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같은 해바라기
PM
숙소 앞 마당의 한가운데서, 마카로프는 막연하게 주위의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날이 점점 밝아 가면서, 눈부신 아침 햇살이 기지와 시설, 그리고 오가는 인형들을 비췄다.
바람소리와 웃음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구령 소리... 전부 더없이 익숙한 것들이지만, 어째선지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나... 왜 여기 있지...?
침착해... 침착해, 마카로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봐...
난... 진실을 추적하는 중이었어...
며칠 전.
어휴... 파티에 술만 나왔다 하면 바로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니까.
M950A는 아직도 노래 삼매경인가... 피곤해, 신경 끄자. 난 빨리 가서 쉬어야 해.
숙소 건물은 조용했고, 문을 닫으니 저 멀리 감정이 잔뜩 실린 노랫소리도 위력이 줄었다.
마카로프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고, 천장을 빤히 바라보며 메모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40분 후, 그녀는 하루를 마치고자 눈을 감았다.
마카로프, 지금 바로 주무시겠습니까?
그리폰 게시판에서 새로운 푸시 알림을 받았습니다.
잘 거니까 내버려둬.
"충격! 지휘관의 침실 사진 유출!"
관심 없어.
"한밤중의 밀회, 그 상대는 누구?"
......뭐?
지휘실.
하~암... 됐다, 할 일 끝! 으으, 침대야 기다려ㄹ――
늦은 밤에 미안하지만 실례할게 카리나, 아직 있지?
아... 마카로프? 응, 아직 있어. 무슨 일이야?
방금 게시판에 올라온 글 봤어?
오늘 관제실 당번인 스테츠킨이 감시 영상에서 지휘관의 방에 여성의 실루엣이 찍혔다고 게시판에 올렸어.
어, 그, 그런 일이 있었어?
이건 심각한 문제야. 당장 그 글을 삭제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해.
어...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처리할게.
하지만 이미 본 애들은 달리 방도가 없겠는데...
못 본 걸로 해 달라는 수밖에 없지 뭐.
다만 입이 가벼운 녀석들도 있으니, 내일 아침쯤이면 알 사람은 다 알게 되겠지만...
그건 그렇네...
늦었는데 카리나도 엄청 피곤하지?
이 일의 조사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어서 자러 가.
어, 조사하려고?!
내가 보기엔 특별히 조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심각한 문제라니까? 침입자가 누군지 반드시 밝혀내야 해.
모두가 아무나 멋대로 지휘관의 방에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기지내의 기강이 해이해질 거야.
아... 그래, 그럼 부탁할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않겠다고 약속해 줄래? 조사해봤는데도 못 밝혀내겠으면 그냥 내버려둬.
기지의 감시 시스템도 업데이트됐고 보안 시스템도 곧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니까, 권한 관리가 훨씬 엄격해질 거야.
알았어, 충고 고마워.
나 진심이야. 절대 무리하지 마, 알았지?
흐아암... 그럼 잘 자...
음... 여기까진 문제 없어. 그 후에 의심 가는 인형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다 꽝이었고, 지휘관은...
...맞아, 카라비너가 지휘관이 실은 정체를 아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지만 결국 누군진 알아내지 못했어.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 다음엔...
좋아요! 주사위는 진작에 던져졌으니 지금부터 파티의 뒷풀이를 시작할까요 여러분!
거창한 말 이런 데다 남용하지 마...
그리고 뒷풀이라니? 왜 수사관인 나까지 입으라는 거야?
그야 당연히,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죠!
이름하여 "지휘관님 짝 찾기 대작전"!
난 빠져도 되지?
이렇게 많은 웨딩드레스는 다 어디서 난 거야?
저번에 리엔필드랑 G36C가 어딜 조사하다 유령을 만나고, 전리품으로 거기 있던 온갖 웨딩드레스를 가져왔단 얘기를 들었는데... 설마 이게 그 전리품이야?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입어 줘서 함께 아름다움을 뽐내 봐요! 자아 꽃처럼 예쁜 아가씨들, 가서 마음껏 고르세요! 사이즈 안 맞으면 제가 고쳐 줄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사양할래.
에이~ 일등공신인 당신도 마땅히 자격이 있다고요!
아이 Zas 씨, 몰래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난 어울려 줄 생각 없어.
에이~그러지 말고요, 모두 함께 즐겨야 더 재밌잖아요? 아까 마카로프한테 정말 딱인 드레스도 봐 뒀어요!
...지휘관 왔다, 그만 떠들어.
지휘관님이 오셨으니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혹시 부끄러워서 그러세요?
부, 부끄럽긴 누가! 웨딩드레스야 예쁘긴 하지만, 이렇게 소꿉놀이처럼 입어도 되는 거냐고.
웨딩드레스의 의의를 존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은 그런 의식을 거치지 않아도 생겨나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예행 연습인 셈 치고 한번 입어 보세요, 언젠가는 정말로 입을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너어... 알았어, 그럼 저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입을게.
약 90분 후, 팽팽하게 긴장감이 감돌던 대화가 끝났다.
Kar98k가 돌아가자 마카로프도 뒤이어 자리를 뜨려 했지만, 카노에게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이야기 끝나면 입겠다고 했죠~? 도망치지 마세요!
치잇...
알았어, 어느 거 입으면 돼?
사실 당신한테 어울리는 게 꽤 많아서요~ 다 한번씩 입어볼래요?
갈 거야, 지금 당장 갈 거야.
아이 알았어요, 그럼 딱 이것만! 이것만 입어 보세요! 얼른 갈아입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노는 마카로프를 억지로 피팅룸으로 밀어넣었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카노, 아까 지휘관이 한 말 믿어?
그 실루엣이 카리나 씨였단 말이요?
응.
마카로프 씨는 믿나요?
믿고 싶지만, 도저히 안 믿겨.
그 게시글 보자마자 카리나한테 연락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그렇군요... 그런데도 아까 지휘관에게 반박하지 않았다니, 마카로프는 배려심이 깊네요.
카리나도 숨기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니, 아마... 그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우리"는 알아선 안 될 이유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가 이번 이벤트를 주최한 이유는 나도 알아.
다들 속으론 이해하지만, 머리로는 납득이 안 가니까.
예전만 해도 지휘관이 우리한테 뭔가를 숨기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어쩌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그 인물이 지휘관의 방에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린 전혀 모르는 걸지도 몰라.
항상 풀죽으면 재미없어요, 다시 전장에 나가기 전까진 소중한 일상을 만끽해야죠.
이렇게 예쁜 옷들도 있고, 우리 얼굴에 모난 점도 없고, 훌륭한 지휘관님까지 계시는데 얼마나 좋아요?
거짓말에도 좋은 거짓말이 있고, 누구라도 가끔 하나쯤 숨기는 일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괜히 속상해하기보단 함께 지휘관의 희한한 표정을 감상하는 게 어때요?
넌 그런 데서 정말 낙관적이구나...
적어도 카라비너 빼곤 다들 이런 식으로 넘어가도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니, 그것도 괜찮겠지.
인형과 인간은 다르니까요.
인간의 목숨은 단 한 번뿐이잖아요.
나도 알아.
지휘관은 우리보다 훨씬 신중하지, 인간은 인형처럼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으니까.
지휘관의 판단은, 분명 지휘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일 거야. 자신을 함부로 위험에 처하게 둘 사람이 아니니까.
맞아요! 그리고, 설령 진실을 밝혀내더라도 오히려 골치만 아플지도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그 실루엣의 정체는 사실 귀신이었다! 라던가...
할로윈은 아직 멀었는데?
아니면 시스템 오류였다던가...
그럼 우리 기지의 감시 시스템은 튜링 테스트도 통과할 수 있는 인정머리 있는 프로그램이란 뜻이네.
어쩌면 초능력자나 외계인일 수도요?
하아... 태클 그만 걸래.
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애써 맞장구 안 쳐 줘도 돼요!
알아, 내가 심심해할까 봐 말 받아 준 거잖아.
다 갈아입었어.
우와아, 정말 예뻐요! 지금 바로 지휘관님한테 갈까요?
지휘관님도 분명 마카로프의 자태에 입이 떡 벌어질 거예요!
전술인형이 이런 걸로 칭찬받아도 되는 걸까...
그럼요, 전술인형에게도 아름다움을 추구할 권리는 있어요. 너무 차가우면 군용 인형들이랑 무슨 차이예요?
강력하지만, 그건 죽이고 죽는 것밖에 못 하잖아요.
아름다움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평화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아이러니하네... 진정한 아름다움은 평화로운 세상에 있는데, 전쟁 속에서 뒹굴어야 눈부시고 값지게 보인다니.
아름다운 예술품도 배경이 받쳐 줘야 돋보이는 법이니까요. 자, 어서 가요!
그래서... 카노랑 함께 지휘관을 보러 갔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됐지? 무슨 대화를 들었는데... 아직, 음성 데이터가 남았을 텐데...
어휴... 그것 보세요 지휘관님,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요! 역시 다른 방에 있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디 구석진 곳에 빈 방을 마련한다던가...
진정해 카리나, 이번 건 단순한 사고야...
그런데, 왜 감시 카메라에 네 모습이 잡힌 거지? 차단했으니 안 찍힐 거라며.
분명한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휘관님께서 저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으셨기에... 달리 말하자면, 소통 부족이 원인입니다.
그날, 사전에 감시 시스템이 업데이트된다 알려 주셨거나 제가 밖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면, 사전에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내 탓이네.
그래, 그만 가도 좋... 응? 잠깐, 뭐하려고?
......
으음... 여기부터는 전혀 기억나질 않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카로프?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잘 잤니?
...아니.
내 기억에 문제가 생겼어. 데이터가 일부 손상된 모양이야.
아, 안 그래도 말해 주려던 참이야. 어젯밤 네가 내 방 앞에서 전원이 나간 채로 서 있었어. 심장이 철렁했다니까.
정비 인원이 널 봐 주고 갔는데, 지금 느낌은 어때?
전원이 나간 거였나...? 어디 부품이 고장났을지도...
그런데 지휘관, 저번 일 말인데...
...말해보렴.
난 지휘관을 믿어.
지휘관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분명 생각 없이 하진 않았을 테니까. 우리한테 안 알려 줘도 괜찮아.
하지만 이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난 그때도 지휘관의 안전을 위해 조치를 취할 거야.
그래... 알았어. 고마워 마카로프.
그 옷도 정말 잘 어울린다.
그야 물론이지, 난 항상 뛰어나니까.
웨딩드레스를 입어도 예쁘고 귀엽다고.
하하하... 그렇지.
네가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지.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야말로,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고 말겠어.
마카로프는 말없이 지휘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일과 업무 시간이 되기 전까지, 둘은 잠깐의 평온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도 전부 커튼 뒤 "누군가"의 눈에 담겼다.
그 모습도 기록으로 남겼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