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교량
"어쩌면 당신은 어느날 저를, 이 시간을 그리워하겠죠.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금방 다시 만날 테니까."
독일군의 회전익 수송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안젤리아는 다친 몰리도를 빈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그녀 곁에 앉았다.
회전익 엔진의 규칙적인 소음을 들으니, 격전으로 인한 피로가 쏟아졌다. 그리고 피로에 절어 하품을 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다친 덴 아직도 아파?
스쳤을 뿐이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몸의 상처보단 정신적 충격이 더 크네요...
그래?
내 눈엔 아직도 씩씩해 보이는데.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거예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난민 구역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잖아. 다 각오한 줄 알았더니만.
각오는 했지만...
설마 홉스 씨가 자독당의 간첩일 줄은 몰랐어요.
어쩐지, 주석님도 그를 항상 멀리하시더라니. 예전부터 눈치채셨던 거겠죠?
희한하네, 주석이 대강 알아낸 걸 너는 왜 몰랐어?
사실, 저도 홉스 씨도 최근에서야 주석님 밑으로 인사 조정을 받았거든요.
홉스 씨는 시 정부 쪽에서 발령받은 사람이라 평소에도 대화할 일이 적었고, 보안 업무에 문제도 없으니 딱히 트집 잡을 일도 없었어요.
그러나저러나, 오늘 조사도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네.
에이, 정말 지루한 여행이야.
며칠 간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안젤리아는 손사래를 치며 비아냥댔다.
안젤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몰리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한숨 푹푹 쉬지 마세요.
여기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분명 앞으로 진전이 생길 거예요.
지금은 그냥 푹 쉬자고요.
그래... 그렇지.
안젤리아는 대뜸 턱을 괴고 고민했다.
...무슨 생각하세요?
오늘 일 말이야, 아직 의문점들이 잔뜩 있어.
의문점이요?
내통자인 홉스 씨는 이미 잡혀갔잖아요.
울릭도 K도, 나와 손잡은 건 같은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야.
아까 자독당이 우릴 잡아가지 못한 건, 그 공통된 적이 우리가 놈들에게 넘어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
어... 패러데우스 말인가요? 자독당의 잠복 경찰들은 파월과 서로를 견제하다 공멸한 거잖아요.
글쎄. 저복사 감염증은 그 노란 가루 때문에 급속 변이를 일으켰어. 게다가 그건 우리가 식물 연구소에서 당했던 것과 증상이 매우 비슷해.
파월이 자기 능력으로 그런 걸 손에 넣었다곤 보기 힘들어.
그럼, 식물 연구소의 배후가 난민 구역의 배후와 동일 세력이란 건가요?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 적이 이미 우릴 지켜보고 있단 말씀이군요...
이따가 주석님께 같이 말씀드려요.
이렇게 된 이상 대비책을 단단히 세워 둬야겠어요.
당연히 대비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네? 어떤 거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적은 항상 우리보다 한발 앞서 준비했어.
어쩌면... 내가 중요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그러니 몰리도 양, 질문 좀 해도 되지?
안젤리아는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며 고민하는 듯한 투로 몰리도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완곡한 태도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던 몰리도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안젤리아 씨.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아는 한에서 다 말해드릴게요.
좋아. 식물 연구소에서, 너도 환각제 성분의 꽃가루를 마시고 의식을 잃었었지?
네, 그거 때문에 아직도 코가 아려요.
너도, 나도, 그 홉스도 잠시 기절했지.
그런데 지금 깨달은 게 있어. 나를 포함해, 그걸 마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과민 반응을 보였어. 바로 코피였지.
아까 전 난민촌에서도, J도 대기 중의 가루를 마시곤 코피를 흘렸어.
그런데, 넌 두 번 다 코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더라?
알레르기요? 그건 사람마다 반응이 천차만별이잖아요.
저는 운 좋게... 체질이 좀 다른가 보죠.
뭐, 그럴 수 있지.
다음은 고아원에서의 일이야.
그때 레나테가 방을 수사하던 중, 어떤 여자애가 네게 사탕을 달라 졸랐지만 없다고 거절하는 걸 봤다더군.
아, 그날은 깜빡하고 사탕을 안 챙겼거든요. 그런데 그게 왜요?
사탕이 아니라, 왜 고아원 아이들이 널 보자마자 사탕을 달라 졸랐느냐가 요점이지.
너, 전에도 그 고아원에 간 적 있어?
왜 그 아이가 네가 사탕을 주는 걸 알았지?
아아...
그 고아원이 위원회의 지원 명단에 있어서, 방문 답사한 적이 있어요.
안젤리아 씨가 부탁하셨을 때 바로 그 고아원의 원장님과 연락한 것도 그때 만나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죠.
아하, 그랬군.
그리고 사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하나 드실래요? 오늘은 잔뜩 있어요!
기분이 울적할 땐 당분 섭취가 중요하대요.
고맙게 받을게.
몰리도가 핸드백에서 사탕 봉지를 꺼내자, 안젤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 지금까지의 일을 확실하게 판단하려는 거였어.
불편했다면 사과할게.
아뇨 아뇨, 안젤리아 씨도 다 업무 때문에 그러신 거잖아요. 전혀 신경 안 써요.
괜찮으시면 업무가 아닌 일도 얼마든지 상담해드릴게요!
그래? 잘 됐다, 그 "업무가 아닌 일" 말인데,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오, 궁금한 거요?
뭔데요?
이거.
안젤리아가 내민 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몰리도의 등을 향했다.
그리고 채 반응하기 전에, 안젤리아는 몰리도의 허리띠에서 권총을 뽑았다.
권총을 빼앗은 안젤리아는 즉시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몰리도를 겨누면서, 두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난민 지역에 들어가기 전, 넌 분명 총은 못 쓴다고 했어.
그런데 아까 홉스가 널 죽이려 할 때, 이걸 뽑으려 하더군.
왜 거짓말했지?
아... 어...
죄, 죄송해요... 사실 출발하기 전 주석님께서 호신용 무기를 꼭 챙기라 하셔서...
훈련을 조금 받긴 했지만, 여전히 서툴러요...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아서,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호오, 그래...?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초, 총도 저리 치워 주세요... 무섭다고요...!
논리는 빈틈없지만, 연기력이 꽝이야.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그런 눈빛 못 내.
안젤리아 씨, 농담하지 마세요!
저 진짜 화낼 거예요!?
화내기 전에 그 사탕이나 드셔.
보나마나 네 감정을 진정시키는 화학 성분이 잔뜩이겠지?
이건 그냥 흔한 사탕이에요!
누명 씌우는 거 그만하세요, 안젤리아 씨!
정 그러시면, 수송기도 곧 주석님이 지정하신 접선 장소에 도착하니까 그때 가서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가서 제 신분 조사 마음껏 해보세요, 결국엔 제가 결백하단 것만 입증될 테니까요!
그래? 그거 꽤 기대되는——
하지만 안젤리아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하단 표정이던 몰리도의 눈빛이 돌변했다.
몰리도는 순식간에 안젤리아에게 달려들어, 왼손을 비정상적인 각도로 휘둘러 자신을 향한 총구를 쳐냈다.
기습에 손등을 맞은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겨, 하마터면 반동으로 권총을 놓칠 뻔했다.
발사된 총탄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몰리도 뒤의 기내벽에 박혔다.
윽!?
상대의 뛰어난 근접 전투 실력에 놀란 안젤리아는 자세를 바로잡고, 왼손으로 자신의 권총도 뽑아 몰리도의 가슴팍을 향해 쏘았다.
하지만 저 "수행 비서"의 움직임은 안젤리아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총성이 터지는 동시에, 인간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반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회피에 총알은 그녀의 어깨만 스친 것이 다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킨 비서 아가씨는, 얼굴에 그 다정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살의로 가득찬 차가운 눈빛과 기괴한 웃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
일말의 주저 없이 동료의 급소를 쏘다니, 정말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네요.
하하... 살짝 겁만 줄 셈이었는데, 바로 정체를 드러내셨군.
그 반응 속도... 너, 인형이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루치아는 물론 에르빈마저도 이상한 점을 전혀 찾지 못했어. 그럼, 신형 니토렷다?
어느 쪽이든, 절 아주 깔보는 추측이군요.
난민 구역에서 그렇게 끌고 다녔는데, 아무리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네 심박수는 항상 일정했어.
그 난민 구역에 나타난 변이체도 네가 꾸민 짓이지?
자독당 놈들은 눈치도 없이 날 잡으려 하니까, 하는 김에 해치운 거고.
홉스든 자독당이든, 그런 얼간이들은 그저 이용할 가치밖에 없는 장기말에 불과해요.
그래도... 네, 당신 말이 맞아요. 제 목표는 처음부터 당신이었답니다, 안젤리아.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난민 구역을 들쑤시며 생사고락을 함께했잖아요? 저한테 완전히 경계심을 푼 줄 알았는데요.
하, 생사고락이랜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야.
패러데우스의 사이비 자식이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몇 분 못 갈 거예요.
흥... 이 비행기도 너처럼 문제가 있구만.
이제 눈치채봤자 늦었어요. 곧 목적지에 도착해요.
기지에 도착하면, 방금처럼 편히 앉아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도록 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아버님이 알고 싶어하시는 모든 걸 토해낼 때까지.
그 전에 널 해치우면 되겠군.
좁은 공간에 살의가 가득찼다. 잠깐의 대치 후, 안젤리아가 먼저 정적을 깨며 움직였다.
상대가 패러데우스의 작품임을 알았으니 봐줄 필요도 없었다. 안젤리아는 이번엔 바로 머리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몰리도는 다시 한번 섬광 같은 속도로 머리를 숙여 피하는 동시에 안젤리아에게 돌진했다.
물론, 안젤리아도 수없이 훈련한 대로 곧장 가슴팍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몰리도는 날아오는 총탄을 오른팔로 막으면서 핸드백을 던졌다.
팔에 핸드백을 맞은 안젤리아는 약간 주춤했다. 그 찰나의 빈틈에, 몰리도는 거리를 완전히 좁히고 날렵한 발차기로 안젤리아의 손에서 권총을 쳐냈다.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안젤리아의 코앞까지 접근한 몰리도는 그녀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왼발을 높이 들어 안젤리아의 목을 거는 동시에, 두 손으로 안젤리아의 왼팔을 잡아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리면서 암바를 걸었다.
왼손을 붙잡힌 안젤리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몰리도의 힘은 평범한 여성의 것이 아니었다.
점점 왼어깨가 탈골할 듯이 아파왔다.
그만 항복하세요, 안젤리아! 저희와 함께해요!
낡은 체제의 썩어 빠진 권력자들에게 굽신대지 말고, 저희 패러데우스와 함께 인류를 올바른 미래로 인도해요!
그 미래라는 게 사람을 돌연변이 괴물로 만드는 거냐?!
다 필요한 희생이랍니다!
승리를 확신한 몰리도는 조금 방심하고 말았다.
안젤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군용 비수를 뽑아 왼손을 내리찍어 의수를 몸에서 떼어냈다.
갑자기 제압을 잃은 몰리도는 번뜩이는 칼날에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허리에 남은 상처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안젤리아의 공격이 통했음을 증명했다.
칫... 잔머리가 참 대단하다니까요.
반쯤 쇳덩어리는 아닌 것 모양이네, 니토 아가씨.
너넨 대체 어디까지 인체인지 항상 궁금했거든.
전 니토가 아니에요, 완전한 인간이죠.
단지, 당신보다 훨씬 월등할 뿐이지만요.
참 익숙한 단어네. 그 자독당 민족주의자들도 한 수 접어야겠는걸.
아무튼, 신형 니토인 건 틀림없단 거지?
안젤리아는 자세를 잡고, 비수를 단단히 쥐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정말 저를 화나게 하셔야겠어요? 그래서 무슨 소용인가요?
제가 무엇이든, 당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요.
그리고 이 고공에서 어디로 도망치실 건가요?!
몰리도는 말도 다 안 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안젤리아는 이제 오른팔만으로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격차라... 확실히, 우리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지.
하지만 그건 힘의 차이가 아니야. 넌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럼 증명해 보세요, 안젤리아.
당신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래요? 지금 당신이 뭘 할 수 있죠?
흥...
루치아!!
안젤리아의 고함에, 아주 익숙한 모습이 비행기의 해치를 열고 나타났다. 그 얼굴엔, 역시 아주 익숙한 살살 약올리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본 몰리도는 아연실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야~ 안젤리아가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인걸?
내가 도와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이번 공적은 양보해 주려 했더니만~
너 어떻게... 대체 어느 사이에...
...안젤리아, 절 속였군요?
다 이긴 줄 알고 방심했지?
일단 창밖부터 봐, 몰리도.
......!!!
안젤리아의 말에 확 고개를 돌려 수송기의 유리창 밖을 본 몰리도는, 다시 한번 아연실색했다.
수송기는 그녀의 계획대로 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마그데부르크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그곳은 주독 소련군의 군사 기지였다.
언제부터... 그물을 던졌나요?
너희같이 스스로 잘난 줄 아는 녀석들이 덫에 안 걸릴까 봐, 우리보고 모두 당한 척하게 했어.
그리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 네가 부른 수송기도 착륙하자마자 먼저 몰래 올라탔어.
파일럿이랑도 잘 "협상"했어.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쿨쿨 자는 중이야.
칫... 자독당 쓰레기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건 제 실책이네요.
너희든 그놈들이든, 리벨리온의 어느 누구도 해치우지 못했지.
난 그냥 나 자신을 미끼 삼아 월척이 낚이길 기다린 거야. 그런데 정말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물밖으로 튀어나오더라? 너는 물론, 그 홉스도 말이야.
날 따라 난민 구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의 패배였다, 몰리도.
제 패배라고요? 과연 그럴까요, 안젤리아?
당신의 늑대 무리는 확실히 강하지만, 저에겐 별반 차이 없어요.
AK-12는 신분을 밝힌 패러데우스에게 총구를 겨누고, 흉악하게 부릅뜬 보라색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봤다.
허튼짓 마.
안젤리아는 굼떠서 너랑 못 놀아 주겠지만, 이 군용급 인형과 자동소총은 아니거든. .545 철갑탄으로 아주 잘 어울려 줄게.
그리고 안젤리아랑 달리 난 너랑 별로 친해지지도 않았으니까, 실수로 널 벌집으로 만들어도 용서해 줘.
날 겁주는 건 상관없지만...
비행 중인 기내에서 함부로 총을 갈겼다간 모두 죽을걸?
네 주인이 추락사해도 괜찮겠어?
첫째, 안젤리아는 내 주인이 아니야. 그냥 지휘자일 뿐이지.
둘째, 미리 낙하산도 준비해 놨어. 몇개 모자라긴 하지만 말이야.
......
신경전을 벌이며, 몰리도는 발을 아주 천천히 뒤로 옮겼다.
그리고 AK-12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채기 전에, 바로 몸을 돌려 옆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AK-12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더 빨랐다.
발사된 철갑탄은 몰리도의 다리를 깔끔하게 관통했다.
피가 흩뿌려졌고, 몰리도의 움직임도 멈칫했다.
타앙!
그리고 총성이 또 다시 터졌다.
내장갑 때문에, 이번엔 철갑탄은 관통하지 않고 몰리도의 어깨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격통에 몰리도는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뿜으며 옷을 물들여 가는 어깨를 감싸면서, 몰리도는 괴로운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AK-12의 안젤리아도, 권총을 쥐고서 차가운 눈빛으로 몰리도를 주시했다.
그만 포기해. 네게 이제 승산은 없어.
훨씬 월등한 인간이니,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이 정도 거리면... 윽... 철갑탄도 제게 유효타를 줄 수 있군요...
정말 유용한 데이터를 얻었어요...
몰리도는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포기한 기색이 없는 몰리도의 거동에, 안젤리아는 총을 들어 머리를 조준했다.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착륙하면 네 입에서 윌리엄에 관한 정보를 끄집어내야 하니까.
——꿈 깨세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몰리도가 갑자기 기내의 좌석을 덥석 잡더니, 이것저것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콰직!
뭐야!?
그리고 굉음과 함께 뜯어낸 좌석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안젤리아가 바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날아온 의자에 막히고 말았다.
또 다시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몰리도가 수송기의 문을 손으로 잡아뜯은 것이었다.
제기랄! 꽉 붙잡아!
몰리도를 저지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측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직감적인 행동이 그녀를 구했다.
한편, 역시 손잡이를 잡고 버틴 몰리도는 좌석 하나를 더 뜯어내 수송기의 엔진을 향해 던졌다.
한쪽 프로펠러가 망가진 수송기는 그대로 제어를 잃고 요동쳐, 기내의 모두가 균형을 잃었다.
루치아, 조종석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착륙시켜!
벌써 가는 중이야!
이 미친년, 동귀어진할 셈이냐?!
네 마음대로 둘 줄 알고!?
"네 마음대로 둘 줄 알고"요?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안젤리아!
오늘 일을 기억할 거예요! 오늘 제게 저지른 짓, 전부 갚아 주겠어요! 기대하세요, 안젤리아!
몰리도는 그 선전포고를 내뱉곤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렸다.
점점 강하하는 수송기 안에서, 안젤리아는 손잡이를 붙들고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엘베 강에 튀어오른 물보라뿐이었다.
니토가 완전히 인간 사회에 녹아들 정도가 된 건가...
그렇다면, 또 어디에 패러데우스가 침투했을까?
윌리엄의 목적은 정말 유적 가동뿐일까?
우리나라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숨어다닌 끝에 꼬리를 보이고 말았군.
놈은 분명히 이 땅에 있어. 이제부턴 내가 공격할 차례다.
두고보라고... 몰리도, 윌리엄...
머지않아 만나게 될 테니까!
......
[이중난수] - END.
J를 태운 구급차를 보낸 뒤, K는 홉스를 가둔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가고 나서야, K는 뒷좌석에 탄 인형을 흘겨봤다.
......
......
으음...
안젤리아가 그렇게 날 못 믿겠다던가?
아니, 내게 당신을 도우라고만 했다. 신경 쓰지 마라.
......
......
...담배 피나?
아니.
......아니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J가 더 간첩 같지 않아?
......
......
그래... 아무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게 너희 장기니.
......
이따가 어디 가서 뭐라도 마실까?
아니.
매우 어색한 침묵을 싣고, 트럭은 갈 길을 나아갔다.
K는 불붙인 담배를 물었지만 한 모금도 빨아들이지 않았다.
이봐, 지금 우리 이러고 있으면 마치――
전혀.
전체 대사 보기 (148줄)
독일군의 회전익 수송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안젤리아는 다친 몰리도를 빈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그녀 곁에 앉았다.
회전익 엔진의 규칙적인 소음을 들으니, 격전으로 인한 피로가 쏟아졌다. 그리고 피로에 절어 하품을 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다친 덴 아직도 아파?
스쳤을 뿐이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몸의 상처보단 정신적 충격이 더 크네요...
그래?
내 눈엔 아직도 씩씩해 보이는데.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거예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난민 구역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잖아. 다 각오한 줄 알았더니만.
각오는 했지만...
설마 홉스 씨가 자독당의 간첩일 줄은 몰랐어요.
어쩐지, 주석님도 그를 항상 멀리하시더라니. 예전부터 눈치채셨던 거겠죠?
희한하네, 주석이 대강 알아낸 걸 너는 왜 몰랐어?
사실, 저도 홉스 씨도 최근에서야 주석님 밑으로 인사 조정을 받았거든요.
홉스 씨는 시 정부 쪽에서 발령받은 사람이라 평소에도 대화할 일이 적었고, 보안 업무에 문제도 없으니 딱히 트집 잡을 일도 없었어요.
그러나저러나, 오늘 조사도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네.
에이, 정말 지루한 여행이야.
며칠 간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안젤리아는 손사래를 치며 비아냥댔다.
안젤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몰리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한숨 푹푹 쉬지 마세요.
여기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분명 앞으로 진전이 생길 거예요.
지금은 그냥 푹 쉬자고요.
그래... 그렇지.
안젤리아는 대뜸 턱을 괴고 고민했다.
...무슨 생각하세요?
오늘 일 말이야, 아직 의문점들이 잔뜩 있어.
의문점이요?
내통자인 홉스 씨는 이미 잡혀갔잖아요.
울릭도 K도, 나와 손잡은 건 같은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야.
아까 자독당이 우릴 잡아가지 못한 건, 그 공통된 적이 우리가 놈들에게 넘어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
어... 패러데우스 말인가요? 자독당의 잠복 경찰들은 파월과 서로를 견제하다 공멸한 거잖아요.
글쎄. 저복사 감염증은 그 노란 가루 때문에 급속 변이를 일으켰어. 게다가 그건 우리가 식물 연구소에서 당했던 것과 증상이 매우 비슷해.
파월이 자기 능력으로 그런 걸 손에 넣었다곤 보기 힘들어.
그럼, 식물 연구소의 배후가 난민 구역의 배후와 동일 세력이란 건가요?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 적이 이미 우릴 지켜보고 있단 말씀이군요...
이따가 주석님께 같이 말씀드려요.
이렇게 된 이상 대비책을 단단히 세워 둬야겠어요.
당연히 대비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네? 어떤 거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적은 항상 우리보다 한발 앞서 준비했어.
어쩌면... 내가 중요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그러니 몰리도 양, 질문 좀 해도 되지?
안젤리아는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며 고민하는 듯한 투로 몰리도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완곡한 태도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던 몰리도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안젤리아 씨.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아는 한에서 다 말해드릴게요.
좋아. 식물 연구소에서, 너도 환각제 성분의 꽃가루를 마시고 의식을 잃었었지?
네, 그거 때문에 아직도 코가 아려요.
너도, 나도, 그 홉스도 잠시 기절했지.
그런데 지금 깨달은 게 있어. 나를 포함해, 그걸 마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과민 반응을 보였어. 바로 코피였지.
아까 전 난민촌에서도, J도 대기 중의 가루를 마시곤 코피를 흘렸어.
그런데, 넌 두 번 다 코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더라?
알레르기요? 그건 사람마다 반응이 천차만별이잖아요.
저는 운 좋게... 체질이 좀 다른가 보죠.
뭐, 그럴 수 있지.
다음은 고아원에서의 일이야.
그때 레나테가 방을 수사하던 중, 어떤 여자애가 네게 사탕을 달라 졸랐지만 없다고 거절하는 걸 봤다더군.
아, 그날은 깜빡하고 사탕을 안 챙겼거든요. 그런데 그게 왜요?
사탕이 아니라, 왜 고아원 아이들이 널 보자마자 사탕을 달라 졸랐느냐가 요점이지.
너, 전에도 그 고아원에 간 적 있어?
왜 그 아이가 네가 사탕을 주는 걸 알았지?
아아...
그 고아원이 위원회의 지원 명단에 있어서, 방문 답사한 적이 있어요.
안젤리아 씨가 부탁하셨을 때 바로 그 고아원의 원장님과 연락한 것도 그때 만나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죠.
아하, 그랬군.
그리고 사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하나 드실래요? 오늘은 잔뜩 있어요!
기분이 울적할 땐 당분 섭취가 중요하대요.
고맙게 받을게.
몰리도가 핸드백에서 사탕 봉지를 꺼내자, 안젤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 지금까지의 일을 확실하게 판단하려는 거였어.
불편했다면 사과할게.
아뇨 아뇨, 안젤리아 씨도 다 업무 때문에 그러신 거잖아요. 전혀 신경 안 써요.
괜찮으시면 업무가 아닌 일도 얼마든지 상담해드릴게요!
그래? 잘 됐다, 그 "업무가 아닌 일" 말인데,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오, 궁금한 거요?
뭔데요?
이거.
안젤리아가 내민 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몰리도의 등을 향했다.
그리고 채 반응하기 전에, 안젤리아는 몰리도의 허리띠에서 권총을 뽑았다.
권총을 빼앗은 안젤리아는 즉시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몰리도를 겨누면서, 두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난민 지역에 들어가기 전, 넌 분명 총은 못 쓴다고 했어.
그런데 아까 홉스가 널 죽이려 할 때, 이걸 뽑으려 하더군.
왜 거짓말했지?
아... 어...
죄, 죄송해요... 사실 출발하기 전 주석님께서 호신용 무기를 꼭 챙기라 하셔서...
훈련을 조금 받긴 했지만, 여전히 서툴러요...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아서,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호오, 그래...?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초, 총도 저리 치워 주세요... 무섭다고요...!
논리는 빈틈없지만, 연기력이 꽝이야.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그런 눈빛 못 내.
안젤리아 씨, 농담하지 마세요!
저 진짜 화낼 거예요!?
화내기 전에 그 사탕이나 드셔.
보나마나 네 감정을 진정시키는 화학 성분이 잔뜩이겠지?
이건 그냥 흔한 사탕이에요!
누명 씌우는 거 그만하세요, 안젤리아 씨!
정 그러시면, 수송기도 곧 주석님이 지정하신 접선 장소에 도착하니까 그때 가서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가서 제 신분 조사 마음껏 해보세요, 결국엔 제가 결백하단 것만 입증될 테니까요!
그래? 그거 꽤 기대되는——
하지만 안젤리아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하단 표정이던 몰리도의 눈빛이 돌변했다.
몰리도는 순식간에 안젤리아에게 달려들어, 왼손을 비정상적인 각도로 휘둘러 자신을 향한 총구를 쳐냈다.
기습에 손등을 맞은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겨, 하마터면 반동으로 권총을 놓칠 뻔했다.
발사된 총탄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몰리도 뒤의 기내벽에 박혔다.
윽!?
상대의 뛰어난 근접 전투 실력에 놀란 안젤리아는 자세를 바로잡고, 왼손으로 자신의 권총도 뽑아 몰리도의 가슴팍을 향해 쏘았다.
하지만 저 "수행 비서"의 움직임은 안젤리아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총성이 터지는 동시에, 인간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반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회피에 총알은 그녀의 어깨만 스친 것이 다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킨 비서 아가씨는, 얼굴에 그 다정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살의로 가득찬 차가운 눈빛과 기괴한 웃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
일말의 주저 없이 동료의 급소를 쏘다니, 정말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네요.
하하... 살짝 겁만 줄 셈이었는데, 바로 정체를 드러내셨군.
그 반응 속도... 너, 인형이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루치아는 물론 에르빈마저도 이상한 점을 전혀 찾지 못했어. 그럼, 신형 니토렷다?
어느 쪽이든, 절 아주 깔보는 추측이군요.
난민 구역에서 그렇게 끌고 다녔는데, 아무리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네 심박수는 항상 일정했어.
그 난민 구역에 나타난 변이체도 네가 꾸민 짓이지?
자독당 놈들은 눈치도 없이 날 잡으려 하니까, 하는 김에 해치운 거고.
홉스든 자독당이든, 그런 얼간이들은 그저 이용할 가치밖에 없는 장기말에 불과해요.
그래도... 네, 당신 말이 맞아요. 제 목표는 처음부터 당신이었답니다, 안젤리아.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난민 구역을 들쑤시며 생사고락을 함께했잖아요? 저한테 완전히 경계심을 푼 줄 알았는데요.
하, 생사고락이랜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야.
패러데우스의 사이비 자식이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몇 분 못 갈 거예요.
흥... 이 비행기도 너처럼 문제가 있구만.
이제 눈치채봤자 늦었어요. 곧 목적지에 도착해요.
기지에 도착하면, 방금처럼 편히 앉아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도록 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아버님이 알고 싶어하시는 모든 걸 토해낼 때까지.
그 전에 널 해치우면 되겠군.
좁은 공간에 살의가 가득찼다. 잠깐의 대치 후, 안젤리아가 먼저 정적을 깨며 움직였다.
상대가 패러데우스의 작품임을 알았으니 봐줄 필요도 없었다. 안젤리아는 이번엔 바로 머리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몰리도는 다시 한번 섬광 같은 속도로 머리를 숙여 피하는 동시에 안젤리아에게 돌진했다.
물론, 안젤리아도 수없이 훈련한 대로 곧장 가슴팍을 향해 두 발을 쏘았다.
몰리도는 날아오는 총탄을 오른팔로 막으면서 핸드백을 던졌다.
팔에 핸드백을 맞은 안젤리아는 약간 주춤했다. 그 찰나의 빈틈에, 몰리도는 거리를 완전히 좁히고 날렵한 발차기로 안젤리아의 손에서 권총을 쳐냈다.
<color=#A9A9A9>빠르다!?</color>
눈 깜짝할 사이에 안젤리아의 코앞까지 접근한 몰리도는 그녀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왼발을 높이 들어 안젤리아의 목을 거는 동시에, 두 손으로 안젤리아의 왼팔을 잡아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리면서 암바를 걸었다.
왼손을 붙잡힌 안젤리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몰리도의 힘은 평범한 여성의 것이 아니었다.
점점 왼어깨가 탈골할 듯이 아파왔다.
그만 항복하세요, 안젤리아! 저희와 함께해요!
낡은 체제의 썩어 빠진 권력자들에게 굽신대지 말고, 저희 패러데우스와 함께 인류를 올바른 미래로 인도해요!
그 미래라는 게 사람을 돌연변이 괴물로 만드는 거냐?!
다 필요한 희생이랍니다!
승리를 확신한 몰리도는 조금 방심하고 말았다.
안젤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군용 비수를 뽑아 왼손을 내리찍어 의수를 몸에서 떼어냈다.
갑자기 제압을 잃은 몰리도는 번뜩이는 칼날에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허리에 남은 상처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안젤리아의 공격이 통했음을 증명했다.
칫... 잔머리가 참 대단하다니까요.
반쯤 쇳덩어리는 아닌 것 모양이네, 니토 아가씨.
너넨 대체 어디까지 인체인지 항상 궁금했거든.
전 니토가 아니에요, 완전한 인간이죠.
단지, 당신보다 훨씬 월등할 뿐이지만요.
참 익숙한 단어네. 그 자독당 민족주의자들도 한 수 접어야겠는걸.
아무튼, 신형 니토인 건 틀림없단 거지?
안젤리아는 자세를 잡고, 비수를 단단히 쥐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정말 저를 화나게 하셔야겠어요? 그래서 무슨 소용인가요?
제가 무엇이든, 당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요.
그리고 이 고공에서 어디로 도망치실 건가요?!
몰리도는 말도 다 안 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안젤리아는 이제 오른팔만으로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격차라... 확실히, 우리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지.
하지만 그건 힘의 차이가 아니야. 넌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럼 증명해 보세요, 안젤리아.
당신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래요? 지금 당신이 뭘 할 수 있죠?
흥...
루치아!!
안젤리아의 고함에, 아주 익숙한 모습이 비행기의 해치를 열고 나타났다. 그 얼굴엔, 역시 아주 익숙한 살살 약올리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본 몰리도는 아연실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야~ 안젤리아가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인걸?
내가 도와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이번 공적은 양보해 주려 했더니만~
너 어떻게... 대체 어느 사이에...
...안젤리아, 절 속였군요?
다 이긴 줄 알고 방심했지?
일단 창밖부터 봐, 몰리도.
......!!!
안젤리아의 말에 확 고개를 돌려 수송기의 유리창 밖을 본 몰리도는, 다시 한번 아연실색했다.
수송기는 그녀의 계획대로 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마그데부르크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그곳은 주독 소련군의 군사 기지였다.
언제부터... 그물을 던졌나요?
너희같이 스스로 잘난 줄 아는 녀석들이 덫에 안 걸릴까 봐, 우리보고 모두 당한 척하게 했어.
그리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 네가 부른 수송기도 착륙하자마자 먼저 몰래 올라탔어.
파일럿이랑도 잘 "협상"했어.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쿨쿨 자는 중이야.
칫... 자독당 쓰레기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건 제 실책이네요.
너희든 그놈들이든, 리벨리온의 어느 누구도 해치우지 못했지.
난 그냥 나 자신을 미끼 삼아 월척이 낚이길 기다린 거야. 그런데 정말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물밖으로 튀어나오더라? 너는 물론, 그 홉스도 말이야.
날 따라 난민 구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의 패배였다, 몰리도.
제 패배라고요? 과연 그럴까요, 안젤리아?
당신의 늑대 무리는 확실히 강하지만, 저에겐 별반 차이 없어요.
AK-12는 신분을 밝힌 패러데우스에게 총구를 겨누고, 흉악하게 부릅뜬 보라색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봤다.
허튼짓 마.
안젤리아는 굼떠서 너랑 못 놀아 주겠지만, 이 군용급 인형과 자동소총은 아니거든. .545 철갑탄으로 아주 잘 어울려 줄게.
그리고 안젤리아랑 달리 난 너랑 별로 친해지지도 않았으니까, 실수로 널 벌집으로 만들어도 용서해 줘.
날 겁주는 건 상관없지만...
비행 중인 기내에서 함부로 총을 갈겼다간 모두 죽을걸?
네 주인이 추락사해도 괜찮겠어?
첫째, 안젤리아는 내 주인이 아니야. 그냥 지휘자일 뿐이지.
둘째, 미리 낙하산도 준비해 놨어. 몇개 모자라긴 하지만 말이야.
......
신경전을 벌이며, 몰리도는 발을 아주 천천히 뒤로 옮겼다.
그리고 AK-12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채기 전에, 바로 몸을 돌려 옆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AK-12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더 빨랐다.
발사된 철갑탄은 몰리도의 다리를 깔끔하게 관통했다.
피가 흩뿌려졌고, 몰리도의 움직임도 멈칫했다.
타앙!
그리고 총성이 또 다시 터졌다.
내장갑 때문에, 이번엔 철갑탄은 관통하지 않고 몰리도의 어깨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격통에 몰리도는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뿜으며 옷을 물들여 가는 어깨를 감싸면서, 몰리도는 괴로운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AK-12의 안젤리아도, 권총을 쥐고서 차가운 눈빛으로 몰리도를 주시했다.
그만 포기해. 네게 이제 승산은 없어.
훨씬 월등한 인간이니,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이 정도 거리면... 윽... 철갑탄도 제게 유효타를 줄 수 있군요...
정말 유용한 데이터를 얻었어요...
몰리도는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포기한 기색이 없는 몰리도의 거동에, 안젤리아는 총을 들어 머리를 조준했다.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착륙하면 네 입에서 윌리엄에 관한 정보를 끄집어내야 하니까.
——꿈 깨세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몰리도가 갑자기 기내의 좌석을 덥석 잡더니, 이것저것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콰직!
뭐야!?
그리고 굉음과 함께 뜯어낸 좌석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안젤리아가 바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날아온 의자에 막히고 말았다.
또 다시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몰리도가 수송기의 문을 손으로 잡아뜯은 것이었다.
제기랄! 꽉 붙잡아!
몰리도를 저지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측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직감적인 행동이 그녀를 구했다.
한편, 역시 손잡이를 잡고 버틴 몰리도는 좌석 하나를 더 뜯어내 수송기의 엔진을 향해 던졌다.
한쪽 프로펠러가 망가진 수송기는 그대로 제어를 잃고 요동쳐, 기내의 모두가 균형을 잃었다.
루치아, 조종석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착륙시켜!
벌써 가는 중이야!
이 미친년, 동귀어진할 셈이냐?!
네 마음대로 둘 줄 알고!?
"네 마음대로 둘 줄 알고"요?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안젤리아!
오늘 일을 기억할 거예요! 오늘 제게 저지른 짓, 전부 갚아 주겠어요! 기대하세요, 안젤리아!
몰리도는 그 선전포고를 내뱉곤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렸다.
점점 강하하는 수송기 안에서, 안젤리아는 손잡이를 붙들고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엘베 강에 튀어오른 물보라뿐이었다.
니토가 완전히 인간 사회에 녹아들 정도가 된 건가...
그렇다면, 또 어디에 패러데우스가 침투했을까?
윌리엄의 목적은 정말 유적 가동뿐일까?
우리나라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숨어다닌 끝에 꼬리를 보이고 말았군.
놈은 분명히 이 땅에 있어. 이제부턴 내가 공격할 차례다.
두고보라고... 몰리도, 윌리엄...
머지않아 만나게 될 테니까!
......
[이중난수] - END.
J를 태운 구급차를 보낸 뒤, K는 홉스를 가둔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가고 나서야, K는 뒷좌석에 탄 인형을 흘겨봤다.
......
......
으음...
안젤리아가 그렇게 날 못 믿겠다던가?
아니, 내게 당신을 도우라고만 했다. 신경 쓰지 마라.
......
......
...담배 피나?
아니.
......아니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J가 더 간첩 같지 않아?
......
......
그래... 아무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게 너희 장기니.
......
이따가 어디 가서 뭐라도 마실까?
아니.
매우 어색한 침묵을 싣고, 트럭은 갈 길을 나아갔다.
K는 불붙인 담배를 물었지만 한 모금도 빨아들이지 않았다.
이봐, 지금 우리 이러고 있으면 마치――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