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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5 · 편극광

광원뿔좌표계 I

"바닷물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그는 마지막 심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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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심층.

예고르는 기갑을 타고 기지 깊숙이 나아갔지만, 기갑 자체의 크기와 구조 때문에 통과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다.

패러데우스가 기지 내부를 대폭 개조하지 않았다면, 예고르는 사전에 확보한 청사진을 따라 이미 최심부에 도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조금 전 철혈의 공격으로 호위 부대와 갈라진 지금, 형세는 역전되어 버렸다.

이 기갑은 비좁은 공간에서 날렵하게 움직이기가 힘들다.

그 점을 이용해 리벨리온의 전술인형들도 기갑의 사각지대에서 끈질기게 기습을 가했지만, 다행히 월등한 화력 덕분에 계속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다시 기습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인형들도 이제 심각한 손상을 입어서일지도 모른다.

콰아아아아...

그때, 위에서 엄청난 굉음이 났다.

예고르

여기는 랜드. 엠버-1,응답하라.

통신기에선 노이즈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다른 아군 부대들처럼, 침묵에 빠졌다.

예고르

남은 건 나뿐인가...

예고르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통신기를 끄고, 잠시 숨을 돌릴 겸 지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불현듯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3차 대전 당시, 한밤중 슈바르츠발트 깊은 곳에서 적과 실랑이를 벌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신 외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쥐 죽은 듯이 고요하지만...

모든 감각이 주위에 뭔가 있다고 경고하는, 바로 그 느낌.

적이 있다고, 자신을 죽이려는 적이 바로 근처에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예고르

네년이 여기 있는 건 이미 안다.

너만 해치우면, 바로 제어실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이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고르는 확신했다. 그자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안젤리아. 지금까지 자신을 끈질기게 방해한 그 여자가, 다시 한번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예고르

생쥐 같은 년...

찰칵.

복도의 마지막 조명이 꺼졌다.

드디어 안젤리아가 그의 말에 대답한 듯이.

탁, 탁, 탁.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막이 뿜어져 나왔다.

예고르

또 잔수작을 부리는군.

연막으로 모니터의 화면이 새까매져, 예고르는 적외선 화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곧바로 소이탄이 굴러와, 통로에 불을 질렀다.

열화상 화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 시야가 마비된 그 순간, 정적을 깨고 총탄이 날아와 카메라를 파괴했다.

좌측 시야를 잃은 예고르는 어쩔 수 없이 기체를 후진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후퇴하는 방향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발밑에서 폭탄이 터져 기체가 살짝 기울었지만, 아직 상황 통제는 가능했다.

보병이 휴대하는 수준의 폭탄으로는 이 기갑을 마비시킬 수 없다.

다만,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총알이 연막을 뚫고 날아와 관절 부위에 노출된 유압 펌프를 노렸다.

예고르는 부무장의 포신을 돌려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포탄을 쏘았다.

대구경 포격으로 인해, 적의 공격은 즉시 멎었다.

예고르는 조준을 계속하면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며 경계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좌측 카메라가 파괴된 탓에, 계속해서 기체를 돌려야만 했다.

바로 그때, 방금 기갑을 향한 사격이 날아든 위치에서 누군가가 박살 난 엄폐물 밖으로 나오더니, 빠르게 화력 사각지대로 달려왔다.

예고르

이쪽이냐!

예고르는 기체를 우회전해, 방금 누군가가 뛰쳐나온 위치를 향해 재차 제압 사격을 가했다.

좁은 공간에서 메아리치는 기총 소리가 멀어졌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예고르가 황급히 기체를 좌측으로 돌렸지만, 그림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기체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예고르

이 괴물 자식!

AK15

......

리벨리온에서 가장 용맹한 AK-15가, 폭탄을 쥐고서 위험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예고르는 레버를 밀어 기체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AK-15의 폭탄이 기체의 발목 관절에서 폭발했다.

파괴된 부위는 가장 중요한 기동 시스템이었다. 조종석에 붉은 비상등이 켜졌고, 고장 경고등과 사이렌이 맹렬하게 울렸다.

예고르는 사력을 다해 기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인형들에게 포격을 퍼부어 사각지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모니터는 각부의 동력 복구에 실패했다는 경고가 표시됐다.

하지만 아직 추진기는 연료가 충분하다. 출력을 높이면 거리를 벌릴 수 있다.

거리만 벌린다면, 전술인형의 허약한 무기 따위로는 이 기체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상대가 그런 기회를 줄 리 만무했다.

안젤리아

포위해!

어느샌가 조용히 기체 뒤까지 접근한 인형들이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예고르도 부무장으로 반격했지만, 베테랑인 리벨리온 인형들은 벌써 대응법을 알아냈다. 자세를 낮추고 사격이 닿지 않는 각도로 파고들면서, 예고르의 기체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예고르

어림없다!

예고르는 미사일 발사기를 수직으로 조준했다.

그리고 장전된 모든 고폭 살상 미사일을 일제히 발사했다.

발사된 미사일들은 천장에 부딪혀 폭발했고, 무수한 파편으로 변해 사방으로 쏟아졌다.

AK15

엄폐!

RPK16

어머나, 이거 큰일 났네요.

AN94

회피 집중! 조심――크윽!!

격렬한 충격을 받아내면서, 예고르는 필사적으로 기체의 균형을 유지했다.

가까이서 미사일이 폭발해 그의 기체도 폭풍에 휩쓸렸지만, 두꺼운 장갑이 고폭탄의 파편을 견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진동으로 접촉 불량이 발생한 계기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계기판은 잠깐 깜빡이다, 다시 노이즈를 내며 회복됐다.

다행히, 내부 설비의 손상은 크지 않았다.

예고르

아직 운이 다하진 않았나 보군.

연막이 걷히고, 불길도 사그라들었다.

습격한 전술인형들도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명도 돌아왔지만, 복도는 그 폭발로 인해 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졌고, 들어온 방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마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완전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고르

이 버러지들이... 덕분에 시간만 낭비했군.

이제, 남은 문제는 저들의 지휘관이 어디 있는가였다.

예고르는 겨우 이 정도로 그 여자가 죽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그 여자는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 그 여자를 죽이려면, 이보다 백 배는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고, 천 배는 더 고생해야 할 것이다.

그 여자... 안젤리아는 대체 어디에 숨었지?

퍼엉!

예고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폭발이 일어났다.

이에 기체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예고르

크윽... 뭐지!?

폭발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예고르는 조종석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상처가 깊진 않았다. 기절할 정도도 아니었다.

예고르는 정신을 붙잡고, 바로 기체의 상태를 점검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폭발로 기체의 왼다리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다. 비상시의 외발 기동법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이날을 위해, 몇 번이고 훈련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는 기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승산은 있다.

하지만, 모니터의 화면을 본 그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모니터에 비친 광경은, 두 다리를 잃은 전술인형의 모습이었다.

만약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분명 끔찍한 광경이었으리라.

하지만 저 인형의 전우가 몸으로 대신 파편을 맞아 준 덕분에, 핵심 기능이 아직 정지되지 않았다.

저 인형은 아직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는 동료에게서 건네받은 폭탄을 쥐고서, 기체의 왼쪽을 타고 올랐다.

예고르의 기체를 상대로 전멸한 리벨리온의 전술인형들 중, 유일하게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인형.

늑대들의 우두머리였다.

RPK16

그래서 인간이란 참 흥미로운 생물이라니까요.

RPK16

첫인사 선물로 나쁘진 않죠? 그럼... 나머지는 부탁할게요, 선배님.

AK12

안젤리아... 임무 완료.

콰아앙!

차가운 유언을 남기며, AK-12란 이름의 인형은 기체의 나머지 다리와 함께 불꽃에 삼켜졌다.

안젤리아

수고했다.

그 여자의 짜증 나는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예고르의 귀를 때렸다.

공개 채널에서의 통화라니, 엄청난 도발 행위다.

하지만 그 여자의 목소리보다, 예고르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이 더 신경 쓰였다.

기동 시스템과 추진기 모두 작동이 정지됐다. 기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기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 여자... 안젤리아가, 분명 자신의 조종석을 노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조종석의 덮개를 여는 순간, 총알이 날아들어 자신의 머리를 꿰뚫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저 위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두껍고 견고한 천장도 마치 수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지만, 지금은 오히려 지옥으로 내려가는 계단 같았다.

그 통로 끝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의 동료들이 먼저 들었던, 바다 괴수가 닥쳐오는 것 같은 소리.

바닷물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예고르는 안젤리아의 계획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인가. 지금 예고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패했다.

마지막 순간이 닥쳐오자,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창백한 여한만이 맴돌았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바닷물의 소리를 들으며, 품에서 가족의 사진을 꺼냈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내려질 최후의 심판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