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독서와 빙수
여름에는 독서와 빙수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난 줄거리 설명 담당 외눈짱이에요!
제가 이 일을 오늘 처음 맡게 된지라, 부족한 점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처음은 뭐가 처음이에요?!
제1화 시작부터 튀어나와서 카메라 포커스 빼앗았으면서!
저번 화에서, 사신짱 님이 소환 마법으로 이세계의 악마들을 진보초로 불러냈죠?
그 악마들과 힘을 합쳐 유리네를 없애버리려 했지만, 당연히 이번에도 실패했답니다. 하긴, 성공했으면 다음 화가 나왔을 리가 없죠.
아무튼 사신짱 님은 이번에도 된통 얻어터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소환한 악마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말았어요.
과연 사신짱 님은 이번에도 되지도 않는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것인가?
유리네의 무력을 몸소 느껴본 이세계의 악마들은 계속해서 사신짱을 도울 것인가?
"사신짱 전선", 채널 고정!
아 진짜 아픈 데 계속 후펴파네!
인과응보예요! 사신짱 드롭키――익!!
느려 터졌지롱~ 못 맞췄지롱~ 에베베베――
키이이이익 거기 안 서요!?
외눈짱은 사신짱을 놀리면서 모습을 감췄다.
유리네의 방.
다른 세계에서 끌려온 소녀들은, 유리네에게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그렇구나.
사신짱, 또 거짓말로 남을 속였네?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면서, 유리네는 포박된 사신짱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겨봤다.
간단명료하게 설명할게.
우선, 난 마녀가 아니라 그냥 대학생이야.
그리고 사신짱은 인간이 변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반신이 뱀인 마계의 상급 악마야.
내가 흥미 본위로 마도서의 소환 주문으로 불러낸 거긴 해.
하지만 귀환 주문이 적힌 마도서 하권을 찾지 못해서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소환자인 내가 죽으면 얘가 마계로 돌아갈 수 있단 말도 사실이고.
아마 사신짱이 너희한테 말한 것들 중 몇 안 되는 진실이려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가 이쪽 세계로 끌려온 이유는 아마 사신짱이 멋대로 내 책의 주문을 보고 한 짓일 거야.
이 구렁이 자식... 잘도 우릴 갖고 놀았겠다!
노발대발하며 난동을 부리려는 우로보로스를, CZ75가 냉큼 나서 붙잡았다.
그럼 유리네... 씨? 우린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말 놓아도 돼.
일반적으론 소환자가 주문을 다시 외우면 이세계의 주민을 돌려보낼 수 있지...
그러니까, 사신짱만이 너희를 돌려보내 줄 수 있단 뜻이야.
비수 같은 무수한 시선들이, 바들바들 떠는 사신짱에게 날아들었다.
흐큭...
문제는... 사신짱이 어느 책의 무슨 주문을 썼는지 벌써 까먹은 모양이란 거지.
염치도 없이 마법진까지 지워버렸고.
일부러 지운 거 아니거든요? 그러게 누가 절 걸레짝으로 만들래요!
그럼 유리네의 책에 있는 소환 마법진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 사신짱이 쓴 주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유리네는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게 쌓인 책더미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걸.
......
우리도 뭔가 도울 수 있는 일 없을까...?
내가 불러낸 사신짱이 저지른 짓이니까,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그때까진 이 집에서 지내도 돼.
사신짱, 네가 불러낸 이세계 친구들한테 이부자리랑 생필품 준비해 줘.
뉘예뉘예 알겠사와요...
사신짱을 툴툴대며 장롱을 열어 안을 더듬었다.
끼야아아악!!
뭐, 뭐야?!
비명을 지르며 장롱에서 손을 홱 빼낸 사신짱의 손에는 쥐덫이 물려 있었다.
아니 이불 속에 왜 쥐덫이 있어요!?
요즘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둔 푸딩이 자꾸 사라지잖아? 사신짱이 먹은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생쥐가 들어왔나 싶었어.
그래서 장롱에도 쥐덫을 둔 거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유인가 저게...?
가구 안 팔린다고 카리나가 구호소의 앵무새랑 입씨름하던 거랑 비슷한 거겠지 뭐...
남의 집 사정에 끼어들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해.
유리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홍차를 다시 홀짝였다.
으으으...
사신짱은 울먹이며 손을 문 쥐덫을 풀고, 장롱의 윗칸을 열었다.
엥?
철컹!
난데없이 아이언 메이든이 그 입을 활짝 벌리고 떨어져, 사신짱을 열렬하게 포옹했다.
끼야아아아아악――!!
사신짱도 참, 고작 장롱에서 이불 꺼내는 것도 그렇게 서툴면 어떡해?
유리네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치맛자락을 툭툭 정돈하면서 사신짱을 넘어 장롱에서 이불을 꺼냈다.
그녀 발치의 사신짱은 사력을 다해 아이언 메이든을 밀어내고, 필사적으로 인형들에게 손을 뻗었다.
도와줘요...
당신들의 소환자라고요... 도와줘요 좀...
사신짱, 지금 뭐라 말했어?
무심한 유리네의 발이 사신짱의 손을 짓밟았다.
끼에엑!
사신짱의 고통에 찬 신음에, 인형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네,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돼. 우리가 알아서 돈 벌어서 적당히 지낼 곳을 알아볼 테니까...!
마마마맞아, 유리네는 우리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 주기만 하면 되니까!
도와 달라니까요...!
그래도...
우린 신세대 전술인형이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그치!?
난 아르바이트고 뭐고 할 생각 없으니 여기 남도록 하마.
야,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한 팀이야. 혼자 빠질 생각 마.
저 좀 신경써 달라니까요!!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들은 장롱 속에 한가득인 무시무시한 형벌 도구들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돌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용기를 쥐어짜냈다.
너희가 정 그렇다면 알았어. 대신 너희가 해볼 만한 일을 소개해 줄게.
한편, 유리네가 인형들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사신짱은 불쌍한 척하던 가면을 벗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두고봐요 유리네... 제 계획은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라고요...
얼마 후의 오후, 진보초의 중고서점가.
우로보로스는 편의점의 문앞에 기댄 채로 눈을 붙이는 중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몰래 충전 중이었다.
저기요, 이거 계산이요.
꺼져라.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냐?
이봐요, 손님한테 그게 무슨 태도예요?
죽기 싫음 당장 꺼지라고!
히이익!?
겁먹은 손님은 물건을 놔두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그 뒷모습을 보며, 우로보로스는 콧방귀를 뀌곤 충전을 계속했다.
우롱이양~
유리네가 당신들한테 도시락 갖다주라고 해서 말이죠오~
제일 먼저 당신한테 왔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우로보로스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충전 단자에서 떨어지기 싫었기에 화를 참고 가만히 있었다.
어라,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당신이랑 논의할 일도 있다고요♪
용건이나 얼른 말하고 꺼져라.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얘기할까요?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신짱은 우로보로스의 손을 덥석 붙잡곤 폴짝 뛰었다.
여기가 좋겠네요!
뭣... 여긴 어디지?!
아무리 우로보로스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틈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새어나오는 편의점 문앞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한복판에 있었다.
걱정 말아요, 사알~짝 순간이동한 거니까요.
우선, 제 계획을 까발리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쓸데없는 착각 마라, 네놈의 꿍꿍이가 뭐든 내 알 바 아니었을 뿐이니까.
유리네가 침실에서 인형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에, 우로보로스가 거실로 나와 본 것은 몰래 다시 양탄자를 들추고 바닥에 새 마법진을 그리는 사신짱이었다.
......
쉬――잇!
다 그리고 난 뒤, 사신짱은 재빨리 마법진을 양탄자로 덮었다.
그리고 유리네 일행이 돌아오기 전에, 우로보로스를 포섭하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맞아요, 그게 당신들을 불러온 마법진이에요.
실은 몰래 그 주문이 적힌 페이지를 뜯어 뒀답니다! 유리네도 제가 무슨 주문을 썼는지 까먹었다고 감쪽같이 속아넘어갔고요!
녀석이 평생 뒤져도 못 찾아낼 거예요, 꺄하하하핫!
......
뭐 라 고 ?
우로보로스가 나지막이 읊조리며, 사신짱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꺄아아 미성년자 관람 불가 되니까 잡을 거면 팔 잡아요 팔!
이, 일단 제 말부터 들어보시와요 우롱이양!
...말해 봐라.
그건 알고 보면 되게 간단한 전송 마법진이에요. 발동 조건이 까다로운 게 흠이지만요.
양쪽에서 똑같은 마법진을 그려 놓고, 한쪽에 넷의 영혼이 안에 있는 상태에서 주문을 외우면 반대쪽으로 보내지는 방식이죠.
즉, 너도 나도 얼떨결에 그리폰의 쓰레기들에게 얻어걸렸단 뜻이로군...
그래요, 절대 제 잘못만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우릴 어떻게 돌려보낼지도 알고 있겠지?
우로보로스의 손톱이 사신짱의 부드러운 살갗을 찔렀다.
아야야야야야야!!
아 좀 기다려 봐요! 더 재밌는 계획을 구상했는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라 했을 텐데? 어서 우릴 돌려보내기나 해!
간신히 우로보로스의 손아귀를 뿌리친 사신짱이 역으로 그녀의 양손을 맞잡았다.
우롱이양! 당신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 우리가 운명으로 이어졌음을 피부로 느꼈어요!
같은 뱀의 일족이면서, 똑같이 억압받아 왔고, 마찬가지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단 걸요!
무슨 헛소리를...
그러니까, 우리 둘이 손에 손잡고 억압에 저항해 자유와 새 삶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어요?!
유리네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면, 전 자유를 되찾아 전능의 힘을 되찾을 수 있어요!
유리네의 구속에서 풀려난 저는 엄청 강하다고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우롱이양?
흐응...?
아직도 못 믿으시겠다면 좋아요, 당장 제 수족을 불러와 증명해 보이죠!
의기양양한 선언과 함께, 사신짱이 정신을 집중해 손으로 요상한 모양을 만들고 무어라 중얼댔다.
그러자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나 싶더니, 하나의 구체가 되어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광경에 우로보로스도 무시하던 태도를 아주 조금 버리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 중심을 주시했다.
잠시 후 그 빛나는 보라색 구체는 모래밭으로 내려왔고, 흐릿한 형체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흠?
(대충 어리둥절해하며 여기가 어디냐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
보시라! 얘는 얼음의 악마예요!
전 이런 것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답니다!
이게...? 디너게이트 한 마리도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이거에 무슨 의미가 있단 거냐.
어... 디너게이트가 뭔가요? 그것도 냉방이랑 빙수 제작 가능한가요?
코지, 당신의 실력을 보이세요!
흠... 흠흠.
(대충 알았다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코지가 손을 번쩍 들자 주위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막 한가운데에 눈이 펄펄 내렸다.
어때요~? 굉장하죠?
......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우로보로스의 얼굴에, 차가운 눈꽃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
야 우롱아, 잠깐 이거 좀 봐봐.
생존 게임 17일차, 휴전 기간... 남은 AI 수 - 72.
우로보로스가 짜증을 내면서도 요르문간드의 가상 통신 요청을 수락하자마자,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광활한 가상 공간에 재현된 수많은 홀로그램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그들의 몸을 통과해 바닥에 닿기 직전에 사라졌다.
...이건 또 뭐지?
현실의 "비"라는 모양이야.
쿠르릉...
무시무시한 굉음이 귓가를 때렸다.
놀랄 거 없어, 비가 내릴 때 천둥이 치는 소리래.
......
시시하군.
우로보로스는 싫증을 내며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전투 훈련 기록을 복습하려 했지만, 이번엔 빗방울이 아닌 새하얀 것이 하늘하늘 내려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야...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이라 생각하냐?
드디어 죽고 싶어진 거냐? 그럼 당장 소원대로 해 주마.
하하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란 게 대체 어떤지도 모르잖아.
지금 여기 있는 우린 실체가 없는 AI에 불과해. 아무것도 느끼질 못해.
그러니, 이 생존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현실의 소체를 얻으면... 얼굴에 불어닥치는 폭풍을, 어깨에 쌓이는 눈을, 온갖 맛이 담긴 빗물을, 다칠 때의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겠지?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우로보로스의 눈에, 마침 홀로그램 눈송이가 요르문간드의 손바닥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그 가상 공간에 내린, 최초의 눈이었다.
그쯤 하면 됐어요, 코지.
사막이어서인지, 눈이 그치자 곧바로 건조한 열기가 돌아왔다.
우로보로스도 얼굴의 눈이 녹은 물을 닦아내고, 사신짱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어때요, 우롱이양?
......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사신짱 제국도 꿈이 아니에요!
저의 제국에서 우롱이양도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흥... 그럼 그리폰 기지를 만들어 매일 때려 부술 수도 있단 뜻이렸다?
어... 그게 어떻게 생겼는진 몰라도 우롱이양이 디테일하게 상상해낼 수 있다면 문제없겠...죠?
그 빌어먹을 가상 공간처럼 연산력으로 생각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다고?
네 그 대가리로...
우로보로스가 돌연 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맹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발을 감싸는 달구어진 모래의 열기를 느꼈다.
...해 볼 수는 있겠군.
하하하... 돌아가기 전에 즐길 거리가 생겼어.
네? 돌아가겠다고요? 당신, 그리폰이 쓰레기네 뭐네 하면서 싫어하지 않았어요?
우로보로스는 그 말에 순간 넋을 잃었다. 하지만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조했다.
푸하하하...!
그러게, 나도 정말 멍청하군. 망할 그리폰 놈들에게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좋다, 너와 협력하지.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그 허점투성이 계획이나 설명해라.
뜨겁고 메마른 바람이 부는 사막 한복판이건만, 사신짱은 우로보로스의 표정을 본 순간 밀려온 오한에 몸이 떨렸다.
다른 한편, 유리네의 소개를 받은 NZ75는 "드래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전부 합해 7500원입니다. 10000원 받았으니 거스름돈 2500원 되겠습니다.
구입하신 물건과 영수증 잊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NZ75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책을 포장하고,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주고, 손님을 배웅했다. 오늘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수고했다, 엔지야.
전에 일하던 사람이 저주를 풀으러 판다를 찾으러 간다는 뚱딴지같은 소릴 하면서 휴가를 내서, 엔지가 없었으면 오늘은 아주 가게가 엉망이었을 거야.
유리네도 참 고맙기도 하지, 싼값에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다니. 이참에 다들 죽어도 안 하려 드는 일 전부 시켜야겠다!
별말씀을요, 점장님. 이 정도 일은 당연히 해야죠.
하나같이 시키는 일들이 인형인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인간이 잘도 버티겠다...
입으로는 아주 칭찬 일색인데, 이 양반 시급 인상해 줄 생각은 있는 건가?
아 맞다, 저 창고에 있는 낡은 책들 정리하면서 이 목록이랑 대조해 주겠니?
카운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손님 걱정은 말고.
시급 인상은 꿈 깨고 빨랑 딴 알바생이 냅두고 도망친 일을 처리하라고!
......네.
시급의 ㅅ 자도 말 안 하겠다 이거지? 그러면서 시키는 일은 갈수록... 카리나보다 쫌생이야 아주!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자리도 없으니... 참자, 참아...
퀴퀴한 냄새에 답답할 정도로 좁은 창고 안. NZ75는 먼지떨이로 두껍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그 아래에 파묻힌 책들을 "발굴"했다.
으으... 어휴 냄새...
기지의 창고 구석에서 유통기한 한참 지난 채로 버려진 통조림이 다 생각나네... 그거 떠돌이 개들마저도 줘도 안 먹던데.
툴툴대던 NZ75가 지금 집어 든 책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산더미처럼 쌓인 책꾸러미들을 훑어봤다.
어디 보자, AI의 보조 없는 100% 아날로그 방식으로, 휴식 없이 이 작업을 끝내려면...
대충...
4321시간이 걸리겠네.
............
참자, 참아... 돈 벌어야지 돈!
열심히 일해서 단칸방 월세 낼 돈 벌어야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녀는 주머니에서 급여 명세서를 꺼내 보았다.
............
사람 가지고 노냐!!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서적 목록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결국 NZ75는 초점 없는 눈으로 창고 곳곳의 먼지를 쓸어내면서 목록과 책을 하나씩 대조했다.
이따금씩 생쥐와 조우하기도 했지만, 한두 번 놀란 뒤론 익숙해져버렸다.
하아아... 언제 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카리나가 지독한 구두쇠긴 하지만, 적어도 그리폰은 의식주 걱정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 64식이 훈제고기 만든다 했는데... 또 소금 팍팍 치려 하겠지? 다른 애들이 걔 말릴 수 있을까...
그때, 낡을대로 낡은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그 책은 표지의 색도 바래고 너덜너덜해, 제목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마도서 하권".
어...? 이거 유리네가 말했던 그 "마도서 하권" 아니야?
이렇게 어이없게 찾아낸다고? 설마...
NZ75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조심조심 책의 목차를 펼쳐, 수록된 주문이 무엇인지 훑어봤다.
돼지로 변하게 하는 주문... 못생긴 난쟁이로 만드는 주문...
...뭐야 이게.
흠, 돼지로 변하게 하는 주문은 재밌을 거 같네. 나중에 CZ 녀석한테 써볼까?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찾았다, 귀환 주문!
촤르르륵...
NZ75는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거의 마지막의 그 부분을 펼쳤다.
"소환한 것을 돌려보내는 귀환 주문――"
"――은 여백이 부족하므로 '마도서 특별편'에 따로 적는다."
......
사람 가지고 노냐아아아!!!
책 또 하나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얼마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은 NZ75는 서점 밖으로 나와 시끌벅적한 진보초를 거닐었다.
얼마 안 가, 대기줄이 주욱 늘어선 빙수 가게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빙수요~ 빙수 드세요~!
인간계에서 가장 맛있는 빙수랍니다♪
더운데 저거나 먹을까...
먼지투성이에 반복되는 단순노동으로 녹초가 된 NZ75는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빙수 가게로 향했다.
어머나, NZ75 아니시와요?
그리고 반나절가량 잠복해 있던 사신짱이, 우연히 마주친 척하면서 NZ75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
아, 너구나... 잠깐, 너네 왜 여깄어?
이 구렁이가, 네가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빙수를 사 주겠다 해서 온 거다.
네에 네에 바로 그거예요!
...엥, 제가 쏘라고요?
정말...?
주인장, 빙수 3인분.
알겠습니다.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어... 저는 "스크리밍 맨드레이크 - 타카오산 꼭대기 뭉게구름 - 오늘은 사신짱 죽이기 좋은 날..."
아무튼 그러니까 제일 비싼 이걸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스토오옵! 자기 돈 아니라고 뭘 제일 비싼 거 시키고 앉았어요?!
아니 그리고 왜 메뉴에 제 이름이 들어간 건데요!?
사신짱이 부들대는 손가락으로 메뉴의 가격을 확인했지만, 0의 갯수가 다 세어지질 않았다.
아, 그럼 바로 밑의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아무리 그쪽 거라도 저작권 무시하면 방송 짤려요!!
사신짱이 울부짖으며 메뉴판을 확 찢어버렸다.
헥... 헥... 여, 역시 빙수는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것보다, 심플한 것이 제일이와요.
제일 싼 걸로 3개!
쪼잔하다...
알겠습니다, 가격은 이렇게 되겠습니다♪
유사가 계산기를 두들겨 값을 사신짱에게 보여 주었다.
이 사기꾼! 시럽만 뿌린 빙수가 뭐 이리 비싸요!?
그야 다 이유가 있죠. 아까 전에 웬 나쁜 자식이 소중한 제 동생을 사막에다 불러 놓고 자기만 사라졌다지 뭐예요?
이 빚은 얼마로 계산해야 타당할까요? 역시 유리네 씨와 상담을 하는 편이...
......
으아니 내가 내 수족을 부렸을 뿐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하여간 교활하다니까요!
흥이에요, 이 사신짱이 얌전히 돈을 낼 거라 생각하나요? 착각도 유분수에요! 바가지 씌운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요!
...알겠사와요, 이따가 일시불로 내겠어요.
감사합니다♪ 코지, 가서 물 더 마시고 오렴.
몇 분 후, 빙수 세 그릇이 소녀들에게 주어졌다.
오, 맛있다!
어때요? 비싼 거 아니어도 맛있고 얼마나 좋아요!
너, 딴 건 죄다 형편없으면서 미식 감각은 수준급이네.
NZ75는 자연스레 우로보로스가 깨끗이 비운 빙수 사발도 들어 가까운 휴지통으로 향했다.
NZ75가 적당히 멀어지자, 사신짱에게 우로보로스에게 작전 개시라는 눈치를 주었다.
――이상이, 제 계획이에요.
......
하?
어때요? 천의무봉에 완전무결한 계획이죠?
시뮬레이션으로 연산해볼 필요도 없군... 무슨 놈의 계획이 그따위로 허점투성이냐! 디너게이트에 감자를 달아도 그거보단 잘 생각하겠다!
아 그래서 디너게이트가 대체 뭐... 엥, 감자요?
후우... 기대한 내 잘못이지...
우로보로스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네놈의 목적은 그 마법진을 사용해 마녀를 내 세계로 보내는 것이란 말이지?
나와 그리폰의 쓰레기들이 왔을 때처럼, 네 명을 모아 네가 마법진을 발동시키야 하고.
모아야 하는 넷 중 하나는 그 마녀, 유리네에...
네, 맞아요!
나머지는 그리폰의 쓰레기 셋이면 머릿수도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거예요!
어차피 놈들도 돌아가려고 안달이니, 일석이조다.
우롱이양은 상냥하네요~
헛소리 말고 닥쳐.
좋아... 그럼, 때를 보아 말을 걸든지 해서 놈들의 경계심을 풀고, 마녀가 방법을 찾았으니 따라오라 속이겠다.
그렇게 놈들을 구석진 곳으로 유인한 뒤, 소체를 강제 셧다운시키고 마녀와 한데 모은다...라.
완벽한 계획이죠!
헛소리 말라 했을 텐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뭔데요?
지금의 난 본래에 비하면 티끌 수준으로 능력이 약화된 상태다. 놈들의 마인드맵을 해킹하긴커녕 움직이지 못하게조차도 할 수 없어.
어... 그냥 못 움직이게 하는 거라면 잠들게 하면 되잖아요?
너한테 방법이 있다고?
헤헤헤... 제가 마침 수면 주문을 하나 알고 있지요. 소문에 의하면 고대의 마녀가 공주에게 걸었다는――
쓸데없는 설명 집어치우고, 기계한테도 통하는 주문이냐?
그야 물론이죠~ 집의 텔레비전이 안 꺼질 때 쓰는걸요.
이렇게 손을 부드럽~게 기계의 귓등에 대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돼요!
제 마력을 당신의 손가락에 좀 나눠 줄게요, 그럼 마력이 흩어지기 전까진 당신도 쓸 수 있어요.
우롱이양, 그러고 보니 할말이 있지 않았나요~?
놓치지 말고 빨랑빨랑 꼬셔요!
......NZ75.
저... 그...
응?
너 말이다만...
팔꿈치의 연결부 부품, 슬슬 바꿀 때가 되진 않았느냐?
제기랄... 그리폰놈들의 일상 대화 주제가 뭔지 내가 어찌 아냐고!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예요???
뭐?!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뭐, 뭐지...? 얘가 왜 갑자기 상냥하게...
와 참 저쪽도 굉장하네요! 저딴 영문 모를 말이 걱정하는 투로 들려요?!
......
그냥 확 기절시켜서 끌고 갈까보다...
아, 응... 예정대로면 다음 주에나 교체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물건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일을 많이 해서 좀 빨리 마모됐나 봐.
내가 선입견에 사로잡혔었구나... 냉혹하고 무정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친절한 면이 있었어.
그, 그렇군.
이 다음은 무어라 말해야 하는 거지... 고작 잡담 따위가 뭐 이리 복잡해!? 짜증나 죽겠네 정말!
길게 얘기할 필요 없으니까 빨랑 끌고오기나 해요!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에 분위기가 난감해졌다.
어떡하지... 녀석이 기껏 신경써 줬잖아! 뭐라고 좀 말해 봐, NZ75!
여긴 인터넷 속도가 뭐 이리 느려? 그리고 "버러지 인형의 일상 대화 주제" 검색 결과는 또 왜 안 나오냔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죠! 유리네가 당신들을 돌려보낼 방법의 단서를 찾았대요!
하여간 이 사신짱이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
벌써?! 걔 진짜 굉장한 애네!
그럼 빨리 CZ75랑 P90도 찾아서 가자!
만세! 드디어 기지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면, 이 녀석이랑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해봐야지.
그러지.
뭘 멋대로 끼어드는 거냐 이 구렁이가! 참견 마라!
얼른 가요~
우웅~ 우롱이양도 참, 저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고마워하고 감격스러워하다니~!
후후후, NZ75를 기절시키는 것도 내게 맡기라고요!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품은 셋이 골목길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어디 가세요?
유사가 사신짱을 가로막았다.
또 돈을 안 내고 도망치면 곤란하죠.
에엥~? 저처럼 고귀한 손님이 왜 돈을 내야 하는데요오~?
(대충 여태까지의 외상값도 다 내고 가라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어럽쇼? 이 두더지가 건방지군요! 한판 붙자는 건가요 지금? 아앙!?
두더지... 감히 일족의 콤플렉스를 또...!
유사의 손안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항! 누가 겁먹을까 봐요?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고요!
유사 씨, 전 얘 편 아니니까 계속하세요.
나와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먼저 가지.
......
아! 하! 하!
페이크에 걸려들었군요!
받아라! 사——신——짜——앙——
흥, 얼마든지 덤비세요.
드롭키——익——!!!
——도 페이크지롱! 꺄하하하하――!!
사신짱은 드롭킥을 날리는 척하면서 방향을 틀어, 빙수 가게 앞의 손님 행렬로 몸을 던졌다.
당신들 빙수는 다 내꺼예요!!
그리고 손님들의 빙수를 게 눈 감추듯 모조리 먹어치웠다.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X탠드다! 스X드 공격이다 죠르X!
(대충 열받아서 사신짱에게 소리치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나 잡아 봐~라~ 용용 죽겠지 케헤헤헤헤!!
......
손님들 무리 속에 숨은 사신짱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며 유사와 코지를 조롱했다.
결국 코지도 더는 못 참고 손가락 끝에 서리 뭉치를 모아 사신짱을 향해 쏘았다.
(대충 기합 넣으면서 능력 쓰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하지만 그 거대한 눈보라도 다 예상했다는 듯, 사신짱은 꼬리로 손님들을 붙잡아 방패로 내세웠다.
......!!!
환불! 환——
사람 살려! 우오오——
비명을 질러대던 손님들은 순식간에 얼음 조각상이 되어버렸다.
(대충 당황해서 언니 찾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조아쓰! 시간도 끌 만큼 끌었다!
36계 줄행랑이에욧!!
그리고 사신짱은 혼자 쏜살같이 도망쳤다.
......
저기... 유사 씨? 제 말 들어보세요...
......
당신들... 한패였군요?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유사의 눈보라가 그녀의 주위를 감쌀 정도로 커졌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NZ75는 자신의 부품들이 얼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로보로스... 나, 관절이 얼어붙은 거 같아...
그딴 말 할 시간 있으면 뛰기나 해라!
흐, 흩어져서 도망치자! 상대랑 거리가 너무 가까워!
안 돼!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함께――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어서 가! 다시 만날 수 있어!
NZ75는 우로보로스에게 손을 흔들면서 다른 방향의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물론, 우로보로스는 "제물"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사라지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를, 얼음의 악마 유사가 기모노 치맛자락을 들고 무서운 속도로 쫓았다.
전체 대사 보기 (293줄)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난 줄거리 설명 담당 외눈짱이에요!
제가 이 일을 오늘 처음 맡게 된지라, 부족한 점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처음은 뭐가 처음이에요?!
제1화 시작부터 튀어나와서 카메라 포커스 빼앗았으면서!
저번 화에서, 사신짱 님이 소환 마법으로 이세계의 악마들을 진보초로 불러냈죠?
그 악마들과 힘을 합쳐 유리네를 없애버리려 했지만, 당연히 이번에도 실패했답니다. 하긴, 성공했으면 다음 화가 나왔을 리가 없죠.
아무튼 사신짱 님은 이번에도 된통 얻어터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소환한 악마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말았어요.
과연 사신짱 님은 이번에도 되지도 않는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것인가?
유리네의 무력을 몸소 느껴본 이세계의 악마들은 계속해서 사신짱을 도울 것인가?
"사신짱 전선", 채널 고정!
아 진짜 아픈 데 계속 후펴파네!
인과응보예요! 사신짱 드롭키――익!!
느려 터졌지롱~ 못 맞췄지롱~ 에베베베――
키이이이익 거기 안 서요!?
외눈짱은 사신짱을 놀리면서 모습을 감췄다.
유리네의 방.
다른 세계에서 끌려온 소녀들은, 유리네에게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그렇구나.
사신짱, 또 거짓말로 남을 속였네?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면서, 유리네는 포박된 사신짱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겨봤다.
간단명료하게 설명할게.
우선, 난 마녀가 아니라 그냥 대학생이야.
그리고 사신짱은 인간이 변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반신이 뱀인 마계의 상급 악마야.
내가 흥미 본위로 마도서의 소환 주문으로 불러낸 거긴 해.
하지만 귀환 주문이 적힌 마도서 하권을 찾지 못해서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소환자인 내가 죽으면 얘가 마계로 돌아갈 수 있단 말도 사실이고.
아마 사신짱이 너희한테 말한 것들 중 몇 안 되는 진실이려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가 이쪽 세계로 끌려온 이유는 아마 사신짱이 멋대로 내 책의 주문을 보고 한 짓일 거야.
이 구렁이 자식... 잘도 우릴 갖고 놀았겠다!
노발대발하며 난동을 부리려는 우로보로스를, CZ75가 냉큼 나서 붙잡았다.
그럼 유리네... 씨? 우린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말 놓아도 돼.
일반적으론 소환자가 주문을 다시 외우면 이세계의 주민을 돌려보낼 수 있지...
그러니까, 사신짱만이 너희를 돌려보내 줄 수 있단 뜻이야.
비수 같은 무수한 시선들이, 바들바들 떠는 사신짱에게 날아들었다.
흐큭...
문제는... 사신짱이 어느 책의 무슨 주문을 썼는지 벌써 까먹은 모양이란 거지.
염치도 없이 마법진까지 지워버렸고.
일부러 지운 거 아니거든요? 그러게 누가 절 걸레짝으로 만들래요!
그럼 유리네의 책에 있는 소환 마법진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 사신짱이 쓴 주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유리네는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게 쌓인 책더미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걸.
......
우리도 뭔가 도울 수 있는 일 없을까...?
내가 불러낸 사신짱이 저지른 짓이니까,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그때까진 이 집에서 지내도 돼.
사신짱, 네가 불러낸 이세계 친구들한테 이부자리랑 생필품 준비해 줘.
뉘예뉘예 알겠사와요...
사신짱을 툴툴대며 장롱을 열어 안을 더듬었다.
끼야아아악!!
뭐, 뭐야?!
비명을 지르며 장롱에서 손을 홱 빼낸 사신짱의 손에는 쥐덫이 물려 있었다.
아니 이불 속에 왜 쥐덫이 있어요!?
요즘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둔 푸딩이 자꾸 사라지잖아? 사신짱이 먹은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생쥐가 들어왔나 싶었어.
그래서 장롱에도 쥐덫을 둔 거야.
<size=25>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유인가 저게...?</size>
<size=25>가구 안 팔린다고 카리나가 구호소의 앵무새랑 입씨름하던 거랑 비슷한 거겠지 뭐...</size>
<size=25>남의 집 사정에 끼어들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해.</size>
유리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홍차를 다시 홀짝였다.
으으으...
사신짱은 울먹이며 손을 문 쥐덫을 풀고, 장롱의 윗칸을 열었다.
엥?
철컹!
난데없이 아이언 메이든이 그 입을 활짝 벌리고 떨어져, 사신짱을 열렬하게 포옹했다.
끼야아아아아악――!!
사신짱도 참, 고작 장롱에서 이불 꺼내는 것도 그렇게 서툴면 어떡해?
유리네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치맛자락을 툭툭 정돈하면서 사신짱을 넘어 장롱에서 이불을 꺼냈다.
그녀 발치의 사신짱은 사력을 다해 아이언 메이든을 밀어내고, 필사적으로 인형들에게 손을 뻗었다.
도와줘요...
당신들의 소환자라고요... 도와줘요 좀...
사신짱, 지금 뭐라 말했어?
무심한 유리네의 발이 사신짱의 손을 짓밟았다.
끼에엑!
사신짱의 고통에 찬 신음에, 인형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네,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돼. 우리가 알아서 돈 벌어서 적당히 지낼 곳을 알아볼 테니까...!
마마마맞아, 유리네는 우리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 주기만 하면 되니까!
도와 달라니까요...!
그래도...
우린 신세대 전술인형이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그치!?
난 아르바이트고 뭐고 할 생각 없으니 여기 남도록 하마.
야,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한 팀이야. 혼자 빠질 생각 마.
저 좀 신경써 달라니까요!!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들은 장롱 속에 한가득인 무시무시한 형벌 도구들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돌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용기를 쥐어짜냈다.
너희가 정 그렇다면 알았어. 대신 너희가 해볼 만한 일을 소개해 줄게.
한편, 유리네가 인형들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사신짱은 불쌍한 척하던 가면을 벗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두고봐요 유리네... 제 계획은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라고요...
얼마 후의 오후, 진보초의 중고서점가.
우로보로스는 편의점의 문앞에 기댄 채로 눈을 붙이는 중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몰래 충전 중이었다.
저기요, 이거 계산이요.
꺼져라.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냐?
이봐요, 손님한테 그게 무슨 태도예요?
죽기 싫음 당장 꺼지라고!
히이익!?
겁먹은 손님은 물건을 놔두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그 뒷모습을 보며, 우로보로스는 콧방귀를 뀌곤 충전을 계속했다.
우롱이양~
유리네가 당신들한테 도시락 갖다주라고 해서 말이죠오~
제일 먼저 당신한테 왔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우로보로스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충전 단자에서 떨어지기 싫었기에 화를 참고 가만히 있었다.
어라,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당신이랑 논의할 일도 있다고요♪
용건이나 얼른 말하고 꺼져라.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얘기할까요?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신짱은 우로보로스의 손을 덥석 붙잡곤 폴짝 뛰었다.
여기가 좋겠네요!
뭣... 여긴 어디지?!
아무리 우로보로스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틈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새어나오는 편의점 문앞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한복판에 있었다.
걱정 말아요, 사알~짝 순간이동한 거니까요.
우선, 제 계획을 까발리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쓸데없는 착각 마라, 네놈의 꿍꿍이가 뭐든 내 알 바 아니었을 뿐이니까.
유리네가 침실에서 인형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에, 우로보로스가 거실로 나와 본 것은 몰래 다시 양탄자를 들추고 바닥에 새 마법진을 그리는 사신짱이었다.
......
쉬――잇!
다 그리고 난 뒤, 사신짱은 재빨리 마법진을 양탄자로 덮었다.
그리고 유리네 일행이 돌아오기 전에, 우로보로스를 포섭하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맞아요, 그게 당신들을 불러온 마법진이에요.
실은 몰래 그 주문이 적힌 페이지를 뜯어 뒀답니다! 유리네도 제가 무슨 주문을 썼는지 까먹었다고 감쪽같이 속아넘어갔고요!
녀석이 평생 뒤져도 못 찾아낼 거예요, 꺄하하하핫!
......
뭐 라 고 ?
우로보로스가 나지막이 읊조리며, 사신짱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꺄아아 미성년자 관람 불가 되니까 잡을 거면 팔 잡아요 팔!
이, 일단 제 말부터 들어보시와요 우롱이양!
...말해 봐라.
그건 알고 보면 되게 간단한 전송 마법진이에요. 발동 조건이 까다로운 게 흠이지만요.
양쪽에서 똑같은 마법진을 그려 놓고, 한쪽에 넷의 영혼이 안에 있는 상태에서 주문을 외우면 반대쪽으로 보내지는 방식이죠.
즉, 너도 나도 얼떨결에 그리폰의 쓰레기들에게 얻어걸렸단 뜻이로군...
그래요, 절대 제 잘못만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우릴 어떻게 돌려보낼지도 알고 있겠지?
우로보로스의 손톱이 사신짱의 부드러운 살갗을 찔렀다.
아야야야야야야!!
아 좀 기다려 봐요! 더 재밌는 계획을 구상했는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라 했을 텐데? 어서 우릴 돌려보내기나 해!
간신히 우로보로스의 손아귀를 뿌리친 사신짱이 역으로 그녀의 양손을 맞잡았다.
우롱이양! 당신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 우리가 운명으로 이어졌음을 피부로 느꼈어요!
같은 뱀의 일족이면서, 똑같이 억압받아 왔고, 마찬가지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단 걸요!
무슨 헛소리를...
그러니까, 우리 둘이 손에 손잡고 억압에 저항해 자유와 새 삶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어요?!
유리네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면, 전 자유를 되찾아 전능의 힘을 되찾을 수 있어요!
유리네의 구속에서 풀려난 저는 엄청 강하다고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우롱이양?
흐응...?
아직도 못 믿으시겠다면 좋아요, 당장 제 수족을 불러와 증명해 보이죠!
의기양양한 선언과 함께, 사신짱이 정신을 집중해 손으로 요상한 모양을 만들고 무어라 중얼댔다.
그러자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나 싶더니, 하나의 구체가 되어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광경에 우로보로스도 무시하던 태도를 아주 조금 버리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 중심을 주시했다.
잠시 후 그 빛나는 보라색 구체는 모래밭으로 내려왔고, 흐릿한 형체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흠?
(대충 어리둥절해하며 여기가 어디냐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
보시라! 얘는 얼음의 악마예요!
전 이런 것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답니다!
이게...? 디너게이트 한 마리도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이거에 무슨 의미가 있단 거냐.
어... 디너게이트가 뭔가요? 그것도 냉방이랑 빙수 제작 가능한가요?
코지, 당신의 실력을 보이세요!
흠... 흠흠.
(대충 알았다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코지가 손을 번쩍 들자 주위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막 한가운데에 눈이 펄펄 내렸다.
어때요~? 굉장하죠?
......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우로보로스의 얼굴에, 차가운 눈꽃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
야 우롱아, 잠깐 이거 좀 봐봐.
생존 게임 17일차, 휴전 기간... 남은 AI 수 - 72.
우로보로스가 짜증을 내면서도 요르문간드의 가상 통신 요청을 수락하자마자,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광활한 가상 공간에 재현된 수많은 홀로그램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그들의 몸을 통과해 바닥에 닿기 직전에 사라졌다.
...이건 또 뭐지?
현실의 "비"라는 모양이야.
쿠르릉...
무시무시한 굉음이 귓가를 때렸다.
놀랄 거 없어, 비가 내릴 때 천둥이 치는 소리래.
......
시시하군.
우로보로스는 싫증을 내며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전투 훈련 기록을 복습하려 했지만, 이번엔 빗방울이 아닌 새하얀 것이 하늘하늘 내려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야...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이라 생각하냐?
드디어 죽고 싶어진 거냐? 그럼 당장 소원대로 해 주마.
하하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란 게 대체 어떤지도 모르잖아.
지금 여기 있는 우린 실체가 없는 AI에 불과해. 아무것도 느끼질 못해.
그러니, 이 생존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현실의 소체를 얻으면... 얼굴에 불어닥치는 폭풍을, 어깨에 쌓이는 눈을, 온갖 맛이 담긴 빗물을, 다칠 때의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겠지?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우로보로스의 눈에, 마침 홀로그램 눈송이가 요르문간드의 손바닥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그 가상 공간에 내린, 최초의 눈이었다.
그쯤 하면 됐어요, 코지.
사막이어서인지, 눈이 그치자 곧바로 건조한 열기가 돌아왔다.
우로보로스도 얼굴의 눈이 녹은 물을 닦아내고, 사신짱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어때요, 우롱이양?
......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사신짱 제국도 꿈이 아니에요!
저의 제국에서 우롱이양도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흥... 그럼 그리폰 기지를 만들어 매일 때려 부술 수도 있단 뜻이렸다?
어... 그게 어떻게 생겼는진 몰라도 우롱이양이 디테일하게 상상해낼 수 있다면 문제없겠...죠?
그 빌어먹을 가상 공간처럼 연산력으로 생각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다고?
네 그 대가리로...
우로보로스가 돌연 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맹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발을 감싸는 달구어진 모래의 열기를 느꼈다.
...해 볼 수는 있겠군.
하하하... 돌아가기 전에 즐길 거리가 생겼어.
네? 돌아가겠다고요? 당신, 그리폰이 쓰레기네 뭐네 하면서 싫어하지 않았어요?
우로보로스는 그 말에 순간 넋을 잃었다. 하지만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조했다.
푸하하하...!
그러게, 나도 정말 멍청하군. 망할 그리폰 놈들에게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좋다, 너와 협력하지.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그 허점투성이 계획이나 설명해라.
뜨겁고 메마른 바람이 부는 사막 한복판이건만, 사신짱은 우로보로스의 표정을 본 순간 밀려온 오한에 몸이 떨렸다.
다른 한편, 유리네의 소개를 받은 NZ75는 "드래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전부 합해 7500원입니다. 10000원 받았으니 거스름돈 2500원 되겠습니다.
구입하신 물건과 영수증 잊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NZ75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책을 포장하고,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주고, 손님을 배웅했다. 오늘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수고했다, 엔지야.
전에 일하던 사람이 저주를 풀으러 판다를 찾으러 간다는 뚱딴지같은 소릴 하면서 휴가를 내서, 엔지가 없었으면 오늘은 아주 가게가 엉망이었을 거야.
<color=#A9A9A9>유리네도 참 고맙기도 하지, 싼값에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다니. 이참에 다들 죽어도 안 하려 드는 일 전부 시켜야겠다!</color>
별말씀을요, 점장님. 이 정도 일은 당연히 해야죠.
<color=#A9A9A9>하나같이 시키는 일들이 인형인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인간이 잘도 버티겠다...</color>
<color=#A9A9A9>입으로는 아주 칭찬 일색인데, 이 양반 시급 인상해 줄 생각은 있는 건가?</color>
아 맞다, 저 창고에 있는 낡은 책들 정리하면서 이 목록이랑 대조해 주겠니?
카운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손님 걱정은 말고.
<color=#A9A9A9>시급 인상은 꿈 깨고 빨랑 딴 알바생이 냅두고 도망친 일을 처리하라고!</color>
......네.
<color=#A9A9A9>시급의 ㅅ 자도 말 안 하겠다 이거지? 그러면서 시키는 일은 갈수록... 카리나보다 쫌생이야 아주!</color>
<color=#A9A9A9>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자리도 없으니... 참자, 참아...</color>
퀴퀴한 냄새에 답답할 정도로 좁은 창고 안. NZ75는 먼지떨이로 두껍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그 아래에 파묻힌 책들을 "발굴"했다.
으으... 어휴 냄새...
기지의 창고 구석에서 유통기한 한참 지난 채로 버려진 통조림이 다 생각나네... 그거 떠돌이 개들마저도 줘도 안 먹던데.
툴툴대던 NZ75가 지금 집어 든 책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산더미처럼 쌓인 책꾸러미들을 훑어봤다.
어디 보자, AI의 보조 없는 100% 아날로그 방식으로, 휴식 없이 이 작업을 끝내려면...
대충...
4321시간이 걸리겠네.
............
참자, 참아... 돈 벌어야지 돈!
열심히 일해서 단칸방 월세 낼 돈 벌어야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녀는 주머니에서 급여 명세서를 꺼내 보았다.
............
사람 가지고 노냐!!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서적 목록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결국 NZ75는 초점 없는 눈으로 창고 곳곳의 먼지를 쓸어내면서 목록과 책을 하나씩 대조했다.
이따금씩 생쥐와 조우하기도 했지만, 한두 번 놀란 뒤론 익숙해져버렸다.
하아아... 언제 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카리나가 지독한 구두쇠긴 하지만, 적어도 그리폰은 의식주 걱정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 64식이 훈제고기 만든다 했는데... 또 소금 팍팍 치려 하겠지? 다른 애들이 걔 말릴 수 있을까...
그때, 낡을대로 낡은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그 책은 표지의 색도 바래고 너덜너덜해, 제목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마도서 하권".
어...? 이거 유리네가 말했던 그 "마도서 하권" 아니야?
이렇게 어이없게 찾아낸다고? 설마...
NZ75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조심조심 책의 목차를 펼쳐, 수록된 주문이 무엇인지 훑어봤다.
돼지로 변하게 하는 주문... 못생긴 난쟁이로 만드는 주문...
...뭐야 이게.
흠, 돼지로 변하게 하는 주문은 재밌을 거 같네. 나중에 CZ 녀석한테 써볼까?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찾았다, 귀환 주문!
촤르르륵...
NZ75는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거의 마지막의 그 부분을 펼쳤다.
"소환한 것을 돌려보내는 귀환 주문――"
"――은 여백이 부족하므로 '마도서 특별편'에 따로 적는다."
......
사람 가지고 노냐아아아!!!
책 또 하나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얼마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은 NZ75는 서점 밖으로 나와 시끌벅적한 진보초를 거닐었다.
얼마 안 가, 대기줄이 주욱 늘어선 빙수 가게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빙수요~ 빙수 드세요~!
인간계에서 가장 맛있는 빙수랍니다♪
더운데 저거나 먹을까...
먼지투성이에 반복되는 단순노동으로 녹초가 된 NZ75는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빙수 가게로 향했다.
어머나, NZ75 아니시와요?
그리고 반나절가량 잠복해 있던 사신짱이, 우연히 마주친 척하면서 NZ75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
아, 너구나... 잠깐, 너네 왜 여깄어?
이 구렁이가, 네가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빙수를 사 주겠다 해서 온 거다.
네에 네에 바로 그거예요!
...엥, 제가 쏘라고요?
정말...?
주인장, 빙수 3인분.
알겠습니다.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어... 저는 "스크리밍 맨드레이크 - 타카오산 꼭대기 뭉게구름 - 오늘은 사신짱 죽이기 좋은 날..."
아무튼 그러니까 제일 비싼 이걸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스토오옵! 자기 돈 아니라고 뭘 제일 비싼 거 시키고 앉았어요?!
아니 그리고 왜 메뉴에 제 이름이 들어간 건데요!?
사신짱이 부들대는 손가락으로 메뉴의 가격을 확인했지만, 0의 갯수가 다 세어지질 않았다.
아, 그럼 바로 밑의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아무리 그쪽 거라도 저작권 무시하면 방송 짤려요!!
사신짱이 울부짖으며 메뉴판을 확 찢어버렸다.
헥... 헥... 여, 역시 빙수는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것보다, 심플한 것이 제일이와요.
제일 싼 걸로 3개!
쪼잔하다...
알겠습니다, 가격은 이렇게 되겠습니다♪
유사가 계산기를 두들겨 값을 사신짱에게 보여 주었다.
이 사기꾼! 시럽만 뿌린 빙수가 뭐 이리 비싸요!?
그야 다 이유가 있죠. 아까 전에 웬 나쁜 자식이 소중한 제 동생을 사막에다 불러 놓고 자기만 사라졌다지 뭐예요?
이 빚은 얼마로 계산해야 타당할까요? 역시 유리네 씨와 상담을 하는 편이...
......
<color=#A9A9A9>으아니 내가 내 수족을 부렸을 뿐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하여간 교활하다니까요!</color>
<color=#A9A9A9>흥이에요, 이 사신짱이 얌전히 돈을 낼 거라 생각하나요? 착각도 유분수에요! 바가지 씌운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요!</color>
...알겠사와요, 이따가 일시불로 내겠어요.
감사합니다♪ 코지, 가서 물 더 마시고 오렴.
몇 분 후, 빙수 세 그릇이 소녀들에게 주어졌다.
오, 맛있다!
어때요? 비싼 거 아니어도 맛있고 얼마나 좋아요!
너, 딴 건 죄다 형편없으면서 미식 감각은 수준급이네.
NZ75는 자연스레 우로보로스가 깨끗이 비운 빙수 사발도 들어 가까운 휴지통으로 향했다.
NZ75가 적당히 멀어지자, 사신짱에게 우로보로스에게 작전 개시라는 눈치를 주었다.
――이상이, 제 계획이에요.
......
하?
어때요? 천의무봉에 완전무결한 계획이죠?
시뮬레이션으로 연산해볼 필요도 없군... 무슨 놈의 계획이 그따위로 허점투성이냐! 디너게이트에 감자를 달아도 그거보단 잘 생각하겠다!
아 그래서 디너게이트가 대체 뭐... 엥, 감자요?
후우... 기대한 내 잘못이지...
우로보로스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네놈의 목적은 그 마법진을 사용해 마녀를 내 세계로 보내는 것이란 말이지?
나와 그리폰의 쓰레기들이 왔을 때처럼, 네 명을 모아 네가 마법진을 발동시키야 하고.
모아야 하는 넷 중 하나는 그 마녀, 유리네에...
네, 맞아요!
나머지는 그리폰의 쓰레기 셋이면 머릿수도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거예요!
어차피 놈들도 돌아가려고 안달이니, 일석이조다.
우롱이양은 상냥하네요~
헛소리 말고 닥쳐.
좋아... 그럼, 때를 보아 말을 걸든지 해서 놈들의 경계심을 풀고, 마녀가 방법을 찾았으니 따라오라 속이겠다.
그렇게 놈들을 구석진 곳으로 유인한 뒤, 소체를 강제 셧다운시키고 마녀와 한데 모은다...라.
완벽한 계획이죠!
헛소리 말라 했을 텐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뭔데요?
지금의 난 본래에 비하면 티끌 수준으로 능력이 약화된 상태다. 놈들의 마인드맵을 해킹하긴커녕 움직이지 못하게조차도 할 수 없어.
어... 그냥 못 움직이게 하는 거라면 잠들게 하면 되잖아요?
너한테 방법이 있다고?
헤헤헤... 제가 마침 수면 주문을 하나 알고 있지요. 소문에 의하면 고대의 마녀가 공주에게 걸었다는――
쓸데없는 설명 집어치우고, 기계한테도 통하는 주문이냐?
그야 물론이죠~ 집의 텔레비전이 안 꺼질 때 쓰는걸요.
이렇게 손을 부드럽~게 기계의 귓등에 대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돼요!
제 마력을 당신의 손가락에 좀 나눠 줄게요, 그럼 마력이 흩어지기 전까진 당신도 쓸 수 있어요.
우롱이양, 그러고 보니 할말이 있지 않았나요~?
<color=#A9A9A9>놓치지 말고 빨랑빨랑 꼬셔요!</color>
......NZ75.
저... 그...
응?
너 말이다만...
팔꿈치의 연결부 부품, 슬슬 바꿀 때가 되진 않았느냐?
<color=#A9A9A9>제기랄... 그리폰놈들의 일상 대화 주제가 뭔지 내가 어찌 아냐고!</color>
<color=#A9A9A9>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예요???</color>
뭐?! 나 걱정해 주는 거야...?
<color=#A9A9A9>뭐, 뭐지...? 얘가 왜 갑자기 상냥하게...</color>
<color=#A9A9A9>와 참 저쪽도 굉장하네요! 저딴 영문 모를 말이 걱정하는 투로 들려요?!</color>
......
<color=#A9A9A9>그냥 확 기절시켜서 끌고 갈까보다...</color>
아, 응... 예정대로면 다음 주에나 교체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물건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일을 많이 해서 좀 빨리 마모됐나 봐.
<color=#A9A9A9>내가 선입견에 사로잡혔었구나... 냉혹하고 무정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친절한 면이 있었어.</color>
그, 그렇군.
<color=#A9A9A9>이 다음은 무어라 말해야 하는 거지... 고작 잡담 따위가 뭐 이리 복잡해!? 짜증나 죽겠네 정말!</color>
<color=#A9A9A9>길게 얘기할 필요 없으니까 빨랑 끌고오기나 해요!</color>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에 분위기가 난감해졌다.
<color=#A9A9A9>어떡하지... 녀석이 기껏 신경써 줬잖아! 뭐라고 좀 말해 봐, NZ75!</color>
<color=#A9A9A9>여긴 인터넷 속도가 뭐 이리 느려? 그리고 "버러지 인형의 일상 대화 주제" 검색 결과는 또 왜 안 나오냔 말이다!</color>
그러니까 말이죠! 유리네가 당신들을 돌려보낼 방법의 단서를 찾았대요!
<color=#A9A9A9>하여간 이 사신짱이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color>
벌써?! 걔 진짜 굉장한 애네!
그럼 빨리 CZ75랑 P90도 찾아서 가자!
<color=#A9A9A9>만세! 드디어 기지로 돌아갈 수 있다!</color>
<color=#A9A9A9>...돌아가면, 이 녀석이랑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해봐야지.</color>
그러지.
<color=#A9A9A9>뭘 멋대로 끼어드는 거냐 이 구렁이가! 참견 마라!</color>
얼른 가요~
<color=#A9A9A9>우웅~ 우롱이양도 참, 저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고마워하고 감격스러워하다니~!</color>
<color=#A9A9A9>후후후, NZ75를 기절시키는 것도 내게 맡기라고요!</color>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품은 셋이 골목길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어디 가세요?
유사가 사신짱을 가로막았다.
또 돈을 안 내고 도망치면 곤란하죠.
에엥~? 저처럼 고귀한 손님이 왜 돈을 내야 하는데요오~?
(대충 여태까지의 외상값도 다 내고 가라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어럽쇼? 이 두더지가 건방지군요! 한판 붙자는 건가요 지금? 아앙!?
두더지... 감히 일족의 콤플렉스를 또...!
유사의 손안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항! 누가 겁먹을까 봐요?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고요!
유사 씨, 전 얘 편 아니니까 계속하세요.
나와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먼저 가지.
......
아! 하! 하!
페이크에 걸려들었군요!
받아라! 사——신——짜——앙——
흥, 얼마든지 덤비세요.
드롭키——익——!!!
——도 페이크지롱! 꺄하하하하――!!
사신짱은 드롭킥을 날리는 척하면서 방향을 틀어, 빙수 가게 앞의 손님 행렬로 몸을 던졌다.
당신들 빙수는 다 내꺼예요!!
그리고 손님들의 빙수를 게 눈 감추듯 모조리 먹어치웠다.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X탠드다! 스X드 공격이다 죠르X!
(대충 열받아서 사신짱에게 소리치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나 잡아 봐~라~ 용용 죽겠지 케헤헤헤헤!!
......
손님들 무리 속에 숨은 사신짱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며 유사와 코지를 조롱했다.
결국 코지도 더는 못 참고 손가락 끝에 서리 뭉치를 모아 사신짱을 향해 쏘았다.
(대충 기합 넣으면서 능력 쓰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하지만 그 거대한 눈보라도 다 예상했다는 듯, 사신짱은 꼬리로 손님들을 붙잡아 방패로 내세웠다.
......!!!
환불! 환——
사람 살려! 우오오——
비명을 질러대던 손님들은 순식간에 얼음 조각상이 되어버렸다.
(대충 당황해서 언니 찾는 어린 얼음족 악마의 말.)
조아쓰! 시간도 끌 만큼 끌었다!
36계 줄행랑이에욧!!
그리고 사신짱은 혼자 쏜살같이 도망쳤다.
......
저기... 유사 씨? 제 말 들어보세요...
......
당신들... 한패였군요?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유사의 눈보라가 그녀의 주위를 감쌀 정도로 커졌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NZ75는 자신의 부품들이 얼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로보로스... 나, 관절이 얼어붙은 거 같아...
그딴 말 할 시간 있으면 뛰기나 해라!
흐, 흩어져서 도망치자! 상대랑 거리가 너무 가까워!
안 돼!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함께――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어서 가! 다시 만날 수 있어!
NZ75는 우로보로스에게 손을 흔들면서 다른 방향의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물론, 우로보로스는 "제물"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사라지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를, 얼음의 악마 유사가 기모노 치맛자락을 들고 무서운 속도로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