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미궁 Ⅱ
"처음 만난 이에게 가장 진실된 편안함을."
연황색 안개가 지하 터널을 가득 메웠다.
출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역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들 몇 명이 열차로를 따라 깡총깡총 뛰며, 괴상한 동요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누가 죽였나?"
"짹짹 참새가 죽였죠, 활과 화살로 죽였죠."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죽는 걸 봤나요?"
"윙윙 파리가 봤었죠, 작은 눈으로 죽는 걸 봤었죠."
역의 플랫폼에는, 평일의 출근길에 잡담을 나누던 직장인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검은 옷의 소녀가 몸을 밟고 지나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피를 뽑았죠?"
"물고기가 뽑았죠, 접시로 피를 뽑았죠."
연황색 안개는 이제 눈에 익은 마을까지 퍼졌다.
얼굴이 비쩍 마른 난민들은 절규했고, 하나둘씩 그 치명적인 안개 속에서 쓰러져 갔다.
이런 생지옥이 아예 다른 세상 일이라는 듯, 하얀 옷의 소녀는 미소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난민들의 시체를 넘었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수의를 짰죠?"
"풍뎅이가 짰었죠, 실과 바늘로 짰었죠."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무덤을 팠나요?"
"부엉이가 팠었죠, 삽과 호미로 팠었죠."
눈물범벅인 얼굴로 숨만 겨우 붙은 여성이 바닥을 기어갔다. 필사적으로 한 오라기의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본 하얀 옷의 소녀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왔고, 소녀의 거대한 낫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보였다.
여성은 공포에 질려, 입을 크게 벌리고 생애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음이 도래한 마을에, 소녀의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엄마!! 아빠!!
날 두고 가지 마... 두고 가지 말아요!!!
그 울음은 하늘을 날아가던 새도 멈추어 동정할 정도로 애절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만물이 고요함에 잠겨, 숨을 쉬는 것은 오직 울음소리의 주인뿐이었다.
일어나! 얼른 일어나란 말이야!!
우는 소녀의 가슴이 찢어질 무렵,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찾았다! 면역체다!
훌쩍... 누구세요...?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뒤틀린 남자가 환희하며 달려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꼬마야, 난 □□□이란다.
당신들은... 본 적 없는데...
겁먹은 소녀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어머니의 손을 꼬옥 쥐었다.
무서워 말렴, 우린 널 도와주러 왔단다.
네 부모는 잠들었지만, 네겐 그들을 깨울 힘이 있어.
그리고 난 네가 그 힘을 이끌어낼 방법을 안단다...
하지만...
엄마 아빠를 다시 보기 싫으냐?
전...
지금 네 부모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망설이던 소녀는 결국,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게 잡았던 두 손이, 억지로 떼어졌다.
하나였던 영혼이 찢어졌다.
안 돼... 안 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어떻게든 손을 뻗어 사라진 따스함을 되찾으려 했다.
안 돼... 그 애를 데려가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드넓은 실험실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그녀의 절규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날 정적에 빠졌던 마을 같았다.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 아이를 돌려 주세요!! 그 아이는 제 일부예요!!
제... 제 반쪽이라고요...
뭐어?
뒤틀린 얼굴의 남자가 돌아보았다.
넌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
저 녀석의 그릇에 영혼을 불어넣는 게 네 마지막 역할이었다.
......
너무 걱정하진 마, 이대로 널 잠재우진 않을 테니까.
네가 준 모멸감은 절대 잊지 않아...
목이 세게 조여져,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아주 조금... 성공까지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네 어리석은 고집 때문에, 아주 조금 남기고 실패했잖아!
눈앞이 점점 깜깜해지고, 의식이 몸에서 떠나갈 것 같았다...
뭐어... 그래도 괜찮아, 네 데이터로 녀석을 만들었으니까.
네가 남긴 아쉬움을, 그 녀석이 대신 채워줄 거야.
그러니 너는 그냥, 살아있어라. 고통스럽게,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있어.
호흡을 막던 압박이 풀렸다.
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의 이를 가는 저주가 계속 맴돌았다.
시꺼먼 어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여성 두 명이 대화하고 있었다.
빠짐없이 다 설치했나?
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질문하는 입장이 됐어?
넌 네 일이나 똑바로 하면 돼, 할망구의 잔소리를 들을 처지 아니거든?
너도 알겠지만, 우리의 계획은 도미노야.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알아, 나도 안다고!
어느 한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계획 전체에 지장이 생긴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맡은 일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후후후, 벌써 다 끝냈지롱.
작은 소녀가 손에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이아손의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깜찍한 걸 진작에 베를린 전역에다 뿌려놨다구, 캬하하하하하하!!
죄수들의 고함이 날카로운 경보음에 묻혔다.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 이상한 냄새는 또 뭐야? 불은 왜 안 켜지는데!
그때, 무언가가 폭발했다.
뒤이어 비상등이 켜졌고, 죄수들을 가두던 감방의 보안 시스템이 전부 해제됐다.
뭐... 뭐야?
어찌 됐든 자유다! 나가자!
죄수들이 기뻐하던 것도 잠시.
비상등도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엇이 시작됐는지, 그들이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왜 그래?!
끄아아아아아!!
너 갑자기 왜 그―― 오, 오지 마!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몇몇 죄수들이 끔찍한 괴물로 변하여, 감옥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짐승처럼 물어뜯기 시작했다.
죄수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지만, 소리없이 바닥에서 붕 떠올라 열리는 "이아손의 상자"를 보지 못했고...
퍼엉!
두꺼운 격리벽을 따라, 눈부신 불꽃이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안 돼... 안 돼――!!
격리벽이 무너진다!
무너진다아아아!!!
절망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몇 년이나 비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수호하던 격리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격리벽 너머로, 연황색의 안개가 마치 모래폭풍처럼 도시를 덮쳤다.
왜소한 그림자는 격리벽의 잔해를 딛고 올라서, 이아손의 상자를 껴안은 채로 미친듯이 웃어댔다.
캬하하하하하하! 오늘이 너희의 종말이다!
달려 봐, 걸음아 나 살려라 해봐! 하이에나한테 쫓기는 어린 양처럼 달려보라고!
그래봤자 도망칠 수 없어! 우리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왜소한 여자의 광소를 터뜨리는 사이, 다른 여자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 준비된 거지? 그럼 스승님께 보고할게.
아 잔소리 그만하라 했지! 내가 직접 나섰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그리고, 언니한테 보고는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넌 딴 데로 꺼져!
한가하게 수다 떠는 걸 보니, 임무를 끝마쳤나 보구나.
세 번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다른 두 여자가 공손히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스승님...
언니! 내 임무도 다 끝났어!
잘했어, 아버님께서 너희의 공로에 포상을 내리실 거야.
그럼 이제, 할 일은 하나밖에 안 남았네...
언니 언니, 그거 내가 할게!
내가 죽이게 해 줘! 아버님을 위해 그 여자를 죽이면 기뻐서 내 몸의 관절 한 마디까지 춤을 출 거 같아!
......
안 돼, 그 여자는 내가 직접 끝장내야 해.
태어났을 때부터 내게 주어진... 사명이야.
맑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세 번째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또각... 또각... 또각...
한 발짝 한 발짝, 치명적인 살기를 띠고서.
또각... 또각...
한 박자 한 박자가 심장을 짓밟는 것만 같았다.
――또각.
그녀가 왔다.
...먹물 자국.
여러 모양의 먹물 자국
시야를 가득 채운 먹물 자국이 눈을 어지럽혔다.
대답해, 뭐가 보이지?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라.
......
마지막이다, 이 먹물 자국에서 뭐가 보이지?
......
시체 조각이요.
이 쓰레기가!
피... 피가 보여요...
매서운 따귀 한 방에 세상이 뒤집혔다.
피? 하하하... 그래, 몇 안 되는 너의 쓸모있는 점이지.
마침 오늘의 채혈 시간이로구나.
단단히 고정된 팔의 살갗을, 날카로운 칼날이 베었다.
뿜어져 나온 피는 용기를 점점 붉게 물들였다.
교수님, 이제 충분합니다만...
이걸론 안 죽어. 순진한 강아지나 이런 걸로 죽지.
이놈 같은 똥개는 존엄성을 모조리 잃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넘치는 피가 용기의 바깥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똑... 똑...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가, 박자에 맞춰 뭔지 모를 용액을 몸에 주입했다.
그런데, 오늘은 기지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빨리 움직이세요, 아버님께서 오늘 안에 다 옮기라 하셨습니다.
......
조심조심 링거 바늘을 뽑자, 곧바로 경보가 울렸다.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임무가 더 중요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보도 어느덧 멈췄다.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아무도... 없나요..?
대답은 없었다.
조심조심 일어나, 의무실의 문을 열어보았다.
텅 빈 복도에는, 자신을 가로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은 점점 더, 점점 더 빨라져... 전력으로 달렸다.
수송 열차의 출발 지점.
처분할 쓰레기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5분 후 출발합니다.
처리가 완료되는 즉시 새 기지로 이동하겠습니다.
도중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혹시 누가 발견하거나 미행당할 경우, 알아서 처리하고 모든 흔적을 지우세요.
알겠습니다.
숨을 죽이고, 버려진 이성질체들이 가득 실린 화물칸에 몰래 올라탔다.
시커먼 로브를 찢어 몸을 덮고, 차가운 소녀들의 시신 사이로 몸을 숨겼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고, 열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어서 출발하세요, 빨리 저 쓰레기를 전부 처리하고 오세요.
차량이 살짝 흔들리더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멀어져 가는 기지에서 다급한 경보음이 들려왔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적셨다.
그 색다른 차가움에, 버려진 이성질체들 사이에 섞여 기지를 탈출한 자신이 눈을 떴다.
......
몸을 덮은 이성질체의 시신을 밀어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시선이 닿는 곳은 온통 소녀들의 시체투성이였다.
내 이름... 내 이름은...?
마... 마흐...리안...
힘겹게 이름을 기억해냈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난... 어디서 왔더라...?
그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으며, 소녀들의 시체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왔다.
사람들... 아직 살아있어...
빗물이 몸에 두른 붕대를 적시자,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파왔다.
구해... 줘야...
머릿속에서 괴상한 장면이 솟아났다.
"재난"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광경들...
구하고... 싶어...
그들을... 구하고 싶어...
그때, 저 뒤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쓰레기는 전부 여기다 버린 거, 맞습니까?
네, 언니.
모든 인력을 동원해 그 여자를 찾아내세요.
네.
아... 안 돼...
돌아갈 순 없어...
그들을...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해...
문득 피어난 의지를 품고서, 휘청이면서도 앞으로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쉬지 않고 달렸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도, 얼마나 멀리 달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어... 언니, 왜 그렇게 모습이 엉망이야?
아... 헉, 만지지 마!
아, 괜찮아 언니, 난 엘사라고 해.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약속해.
......
언니, 엄청 많이 다쳤다...
엘사, 여기서 뭐하고 있니?
이리야 언니! 여기 도움이 필요한 난민 언니가 있어!
얘가,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이분이 어딜 봐서 난민이니!
이분의 우리의 성녀님이시란다!
성...녀? 성녀 언니?
이렇게 뵙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필시 신께서 저희를 구원하러 보내신 성녀십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괜찮습니다, 일단 이리로 오시죠.
저는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어린 양들이 잔뜩이에요.
난민... 구원...
자아, 저와 함께 가시죠...
와아, 성녀다! 성녀 언니다!
작지만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꼬옥 쥐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째선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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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황색 안개가 지하 터널을 가득 메웠다.
출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역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들 몇 명이 열차로를 따라 깡총깡총 뛰며, 괴상한 동요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누가 죽였나?"
"짹짹 참새가 죽였죠, 활과 화살로 죽였죠."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죽는 걸 봤나요?"
"윙윙 파리가 봤었죠, 작은 눈으로 죽는 걸 봤었죠."
역의 플랫폼에는, 평일의 출근길에 잡담을 나누던 직장인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검은 옷의 소녀가 몸을 밟고 지나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피를 뽑았죠?"
"물고기가 뽑았죠, 접시로 피를 뽑았죠."
연황색 안개는 이제 눈에 익은 마을까지 퍼졌다.
얼굴이 비쩍 마른 난민들은 절규했고, 하나둘씩 그 치명적인 안개 속에서 쓰러져 갔다.
이런 생지옥이 아예 다른 세상 일이라는 듯, 하얀 옷의 소녀는 미소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난민들의 시체를 넘었다.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수의를 짰죠?"
"풍뎅이가 짰었죠, 실과 바늘로 짰었죠."
"소쩍소쩍 소쩍새, 누가 무덤을 팠나요?"
"부엉이가 팠었죠, 삽과 호미로 팠었죠."
눈물범벅인 얼굴로 숨만 겨우 붙은 여성이 바닥을 기어갔다. 필사적으로 한 오라기의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본 하얀 옷의 소녀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왔고, 소녀의 거대한 낫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보였다.
여성은 공포에 질려, 입을 크게 벌리고 생애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음이 도래한 마을에, 소녀의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엄마!! 아빠!!
날 두고 가지 마... 두고 가지 말아요!!!
그 울음은 하늘을 날아가던 새도 멈추어 동정할 정도로 애절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만물이 고요함에 잠겨, 숨을 쉬는 것은 오직 울음소리의 주인뿐이었다.
일어나! 얼른 일어나란 말이야!!
우는 소녀의 가슴이 찢어질 무렵,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찾았다! 면역체다!
훌쩍... 누구세요...?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뒤틀린 남자가 환희하며 달려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꼬마야, 난 □□□이란다.
당신들은... 본 적 없는데...
겁먹은 소녀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어머니의 손을 꼬옥 쥐었다.
무서워 말렴, 우린 널 도와주러 왔단다.
네 부모는 잠들었지만, 네겐 그들을 깨울 힘이 있어.
그리고 난 네가 그 힘을 이끌어낼 방법을 안단다...
하지만...
엄마 아빠를 다시 보기 싫으냐?
전...
지금 네 부모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망설이던 소녀는 결국,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게 잡았던 두 손이, 억지로 떼어졌다.
하나였던 영혼이 찢어졌다.
안 돼... 안 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어떻게든 손을 뻗어 사라진 따스함을 되찾으려 했다.
안 돼... 그 애를 데려가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드넓은 실험실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그녀의 절규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날 정적에 빠졌던 마을 같았다.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 아이를 돌려 주세요!! 그 아이는 제 일부예요!!
제... 제 반쪽이라고요...
뭐어?
뒤틀린 얼굴의 남자가 돌아보았다.
넌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
저 녀석의 그릇에 영혼을 불어넣는 게 네 마지막 역할이었다.
......
너무 걱정하진 마, 이대로 널 잠재우진 않을 테니까.
네가 준 모멸감은 절대 잊지 않아...
목이 세게 조여져,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아주 조금... 성공까지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네 어리석은 고집 때문에, 아주 조금 남기고 실패했잖아!
눈앞이 점점 깜깜해지고, 의식이 몸에서 떠나갈 것 같았다...
뭐어... 그래도 괜찮아, 네 데이터로 녀석을 만들었으니까.
네가 남긴 아쉬움을, 그 녀석이 대신 채워줄 거야.
그러니 너는 그냥, 살아있어라. 고통스럽게,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있어.
호흡을 막던 압박이 풀렸다.
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의 이를 가는 저주가 계속 맴돌았다.
시꺼먼 어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여성 두 명이 대화하고 있었다.
빠짐없이 다 설치했나?
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질문하는 입장이 됐어?
넌 네 일이나 똑바로 하면 돼, 할망구의 잔소리를 들을 처지 아니거든?
너도 알겠지만, 우리의 계획은 도미노야.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알아, 나도 안다고!
어느 한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계획 전체에 지장이 생긴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맡은 일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후후후, 벌써 다 끝냈지롱.
작은 소녀가 손에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이아손의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깜찍한 걸 진작에 베를린 전역에다 뿌려놨다구, 캬하하하하하하!!
죄수들의 고함이 날카로운 경보음에 묻혔다.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 이상한 냄새는 또 뭐야? 불은 왜 안 켜지는데!
그때, 무언가가 폭발했다.
뒤이어 비상등이 켜졌고, 죄수들을 가두던 감방의 보안 시스템이 전부 해제됐다.
뭐... 뭐야?
어찌 됐든 자유다! 나가자!
죄수들이 기뻐하던 것도 잠시.
비상등도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엇이 시작됐는지, 그들이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왜 그래?!
끄아아아아아!!
너 갑자기 왜 그―― 오, 오지 마!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몇몇 죄수들이 끔찍한 괴물로 변하여, 감옥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짐승처럼 물어뜯기 시작했다.
죄수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지만, 소리없이 바닥에서 붕 떠올라 열리는 "이아손의 상자"를 보지 못했고...
퍼엉!
두꺼운 격리벽을 따라, 눈부신 불꽃이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안 돼... 안 돼――!!
격리벽이 무너진다!
무너진다아아아!!!
절망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몇 년이나 비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수호하던 격리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격리벽 너머로, 연황색의 안개가 마치 모래폭풍처럼 도시를 덮쳤다.
왜소한 그림자는 격리벽의 잔해를 딛고 올라서, 이아손의 상자를 껴안은 채로 미친듯이 웃어댔다.
캬하하하하하하! 오늘이 너희의 종말이다!
달려 봐, 걸음아 나 살려라 해봐! 하이에나한테 쫓기는 어린 양처럼 달려보라고!
그래봤자 도망칠 수 없어! 우리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왜소한 여자의 광소를 터뜨리는 사이, 다른 여자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 준비된 거지? 그럼 스승님께 보고할게.
아 잔소리 그만하라 했지! 내가 직접 나섰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그리고, 언니한테 보고는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넌 딴 데로 꺼져!
한가하게 수다 떠는 걸 보니, 임무를 끝마쳤나 보구나.
세 번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다른 두 여자가 공손히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스승님...
언니! 내 임무도 다 끝났어!
잘했어, 아버님께서 너희의 공로에 포상을 내리실 거야.
그럼 이제, 할 일은 하나밖에 안 남았네...
언니 언니, 그거 내가 할게!
내가 죽이게 해 줘! 아버님을 위해 그 여자를 죽이면 기뻐서 내 몸의 관절 한 마디까지 춤을 출 거 같아!
......
안 돼, 그 여자는 내가 직접 끝장내야 해.
태어났을 때부터 내게 주어진... 사명이야.
맑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세 번째 여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또각... 또각... 또각...
한 발짝 한 발짝, 치명적인 살기를 띠고서.
또각... 또각...
한 박자 한 박자가 심장을 짓밟는 것만 같았다.
――또각.
그녀가 왔다.
...먹물 자국.
여러 모양의 먹물 자국
시야를 가득 채운 먹물 자국이 눈을 어지럽혔다.
대답해, 뭐가 보이지?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라.
......
마지막이다, 이 먹물 자국에서 뭐가 보이지?
......
시체 조각이요.
이 쓰레기가!
피... 피가 보여요...
매서운 따귀 한 방에 세상이 뒤집혔다.
피? 하하하... 그래, 몇 안 되는 너의 쓸모있는 점이지.
마침 오늘의 채혈 시간이로구나.
단단히 고정된 팔의 살갗을, 날카로운 칼날이 베었다.
뿜어져 나온 피는 용기를 점점 붉게 물들였다.
교수님, 이제 충분합니다만...
이걸론 안 죽어. 순진한 강아지나 이런 걸로 죽지.
이놈 같은 똥개는 존엄성을 모조리 잃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넘치는 피가 용기의 바깥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똑... 똑...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가, 박자에 맞춰 뭔지 모를 용액을 몸에 주입했다.
그런데, 오늘은 기지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빨리 움직이세요, 아버님께서 오늘 안에 다 옮기라 하셨습니다.
......
조심조심 링거 바늘을 뽑자, 곧바로 경보가 울렸다.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임무가 더 중요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보도 어느덧 멈췄다.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아무도... 없나요..?
대답은 없었다.
조심조심 일어나, 의무실의 문을 열어보았다.
텅 빈 복도에는, 자신을 가로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은 점점 더, 점점 더 빨라져... 전력으로 달렸다.
수송 열차의 출발 지점.
처분할 쓰레기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5분 후 출발합니다.
처리가 완료되는 즉시 새 기지로 이동하겠습니다.
도중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혹시 누가 발견하거나 미행당할 경우, 알아서 처리하고 모든 흔적을 지우세요.
알겠습니다.
숨을 죽이고, 버려진 이성질체들이 가득 실린 화물칸에 몰래 올라탔다.
시커먼 로브를 찢어 몸을 덮고, 차가운 소녀들의 시신 사이로 몸을 숨겼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고, 열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어서 출발하세요, 빨리 저 쓰레기를 전부 처리하고 오세요.
차량이 살짝 흔들리더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멀어져 가는 기지에서 다급한 경보음이 들려왔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적셨다.
그 색다른 차가움에, 버려진 이성질체들 사이에 섞여 기지를 탈출한 자신이 눈을 떴다.
......
몸을 덮은 이성질체의 시신을 밀어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시선이 닿는 곳은 온통 소녀들의 시체투성이였다.
내 이름... 내 이름은...?
마... 마흐...리안...
힘겹게 이름을 기억해냈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난... 어디서 왔더라...?
그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으며, 소녀들의 시체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왔다.
사람들... 아직 살아있어...
빗물이 몸에 두른 붕대를 적시자,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파왔다.
구해... 줘야...
머릿속에서 괴상한 장면이 솟아났다.
"재난"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광경들...
구하고... 싶어...
그들을... 구하고 싶어...
그때, 저 뒤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쓰레기는 전부 여기다 버린 거, 맞습니까?
네, 언니.
모든 인력을 동원해 그 여자를 찾아내세요.
네.
아... 안 돼...
돌아갈 순 없어...
그들을...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해...
문득 피어난 의지를 품고서, 휘청이면서도 앞으로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쉬지 않고 달렸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도, 얼마나 멀리 달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어... 언니, 왜 그렇게 모습이 엉망이야?
아... 헉, 만지지 마!
아, 괜찮아 언니, 난 엘사라고 해.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약속해.
......
언니, 엄청 많이 다쳤다...
엘사, 여기서 뭐하고 있니?
이리야 언니! 여기 도움이 필요한 난민 언니가 있어!
얘가,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이분이 어딜 봐서 난민이니!
이분의 우리의 성녀님이시란다!
성...녀? 성녀 언니?
이렇게 뵙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필시 신께서 저희를 구원하러 보내신 성녀십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괜찮습니다, 일단 이리로 오시죠.
저는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어린 양들이 잔뜩이에요.
난민... 구원...
자아, 저와 함께 가시죠...
와아, 성녀다! 성녀 언니다!
작지만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꼬옥 쥐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째선지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