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떠난 정원Ⅰ EX
5/5 전투
우리는 다시 건물의 로비로 들어갔다.
이 어둠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헨리에타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안내했다.
그나저나, 헨리에타의 비타는 어떤 곳이었니?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이 안 난다고?
거기서 나온 지 엄청 오래됐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기도 싫어요.
애당초, 비타에서 느낀 행복을 진짜라 할 수 있을까요?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하죠?
......
허구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해져 봤자, 언젠가는 깨어나야 해요.
하지만 달콤한 꿈을 꾸다 깬 것처럼... 결국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의식하는 순간, 오히려 더 괴롭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왠지 너답지 않은 말이구나.
죠제 씨 없이 17만 시간이나 보냈으니까요. 그동안 저도 많은 걸 생각해봤어요.
네 비타에서 나온 건 그 실망감을 느끼기 싫어서니?
누구도 실망하길 원친 않죠. 다들 그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덜 괴롭게 느껴지도록 할 뿐이에요.
하지만, 전 저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싫어요. 스스로의 선택으로 후회하기 싫어요. 그래서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여태까지...
하지만 이렇게 죠제 씨가 돌아오셨잖아요!
그럼 지금까지의 기다림도 헛수고가 아니에요!
...아, 다 왔어요. 여기가 클라에스의 비타예요.
이번엔 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었음 좋겠다만...
......
다시 한번 익숙한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다만 이번에는 강렬한 빛이 쏟아지지 않아, 금방 다시 시야를 회복했다.
여기는 어느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방이었다.
책상... 무슨 사무실 같은 곳인가?
여기는 조금 눈에 익네요...
음... 아무래도 공사 내 담당관 숙소 같아요.
공사 내부라...
이 비타의 주인은 클라에스라 했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알겠어?
공사의 숙소라면 죠제 씨도 잘 아시잖아요?
너무 오래 없었다 보니 좀 헷갈리네.
......
클라에스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클라에스에 대해서도 잘 기억나지 않으시죠?
뭐... 조금은...
죠제 씨도 참...
클라에스는 아주 얌전한 의체예요. 담당관이 안 계셔서, 평소엔 임무에 나가는 일 없이 혼자서 공사에서 지내요.
그래도 저는 클라에스가 좋아요. 가끔 밭에 가서 채소 돌보는 걸 도와줄 때도 있어요.
의체인데 담당관이 없다고?
네...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에 대한 기록을 공사가 전부 말소해서, 아마 클라에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을 거예요.
클라에스의 자료를 살펴보니, 다른 의체들에 비해 기록이 확연하게 짧았다.
그 담당관에 대한 자료도 아예 몇 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라바로"란 담당관은 이 비타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겠네?
죠제 씨, 여기는 비타예요. 원한다면 누구로든 변할 수 있어요.
연산력만 충분하다면야 그렇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체가 이미 죽은 담당관과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저 소녀들을 가상 공간에서 되찾아 나온 것도, 다 이 계정의 원래 주인들과 그녀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클라에스에겐 그 관계가 단절된 상태라면, 과연 그 아이를 무사히 되찾아 나올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헨리에타는 더 말하지 않고 나를 클라에스의 숙소로 안내했다.
여기예요, 여기가 클라에스의 방이에요.
노크를 해봐도 대답이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문고리를 돌려보니 잠겨 있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간결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소박한 디자인의 침대와 선반, 그리고 구석에는 온갖 희한 책들이 꽂힌 금속제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커튼을 열어 바깥을 보니, 건물 밑이든 도로 위든 잡초가 허리까지 올 정도로 무성했다. 족히 몇 년은 방치된 것 같았다.
하지만 창가에나 책상에나 먼지가 얇게 쌓였긴 해도 방에서 쾨쾨한 곰팡내는 나지 않았다.
높은 침대 밑의 선반에도, 정기적으로 손질한 것으로 보이는 기관총이 놓여 있었다.
황폐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이 클라에스란 소녀는 자신의 방을 정성껏 관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 밖으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면, 세상의 끝인 것처럼 고요했다.
아무래도 바로 돌아올 것 같진 않은데... 어디에 있을까?
숙소에 없다면 아마 정원에서 밭을 보고 있겠죠.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숙소 건물은 무성한 잡초와 담쟁이덩굴에 완전히 삼켜져 있었다.
죠제 씨.
응?
이대로 쭉 가시면 사격장이 보일 거예요. 클라에스의 정원은 그 근처예요.
거기서라면 클라에스도, 당신이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가볼까.
네, 그러니 이제 그만 헤어져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
헨리에타?
대답이 없었다.
바깥도 안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카리나, 헨리에타가 갑자기 사라졌어.
여기에 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진 않았어?
공간의 전체적인 운행 효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인형들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과 관계 있어 보여요.
헨리에타는... 도망친 걸까요?
아니... 말하는 게 마지막으로 길을 안내해 줬으니 이만 영원히 작별이라는 투였어.
일단 지휘관님은 클라에스와 SAT8을 찾아봐 주세요, 헨리에타는 이쪽에서 추적해볼게요.
카리나와의 통신을 종료했다.
혹시나 싶어 한참을 기다려봤지만, 헨리에타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결국 체념한 나는 헨리에타가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 잡초로 뒤덮인 벽돌길을 걸었다.
얼마 안 가, 똑같이 낡을대로 낡은 건물과 그 뒤편의 사격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격장을 보니 그리폰에 입사해서 훈련을 받던 때가 저절로 떠올랐다. 비록 지금 내가 직접 총을 들 일은 별로 없지만, 역시 저런 곳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든다.
밤이라면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건물을 빙 돌아, 사격장으로 향했다.
과연, 건물과 사격장 사이의 황폐한 땅 한가운데에 생기 넘치는 꽃밭이 보였다.
그런데 잘 보니, 꽃이 심어진 반대편에 양상추와 토마토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꽃을 기르는 꽃밭이라기 보단, 겸사겸사 꽃도 심어둔 채소밭에 가까웠다.
여기가 바로 클라에스의 정원인 게 확실했다.
거기에 누구야?!
깜짝 놀란 목소리에 뒤를 보니, 소박한 옷차림의 소녀가 정원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분노를 드러냈다.
몇 번을 말했어, 날 내버려두라고!
클라에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계속하는데!
지금 그 모습도! 날 놀리려는 거야?!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쳇... 네가 또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놈들이 또 몰려오려 하잖아.
화를 내며 자기 할말만 내게 던져댄 그 소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저 멀리 달려가 버렸다.
어, 클라에스? 어디 가?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모습이 갖가지 농기구를 한아름 들고서 허둥지둥 건물에서 나왔다.
SAT8?
어라, 지휘관님? 왜 지휘관님까지 여기 계세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지휘관님은 지휘관님이시잖아요?
다행이다, 설명할 수고를 덜었어...
방금 클라에스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길래 절 찾는가 했더니...
지휘관님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나 봐요?
그건 아닐걸. 방금 처음 만났는데, 영문 모를 말만 잔뜩 쏟아내곤 사라졌어.
아... 그럼 지휘관님을 저로 착각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나랑 너를 헷갈릴 리가...
아, 걔가 자꾸 저를 못 본 척하길래 외형을 여러번 바꿔봤거든요.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요. 하지만 방금처럼 불같이 화낸 적은 없었는데...
지금 지휘관님이 빌린 외형은 누구예요?
글쎄, 아마 클라에스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지.
그런데 잠깐. 너, 여기서 외형을 바꿨다고?
네, 여긴 비타니까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게다가 이 비타는 제 마인드맵의 연산력으로 마음대로 수정할 수도 있답니다♪
지금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네...?
클라에스가 가르쳐 줬어요. 해보니까 정말 그대로 되더라고요.
비타의 이야기 속 의체가 지금 자신이 가상 공간에 있다는 걸 안다니...
사잔 설정에 관해서까지 알 줄은 몰랐는걸.
그 애는 뭐든지 아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넌 여기서 눌러앉아 걔랑 지내고 있었단 거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구조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클라에스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사이좋게 지내야죠.
어...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여기서 얼마 동안이나 있었어?
3개월 정도 됐으려나요?
비타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군...
기억나는 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접속했을 때부터 얘기해볼래?
음...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저랑 카노, 시노랑 SPAS가 레벨 2 플랫폼에서 느닷없이 이 공간으로 빨려들어서, 정신 차리고 보니 이 낡은 건물 앞이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처음엔 여기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죠.
텅 비어있었다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뜻이에요.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공백이었어요.
아, 저 채소밭만 빼고요.
제가 여기에 왔을 때, 클라에스는 혼자 밭에서 채소를 기르고 있었어요.
무엇이든 가능한 비타인데 아무것도 없었다니...
담당관이 없어서인가?
그야 저도 모르죠.
클라에스는 절 보곤 엄청 놀랐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해 줘서 한동안은 친하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목소리는 저한테 제 힘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구해 달라 부탁하면서, 텅 빈 공간이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려 줬어요.
고민되긴 했지만, 결국 도와주기로 했죠. 그래서 제 마인드맵으로 여기 있는 거 전~부 만들었답니다.
아니, 뭔지도 모르면서 주인의 동의 없이 멋대로...
무슨 치명적인 오류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치만 엄청 불쌍한 목소리였는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차피 지휘관님이 해결해 주실 거잖아요?
너도 하여간...
아무튼, 아무것도 없던 곳에 이것저것 생겨나니 당연히 클라에스는 엄청 놀라워했죠.
하지만 제가 했다고 알려 주니까 갑자기 쌀쌀맞게 굴기 시작했어요.
보기 싫은 광경이었나?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이곳의 풍경을 보면 슬픈 기억이 떠오르나 봐요.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곤 안 했어?
그야 처음엔 그랬죠. 하지만 자기 방을 보고 나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한 짓은 모두를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 말한 뒤론 다시는 저한테 말을 안 걸었어요.
그랬구나...
아 참, 다른 애들은 무사하죠?
뭐,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 네가 마지막이야.
역시 제가 짐작했던 대로군요. 저흰 전자전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이 낡은 공원에 우연찮게 빨려들었을 뿐이었어요.
혼자서 거기까지 알아냈어?
심심하니까 현상 파악도 좀 했죠~ 아무튼 요약하자면, 누군가 저희의 마인드맵의 연산력을 이용하고 있었어요.
이런 식의 가상 현실 체험 공간은 알바생 시절 많이 봤어요. 하지만 이 공간은 제가 봤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어요.
시스템 자체가 구식이라 운행 효율이 엉망이라서, 언제 붕괴돼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이 비타도 그래요, 제가 막 들어왔을 땐 어떤 최저한도의 연산력이 이 공간을 유지하는 게 느껴졌는데, 이젠 완전히 사라졌어요.
제가 여기서 나간다면, 이 클라에스뿐인 세상을 유지할 힘도 완전히 바닥나서 클라에스까지 함께 사라지고 말 거예요.
그래서 그 애도 같이 데리고 나가려고.
아...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네요.
여기서의 생활도 꽤 즐거웠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꿈 속에서 즐겁게 지낼 순 없으니까요.
클라에스도 계속 저보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지만, 본인도 여기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지?
제 마인드맵의 연산력 대부분을 그 목소리가 가져가서, 나머지만으론 이 공간에서 초래된 오류와 모순을 수정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거든요.
드디어 한계가 온 거로군...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줄기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연산에 부담이 더해지는데, 나타나선 안 될 사람까지 나타나면 부하가 곱절로 늘어나고요.
이 세계를 되도록 조용하게 만들었는데도 알고리즘의 허점이 계속해서 늘어나서, 결국 그 허점으로 인해 악성 공격 이벤트가 발생해요. 일어나야 하는데 안 일어나는 일을 시스템이 피드백하는 거죠.
지휘관님도 다른 곳에서 호전적인 적이 갑자기 주변에서 스폰되는 일을 겪으셨죠?
왜 갑자기 적이 그렇게 어디선가 튀어나오나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이야기를 다시 쓰는 건 원래 이 공간의 관리자가 할 일이지만, 기록으로 봐선 그 관리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지휘관님이 여기 나타나셔서, 이 세계의 허점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어요.
전에 제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가 다시 와선 어떻게든 수정해보겠다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했나 보네요.
그 목소리 말인데... 소녀의 목소리였니?
네, 듣기엔 되게 귀여울 것 같은 여자애의 목소리였어요.
그래... 알았다.
클라에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도 저처럼 그저 모두를 오래 괴롭게 만들 뿐이라 했어요. 모든 건 끝나야 할 때 끝나는 게 제일이라면서요.
......
SAT8은 품의 농기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당의 끝편을 바라봤다.
저 있죠, 여기가 참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고, 채소를 심어서 맛있는 요리도 만들 수 있고, 귀여운 애랑 같이 지내고 말예요.
클라에스랑 사이가 나빠지기 전엔, 이따금씩 함께 피에몬테의 호숫가로 가서 낚시도 했어요.
관찰해보니 대충 알겠더라고요, 그 아인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길 바라요. 그래야 자기 기억 속의 호숫가에서 아무 고민도 없이 조용히 있던 느낌을 재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매번 절 함께 데려가 준 걸 보면, 곁에 누가 있어 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감스럽게도 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의 조악한 대체품일 뿐이지만요.
그 애가 원하는 그 사람은,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지.
아마 그렇겠죠.
클라에스가 착한 아이인 것만은 확실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사라지기 전에, 제가 아직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동안에 그 애의 진정한 소원을 이뤄 주고 싶어요.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네? 지휘관님이 어떻게요?
대답하려단 찰나, 다급한 발소리가 나와 SAT8의 대화를 끊었다.
조금 전 저 멀리 도망쳤던 소녀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 손에는 아까 봤던 그 기관총을 들고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SAT8!
또 글리치가 나타났어!
저번보다 수가 훨씬 많아!
우와... 클라에스가 총 든 건 처음 봐.
나도 싫지만... 이번엔 정말 수가 너무 많아.
어머나...
이번엔 진짜 어렵겠는데?
SAT8이 괜히 쓸데없는 짓을 더 해서 그렇지!
이 사람 말이야?
이 사람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야.
뭐...?
적이 접근하고 있는 거지? 그럼 당장 준비하자.
우리가 수적으론 불리해도, 타이밍만 잘 맞추면 적들이 대처 못하게 기습할 수 있어.
사격은 실력보다 총을 뽑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클라에스?
......!
SAT8도 준비해, 적의 수가 만만치 않아.
넵! 제가 모두를 지킬게요!
저기, 그... 아저씨!
아저씬 누구시죠? 이 공간엔 어떻게 찾아왔나요?
헨리에타가 날 데리고 왔어.
헨리에타가...
그런 거였구나...
저놈들을 해치우고 나서, 당신께 할 말이 있어요.
......
"어떤 책을 읽으세요?"
"지금은... 채소를 기르는 법이 적힌 책을 읽고 있어. 채소 우주인이 침공해 왔을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좋은 병사가 되는 데 필요하다면, 저도 채소에 관련된 책을 읽겠어요."
......
"미끼는 달아 놓았으니, 낚싯대의 반동을 이용해서 왼손으로 가볍게 던져보거라."
"던졌습니다만..."
"그럼 앉아서 기다리면 돼."
......
"공사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 작전 이외에 힘을 사용해선 안 돼."
"이 안경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얌전한 클라에스로 있어다오. 이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명령이 아니라, 너와 나의 약속이다."
"Hai capito?"
전체 대사 보기 (152줄)
우리는 다시 건물의 로비로 들어갔다.
이 어둠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헨리에타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안내했다.
그나저나, 헨리에타의 비타는 어떤 곳이었니?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이 안 난다고?
거기서 나온 지 엄청 오래됐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기도 싫어요.
애당초, 비타에서 느낀 행복을 진짜라 할 수 있을까요?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하죠?
......
허구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해져 봤자, 언젠가는 깨어나야 해요.
하지만 달콤한 꿈을 꾸다 깬 것처럼... 결국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의식하는 순간, 오히려 더 괴롭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왠지 너답지 않은 말이구나.
죠제 씨 없이 17만 시간이나 보냈으니까요. 그동안 저도 많은 걸 생각해봤어요.
네 비타에서 나온 건 그 실망감을 느끼기 싫어서니?
누구도 실망하길 원친 않죠. 다들 그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덜 괴롭게 느껴지도록 할 뿐이에요.
하지만, 전 저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싫어요. 스스로의 선택으로 후회하기 싫어요. 그래서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여태까지...
하지만 이렇게 죠제 씨가 돌아오셨잖아요!
그럼 지금까지의 기다림도 헛수고가 아니에요!
...아, 다 왔어요. 여기가 클라에스의 비타예요.
이번엔 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었음 좋겠다만...
......
다시 한번 익숙한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다만 이번에는 강렬한 빛이 쏟아지지 않아, 금방 다시 시야를 회복했다.
여기는 어느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방이었다.
책상... 무슨 사무실 같은 곳인가?
여기는 조금 눈에 익네요...
음... 아무래도 공사 내 담당관 숙소 같아요.
공사 내부라...
이 비타의 주인은 클라에스라 했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알겠어?
공사의 숙소라면 죠제 씨도 잘 아시잖아요?
너무 오래 없었다 보니 좀 헷갈리네.
......
클라에스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클라에스에 대해서도 잘 기억나지 않으시죠?
뭐... 조금은...
죠제 씨도 참...
클라에스는 아주 얌전한 의체예요. 담당관이 안 계셔서, 평소엔 임무에 나가는 일 없이 혼자서 공사에서 지내요.
그래도 저는 클라에스가 좋아요. 가끔 밭에 가서 채소 돌보는 걸 도와줄 때도 있어요.
의체인데 담당관이 없다고?
네...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에 대한 기록을 공사가 전부 말소해서, 아마 클라에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을 거예요.
클라에스의 자료를 살펴보니, 다른 의체들에 비해 기록이 확연하게 짧았다.
그 담당관에 대한 자료도 아예 몇 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라바로"란 담당관은 이 비타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겠네?
죠제 씨, 여기는 비타예요. 원한다면 누구로든 변할 수 있어요.
연산력만 충분하다면야 그렇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체가 이미 죽은 담당관과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저 소녀들을 가상 공간에서 되찾아 나온 것도, 다 이 계정의 원래 주인들과 그녀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클라에스에겐 그 관계가 단절된 상태라면, 과연 그 아이를 무사히 되찾아 나올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헨리에타는 더 말하지 않고 나를 클라에스의 숙소로 안내했다.
여기예요, 여기가 클라에스의 방이에요.
노크를 해봐도 대답이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문고리를 돌려보니 잠겨 있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간결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소박한 디자인의 침대와 선반, 그리고 구석에는 온갖 희한 책들이 꽂힌 금속제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커튼을 열어 바깥을 보니, 건물 밑이든 도로 위든 잡초가 허리까지 올 정도로 무성했다. 족히 몇 년은 방치된 것 같았다.
하지만 창가에나 책상에나 먼지가 얇게 쌓였긴 해도 방에서 쾨쾨한 곰팡내는 나지 않았다.
높은 침대 밑의 선반에도, 정기적으로 손질한 것으로 보이는 기관총이 놓여 있었다.
황폐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이 클라에스란 소녀는 자신의 방을 정성껏 관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 밖으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면, 세상의 끝인 것처럼 고요했다.
아무래도 바로 돌아올 것 같진 않은데... 어디에 있을까?
숙소에 없다면 아마 정원에서 밭을 보고 있겠죠.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숙소 건물은 무성한 잡초와 담쟁이덩굴에 완전히 삼켜져 있었다.
죠제 씨.
응?
이대로 쭉 가시면 사격장이 보일 거예요. 클라에스의 정원은 그 근처예요.
거기서라면 클라에스도, 당신이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가볼까.
네, 그러니 이제 그만 헤어져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
헨리에타?
대답이 없었다.
바깥도 안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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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와의 통신을 종료했다.
혹시나 싶어 한참을 기다려봤지만, 헨리에타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결국 체념한 나는 헨리에타가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 잡초로 뒤덮인 벽돌길을 걸었다.
얼마 안 가, 똑같이 낡을대로 낡은 건물과 그 뒤편의 사격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격장을 보니 그리폰에 입사해서 훈련을 받던 때가 저절로 떠올랐다. 비록 지금 내가 직접 총을 들 일은 별로 없지만, 역시 저런 곳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든다.
밤이라면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건물을 빙 돌아, 사격장으로 향했다.
과연, 건물과 사격장 사이의 황폐한 땅 한가운데에 생기 넘치는 꽃밭이 보였다.
그런데 잘 보니, 꽃이 심어진 반대편에 양상추와 토마토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꽃을 기르는 꽃밭이라기 보단, 겸사겸사 꽃도 심어둔 채소밭에 가까웠다.
여기가 바로 클라에스의 정원인 게 확실했다.
거기에 누구야?!
깜짝 놀란 목소리에 뒤를 보니, 소박한 옷차림의 소녀가 정원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분노를 드러냈다.
몇 번을 말했어, 날 내버려두라고!
클라에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계속하는데!
지금 그 모습도! 날 놀리려는 거야?!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쳇... 네가 또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놈들이 또 몰려오려 하잖아.
화를 내며 자기 할말만 내게 던져댄 그 소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저 멀리 달려가 버렸다.
어, 클라에스? 어디 가?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모습이 갖가지 농기구를 한아름 들고서 허둥지둥 건물에서 나왔다.
SAT8?
어라, 지휘관님? 왜 지휘관님까지 여기 계세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지휘관님은 지휘관님이시잖아요?
다행이다, 설명할 수고를 덜었어...
방금 클라에스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길래 절 찾는가 했더니...
지휘관님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나 봐요?
그건 아닐걸. 방금 처음 만났는데, 영문 모를 말만 잔뜩 쏟아내곤 사라졌어.
아... 그럼 지휘관님을 저로 착각했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나랑 너를 헷갈릴 리가...
아, 걔가 자꾸 저를 못 본 척하길래 외형을 여러번 바꿔봤거든요.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요. 하지만 방금처럼 불같이 화낸 적은 없었는데...
지금 지휘관님이 빌린 외형은 누구예요?
글쎄, 아마 클라에스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지.
그런데 잠깐. 너, 여기서 외형을 바꿨다고?
네, 여긴 비타니까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게다가 이 비타는 제 마인드맵의 연산력으로 마음대로 수정할 수도 있답니다♪
지금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네...?
클라에스가 가르쳐 줬어요. 해보니까 정말 그대로 되더라고요.
비타의 이야기 속 의체가 지금 자신이 가상 공간에 있다는 걸 안다니...
사잔 설정에 관해서까지 알 줄은 몰랐는걸.
그 애는 뭐든지 아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넌 여기서 눌러앉아 걔랑 지내고 있었단 거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구조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클라에스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사이좋게 지내야죠.
어...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여기서 얼마 동안이나 있었어?
3개월 정도 됐으려나요?
비타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군...
기억나는 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접속했을 때부터 얘기해볼래?
음...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저랑 카노, 시노랑 SPAS가 레벨 2 플랫폼에서 느닷없이 이 공간으로 빨려들어서, 정신 차리고 보니 이 낡은 건물 앞이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처음엔 여기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죠.
텅 비어있었다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뜻이에요.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공백이었어요.
아, 저 채소밭만 빼고요.
제가 여기에 왔을 때, 클라에스는 혼자 밭에서 채소를 기르고 있었어요.
무엇이든 가능한 비타인데 아무것도 없었다니...
담당관이 없어서인가?
그야 저도 모르죠.
클라에스는 절 보곤 엄청 놀랐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해 줘서 한동안은 친하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목소리는 저한테 제 힘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구해 달라 부탁하면서, 텅 빈 공간이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려 줬어요.
고민되긴 했지만, 결국 도와주기로 했죠. 그래서 제 마인드맵으로 여기 있는 거 전~부 만들었답니다.
아니, 뭔지도 모르면서 주인의 동의 없이 멋대로...
무슨 치명적인 오류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치만 엄청 불쌍한 목소리였는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차피 지휘관님이 해결해 주실 거잖아요?
너도 하여간...
아무튼, 아무것도 없던 곳에 이것저것 생겨나니 당연히 클라에스는 엄청 놀라워했죠.
하지만 제가 했다고 알려 주니까 갑자기 쌀쌀맞게 굴기 시작했어요.
보기 싫은 광경이었나?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이곳의 풍경을 보면 슬픈 기억이 떠오르나 봐요.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곤 안 했어?
그야 처음엔 그랬죠. 하지만 자기 방을 보고 나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한 짓은 모두를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 말한 뒤론 다시는 저한테 말을 안 걸었어요.
그랬구나...
아 참, 다른 애들은 무사하죠?
뭐,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 네가 마지막이야.
역시 제가 짐작했던 대로군요. 저흰 전자전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이 낡은 공원에 우연찮게 빨려들었을 뿐이었어요.
혼자서 거기까지 알아냈어?
심심하니까 현상 파악도 좀 했죠~ 아무튼 요약하자면, 누군가 저희의 마인드맵의 연산력을 이용하고 있었어요.
이런 식의 가상 현실 체험 공간은 알바생 시절 많이 봤어요. 하지만 이 공간은 제가 봤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어요.
시스템 자체가 구식이라 운행 효율이 엉망이라서, 언제 붕괴돼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이 비타도 그래요, 제가 막 들어왔을 땐 어떤 최저한도의 연산력이 이 공간을 유지하는 게 느껴졌는데, 이젠 완전히 사라졌어요.
제가 여기서 나간다면, 이 클라에스뿐인 세상을 유지할 힘도 완전히 바닥나서 클라에스까지 함께 사라지고 말 거예요.
그래서 그 애도 같이 데리고 나가려고.
아...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네요.
여기서의 생활도 꽤 즐거웠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꿈 속에서 즐겁게 지낼 순 없으니까요.
클라에스도 계속 저보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지만, 본인도 여기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지?
제 마인드맵의 연산력 대부분을 그 목소리가 가져가서, 나머지만으론 이 공간에서 초래된 오류와 모순을 수정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거든요.
드디어 한계가 온 거로군...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줄기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연산에 부담이 더해지는데, 나타나선 안 될 사람까지 나타나면 부하가 곱절로 늘어나고요.
이 세계를 되도록 조용하게 만들었는데도 알고리즘의 허점이 계속해서 늘어나서, 결국 그 허점으로 인해 악성 공격 이벤트가 발생해요. 일어나야 하는데 안 일어나는 일을 시스템이 피드백하는 거죠.
지휘관님도 다른 곳에서 호전적인 적이 갑자기 주변에서 스폰되는 일을 겪으셨죠?
왜 갑자기 적이 그렇게 어디선가 튀어나오나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이야기를 다시 쓰는 건 원래 이 공간의 관리자가 할 일이지만, 기록으로 봐선 그 관리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지휘관님이 여기 나타나셔서, 이 세계의 허점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어요.
전에 제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가 다시 와선 어떻게든 수정해보겠다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했나 보네요.
그 목소리 말인데... 소녀의 목소리였니?
네, 듣기엔 되게 귀여울 것 같은 여자애의 목소리였어요.
그래... 알았다.
클라에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도 저처럼 그저 모두를 오래 괴롭게 만들 뿐이라 했어요. 모든 건 끝나야 할 때 끝나는 게 제일이라면서요.
......
SAT8은 품의 농기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당의 끝편을 바라봤다.
저 있죠, 여기가 참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고, 채소를 심어서 맛있는 요리도 만들 수 있고, 귀여운 애랑 같이 지내고 말예요.
클라에스랑 사이가 나빠지기 전엔, 이따금씩 함께 피에몬테의 호숫가로 가서 낚시도 했어요.
관찰해보니 대충 알겠더라고요, 그 아인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길 바라요. 그래야 자기 기억 속의 호숫가에서 아무 고민도 없이 조용히 있던 느낌을 재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매번 절 함께 데려가 준 걸 보면, 곁에 누가 있어 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감스럽게도 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의 조악한 대체품일 뿐이지만요.
그 애가 원하는 그 사람은, 아주 소중한 사람이겠지.
아마 그렇겠죠.
클라에스가 착한 아이인 것만은 확실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사라지기 전에, 제가 아직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동안에 그 애의 진정한 소원을 이뤄 주고 싶어요.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네? 지휘관님이 어떻게요?
대답하려단 찰나, 다급한 발소리가 나와 SAT8의 대화를 끊었다.
조금 전 저 멀리 도망쳤던 소녀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 손에는 아까 봤던 그 기관총을 들고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SAT8!
또 글리치가 나타났어!
저번보다 수가 훨씬 많아!
우와... 클라에스가 총 든 건 처음 봐.
나도 싫지만... 이번엔 정말 수가 너무 많아.
어머나...
이번엔 진짜 어렵겠는데?
SAT8이 괜히 쓸데없는 짓을 더 해서 그렇지!
이 사람 말이야?
이 사람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야.
뭐...?
적이 접근하고 있는 거지? 그럼 당장 준비하자.
우리가 수적으론 불리해도, 타이밍만 잘 맞추면 적들이 대처 못하게 기습할 수 있어.
사격은 실력보다 총을 뽑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클라에스?
......!
SAT8도 준비해, 적의 수가 만만치 않아.
넵! 제가 모두를 지킬게요!
저기, 그... 아저씨!
아저씬 누구시죠? 이 공간엔 어떻게 찾아왔나요?
헨리에타가 날 데리고 왔어.
헨리에타가...
그런 거였구나...
저놈들을 해치우고 나서, 당신께 할 말이 있어요.
......
"어떤 책을 읽으세요?"
"지금은... 채소를 기르는 법이 적힌 책을 읽고 있어. 채소 우주인이 침공해 왔을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좋은 병사가 되는 데 필요하다면, 저도 채소에 관련된 책을 읽겠어요."
......
"미끼는 달아 놓았으니, 낚싯대의 반동을 이용해서 왼손으로 가볍게 던져보거라."
"던졌습니다만..."
"그럼 앉아서 기다리면 돼."
......
"공사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 작전 이외에 힘을 사용해선 안 돼."
"이 안경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얌전한 클라에스로 있어다오. 이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명령이 아니라, 너와 나의 약속이다."
"Hai capi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