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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25 · 이중난수

망설임 금물 Ⅴ

"오늘은 정말이지, 엄청 긴 하루였어요... 이제 다 끝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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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거주구의 성당.

바닥엔 시체가 즐비했고, 방금까지 끓어오르던 피는 서서히 식어 갔다.

바닥에 제압된 홉스는 비록 상처는 가벼웠지만, 표정만큼은 저 시체들처럼 차가웠다.

몰리도

이런 경건한 곳에서 살육이라니, 그야말로 신성모독이네요...

두 분이 제때 와 주신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레나테 씨, 에르빈 씨.

AK15

제게 감사할 것 없습니다. 전부 안젤리아의 계획입니다.

RPK16

홉스 씨, 제가 묶은 매듭 마음에 드시나요?

그리고 파월 씨, 처음 뵙는데 인사 안 해주시나요?

홉스

......

파월

......

홉스는 입을 꾹 다물었고, 파월은 AK-15가 벽을 뚫고 들어오던 순간 놀라 실신한 상태였다.

안젤리아는 J에게 다가가, 쪼그려앉아 그를 살펴봤다.

안젤리아

야, 일어나지?

J

.....

RPK16

J 씨, 자꾸 그렇게 죽은 척하시면 에르빈이 이번엔 당신 옆의 벽을 부술 거예요.

J

......

RPK16

어머, 정말 기절했나 봐요.

안젤리아

...맥박은 안정적이네. 죽진 않겠다.

RPK16

그거 참 나쁜 소식이네요.

안젤리아

그러게. 그래도 그나마 나은 소식도 왔군.

AK-15가 뚫고 들어온 구멍 너머로, 경찰차와 구급차, 그리고 무장 헬기의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K

<color=#00CCFF>안젤리아, 5분이면 도착한다. 상황 정리했나?</color>

안젤리아

파월 붙잡았고, 자독당의 간첩도 잡았다. 홉스였어.

J가 얻어터진 거 빼고 나머진 다 괜찮아.

K

<color=#00CCFF>그래?</color>

<color=#00CCFF>제자리서 대기해라, 이제 3분이면 도착하겠군.</color>

통신 종료.

안젤리아

J가 어떤 꼴인지 보고 싶어서 안달 났구만.

몰리도

안젤리아 씨... 홉스 씨는...

안젤리아

걱정 마, 녀석이 울릭 주석한테까지 누가 되진 않게 할 테니까.

K한테 맡기면 차라리 감옥이 낫다고 생각하겠지.

몰리도

어... 그건 좀 심하지 않을까요?

홉스

내숭떨지 마라, 위선자 놈들.

몰리도

지금 뭐라고...

홉스

시치미 떼지 마라. 2053년,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몰리도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홉스

그럼 2058년에는?

안젤리아

잔말 많은 녀석은 질색이니까 똑바로 말해.

홉스

내가 어째서 이러느냐 물었지?

눈앞의 난민 구역을 보고 그 이유를 생각해 봐라.

의회는 국민과 사회를 위해 싸우겠다 약속했기에, 우리도 모든 것을 이 땅에 바쳤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뭐지? 놈들이 우리 독일에게 무얼 했는지 보란 말이다! 저런 난민 따위를 먹여 살리느라, 지켜야 할 국민까지 착취하고 있다!

네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의심한 자독당마저도, 놈들이 규졍한 최저임금과 시간당 7마르크 34페니 추가수당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단 말이다!

안젤리아

하, 결국엔 돈 때문이네.

뭐, 그것도 괜찮지. 적어도 내가 예전에 알던 누구보단 현실적인 이유니.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이어야 동정받을 자격도 있는 법이거든.

홉스

뭘 안다고 지껄이냐!

우리 부대의 정예도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위원회라는 것들은 엄한 돈을 이런 쓰레기촌을 만들어서 거지들이나 기르고 있어!

우리는 이딴 걸 바라고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다!

듣다 못한 안젤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홉스를 두고 자리를 떴다.

RPK16

저 인생 낭비에 대한 변론에 어울려 줄 줄 알았는데요.

안젤리아

예전에 알던 그 녀석 덕분에, 저런 것들은 뭘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거든.

설령 된다 해도, 난 그런 거 잘 못 해. 어느 영감탱이가 더 잘하겠지.

RPK16

이런 귀찮은 일을 떠맡긴 사람이 바로 그 영감님이잖아요?

안젤리아

이번에 멍청이들은 머릿속이 다 비슷비슷하단 걸 알았으니까 됐어.

울릭 주석과의 통화를 마친 몰리도가 안젤리아에게 왔다.

몰리도

안젤리아 씨, 방금 주석님과 통화했어요.

아주 중요한 말이 있으시다면서,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으시대요.

아까 호출했던 헬기가 곧 오는데, 괜찮다면 같이 가시겠어요?

안젤리아

음... 그러지.

여기 일 다 처리하고 주석을 만나러 갈게. 만나는 김에 지난 며칠 간의 성과도 보고해야지.

한편, 어딘가에서.

???

실패했습니다.

???

홉스도 놈들에게 붙잡혔습니다.

???

그는 굳센 자다. 놈들이 바라는 건 아무것도 실토하지 않을 테지.

???

우린 어떡하죠?

???

타라. 지금은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 한, 패배는 아니다.

독일의 각 세력의 개입으로, 난민 격리 구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은 빠르게 진압됐다.

홉스와 파월은 연행됐고, K도 지원군과 함께 도착했다.

K

J는 어딨지?

안젤리아

나랑 몰리도가 괜찮은지부터 살펴야 하는 거 아니야?

K

괜찮아 보이는군. 그래서 어딨어?

안젤리아

저기 구석에 엎어져 있는 거.

K는 의료진을 데리고 쏜살같이 J에게 달려갔다.

몰리도

와아, K 씨랑 J 씨 엄청 친한 사이였군요? 분명 J 씨가 걱정돼――

갑자기 터져나온 K의 폭소가, 몰리도의 말을 끊었다.

몰리도

......

K 씨가 저렇게 해맑게 웃는 건 처음 들어봐요...

안젤리아

나도 저렇게 징그럽게 웃는 놈은 처음이다... 아 맞다, 에르빈.

AK15

네.

안젤리아

레나테랑 먼저 정비하러 가.

나중에 은신처에서 보자.

AK15

알겠습니다.

몰리도

다른 두 인형분들은요?

안젤리아

성당에서 파괴됐어.

괜찮아, 진작에 백업해 뒀으니까. 은신처로 돌아가서 예비 소체로 깨우면 돼.

우린 주석이나 보러 가자고. 말할 게 잔뜩이야.

몰리도

네, 수송기도 마침 도착했어요.

안젤리아

어디 있는데?

몰리도

성당 앞의 광장이요.

안젤리아

응, 알았어.

J

몰리도 씨, 가시게요...?

안젤리아

뭐야, 벌써 깼어?

J

후후후... 수천만 소녀의 꿈을 품은 몸인데, 쉽게 쓰러질 순 없죠...

안젤리아

어우...

몰리도

괜찮으신지 보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럴 필요 없겠네요.

J

아이고오오, 사실 엄청 아파 죽겠어요...

그런데, 몰리도 씨가 절 그렇게 걱정해 주시다니...

몰리도

아뇨, 당신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감상하려던 거예요.

J

예쁜 아가씨일수록 사람을 잘 속인다니까요.

몰리도

히히히.

J

일 다 끝나면 같이 커피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라비아 원두 어때요? 제가 좋은 가게 하나 아는데.

몰리도

아라비아...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좋아요!

안젤리아

......

자리 비켜 줘야 하나?

J

얼레, 계셨습니까?

K

J, 뭘 또 작업 걸어? 구급차에 얌전히 누워나 있어.

J

예이 예이.

그럼 약속입니다 몰리도 씨!

몰리도

네에~!

J

그리고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응?

J

무슨 말 할지 아시죠?

안젤리아

뭐 대충. 커피 얘기지?

J

하하아야야야... 네, 커피 얘깁니다! 잊지 말아 주세요.

금방 또 만날 거란 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안젤리아

제발 빗나가길 빌지.

J

하하하하.

J는 들것에 실려갔다.

몰리도

수송기 착륙 수속부터 해야 하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젤리아

알았어.

K

안젤리아, 잠깐 얘기 좀 하자.

...구석진 곳.

안젤리아

너도 눈치챘나 보군.

K

그래, 브레멘 시 전체가 사전에 준비된 함정 같다.

매번 우리보다 한발 앞섰어.

안젤리아

예상보다 적이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 상태란 뜻이지.

K

홉스 말인가?

안젤리아

아니, 자독당한테 이렇게 큰 규모로 일을 벌일 능력은 없어. 다른 놈들이 있는 거지.

오늘 일어난 사건은 너무 복잡해. 놈들뿐이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이렇게 난민 구역 곳곳에 매복한 것만 해도 놈들의 한계야.

K

확실히... 자독당뿐이라면, 플로라 연구소에까지 미리 잠복했을 수가 없지.

안젤리아

게다가 연구소에선 누군가가 우리가 오기 훨씬 전에 미리 자료를 모조리 삭제했어.

그 정도로 높은 권한을 가진 인물인데, 리오니는 알지도 못했고.

뭐, 그 사람은 애초부터 쓰다 버릴 장기말이긴 했지만.

K

플로라 연구소에서 확보한 자료는 현재 복구를 시도 중이다.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길 바라야지.

안젤리아

고아원도 수상해. 정보에 따르면, 그 아이들 모두 실험체로 끌려간 거야.

그런데 애들의 상태를 봐선, 학대는 물론 차별당한 흔적도 없었어.

K

실험용 생쥐를 정성들여 보살폈다...?

안젤리아

파월은 말 그대로 "연결책"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 눈에 띄는 수송 과정을 은폐하기 위해 양아치들의 손을 빌렸다면 아귀가 맞아.

그놈은 자독당 명의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패러데우스에게 넘겼어.

그 "배송업"이 난민 구역에서만 진행됐으니 추적은 까다롭겠지만...

결론만 따지면, 놈은 패러데우스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아.

윌리엄의 직속 부하도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여전히 어딘가에 은밀히 숨어 있겠지.

홉스도 딱히 아는 게 없을 테고.

고아원 원장과 파월의 거래가 왜 이뤄졌는지도 모를걸?

K

홉스는 내가 직접 심문하지.

안젤리아

마지막으로, 이 난민 구역 말인데...

K

초기 정찰 중 거리에서 발견한 분말을 분석팀에게 보냈다. 아직 결과는 안 나왔어.

안젤리아는 자신이 주웠던 탄피를 K에게 건넸다.

안젤리아

처음 봤을 땐 붕괴 오염 물질로 만든 더티밤 같은 거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여기서 나타난 ELID는 성질이 전혀 달라. 아예 차원이 다른 물건이야.

지금 생각난 건데, 어쩌면 플로라 연구소의 화초와 관계 있지 않을까?

K

......

이 탄피의 출처도 조사하지.

몰리도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여기 있어.

몰리도

수송기 도착했어요!

안젤리아

알았어, 금방 갈게.

K

네가 울릭 주석을 뵙고 온 뒤에 다시 얘기하지.

안젤리아

그래, 넌 내 인형들이나 다 고쳐놔.

갔다 오면 대충 답이 나왔겠지.

수송기 안에서.

몰리도

죄송해요 안젤리아 씨, 여객기에 비해선 엄청 불편하죠...?

안젤리아

괜찮아.

몰리도

저기... 안젤리아 씨 어깨 좀 빌려도 될까요?

안젤리아

그래.

몰리도

헤헤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종일 달려서, 엄청 피곤해요...

안젤리아

푹 쉬어.

안젤리아는 어깨에 기댄 몰리도의 머리를 톡톡 다독였다.

잠시 후, 맹렬한 엔진소리와 함께 수송기가 이륙했다.

몰리도

오늘은 정말이지, 엄청 긴 하루였어요... 이제 다 끝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젤리아

그래.

안젤리아는 더는 난민 구역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대충 상상은 되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 아래, 타오르던 불길은 사그라들고,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저녁 안개에 녹아들고 있을 것이다.

정말 이 세상에 신이란 게 존재해 지금 그곳을 내려다본다면, 아마 아직 희망이 가득한 폐허를 떠올릴 것이라고, 안젤리아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