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2000 - 겨울날 그대를 기다리며

그리폰 기지 내부.

지휘관 액세서리, 선물, 장소 섭외......같은 건 이제 다 끝났네.
그럼 이제 마실 것과 먹을 게 얼마나 준비되어있나 확인해 볼까?

주류 창고로 가는 길에 WA2000과 마주쳤다.
스프링필드가 전에 나한테 준 배정표대로라면 WA2000은 주류 창고의 관리를 맡고 있을 터이다.

WA2000 지휘관, 여긴 뭐하러 온 거야?

지휘관 스프링필드가 크리스마스 때 사용될 물자들의 준비 상황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거든.

WA2000 그럴 필요 없어......
바로 이 내가 준비하고 있으니까 만에 하나라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휘관 난 당연히 WA를 믿고 있지만 말야, 절차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둘러보고만 나올 테니, 들어가게 해줘.

WA2000 아, 알겠어.
지휘관이라고 해서 멋대로 마셔버리면 안 되는 거 알지!

......왠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WA는 어딘가 좀 이상해 보인다.

지휘관 넌 날 술고래로 보고 있는 거냐......

WA2000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알려주는 것뿐이잖아!
빠, 빨리 네 할 일이나 하러 가라고!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단 말이야!

창고 안에 있는 술들과 목록을 비교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맞지 않은 곳을 발견했다.

지휘관 WA, 목록이랑 대조해보는 중인데 샴페인 5병이 비는데?

WA2000 그게......옮기면서 실수하는 바람에 깨져버렸어.

지휘관 그럼 왜 아까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어?

WA2000 이런 사소한 그것까지 보고할 필요 없잖아?
이제 막 보충하려고 나갈 참이었는데 지휘관 네가 온 거란 말이야.

지휘관 그렇구나......
내가 방해한 것 같네. 정말로 미안해.

WA2000 흥, 문 잠가야 하니까 알았으면 빨리 가버리라고!

지휘관 그럼 사죄하는 의미로 나도 같이 갈게.
혼자서 샴페인 다섯 병을 들기는 좀 힘들잖아?

WA2000 인형한테 이런 건 깃털이나 마찬가지야!
그래도 나랑 같이 가고 싶다고 한다면야......뭐...안될 것도 없지만!

지휘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당장 출발하자.

나와 WA2000이 같이 거리를 걷고 있다.
평상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거리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들과 별달라 보일 것 없었다.
──어깨 위로 매고 있는 거대한 여행 가방을 빼면 말이다.

지휘관 WA, 너 어째서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나온 거야?

WA2000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 전술 인형들은 자기 무기를 가지고 다녀.
지휘관, 이건 상식이라고!

지휘관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안에는 네 저격용 총만 들어있는 건 아니지?
이 털들은......인형인가?

WA2000 ......함부로 만지지 마! 그, 그냥 평범한 선물일 뿐이야.

지휘관 그래, 그래......무겁지는 않고?

WA2000 신경 끄시지그래!
빨리 살 거 사고 돌아가자. 늦어서 스프링필드 언니한테 혼나게 되면 전부 다 네 탓이니까!

지휘관 예~예~. 그럼 아가씨의 명을 받들도록 하죠.

WA2000 흥......

나와 WA2000은 마트의 주류 코너에 도착해 샴페인을 카트에 집어넣었다.
이제 막 계산을 하러 갈 참이었는데, WA2000이 와인 코너에서 멈춰섰다.

지휘관 무슨 일이야, WA? 뭐 깜박하고 안 산 거라도 있어?

WA2000 ......글루바인 와인이네.
내 고향에서는 크리스마스 때 이걸 마셨거든.

지휘관 그래? 그럼 이걸로 하자.

나는 WA2000이 바라보고 있는 와인을 카트에 집어넣었다.

WA2000 지휘관, 이건 목록에 없는 건데?

지휘관 내가 한번 마셔보고 싶어서 그래.
이따가 저녁에 WA 네가 나한테 조금만 나누어주지 않겠어?

WA2000 정말이지......네가 그렇게 마셔보고 싶다면야......
썩 내키지는 않지만 같이 마셔줄 수도 있으니까!

WA는 몸을 돌려 카트를 계산대로 밀고 갔다.
그녀는 마지못해 수락한듯한 말투였지만, 난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폰 창고 안에서.
WA가 지휘관과 같이 사 온 글루바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WA2000 정말이지......일일이 손이 많이 가는 녀석들이라니까.

WA2000이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그리폰 인형 부탁할게, WA! 이건 우리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란 말이야!
이건 우리가 직접 개조한 기계 동물이야......이걸 답례로 줄 테니까, 응?

그리폰 인형 그래, 부탁할게, WA. 딱 샴페인 5병만 가져갈 테니까!

그리폰 인형 절대로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WA2000이 근처에 있는 가방 안에 인형들이 준 뇌물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지금 전대미문의 고민에 빠진 중이었다.

WA2000 어떡하지? 지휘관한테 보고해야 하나?
흥......내가 왜 그 녀석을 걱정하는 건데.
지휘관이 이런 사소한 일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쪽팔린 거잖아.

WA2000은 일어나서 글루바인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WA2000 게다가 날 하루종일 귀찮게 해대고......
뭐, 보상으로 이걸 받았지만 말이야.
그런데......언제쯤 열면 될까?
......뭐 "그때쯤" 열면 되겠지.

크리스마스이브 파티가 시작되고 나서 인형들이 벌인 자그마한 소동은 당연하다는 듯이 진압되었다.
파티 도중에 일어난 작은 소동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인형들은 환한 미소를 띄운 체 저녁 늦게까지 즐겁게 파티를 즐겼다.

WA2000 지휘관 이런 구석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내 앞에 선 WA가 들고 있는 유리잔 안에는 붉은색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지휘관 WA구나. 힘들어서 좀 쉬고 있었어.
쟤네들이랑 같이 안 마시는 거야?

WA2000 혼자 여기 앉아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같이 좀 마셔주러 온 것뿐이야.
어차피 지금 한가하잖아?

WA가 가지고 온 유리잔을 내 앞에 내려놓자, 향긋한 술 향기가 풍겨왔다.

지휘관 그래, 정말 고마워.
안에 있는 건 뭐야?

WA2000 글루바인이야.
......아침에 한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이라고.

WA2000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내 옆에 앉았다.

지휘관 메리 크리스마스, WA.

난 WA를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자신의 유리컵을 내 유리컵에 가볍게 부딪혔다.

WA2000 ......메리 크리스마스.

따뜻한 와인이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고개를 돌려 WA의 얼굴을 바라보자, WA의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