 소리야? 지금 넌 우리 손아귀 안이라고.
과연 그럴까?
그 말과 함께, 그리즐리는 구석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자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나면서 방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즐리가 있는 곳은 여전히 훈련장이었고, 굳게 닫힌 방은 그저 홀로그램에 불과했던 것이다.
으에엑!? 거기에 홀로그램 장치가 있는 걸 어떻게...?!
너희처럼 잔수작 부리는 녀석들은 예전부터 수도 없이 상대했어. 겨우 이 정도로 날 속일 수 있다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그리고, 바로 내 뒤에 숨었으면서 스피커 방송으로 대화하는 건 불편하잖아? 그냥 이리 나와서 얘기해, 거기 성가신 두 명.
무, 무무... 어어, 우왁!!
"너처럼 위험한 녀석과 같은 우리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
오리발을 내밀수록 의표를 찔리기 쉬운 법이지.
그리즐리의 말에 놀란 두 형체가, 뒤편의 화물 선반 틈새에서 넘어졌다. 스테츠킨과 마카로프였다.
어... 미안해 그리즐리, 다 설명할게.
설명할 게 어딨어, 그냥 홀로그램 장치가 너무 싸구려인 탓이지. 어쩐지 할인률이 높더라...
이런 눈속임엔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홀로그램이 실체와 제대로 겹쳐지지 않아서, 스위치 만졌을 때부터 눈치챘다고.
그러게 내가 그리즐리랑은 그냥 터놓고 얘기하자 했잖아.
흥, 그럼 이런 눈치 빠른 녀석한테서 어떻게 정보를 뽑아내?
역시 그런 시시한 일은 사실대로 말해 줘야 너희가 단념하겠지.
음? 이미 알고 있었어?
파티 끝난 뒤에 바로 임무 때문에 기지를 떠났지만, 정기 연락으로 그날 밤 지휘관 방에 나타난 신원불명의 인물을 조사 중이란 얘기는 들었거든.
유감이지만 당연히 난 아니야.
뭐, 네가 지휘관을 숙소에 데리고 간 건 Zas가 증명할 수 있겠지.
하지만 감시 시스템을 업데이트할 땐 어디 있었는데?
아무래도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소릴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래, 어차피 재밌는 일도 아니니 그냥 말해 줄게.
감시 시스템이 업데이트 점검 중이던 밤 23시 30분경, 그리즐리는 지휘관을 침상에 눕힌 후 조금 뒤 Zas M21과 함께 방을 나왔다.
다음날 새벽 5시 쯤에 임무가 있었기에, 그리즐리는 자잘한 준비를 마친 뒤 자기 숙소로 돌아가 쉬려 했다.
하지만 돌아가던 도중 다른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예에~ 거침없이 막 나가는 그리폰 swag~
누구보다 잘 나가는 캘리코 swag, 예아~
허... 950 쟤, 취하면 평소에 꺼리는 장르도 되는대로 막 부른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하지만 그리즐리의 눈은 M950A이 아닌, 한쪽에 숨은 수상한 그림자에게 향했다.
그 녀석이 왜 나더러 M950A가 연습하는 모습을 찍어 달라 했는지 이제 좀 알겠네.
"라임 파괴! 그리폰 신인 래퍼의 연습 현장 포착!" 같은 제목으로 그불게에다 올릴 셈이겠지.
"그 녀석", 정말 할 일 없나 보구나.
그, 그리즐리?! 여긴 언제... 아니, 어떻게...!?
RMB-93은 조금 멀리 떨어진 풀숲에 숨어서, 카메라를 들고 M950A를 도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리즐리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옆에 쪼그려앉고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RMB-93은 손에서 카메라를 놓치고 말았다.
Yo yo yo~ 내 랩은 총알탄, 내 사속처럼 속사포지 yo~
그리고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M950A는 계속해서 랩 삼매경이었다.
RMB 너 오늘 관제실 당번 아니었어? 설마 직무유기야?
아니, 다른 사람이랑 오늘 당번직 교체했어.
그래서 여기서 사람 취한 꼴을 찍고, 그걸 다른 녀석한테 줘서 게시판에 올리겠다고? 너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촬영 금지 구역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여기서 뭘 찍든 내 자유지. 게시판에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인형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값진 일 아니겠어?
RMB-93은 태연하게 다시 카메라를 집어 촬영을 계속했다.
말은 잘해요. 아예 스테츠킨이랑 같이 법률 사무소라도 차리지 그래?
나중에 이직할 일 생기면 참고할게.
예에, 그리폰~ 그리... 그리...즐리...?
결국 M950A도 자기 뒤에서 티격대는 그리즐리와 RMB-93을 보고 말았다.
대놓고 찍을 수는 없었기에, RMB-93도 촬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휴 참,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RMB-93은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났고, M950A도 완전히 필름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취기에 고꾸라지려던 M950A를 그리즐리가 재빨리 부축해, 옆의 벤치에 눕혔다.
하여간 얘도 참... 여기다 내버려둘 수도 없는데 빨리 썬더한테 연락이나 해야겠다.
그리즐리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거 같은데.
쳇... 알았어, 알았다고. 마침 RMB-93한테도 확인할 게 있으니 잘됐네.
뭐 솔직히 나도 한숨 돌렸어, 그 수상한 모습은 그리즐리랑 실루엣부터가 달라도 너무 달랐거든.
그게 정말 너였다면, 다들 눈이 삐었다는 뜻이니까.
너 정말로 사람 성질 살살 건드리는 화법에 도가 텄구나? 진짜로 RMB랑 같이 법률 사무소 차리는 게 어때?
얜 원래 이러니까 무시해. 그날 일을 말해 줘서 고마워.
다, 다른 사람도 취조하러 가야 하니까 우린 이만 실례할게!
스테츠킨 때문에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질 낌새가 보이자, 마카로프는 재빨리 인사한 뒤 스테츠킨을 끌고 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기가 문을 잠근 것도 깜빡하고 꽈당 부딪히기까지 했다.
철부지들은 상대하기 영 힘들다니까...
이 소동도 빨리 끝나야지, 도무지 느긋하게 쉴 수가 없네.
하지만 그리즐리의 바람은 보기좋게 빗나가, 다음날 다시 카노와 스테츠킨에게 불려갔다.
정말 "이 방법" 외엔 다른 검증 수단이 없는 거 맞아?
왜 신경질이래? 넌 알리바이도 완벽하잖아.
그럼 드레스 차림으로 사진 속의 모습과 대조해도 떳떳할 거 아니야.
그리즐리 씨가 손해 보는 일도 아니잖아요? 저번에 사진관에서 가져왔던 드레스를 입어볼 기회예요!
아, 혹시 치마 입는 거 싫어하세요?
움직이기 불편해서, 임무에 필요한 거 아니면 안 입어.
그래도 뭐, 리엔필드 수준으로 꺼리는 건 아니지만...
그냥 솔직해지세요, 당신도 웨딩드레스에 관심 있죠?
못 이기는 척이걸랑 됐으니까 얼른 피팅룸 가 봐, 그렇게 꾸물거리단 디자인 괜찮은 거 다 나간다?
음... 좋았어, 이걸로 하자. 이거라면 그 사진 속 인물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거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고른 그리즐리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피팅룸에서 나왔다.
마침 지휘관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Kar98k에게 맹렬한 질문 공세를 받는 중이었기에 그녀에게 눈길을 돌릴 여유는 없어 보였다.
엥... 다들 여기 모여서 뭐해?
그 신원불명의 인물 건으로 카라비너가 지금 지휘관을 추궁하는 중이야.
쏟아지는 질문들을 지휘관이 인내심 있게 조목조목 대답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리즐리도 사건의 전모를 전부 파악하게 되었다.
지휘관님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셨는데, 어떻게 카리나 양이 들어온 걸 아셨나요?
아 맞다, 지휘관을 데려다 놓고 보니 취기가 좀 가라앉았었지?
음?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때 그리즐리가, 지휘관이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들어하던 표정이 좀 부드러워졌다고 했어.
그래, 카리나가 급하게 보고할 게 있다면서 날 깨웠어!
의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카라비너의 태도에, 그리즐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카라비너, 지휘관의 눈빛 좀 봐봐.
그리즐리의 말에 Kar98k는 곁눈질로 지휘관의 거동을 훑어봤다.
그리고 지휘관의 눈빛에서 무얼 봤는진 몰라도,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에 둘렀던 위압감을 완전히 풀었다.
...아무래도 의미 없는 질문이었나 보네요.
Kar98k는 싱긋 미소짓는 그리즐리와 Zas M21을 슬쩍 돌아보곤, 소란의 중심에서 떠났다.
자신이 애써 마련한 청문회가 흐지부지되자 당황한 스테츠킨도 허겁지겁 그녀를 뒤쫓았고, 그리즐리와 Zas M21은 슬며시 길을 비켜 주었다.
카라비너도 지휘관의 고충을 이해했나 보네.
지휘관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비밀이란 것도 있으니까.
지휘관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린 그저 지지해 줄 수밖에 없지.
......
그리즐리와 Zas 덕분에 난 카라비너의 추궁에서 겨우 빠져나왔고, 소동도 차차 진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 인기척이 나서 위를 보니, 한 기지 설비 위에서 밤하늘을 감상하는 인형이 있었다.
그리즐리니?
어, 지휘관? 아름다운 밤이에요~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구나.
낮에 널 봤을 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치마 차림이 정말 잘 어울리는걸?
하하하, 비행기 태우지 마셔. 카노가 며칠 정도 빌려준다길래 그냥 기분전환 삼아 입어본 거야.
그래도 마침 잘 됐다, 온 김에 기념 사진 좀 찍어 줘.
나 지금 카메라 없는데.
그럼 내가 숙소에서 가져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그리즐리가 바로 뛰어내렸지만, 지금 자신이 치마 차림인 걸 깜빡한 모양인지 치맛자락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에이, 이러니까 치마가 싫단――꺄악!?
그리즐리는 발을 빼려다 균형을 잃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붙잡아 주었다.
아하하... 고마워, 지휘관.
천만에,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아, 카라비너한테 궁지에 몰렸을 때 말이야?
우리가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했는데. 지휘관이 잘못된 판단을 하진 않는다고 난 믿어.
그리고 지휘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야, 나야말로 영광이지.
너처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도 참 운이 좋다니까.
얼른 가서 카메라 가져 오렴. 모처럼 입은 드레스인데 기념 사진 찍어야지.
하아... 그나저나, 옛날에는 이 계절에 유성우를 볼 수 있었다던데 말이야.
유성우? 아, 나도 들어봤어. 혜성의 파편들이 대기권에 떨어져 불타 없어지면서 하늘에 남기는 궤적 말이지?
나도 보고 싶다, 그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광경.
그때도 그리즐리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지휘관... 풉.
알았어. 그땐 지휘관도 천생연분을 찾고, 다 함께 유성우 아래서 드라이빙하는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휘관은 내가 곁에서 꼭 지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