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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 거울단계

슈레딩거의 고양이

"몇 명이 쓰러진다 하여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영웅의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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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리아의 임시 은신처.

AN94

그럼, 이제 어떡할 거지?

안젤리아

역시,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훈작사가 뭐랬든, 여기가 윌리엄과 관련된 장소라는 것만은 확실해.

겉보기엔 버려진 양옥처럼 보여도, 안에 천군만마가 잠복하고 있다고 상정하겠어.

라이트

제 직속 팀에게도 연락할까요?

안젤리아

숫자야 많으면 좋지. 하지만 네가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놈들만 데려와.

자신 없다면,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나아.

라이트

...알겠습니다.

안젤리아

이 좌표는 베를린 도심지 내의 외딴 곳에 위치한 부유층의 동네야.

인구 밀집도가 낮아도 치안은 아주 좋지.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간 분명히 들키고 말아.

AK15

반대로, 패러데우스도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없습니다.

안젤리아

AN-94, 넌 라이트의 팀과 함께 바깥에서 경계를 서.

라이트한테는 슈타지의 긴급 집행권이 있으니까, 관계 없는 민간인한테 들켜도 소란이 일어날 걱정은 없어.

그리고, 유사시에 밖에서 지원할 사람도 필요하니까.

AN94

알겠다.

안젤리아

AK-15, RPK, 너희는 나와 함께 정문으로 돌입한다.

정보만 봐서는 안에 아무도 없겠지만... 과연 정말 그럴진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르겠지.

그래도, 현상황으로선 다른 입구를 찾을 필요는 없을 거야.

AK-15가 선봉, RPK는 항시 전자기 흐름을 확인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즉시 보고하고.

AK15

알겠습니다.

RPK16

알겠어요.

안젤리아

이상. 다른 계획도, 전술도 없다. 단 한 가지, 발포는 금지.

물론 지지리도 운이 좋아서 패러데우스의 잡것들과 조우하면 바로 머리통을 날려버려.

책임은 내가 진다.

RPK16

언제 출발할 건가요?

안젤리아

오후 3시.

빈틈없이 준비해.

안젤리아가 탁상에 펼친 지도를 접고, 잠시 뜸을 들였다.

안젤리아

...내가 술집에 쳐들어갔다고, 지금쯤이면 분명 훈작사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그러니 그쪽에서 연락할 시간도 줘야겠지. 3시까지 아무런 해명이나 소식이 없다면...

그럼 적반하장으로 나가야지. 연락 늦은 주제에 나한테 따지지 말라고.

라이트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뭔데?

라이트

잠시 둘이서만 대화 가능할까요?

안젤리아는 각자 준비 중인 리벨리온 대원들을 봤다.

안젤리아

지금?

라이트

지금밖에 없습니다.

안젤리아

...그렇다면야.

안젤리아가 의자를 끌어와, 라이트에게 앉으라 권했다.

안젤리아

뭔 얘기인데?

작전에서 빠지고 싶다고?

라이트

물론 아닙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만큼, 당신의 판단을 믿습니다.

안젤리아

내가 남한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특히나 너 같은 범생이는 나랑 성향이 정반대 아니야?

딱 봐도 요원 학교에서 도덕 과목까지 A 받을 녀석처럼 보이는걸.

라이트

어... 그런 덴 다녀본 적 없습니다만... 소련엔 요원 학교가 있나요?

안젤리아

당연하지. 왜 너넨 없어?

우리 학교의 첫 수업이 뭔지 알아? 자기 파트너로 쓸 군견 한 마리를 고르는 거였어.

그리고 졸업 시험은 그 개를 죽이는 거였지.

라이트

너무 잔인하잖습니까... 모든 요원이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가요?

안젤리아

그냥 윗놈들이 고양이파라서일 수도 있지.

라이트

엑, 농담이셨습니까?

안젤리아

안 웃겼어?

라이트

아... 제게 신경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진지하게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을 뿐이에요.

안젤리아

...말해 봐, 조언 쯤이야 내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해 주지.

그래도 너무 기대하진 마라. 방금 말했듯이, 나 같은 인물은 누군가의 모범이 될 자격 없어.

오히려, 왜 네가 날 그렇게 보는지 궁금한걸?

라이트

겸손하시네요... 그래도 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안젤리아

나처럼? 내가 어떤 사람인데?

라이트

"영웅"이요.

안젤리아

......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은 죄다 위령비 아래에 있어, 이 순진해 빠진 꼬맹아.

라이트

그런가요? 몇 명이 쓰러진다 하여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영웅의 근본입니다.

저는 당신처럼, 그 영령들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공헌하고 싶습니다.

이 한몸 바쳐서라도요.

안젤리아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라이트

물론 갈 길이 멀죠.

하지만, 그 길을 똑바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젤리아

...대체 왜 그러고 싶은데?

라이트

안젤리아 씨껜 아주 유치하고 지루한 소리겠지만...

전 진심으로 당신을 존경합니다. 누가 뭐라든, 세간이 뭐라든,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전부 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잖습니까.

안젤리아

...유치하거나 지루한 말이 아니네.

명심해라 꼬맹이, 이 시대에 이상주의자가 있을 곳은 없어. 단 한 자리도.

물론... 그렇다고 이상주의자가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너처럼 이런 문제를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야.

그만큼 귀하기도 하고.

라이트

...감사합니다.

안젤리아

그래서, 그게 나한테 의견을 구하고 싶은 일이었어?

굳이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었나? 충분히 곧은 의지를 지녔는데 뭘.

내가 뭐라 떠들어도 스스로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잖아.

라이트

네...

라이트가 자신의 가방을 뒤지더니, 속에서 반짝이는 배지를 꺼내 안젤리아에게 보였다.

안젤리아

..."U"?

슈타지 놈들도 참 웃긴 전통을 가졌구만.

상급 요원들은 다 그렇게 알파벳을 코드네임을 지어?

라이트

최초의 요원들이 딱 26명에...

우연히도 모두 이름의 이니셜이 달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안젤리아

그럼 넌 "L"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이트

이제는 이름으로 짓지 않거든요.

좋아하는 단어나, 자신의 정체성에서 따옵니다.

안젤리아

그럼 네가 고른 단어는 뭔데?

라이트

"Unknown".

"이름 모를 이".

안젤리아

......

그나저나, 꼬맹이 주제에 상급 요원이라고? 여태껏 J의 부하인 줄로만 알았더니.

라이트

J 선배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셨습니다.

제 어머니의 제자였죠.

그리고... 전 아직 상급 요원이 아닙니다.

라이트의 표정에서 안젤리아는 뭔가를 눈치챘다.

안젤리아

하, 쫄았냐?

라이트

말씀을 좀 부드럽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안젤리아

자신감을 가져, 적어도 내가 보기에 넌 J 녀석보다 우수해.

라이트

J 선배는 그저 저와 스타일이 다르셔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전 아직 나이도 어리고... 딱히 눈에 띄는 업적도 없는걸요.

제가 정말 이 배지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이트가 엄지로 만지작거리던 배지를 안젤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안젤리아는 흠칫했지만, 배지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젤리아

이걸 받으면 너한테 무슨 변화라도 생겨?

라이트

그다지 많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제 누나는 많이 화내겠죠.

안젤리아

그럼 뭘 그렇게 망설이는데?

누나가 집에서 내쫓을까 봐 그래?

라이트

그럴 리가요. 누나와는 사이 좋습니다.

라이트는 쑥스러워하며 피식했다.

안젤리아도 어깨를 으쓱하곤 배지를 돌려주려 했지만, 어째선지 라이트는 받지 않았다.

안젤리아

...응?

라이트

잠시 당신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안젤리아

뭐어?

안젤리아도 이건 예상치 못해, 적잖이 당황했다.

라이트는 손을 무릎에 올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이트

이번 임무가 끝난 뒤에 돌려 주십시오.

제가 그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다 판단하신다면.

안젤리아

이 녀석 보게... 나더러 네 졸업 시험을 봐 달라고?

라이트

네.

안젤리아

난 소련인인데.

라이트

네, 타국인이죠.

그래도 당신보다 이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양손으로 배지를 감싸쥐었다.

안젤리아

...받아두지.

그래도 네 멘토 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어.

일 끝나면 내 생각이 어떻건 간에 돌려줄 거다.

라이트는 머쓱 웃었다.

라이트

감사합니다.

RPK16

안젤리아.

라이트가 일어난 때마침 RPK-16가 말을 걸었다.

안젤리아

넌 또 왜?

RPK16

저도 당신이랑 단둘이서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안젤리아

...둘이서 짜기라도 했냐?

라이트가 슬쩍 보자, RPK-16은 화사한 미소로 답했다.

이에 라이트도 멋쩍게 웃으며 회답하고, 자리를 양보했다.

안젤리아

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그래?

RPK16

안젤리아.

RPK-16이 자리에 앉더니, 라이트가 했던 것처럼 양손을 무릎에 얹었다. 얼굴에서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웃음기가 돌연 사라져, 매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RPK16

이번 작전... 취소하면 안 될까요?

안젤리아

뭐라고?

취소하자니, 어째서?

RPK16

전부터 말했잖아요,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고요.

최소한 소련의 상층부와 의견을 조율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안젤리아

곰탱이 영감한테도 연락해봤는데, 아직도 답신이 없어.

그 영감이 내 메시지를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RPK16

그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안젤리아

지금 그럴 여유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다른 때도 아니고 이런 시기에 미샤 영감이 조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RPK16

......

안젤리아

그런 높으신 양반들은 지금 우릴 신경쓸 틈이 없다는 거야.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해... 그나저나, 너 왜 갑자기 그렇게 신중해졌냐?

RPK16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봐요.

AK-12 선배도 항상 이렇게 고민이 많았나요?

안젤리아

나 참... 여태까지 너희 둘이 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AK-12는 내 명령을 어떻게 달성할지를 생각했을 거다.

내 명령에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걱정하는 게 아니라.

RPK16

과연 AK-12 선배군요. 다들 선배를 믿는다니까요.

안젤리아

AK-15랑은 사이 나쁘던데?

RPK16

AK-15는 그저 선배한테 질투심이 나서 그럴 뿐이에요.

본인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요.

안젤리아

말이 딴 길로 샜네... 아무튼, 이번 작전은 반드시 예정대로 실행한다. 꾸물거릴 여유 따위 없어.

넌 그저 어떻게 완수할지만 생각해.

RPK16

......

RPK-16는 잠시 눈을 감았다 번쩍 떴다.

RPK16

네, 알겠어요.

안젤리아

좋았어, 슬슬 시간도 됐군.

안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젤리아

출발하자.

RPK16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