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스토리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바닷가... 원래대로라면 마음이 즐거워질 풍경이지만.
햇살이 너무 눈부셔 선글라스를 쓰고도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요즘 한동안 빛을 못 보고 살긴했지, 너무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 것 때문이겠지.
그리고... 처음엔 그저 평범한 포상휴가 여행인 줄 알았는데, AK12와 AN94를 보자,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 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아, 도저히 마음 놓고 휴가를 즐길 수가 없었다.

??? 주인님!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굉장해요, 제가 금방 판 구덩이가 바닷물이 쓸고 지나가자 바로 메워졌어요!

다만 바로 옆에 눈치를 전혀 볼 줄 모르는 녀석이 있다. 말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성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릴 것 같다.

옅은 금발에 짐승 귀가 달리고, 몸에 착 달라붙는 하얀 수영복, 가슴 앞에 앳된 글씨체로 자신의 식별명을 쓴 인형.
지금 바다와 모래의 경계선에서 촐싹거리며, 자신의 새로운 발견을 큰 소리로 보고하고 있었다.

G41 좀 더-어- 커다란 구멍을 파도 똑같이 될까요? 주인님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근데, 그나저나...

지휘관 그 수영복은 어디서 난 거니? 그것도 G36에게 신청한 거니? 내가 알기론 G36이 모두에게 다른 수영복을 준비했을 텐데...

G41 아니에요.

지휘관 그럼 뭐니?

G41 간식을 사러 카리나 씨를 만났을 때, 해변에 여행 간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 그랬더니, 카리나 씨가 저번 세기말의 수영복을 주셨어요. 이것만 입으면 주인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어요.

지휘관 그 녀석이구나... 하긴 G41의 성격으론 이런 장난을 할 것 같진 않았지.
근데 내가 녀석에게 내가 이런 걸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할 인상을 준 적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G41 맞다맞다, 주인님! 같이 땅 파지 않으실래요? 더 크게 파도 바닷물이 쓸어갈 수 있는지 봐요!

지휘관 저기... G41, 난 잠깐 생각할 일이 있어서...
잠깐만 기다려줄래? 잠깐이면 되니까.

G41 네, 주인님!

방금 내가 본 대로라면... AK12는 AN94하고만 온 건가? 아니면 같이 온 사람이 더 있을까? 본부는 이 일을 아는가?
갑자기 비치발리볼로 시합하자는 건 무슨 속셈이지? 단순히 내기? 아니면 이걸로 주의를 끌 속셈인가?
잘 생각해 보자, 지금 회사는 일정이 빡빡하게 채워질 정도로 중요한 시기에 회삿돈으로 피서지로 휴가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는 건가?

철썩 철썩 철썩... 뭔가 이상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파도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고개를 돌려보자, 내 옆에서 G41이 백사장 위에서 제자리에서 탭댄스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지휘관 ... 뭐 하는 거니? 어디 문제라도 났니?

G41 네? 아니요, 주인님. 그냥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요!

지휘관 인형마저 참기 힘든 온도라면 확실히...
뜨거우면 G36에게 가보렴, 모두에게 해변 용품을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네게 맞는 샌들도 있을 거야.

G41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잠깐이면 된다고 말씀했잖아요, 전 주인님을 믿으니까, 전 걱정하지 마세요!

한순간 넋을 잃었다가 머쓱한 웃음으로 자신이 방금 함부로 꺼낸 약속을 얼버무렸다.

지휘관 계속 옆에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지? 미안, 내가 잘못했다. 이런 곳에서 햇볕 쬐며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G41 아니에요, 주인님이 내리는 명령이라면 뭐든지 충실하게 따를 거예요!
가능하다면... 주인님과 같이 놀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지휘관 흐음, 아 맞다. 그럼 마침 너에게 맡길 임무가 있는데...

G41 임무요? 무슨 임무인데요? 말해 주세요!

지휘관 그러니까, 방금 그 두 인형이...

G41 네네! 네네!

내가 고민의 원인을 설명해주자, G41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주먹으로 "G41"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G41 안심하세요, 주인님! 제게 맡겨주세요!
겁도 없이 주인님과 그리폰에 도전하는 녀석들은 제가 상대하겠어요!
시합이든 비치발리볼이든 문제없어요!

지휘관 그럼 힘내렴.
이기면 내가 제대로 포상해줄게.

G41 지휘관님의 포상이 걸린 이상 절대로 안 질 거예요!

...

지휘관 으... 머리야...

G41 죄송해요... 주인님...
설마 저 이상한 인형이 바로 공을 주인님의 얼굴에...

지휘관 걱정 마, 어차피 우리 참가인원은 제한이 없으니까...
첫 시합은 내가 먼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본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너희가 실력을 발휘할 차례야!

G41 알겠어요, 다음 경기는 제게 맡겨주세요!
주인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G41이 자신만만하게 배구장으로 나서는 뒷모습을 보자,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지휘관 (G41은 옷 입는 것조차 개념이 거의 없는 인형인데... 비치발리볼이 뭔지는 알기나 할까?)

G41 G41! 갑니다! 주인님 제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AN94 ... 아.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AK12 G41, 공을 안은 채 이동해서 그리폰 반칙.

G41 네? 왜 반칙이죠?
공을 가지고 상대를 때리는 게 아닌가요?

지휘관 (역시...)

이건 시합이라고 할 수 없었다, 시작하고 3분 동안, 거의 5초마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그리고 상대인 AN94는 무표정이었지만, 발리볼을 확실히 할 줄 알았다.

AN94 서브.

G41 어라... 전 여기 있는데... 왜 공을 아무도 없는 곳에 치는 것이죠?

AK12 그리폰팀 미스, 리벨리온 득점.

G41 미스가 뭐에요? 전 공에 안 맞았는데요?

지휘관 (이거 망했네... 어떻게 설명하지...)

두 번째 시합도 끝났다.
일방적으로 압도 당했다. G41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돌아온 G41을 보고, 나는 서둘러 위로가 될만한 말들을 뽑아냈다.

지휘관 어... 괜찮아, 넌 최선을 다했으니까...

G41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몸을 좀 풀었어요!
전장에서보다 더 실컷 뛰어놀았어요!

지휘관 어?

G41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요? 이상하죠?
비치발리볼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군요! 주인님, 돌아가면 기지에 비치발리볼 연습실 하나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지휘관 (전혀 충격받지 않은 모습이다... 오히려 엄청 즐거워 보인다.)

지휘관 그럼 이겼다고 생각하니?

G41 ...

G41 아...!
잊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주인님을... 실망시켜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지휘관 아니, 괜찮아, 괜찮아.

G41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휘관 이기고 지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야, 시합이든 싸움이든.
그래도 열심히 임했으니, 결과가 아쉬워도 보상은 해줘야지!

G41 무슨 말씀이시죠?

지휘관 가자, 모래 파러 가야지.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며?
이번에 네가 끝까지 스포츠 정신을 가지고 시합에 임한 상이라고 해줄게.

G41 주인님! 고마워요!

그 알 수 없는 리벨리온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부하를 챙겨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나도 기분을 풀고 휴가를 즐길 필요가 있다.
G41의 옆에 있으면 머릿속 잡념을 몽땅 털어버리고, 그저 동심으로 돌아가 즐겁게 놀 수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짧은 휴가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