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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 거울단계

쌀알 소리 Ⅲ

"판도라의 상자를 함부로 건들지 말아라."

-44-A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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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AK12

안젤리아!

......

매연이 흩어지고, 타오르는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다.

충격으로 인한 어지러움과 이명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안젤리아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일까, 그녀 본인은 그다지 다치지 않았다.

안젤리아

...AK, 12?

부하의 모습이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엉망인 상태의 AK-12를 마지막으로 본 건, 그 남자를 상대할 때였다.

AK12

심호흡해 안젤리아, 심호흡.

안젤리아

너...!

AK12

딴말 말고 내 얼굴 봐.

지금 무슨 상황인지 말해.

안젤리아

그러니까...

안젤리아는 방금까지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안젤리아

...패러데우스랑 싸웠지.

너와 AK-15가 창고 안 패러데우스의 졸개들을 해치웠고...

나와 RPK-16은 검은 니토를 해치웠어.

그리고...

섬광이 또 눈앞 지나가는 듯했다.

안젤리아

...하얀 니토가 창고를 터뜨렸지.

그 순간 네가 뛰어와서는 날 안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AK12

멀쩡하네, 다행이다.

안젤리아

하지만 네가...

그제서야 안젤리아는 AK-12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랬다.

AK12

걱정 마, 나 괜찮아. 내부 부품 몇 개가 찌그러져서 관절에 끼었을 뿐이야.

그래도 응급 처치가 필요한걸... 이래선 움직이기도 버거워.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비틀거리며 AK-12의 품에서 나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뚝 서 있던 하얀 건물은 이미 불타는 폐허로 변해버린 뒤였다.

무수한 상자들에 담긴 약품들도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와르르...

거대한 형체가 잔해 속에서 솟아올랐다.

벽돌이 들어올려지고, 먼지와 돌조각들이 몸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물론, 그 정체는 AK-15였다.

그리고 AK-15 밑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RPK-16도, 그녀가 막아 준 덕분에 모습만 좀 엉망일 뿐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안젤리아

RPK, AK-12에게 긴급 조치.

RPK16

무리예요. 아무리 저라도 맨손으론 선배의 망가진 부품을 뜯어낼 순 없어요.

그래도, 선배의 깡이라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AK12

나 멀쩡해지면 제일 먼저 너부터 죽여버릴 거야...

AK15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면, 내 소체의 것을 사용해라.

AK12

너도 괜한 소리하지 마.

네 전투 능력이 떨어지면 안젤리아가 위험해져.

수복 장비라면 AN-94한테 있으니까 난 그냥 복귀하면 돼.

안젤리아

...니토는?

AK-15가 주변을 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AK15

포착되는 신호 없음.

시체도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장을 이탈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젤리아

도망쳤다고?

쳇... 어째서지?

AK12

나야 모르지. 하지만 슬슬 우리도 철수하지 않을래?

지금 상황으론 추격은 무리인데.

안젤리아

그래... 목적은 달성했으니.

안젤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젤리아

현장 검사해서 쓸 만한 단서는 전부 챙겨.

훈작사한테 넘기기만 하면 그레이를 고발하는 건 시간 문제야.

RPK16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요.

안젤리아

무슨――

안젤리아가 질문하기도 전에, 주위에서 귀청이 나갈 것 같은 경적이 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의 통로에서 경찰 제복과 보안인원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한 명도 빠짐없이 무장한 그들은 안젤리아 일행에게 곧장 달려왔다.

보안 인원

꼼짝 마!

경비원

무기를 버려라!

주위에 엄폐물로 삼을 만한 것도 없는 상황이어서, 안젤리아 일행은 저들이 신속하게 자신을 겹겹이 포위하는 걸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AK-15와 RPK-16은 안젤리아 곁으로 와 무기를 쥐었다.

AK-15는 아예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살기를 내뿜어, 보안인원들이 무의식적으로 총구를 그녀에게 향할 정도였다.

안젤리아

......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결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에 대한 적의가 명백했고, 목표도 확실했다.

폭발이 일어난다면, 현지 공무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무리엔 사설 보안 병력까지 섞여 있었다.

경찰과 사설 보안 부대가 한마음으로 움직인 것이다.

과연 이게 무얼 의미할까?

그레이

정말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네요.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너...

총을 겨눈 무리를 가르고, 지금 안젤리아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실루엣이 나타났다.

보안 부대와 경찰이 섞인 무리는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비켰고, 그레이는 그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안젤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레이

뭘 멍하니 있어, 빨리 검사해.

안젤리아와 대화하기 전, 그레이는 손짓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쫓아냈다.

일부만이 리벨리온과 대치하기 위해 남고, 대부분이 그레이의 지시에 흩어졌다.

그들은 현장을 봉쇄하고, 아직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잔해를 회수했다. 움직임은 질서정연했고, 전혀 다른 소속인 인부들이 함께 작업하는데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안젤리아

거기 안 멈춰!?

그것들은――

보안 인원

움직이지 마!

안젤리아는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그레이 옆의 사병들에게 총으로 제지당했다.

AK-15는 안젤리아 옆에 서서 저 무례한 사병들을 노려봤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에도 그들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안젤리아

제기랄...

저건...

안젤리아는 그들이 남은 약품과 걸레짝인 시체들을... 그녀가 겨우겨우 찾아낸 단서와 증거물을 보따리에 담아 가져가는 걸 눈뜨고 보기만 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안젤리아도 저 망할 여자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젤리아

증거 인멸이냐.

그레이

증거라뇨?

그레이는 인상을 쓰며 짐짓 당혹스러운 척했다.

그리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폐허와 자신 곁의 호위를 번갈아 보았다.

보안 인원

이거 오해가 있으신가 보군요, 안젤리아 씨.

여기는 갈라테아 그룹의 실험 약품용 창고입니다.

여기에 보관되던 것은 전부 "이둔"의 임상시험용 샘플입니다.

그레이 옆의 사병 중 한 명이, 눈치를 받고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안젤리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네.

그레이

글쎄요, 과연 누가 믿어 줄까요.

그레이는 비웃는 눈초리로 응했다.

그레이

경찰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요.

...당신의 정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안젤리아

여긴 내 나라 아니야, 그리고... 경찰은 무슨 얼어죽을 경찰?

안젤리아는 냉소하며 불길에 비치는 그레이의 얼굴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봤다.

안젤리아

여긴 도심지에서 6km나 떨어졌고, 직통 도로도 없는 곳인데.

베를린의 경찰이 어떻게 이리도 빨리 현장에 도착해?

게다가 네 사병놈들이랑 호흡도 아주 척척 맞고. 다 네 패거리잖아.

안젤리아가 턱을 들자, 그녀 곁의 리벨리온도 반 발자국 내디뎠다. 이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안젤리아

지금 연기도 아주 건성으로 하는데...

그냥 날 놓아줄 생각 없잖아, 안 그래?

AK15

......

AK-15는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무기를 들어, 총구를 그레이에게 향했다.

AK12

AK-15... 침착해.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움직임을, AK-12의 목소리가 멈췄다.

RPK16

걱정 마세요, 선배.

AK-15도 그 정도로 막나가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RPK-16의 눈빛도 그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RPK16

여기서 교전했다간 우린 안젤리아를 지키지 못해요. 주변에 엄폐물도 없는걸요.

하지만 반대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 정도 거리라면... 눈 깜빡할 틈도 없이 AK-15가 당신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어요, "닥터 그레이".

보안 인원

건방지게 어딜!

RPK-16의 도발에 사병이 발끈하며 고함을 쳤지만, AK-15를 의식해 나서진 못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의 말이 떨어지기 전엔 아무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레이

그것 참 흥미롭군요.

그레이의 얼굴의 웃음기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RPK-16와 눈싸움을 벌였다.

안젤리아

네가 정말 무사할 거 같냐?

그레이

당신은 지금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린 꼴이에요, 안젤리아.

당신의 장난쯤,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안젤리아는 그레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차갑게 노려봤다. 저 빌어먹을 여자의 자신감과 우월감이 냄새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 거리라면... 자신이 총을 더 빨리 뽑는다면 적어도...

??

동작 그만!

바로 그때, 다른 방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소리치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전혀 다른 스타일의 무장 부대가 신속히 진입했다.

예고 없는 등장에 그레이와 그녀의 사병들의 경계 대상이 바뀌었다.

라이트

안젤리아 씨는 슈타지 관할의 중요 인물입니다!

베를린 경찰과 갈라테아에게 구속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현장은 우리가 통제합니다!

어린 청년이 곧장 안젤리아와 그레이에게 달려와, 자신의 요원증을 들이밀며 의도를 밝혔다.

그 청년을 뒤따라, AN-94가 긴급 수복용 공구함을 들고 AK-12에게 신속히 다가갔다.

그녀가 말없이 응급 처치를 해 주자, AK-12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AN94

핵심 부품에 손상은 없다, AK-12.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거다.

AK12

고마워 AN-94.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

내 총 좀 가져와 줘, 당장 죽여버려야 할 년이 있거든.

AK-12가 천천히 일어났지만, AN-94와 안젤리아에게 동시에 제지당했다.

그레이

...젊으신 요원님, 정말 허가를 받고 움직인 건가요?

그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의 어린 어조로 자신과 안젤리아 사이에 끼어든 라이트에게 물었다.

라이트

물론입니다, 여기 영장입니다. 이 시간부로 이 현장은 슈타지가 접수하겠습니다.

그레이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

그레이

흥...

그레이가 손짓하자, 현장을 헤집던 인원들이 다시 질서정연하게 현장에서 나왔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뒤져낸 물건들을 가지고서.

라이트

중요한 증거물입니다, 내놓으시죠.

보안 인원

주제 넘지 마라, 슈타지!

갈라테아 그룹의 사유물을 가져가겠다고?

네 상급자한테 직접 오라고 해!

아니면 네 모가지 날아갈 각오나 하던가!

라이트

......

상대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라이트는 한발 물러서 요원들을 폭발 현장으로 들여보냈다.

라이트

여기서 습격이 일어났다 봐도 무방합니까?

그레이

최근 수 개월간, 베를린에선 사고가 다발했죠.

하지만 설마 폭도들이 갈라테아 그룹을 건드릴 정도로 흉포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어떤 테러 행위에도 굴복하지 않아요.

"이둔"은 반드시, 약속대로 출시될 겁니다... 라고 당신의 친구들께 전해 주세요, 어린 요원님.

라이트는 잠시 침묵하다, 그레이에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라이트

그렇게 전하죠.

안젤리아 씨, 이만 갑시다.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AK-12를 부축하며 고개를 들어, 그레이의 눈을 마주봤다.

그레이

<Size=30>목숨을 건졌군요.</Size>

안젤리아

<Size=30>이걸로 끝이라 생각 마라.</Size>

슈타지의 경호를 받으며 떠나는 안젤리아를 바라보다, 그레이도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현장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레이

...여기 남은 건 없군요.

우리도 이만 가요.

그녀의 부름에, 갈라테아 소속의 인원들도 허리를 펴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