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난수
EP.13.25 · 이중난수

앞날의 징조

"약속할게. 다시는 너한테 거짓말 안 할게."

-41-6-1

1 / 125
전체 대사 보기 (117줄)

백업과 수복이 끝난 인형들이 차례차례 깨어나면서, 카페도 다시 이전처럼 북적여졌다.

모두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요란한 걸 좋아하는 인형들은 한자리에 모여 잔을 들었다.

철혈의 공장과 관련된 마지막 조사 임무도 끝나고, 난 인형들의 손에 이끌려 이 북적이는 곳에 함께했다.

한동안 모두와 어울려 주고 나서야 겨우 인형들은 내게서 관심을 돌렸고, 나도 그제서야 겨우 음료수를 한잔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축하 파티가 한창인 카페를 어슬렁대다, 그늘진 구석에 숨은 카리나를 발견했다.

카리나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분명 인형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때까지 정비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겠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음료수를 하나 더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옆에서 눈치를 줬지만, 카리나는 고개를 들어 날 살짝 보곤 말도 없이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으니, 합석을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휘관

아직도 삐졌어?

카리나

...아뇨.

지휘관

그럼 왜 애들이랑 안 놀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카리나

앞으론 이런 모습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옆에서 구경만 하려고요.

지휘관

...네가 그런 감성적인 말을 하니 기분이 묘한걸.

카리나

저도 감성에 젖을 때 있거든요!?

지휘관

역시 아직도 삐졌――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갖은 일을 겪었지만, 카리나도 이제 겨우 스물 몇 살인 여자애일 뿐이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굳세고 믿음직한 모습을 당연히 여겨, 내 독선적인 생각이 그녀를 상처입혔던 것이다.

카리나는 여전히 뾰로통한 모습이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려 하다가도, 이내 다시 다물었다.

내 잘못이기도 하니, 고민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지휘관

이제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마음은 정했니?

그 말을 들은 카리나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음료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시큰둥한 말투로 내게 되물었다.

카리나

지휘관님은 어떠신데요?

지휘관

음... 인형들의 수복이 다 끝났으니...

당연히 24일 통상 모의작전을 해야겠지.

인형들 개개인의 작전능력도 회복시켜야 하니, 그때쯤이면 너도 또 교정 테스트하느라 바빠질 거야.

카리나

어... 네? 떠... 떠날 생각은 없으세요?

지휘관

내가 그만둔단 소리 한 적 있던가?

카리나

저, 정말로요...?

정말 퇴직할 생각 없으신 거죠?!

지휘관

말했잖아, 그 그린존 통행증은 휴지통에 버렸다고. 지금쯤이라면 어느 처리장에서 가루가 되었겠지?

카리나

그... 그랬죠...

<size=30>근데 여태까지 확실하게 대답도 안 해 주시고, 저보고 혼자 떠나도 된다고 하시고...</size>

지휘관

에이, 그건 농담이었지. 네가 진짜 가 버리면 난 어떡해?

난 너처럼 후방 지원 업무 처리할 줄 모른다니까.

카리나

진심이세요?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지휘관

처음부터 거짓말한 적 없다니까 그러네...

정 못 믿겠으면 내 몸 뒤져보던가, 그 통행증 있나.

뭣하면 내 방도 볼래?

난 이제 어디에도 못 가.

카리나

지... 지휘관님... 이 바보 멍청이!!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요 일주일 동안 제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요!?

매일 아침에 눈 뜨면 지휘관님 안 계실까 봐 얼마나...!

매일... 무서웠는데... 우으으... 훌쩍....

지휘관

으, 아, 미... 미안해 카리나, 살짝 장난친 건데 네가 그렇게 반응해서...

그리고 그 뒤로 네가 내 말도 안 들어 줬잖니.

카리나

진짜 화났다고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지휘관님이 사라지실 거라면, 차라리 미리 거리를 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고요!

지휘관

엑, 그런 거였어? 그럼 왜...

카리나

하지만... 하지만 도저히 그러질 못했다고요!

아예 얼굴도 안 보려고 했는데, 매일 정신 차리고 보면 지휘실이었단 말이에요!

지휘관

지... 진짜 미안해,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어... 사죄하는 뜻에서... 그래 그래! 우리 하루 동안 역할 바꿔볼까?

카리나

네에??

지휘관

그러니까, 하루만 우리 직위를 바꿔보자고. 네가 지휘관, 내가 보급관. 어때? 요즘은 임무도 별로 없으니 하루 정도는 그래도 괜찮겠지...

카리나

지휘관님... 농담 아니시죠?

지휘관

그래, 진심이야.

무슨 일이든 다 시켜. 짜증 나는 일 있으면 나한테 다 푸념해도 되고.

어... 어때...?

카리나

......풉.

카리나

푸하하하하하!!!

역시 지휘관님이세요, 사고방식도 남다르시다니까요!

꿈도 꾸지 마세요, 지휘관님이 보급관 일을 맡으셨다간 우리 인형들 작전 중에 총알 한 발 제대로 못 쏠걸요?

그러면 또 저만 혼난다고요.

지휘관

그럼 어떡해야 용서해 줄래?

카리나

으음... 그러면...

앞으로 다시~는 저한테 거짓말 않기!

어때요, 지휘관님? 약속해 주실 수 있어요?

지휘관

그걸로 충분해?

카리나

네, 그걸로 충분해요.

지휘관

그래, 약속할게. 다시는 너한테 거짓말 안 할게.

카리나

헤헤헤, 꼭 지키셔야 해요!

10년이 지나서도, 석양이 저물 무렵 차량의 창밖 저멀리의 이동식 격리벽을 바라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린다.

주황빛 석양이 격리벽을 비추며 서서히 벽 전체를 물들이는 모습은, 마치 핫케이크에 뿌린 시럽 같다.

온갖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다, 그 유일하게 느긋해질 수 있던 순간이 내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얼마나 운 좋고 행복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이 세월에 따라 변해 가면서, 과거의 얼굴들도 점점 흐려지고 멀어져 갔다.

그녀와 작별할 때, 차마 묻지 못한 것이 있다. 물어봤자 아무 의미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일지 몰라도, 그녀는 더는 그때의 그녀가 아니다.

그래도 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10년 전, 결국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

카리나

하암... 갑자기 졸리네요...

마음이 놓이니까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아요...

지휘관

여태 밤을 샜으니 지칠만도 하지. 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쉬렴, 저 녀석들은 언제까지 놀자판일지 몰라.

뒷정리는 내일 생각하자.

카리나

네... 그럴게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지휘관님...

후아아암...

카리나는 감기는 눈을 비비며 카페를 떠났다.

부디 내일 아침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말괄량이 보급관 아가씨가 무표정인 채로 뒤에 서 있는 건 역시 좀 오싹했다.

댄들라이

자리 비었습니까, 지휘관님?

지휘관

너 여긴 또 무슨 일이야?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했잖아.

댄들라이

당신을 제외한 여기서 절 볼 수 있는 인간이 쿨쿨 자러 갔으니, 잠시 바람을 쐬도 괜찮지 않을까요?

지휘관

너 또 우릴 감시했구나...

댄들라이

두 분의 관계가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의외군요, 카리나 씨가 저렇게 다루기 쉬운 성격일 줄은 몰랐습니다.

두 분의 수준은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였군요.

지휘관

윽... 그래서, 놀리려고 굳이 찾아온 거야?

댄들라이

약간의 정보를 얻었습니다만,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소중하고도 짧은 법이니까요.

잠깐 더 기다려서 나쁠 건 없습니다.

댄들라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카페 중앙으로 돌리니, 시끄러운 소리가 충격파처럼 밀려왔다.

안나

그만 저항하고 볼 내놔!

G11

우으으 이거 놔아아... 내 얼굴...

도와줘 우으아우으....

UMP9

푸하하하, G11 얼굴 뭉개진다~

AUGPARA

엄청 재밌어 보이네요, 저도 꼬집어 보고 싶어요!

VHS

조용히 좀 해, 메이드장 왔잖아.

G36

거기 당신들, 카페에서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장난이라면 숙소로 가서 하세요.

안나

꺄아~ 도망쳐라~

G36

카페에서 뛰지도 마세요! 위험합니다, 그러다 부딪혀요!

스프링필드

오늘은 내버려둬요, G36 씨. 가끔은 이렇게 떠들썩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G36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당신이 항상 그러니 저들이 계속 카페에서 장난치는 겁니다.

나는 가볍게 탄식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평범하게 짝이 없는 일상이야말로, 내가 지켜내고 싶은 것이다.

지휘관

그래서, 그 정보란 건 뭐지?

댄들라이

성급하시군요. 그렇게 일에 고프신가요?

지휘관

지금 게으름 피우다 나중에 후회하기 싫을 뿐이야.

댄들라이

그렇다면, 따라오시죠.

댄들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향했다.

나도 스프링필드에게 귀띔을 주고, 코트를 걸치고 댄들라이를 따라갔다.

......

아직 한가을도 아니건만, 한밤중의 바깥은 역시 조금 쌀쌀했다.

지휘관

후우... 너희 다 여기 있었구나.

예상대로, 기지 밖 공터에서 날 기다리던 사람들은 AR팀이었다.

댄들라이

약속대로, 지휘관을 데려왔어.

RO635

고마워, 수고했어.

지휘관

너희가 댄들라이한테 날 데려와 달라고 했어?

왜 직접 오지 않고?

RO635

그... 그런 데에 가긴 좀 부끄러워서요...

AR15

AR팀으로서, 역시 일반 인형들과는 조금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M4 SOPMOD II

올 줄 알았어! 헤헤, 이제 지휘관은 우리가 독차지네!

지휘관

다른 사람도 아니고 SOP2 네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 무서운데...?

RO635

크흠... 지휘관님을 모신 건 다름이 아니라, 다소 무리한 요청이 있어서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울 부탁임은 알지만, 우선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댄들라이, 보여드려.

댄들라이

지휘관님, 이걸 보시죠.

지휘관

이 양옥은...?

댄들라이

틀림없습니다, 루니샤의 마인드맵에서 몇 번이고 나타났던 바로 그 양옥입니다.

그녀의 기억에 기록된 "집"의 모습이죠.

AR15

나도 M4의 마인드맵 밑바닥에서 본 적 있어.

댄들라이

안젤리아 씨가 독일에서 얻은 정보가, 하벨 씨의 정보망에 잡혔습니다. 슈타지가 완전히 똑같은 건물을 찾아낸 모양이더군요.

지휘관

댄들라이 너 설마, 하벨 씨의 서버까지 해킹한 거야?!

댄들라이

아주 작은 백도어를 뚫었을 뿐이어서, 발각되진 않았습니다.

안젤리아 씨의 독일에서의 활약 덕택에, 슈타지도 우연히 이 양옥을 발견했습니다.

지휘관

안젤리아 씨 쪽에서 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

그래서, 너희의 부탁이란 게 뭐지?

RO635

지휘관님, 저희 AR팀은 다짐했습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M4 씨와 M16을 찾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요.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저희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흰 이 위치까지 가, M4 씨에 관한 단서는 없을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휘관님께 무리한 부탁임은 알지만, 부디 출장을 허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필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지휘관

거절한다.

RO635

네?

지휘관

실종된 우리 인형을 찾는데, 어떻게 너희만 보낼 수 있겠어?

AR15

그럼...?

지휘관

아직 장담은 못하지만, 그 양옥에 관해서 이쪽에서도 조사해봐야지.

그리고 직접 그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그런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너희만 보내진 않을 거야.

걱정 마, 그리폰의 지휘관으로서 그 어떤 인형도 포기하지 않아.

M4 SOPMOD II

다행이다, 지휘관도 우리랑 같은 생각이구나!

지휘관

그래, 아무도 버리지 않을거야.

대신 너희도 약속하렴. 움직이게 된다면, 반드시 명령을 따르고 단독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우린 이제 한 가족이야. 여기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전우이자 친구지. 우리는 운명으로 이어진 공동체야.

약속할 수 있겠어?

세 인형은 서로를 마주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답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나도 고개로 대답했다.

지휘관

해당 계획은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그리고 내일 페르시카 씨가 오니까 그때 다들 정비를 받도록 해.

그리고... 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카페에서 잠깐 놀다가는 게 어때?

RO635

아뇨,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

저흰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지휘관님도 일찍 주무세요.

지휘관

그래.

AR팀은 웃으면서 떠났다. RO도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어째선지 가뿐해진 마음으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댄들라이

또 다시 엄청난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군요.

지휘관

내 선택이 잘못됐나?

M4를 찾는 건 너도 바라는 일이잖아.

댄들라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바람에 얼마나 큰 대가가 따를지도 잘 알고 있죠.

지휘관

그럼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댄들라이

그저, 당신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휘관

그래도 계속 이겨 왔잖아.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아.

난 저 애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어. AR팀은 특히나 더 많이 희생했으니까.

댄들라이

맞는 말이군요.

지금의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항상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휘관

마치 내 미래를 봤다는 듯이 말한다?

댄들라이

그런 셈이죠.

지휘관

뭐...?

댄들라이

그래도, 미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저희의 약속을 잊지 마세요.

당신이 땅에 묻히기 전에 이 세계에 대한 감상을 제게 들려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진, 마음껏 노력하며 발버둥치세요. 그것이 인간의 가장 재미있는 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