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li
"일어나, 이 바보야. 우리 모두 널 지켜보고 있어."
그리폰 기지, 지하 2층의 복도.
반란군 특전사 부대는 쓰러진 인형들의 잔해를 확인하며 지휘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지휘부장, 당측이 지하 2층에서 적 병력의 퇴각을 확인했다. 바닥에서 인간의 혈흔도 발견했지만, 최우선 목표는 아직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았다.
현재 1개 인형 소대가 지하 3층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어, 돌파 방법을 강구 중이다.
탄약 소모를 신경쓰지 말고 신속히 돌파하라. 반드시 크루거를 찾아내야 한다.
알았다. 그리고 방금 D7 구역에서 인형 1기가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맛이 간 인형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이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명을 보내 확인하도록.
알았다, 이상.
통신을 종료한 뒤, 특전사 대장은 수신호로 부대를 전진시켰다.
전력 차단 지점까지, 앞으로 570m.
전진, 전진... 토카레프는 홀로 어둠을 헤치며, 헬리안에게 전달받은 위치로 달려갔다.
PPK, 응답 바람!
여기는 PPK, 수신 감도 양호~
방금 폭발음이 들렸는데, 괜찮아요?
그냥 적이 또 마구잡이로 폭격한 거야. 여긴 저 정도 가지곤 안 무너져.
아직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요...
다만, 우리 방어선의 위치가 발각됐어.
예상보다 좀 빠르게 말이야.
......
발소리가... 가까워요...
이따 다시 연락해, 이제 움직여야 하니까.
통신 종료.
제발... 모두 무사해야 돼요...!
방어선을 구축한 지 7분 16초...
잘하는 짓이다 PPK, 우리 상황을 그렇게 간단히도 말하고 말이야.
그럼 뭐라고 해? 당장에라도 펑펑 울 거 같은 토카레프한테, 우린 지금 탄약도 바닥났고 엄폐물도 거의 다 박살나서 우리 떨거지 셋이 육탄전 벌이기 직전이라고 이실직고할까?
......
제가 엄호할게요...
나도 근접전이야 해봤지, 그런데 대뜸 총 버리고 삽으로 싸우라니까 심리적으로 좀――
적 한 명이 폭발로 인한 먼지 구름을 뚫고 인형들의 방어선에 발을 내디뎠다.
촤악!!
장작을 패는 것처럼, MP443이 삽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거부감이 들어서.
아직도 농담할 여유가 있다니, 너 보기보다 정신력이 강하구나.
......
적이 또 와요...
오라고 해, 다 썰어버리겠어.
PPK 일행은 다시 엄폐물 뒤에 조용히 숨어, 적들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MP443이 눈치를 보내자, 이를 읽은 리베롤은 천천히, 제일 앞의 엄폐물로 이동해 일차적으로 적의 머릿수를 줄이려 했다.
목표 파악 중...
조준... 사격 준비...
티잉!
총탄이 두꺼운 장갑에 튕겨 나갔다.
망할, 덩치가 왔네.
나한테 쓰려고 남겨 둔 수류탄인데... 그냥 써야겠네.
인형들은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뒀던 무기를 꺼내 대응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저 너머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리베롤, 적은?
안 보여요...
......
세 인형이, 조심조심 엄폐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쿵...
쿵쿵쿵쿵——
그와 동시에, 발소리가 빨라졌다. 중장갑 군용 인형 하나가, 집속 수류탄을 한 아름 끌어안고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후퇴!! 빨리 뒤로——
콰아앙——!!
전력 차단 지점까지, 앞으로 173m.
타타탕!!
토카레프가 문기둥 뒤에 웅크려 적의 소사를 피했다.
PPK, 저 발각됐어요. 헬리안 씨와도 연락이 닿질 않아요.
통신은 이쪽도 먹통이야. 너 아직 달릴 순 있지?
괜한 생각 마, 그냥 신호 불량일 테니까.
네, 전 괜찮아요. 잠시 발이 묶였을 뿐이에요.
놈들부터 따돌리도록 해. 안 그럼 네가 전원을 복구해도 놈들이 또 끊어버릴 거야.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쪽은 괜찮아요?
우후훗, 그야 물론이지. 녀석들을 아주 가지고 놀고 있다고.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다음 정기 연락 때 보자.
PPK가 통신을 종료했다.
그녀의 말에 기운을 얻은 듯, 토카레프는 용기를 내어 문기둥을 넘어 창문을 뚫고 도망쳤다.
타타타탕——
매섭게 날아드는 총탄들이, 그녀를 스쳤다.
방어선을 구축한 지 9분 23초...
......
딴지 안 걸어?
내가 지금 딴지 걸 기운이 있어 보여...?
PPK는 다리 한 짝만 남은 MP443을 질질 끌면서 2차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톰슨이 그들을 위해 남겨 뒀던 인형들은 이미 폭격에 당했고, PPK는 희생된 인형들의 잔해에서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회수했다.
결국 의지할 건 자신뿐이라니까.
리베롤의 유품은... 뭐 건졌어...?
......
아니. 폭발이 너무 가까워서 아무것도 안 남았어.
휴대품 정리하라 할 때 그냥 돌멩이 하나만 남겨 둘걸...
그럼 너한테 내 유품 대신 줄 수 있었을 거 아니야.
됐거든? 어차피 우리 모두 못 돌아가.
게다가, 다음에 우리가 눈 뜨면 이 기억이 있겠어?
그럼... 우릴 기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없어, 그라치. 지금 여기의 우리가 사라지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돼.
우와아, 끔찍해... 이보다 더 끔찍해질 수 있을까...
......
그야 물론 더 끔찍해질 수 있지. 네가 먼저 가버리면 나 혼자 버텨야 한다는 걸 잊지 마.
PPK... 너 의외로 사람 다독일 줄 아는 애였구나.
나 가기 전에 "카추샤" 한 곡 불러 줄래?
미안하지만 난 "에리카"밖에 몰라서.
그것도 상관없어, 죽기 직전인데 가릴 게 뭐 있다고.
콰앙——!!
적의 폭격이 더욱 가까워졌고, 1차 방어선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황야에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데♪
그 꽃은 에리카라 하네♪
포성 속에서 부르는 PPK의 노래는 어렴풋이 들렸고, 왠지 진지함이 부족하게 들렸다.
10만 마리의 자그마한 꿀벌들로부터♪
열렬하게 모여드는 것은 에리카라네♪
포성과 발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고, PPK의 떨리는 노랫소리만 남았다. MP443은 삽을 꾹 쥐고,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전력 차단 지점.
토카레프는 떨리는 손으로 끊어진 전력 공급선을 수리했다.
저 뒤에선 적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고, 당장에라도 저 모퉁이를 돌아 놈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PPK, 저 거의 다 됐어요!
얼마나 더 걸려?
37초요!
더 서둘러.
지금 이게 최대한 빨리하는 거예요!
...PPK?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허스키하게 들려, 아님 섹시하게 들려?
......
농담하지 말고,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왠지 리베롤과 그라치의 목소리도 못 들은 지 꽤 된 거 같은데...
토카레프는 나랑 얘기하기 싫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PPK랑 계속 얘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아니었으면, 저... 진작에 무너졌을 거예요...
미안해.
네?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
PPK? 왜 그래요?
전원 공급선의 수리가 끝나, 전력이 복구됐다.
토카레프,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PPK?!
콰앙――!!! 거대한 폭음이 토카레프의 귀를 때렸다.
...PPK!!!
이쪽이다!
타타타탕——!
토카레프가 길모퉁이 뒤로 몸을 굴리기가 무섭게, 적의 총탄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수류탄 던져! 엄폐에서 끌어내서 쏴라!
큰일이야, 이쪽으로 수류탄을 던지면 전원이 다시 끊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헬리안 씨와 호위 팀은 그렇게 무거운 서버를 끌고 계단을 탈 수도 없을 테고...
어떻게든 놈들을 딴 방향으로 유인해야 해!
타타탕!!
결심한 토카레프가 반격하며 엄폐물 밖으로 뛰어나와, 전원 공급선과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놓치지 마라!
쏴라!
......
탄창의 마지막 탄환으로 적을 주춤하게 만들면서, 토카레프는 문 뒤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수류탄 하나가, 그녀를 앞질렀다.
퍼엉——!
큭...!
충격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소체의 상태를 점검할 겨를이 없었다. 전원 공급선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헬리안 씨에게 최대한 시간을 벌어 줘야 해...
모두의 희생을 절대 헛되이 할 수 없어...!
목표가 계속 이동한다!
비켜, 하나 더 던진다!
콰앙!!
이번엔 폭발이 바로 뒤에서 터져, 중심을 잃은 토카레프는 한참을 바닥에 나뒹굴었다.
적들은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저놈...
피해! 아직도 총을 가졌다!
타탕——!
흐릿한 시야 속에서, 토카레프는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간신히 눈의 초점을 조절해 보니, 그건 총을 쥐고 있던 자신의 팔이었다.
영원한 어둠이 찾아와, 토카레프의 눈꺼풀을 짓눌렀다.
저도... 지금 갈게요...
그때, 그 어둠을 뚫고 차가운 손 하나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 토카레프의 눈에, 웃음기 가득한 PPK의 얼굴이 보였다.
PPK...
일어나, 이 바보야. 우리 모두 널 지켜보고 있어.
모두들...
PPK의 얼굴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토카레프는 마치 저 빛을 따라잡으려는 듯, 귀신에 홀린 듯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 저딴 괴물이 다 있어!?
타타탕!!
그 소리에 다리의 반응을 잃었다. 토카레프의 몸뚱이는 철렁하는 감각과 함께 다시 단단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의 어둠이 소용돌이쳤고, 토카레프의 마인드맵도 거기에 빨려드는 듯했다.
접근하지 마라, 이 인형들 근접전에 도가 텄어. 수류탄 하나 더 던져서 처리해.
차가운 바닥에 닿은 귀를 통해, 적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토카레프의 마음을 두들겼다.
오류일까 장난일까, 이 순간 토카레프의 마인드맵은 지금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을 떠올렸다.
끝이 다가온 그녀의 눈을 가려 주는 것처럼.
같은 날의 조금 이른 저녁 시간, 창고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던 도중.
어라? 내가 이거 여기다 뒀었구나~
그게 뭐예요?
로봇견의 잔해야.
엑... 그런 건 왜 갖고 있어요?
그냥 로봇견이 아니야, 뉴스에 나온 로봇견이지!
자기 주인을 구하려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폭탄을 막았대.
아하... 충성심의 상징이군요.
에이, 그렇게 시시한 이유로 수집한 게 아니지~
인형인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란 걸, 나 스스로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야.
어느날 어딘가에서 싸우던 우리가 무기와 탄약을 몽땅 잃더라도, 아직 내겐 이 몸뚱이가 있다!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용기를 잃지 말자는 뜻이지.
말 잘했다, 그라치!
박수 소리가 토카레프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토카레프의 눈에, 만신창이인 웰로드가 적들 사이로 걸어가, 수류탄을 꺼내는 병사 옆에 섰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에, 적의 모습은 점점 웰로드와 겹쳐 보였다.
웰로드...
눈물에 앞이 흐려졌다.
..."순순히 저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스러져 가는 이여, 저무는 날에 맞서 소리치고 격노하라.
이제 토카레프의 눈엔 웰로드의 모습만이 남았다.
적이 있다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포성도 잊고, 자신마저 잊었다.
"격노하라."
그녀의 마인드맵엔 단 한 줄의 명령어만 남았다.
달려라.
달려라!
앞으로 달려!!
인형인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야.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
맡겨 주세요...
으아아아아아아!!!
야수와 같은 포효에 특전사들이 흠칫했고, 토카레프는 괴물 같은 자세로 내달렸다.
웰로드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끝내 토카레프는 웰로드를 껴안았다.
토카레프에게,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는 웰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꺼져 가는 빛에 격노하라!!!"
이야아아아아아압!!!
토카레프는 그대로,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를 놓은 적을 덮쳤다.
콰앙——
사무실로 돌아온 비서가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국장님? 왜 불을 끄고 계십니까?
지도를 보고 있었다.
눈앞의 홀로그램 지도를 응시하던 젤린스키는 홀로그램을 끄며 비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소식인가?
네. 일부 군사기지의 반역 혐의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들도 이제 언제든지 동원 가능합니다.
소란도 해결됐고?
네,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누군가 국방부의 중추 시스템을 교란해, 내부에서 허위 지시를 퍼뜨렸습니다.
대다수의 부대가 이 허위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현재 일부 기지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되찾아, 오프라인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웃음거리가 될 일이군... 군의 시스템을 공원처럼 들락날락하다니.
어쨌든 이것으로 우리 군에게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됐어.
다행히 주도권도 우리 손 안에 있고.
젤린스키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재 상황을 상층부에게 보고해라.
네.
그리고 젤린스키는 다시 자리에 앉아, 홀로그램 지도를 다시 켜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폭풍이 다가오는구나...
타타타탕——!!
콰앙!!
콰앙——!!
끝도 없이 쏟아지는 적의 화력이 헬리안 일행을 궁지로 몰았다. 지금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며 전원이 복구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토카레프!
통신이 끊어져서 연락이 안 돼...
콰아앙!!
적은 무작정 돌입하지 않고, 포격으로 상대를 끌어낼 심산이었다.
포화 세례에 인형들 주위의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사방이 연기로 가득찼다.
어떻게든 좀 해 봐, 이러다 내 실험 기구들까지 다 작살나겠어!
톰슨... 방어선을 구축해라. 놈들의 접근을 막아...
라저!
크루거 님...
헬리안은 중상을 입은 크루거를 부축했다.
크루거 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울지 말게, 헬리안... 오늘은 본디 기쁜 날 아니었나...
기쁘긴 뭐가 기쁩니까!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습니다!
크루거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더니,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뭘 찾으십니까? 대신 꺼내드리겠습니다.
아니... 이것만큼은 내가 직접 주고 싶어...
잠시 후, 크루거의 손이 피로 얼룩진 편지 봉투를 헬리안에게 건넸다.
소박하고 간결한 통지서였다.
"친애하는 헬리안 귀하."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귀하에게 종신 계약을 제안하는 바, 이를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통지해드립니다."
"종신 계약 시작일은, 이 통지서를 받는 오늘부터 평생토록입니다."
이건...
그리폰이 존재하는 한... 자네는 우리가 지켜 주겠네.
자네에게 평생 기댈 수 있는 곳이 되어서 말이야...
그럼... 억지로라도 소개팅 나갈 필요도 없겠지? 하하하...
......
크루거 님은 "평생"이라 단어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입사 당시 그것 때문에 한소리 듣기까지 했어요.
하하... 그랬나...?
헬리안투스, 신고합니다. 금일부로 크루거 님의 대리인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 신뢰가 틀리지 않았길 바라지.
평생토록 그 신뢰에 부응하겠습니다.
어허, 신참. "평생"이란 함부로 써도 되는 말이 아니야.
자네는...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어...
덕분에, 나도 평생이란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네... 평생이란...
크루거는 묵묵히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
정말 최악의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네만... 오늘 아님 언제 말해 주겠나.
입사 10주년 축하하네, 헬리안.
깜짝 파티도 준비했는데... 아쉽게도 다 망쳐버렸군.
크루거님... 너희들도...?
그 말에, 헬리안은 놀란 얼굴로 인형들을 돌아봤다.
미안하다, 헬리안. 케이크도 다 박살이 났다...
마담 몰래 파티장 꾸미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그런데 그 XX들이 싹 다 날려버렸으니 원...
...고마워.
너희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난 충분해...
적이 불타는 잔해로 파묻힌 통로를 파헤치는 소리가 들리자, 헬리안은 그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임을 깨달았다.
눈물이, 매연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더라도...
...우린 끝까지 싸워야 해.
크루거 님...
크루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상이 심해 힘을 줄 때마다 등의 상처가 흉측하게 벌어졌다.
우린... 아직 지지 않았어.
......
크루거 씨, 제발 가만 있어요!
안 돼...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헬리안도 크루거를 말리며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그를 눕히려 했지만, 그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헬리안의 팔을 타고 떨어졌다.
크루거 님... 위험합니다, 제발...
비켜!
그의 고함에 고개를 떨군 헬리안의 눈물도 바닥에 떨어졌다.
......
크루거는 다시 바닥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형들도 모여들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쿠구궁...
계속되는 폭발에, 바닥이 요람처럼 흔들렸다.
...폭격기?
그때, 전력망이 복구되어 엘레베이터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 애들... 성공했구나!
토카레프? MP443! PPK! 리베...
황급히 지휘 태블릿을 확인했지만, 그녀들의 위치를 표시하던 반점은 더는 반짝이지 않았다.
그녀들의 희생도 헛되이 해선 안 되네... 전진해야 해...
먼저 지하 3층으로 돌아가죠. 크루거 님의 치료가 급선무입니다.
아니... 더 위로 올라간다.
예?!
저건 폭격기 소리다.
우리의 지상 건물은 진작에 전부 파괴됐어... 그런데 폭격기가 날아와 폭격했다는 건, 우릴 노린 게 아니란 뜻이다. 우리의 지원군이야.
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린 끝장입니다! 다시 퇴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토론은 둘이서 실컷 하세요, 난 내내 뛰어다녀서 이제 진짜 못 움직이겠어...
가봐서 지원군 맞으면 데리러 와 줘요.
그래서, 어떡하겠나?
......
크루거 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페르시카, 더미 AR팀을 가동하게. 다만 자네가 따라오지 않으면 이 더미들이 멀쩡하게 살아남을진 장담 못해.
엑!? 아, 안 돼요! 얘네 컨트롤만큼은 절대 양보 못해!
전원, 돌파 준비! 우리의 지원군이 왔다!
전체 대사 보기 (239줄)
그리폰 기지, 지하 2층의 복도.
반란군 특전사 부대는 쓰러진 인형들의 잔해를 확인하며 지휘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지휘부장, 당측이 지하 2층에서 적 병력의 퇴각을 확인했다. 바닥에서 인간의 혈흔도 발견했지만, 최우선 목표는 아직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았다.
현재 1개 인형 소대가 지하 3층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어, 돌파 방법을 강구 중이다.
<color=#00CCFF>탄약 소모를 신경쓰지 말고 신속히 돌파하라. 반드시 크루거를 찾아내야 한다.</color>
알았다. 그리고 방금 D7 구역에서 인형 1기가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color=#00CCFF>맛이 간 인형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이겠지.</color>
<color=#00CCFF>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명을 보내 확인하도록.</color>
알았다, 이상.
통신을 종료한 뒤, 특전사 대장은 수신호로 부대를 전진시켰다.
전력 차단 지점까지, 앞으로 570m.
전진, 전진... 토카레프는 홀로 어둠을 헤치며, 헬리안에게 전달받은 위치로 달려갔다.
PPK, 응답 바람!
<color=#00CCFF>여기는 PPK, 수신 감도 양호~</color>
방금 폭발음이 들렸는데, 괜찮아요?
<color=#00CCFF>그냥 적이 또 마구잡이로 폭격한 거야. 여긴 저 정도 가지곤 안 무너져.</color>
아직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요...
<color=#00CCFF>다만, 우리 방어선의 위치가 발각됐어.</color>
<color=#00CCFF>예상보다 좀 빠르게 말이야.</color>
......
<color=#00CCFF>발소리가... 가까워요...</color>
<color=#00CCFF>이따 다시 연락해, 이제 움직여야 하니까.</color>
통신 종료.
제발... 모두 무사해야 돼요...!
방어선을 구축한 지 7분 16초...
잘하는 짓이다 PPK, 우리 상황을 그렇게 간단히도 말하고 말이야.
그럼 뭐라고 해? 당장에라도 펑펑 울 거 같은 토카레프한테, 우린 지금 탄약도 바닥났고 엄폐물도 거의 다 박살나서 우리 떨거지 셋이 육탄전 벌이기 직전이라고 이실직고할까?
......
제가 엄호할게요...
나도 근접전이야 해봤지, 그런데 대뜸 총 버리고 삽으로 싸우라니까 심리적으로 좀――
적 한 명이 폭발로 인한 먼지 구름을 뚫고 인형들의 방어선에 발을 내디뎠다.
촤악!!
장작을 패는 것처럼, MP443이 삽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거부감이 들어서.
아직도 농담할 여유가 있다니, 너 보기보다 정신력이 강하구나.
......
적이 또 와요...
오라고 해, 다 썰어버리겠어.
PPK 일행은 다시 엄폐물 뒤에 조용히 숨어, 적들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MP443이 눈치를 보내자, 이를 읽은 리베롤은 천천히, 제일 앞의 엄폐물로 이동해 일차적으로 적의 머릿수를 줄이려 했다.
목표 파악 중...
조준... 사격 준비...
티잉!
총탄이 두꺼운 장갑에 튕겨 나갔다.
망할, 덩치가 왔네.
나한테 쓰려고 남겨 둔 수류탄인데... 그냥 써야겠네.
인형들은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뒀던 무기를 꺼내 대응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저 너머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리베롤, 적은?
안 보여요...
......
세 인형이, 조심조심 엄폐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쿵...
쿵쿵쿵쿵——
그와 동시에, 발소리가 빨라졌다. 중장갑 군용 인형 하나가, 집속 수류탄을 한 아름 끌어안고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후퇴!! 빨리 뒤로——
콰아앙——!!
전력 차단 지점까지, 앞으로 173m.
타타탕!!
토카레프가 문기둥 뒤에 웅크려 적의 소사를 피했다.
PPK, 저 발각됐어요. 헬리안 씨와도 연락이 닿질 않아요.
<color=#00CCFF>통신은 이쪽도 먹통이야. 너 아직 달릴 순 있지?</color>
<color=#00CCFF>괜한 생각 마, 그냥 신호 불량일 테니까.</color>
네, 전 괜찮아요. 잠시 발이 묶였을 뿐이에요.
<color=#00CCFF>놈들부터 따돌리도록 해. 안 그럼 네가 전원을 복구해도 놈들이 또 끊어버릴 거야.</color>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쪽은 괜찮아요?
<color=#00CCFF>우후훗, 그야 물론이지. 녀석들을 아주 가지고 놀고 있다고.</color>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color=#00CCFF>다음 정기 연락 때 보자.</color>
PPK가 통신을 종료했다.
그녀의 말에 기운을 얻은 듯, 토카레프는 용기를 내어 문기둥을 넘어 창문을 뚫고 도망쳤다.
타타타탕——
매섭게 날아드는 총탄들이, 그녀를 스쳤다.
방어선을 구축한 지 9분 23초...
......
딴지 안 걸어?
내가 지금 딴지 걸 기운이 있어 보여...?
PPK는 다리 한 짝만 남은 MP443을 질질 끌면서 2차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톰슨이 그들을 위해 남겨 뒀던 인형들은 이미 폭격에 당했고, PPK는 희생된 인형들의 잔해에서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회수했다.
결국 의지할 건 자신뿐이라니까.
리베롤의 유품은... 뭐 건졌어...?
......
아니. 폭발이 너무 가까워서 아무것도 안 남았어.
휴대품 정리하라 할 때 그냥 돌멩이 하나만 남겨 둘걸...
그럼 너한테 내 유품 대신 줄 수 있었을 거 아니야.
됐거든? 어차피 우리 모두 못 돌아가.
게다가, 다음에 우리가 눈 뜨면 이 기억이 있겠어?
그럼... 우릴 기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없어, 그라치. 지금 여기의 우리가 사라지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돼.
우와아, 끔찍해... 이보다 더 끔찍해질 수 있을까...
......
그야 물론 더 끔찍해질 수 있지. 네가 먼저 가버리면 나 혼자 버텨야 한다는 걸 잊지 마.
PPK... 너 의외로 사람 다독일 줄 아는 애였구나.
나 가기 전에 "카추샤" 한 곡 불러 줄래?
미안하지만 난 "에리카"밖에 몰라서.
그것도 상관없어, 죽기 직전인데 가릴 게 뭐 있다고.
콰앙——!!
적의 폭격이 더욱 가까워졌고, 1차 방어선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황야에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데♪
그 꽃은 에리카라 하네♪
포성 속에서 부르는 PPK의 노래는 어렴풋이 들렸고, 왠지 진지함이 부족하게 들렸다.
10만 마리의 자그마한 꿀벌들로부터♪
열렬하게 모여드는 것은 에리카라네♪
포성과 발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고, PPK의 떨리는 노랫소리만 남았다. MP443은 삽을 꾹 쥐고,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전력 차단 지점.
토카레프는 떨리는 손으로 끊어진 전력 공급선을 수리했다.
저 뒤에선 적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고, 당장에라도 저 모퉁이를 돌아 놈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PPK, 저 거의 다 됐어요!
<color=#00CCFF>얼마나 더 걸려?</color>
37초요!
<color=#00CCFF>더 서둘러.</color>
지금 이게 최대한 빨리하는 거예요!
...PPK?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color=#00CCFF>허스키하게 들려, 아님 섹시하게 들려?</color>
......
농담하지 말고,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왠지 리베롤과 그라치의 목소리도 못 들은 지 꽤 된 거 같은데...
<color=#00CCFF>토카레프는 나랑 얘기하기 싫어?</color>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PPK랑 계속 얘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아니었으면, 저... 진작에 무너졌을 거예요...
<color=#00CCFF>미안해.</color>
네?
<color=#00CCFF>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color>
PPK? 왜 그래요?
전원 공급선의 수리가 끝나, 전력이 복구됐다.
<color=#00CCFF>토카레프,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color>
PPK?!
콰앙――!!! 거대한 폭음이 토카레프의 귀를 때렸다.
...PPK!!!
이쪽이다!
타타타탕——!
토카레프가 길모퉁이 뒤로 몸을 굴리기가 무섭게, 적의 총탄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수류탄 던져! 엄폐에서 끌어내서 쏴라!
<color=#A9A9A9>큰일이야, 이쪽으로 수류탄을 던지면 전원이 다시 끊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color>
<color=#A9A9A9>헬리안 씨와 호위 팀은 그렇게 무거운 서버를 끌고 계단을 탈 수도 없을 테고...</color>
<color=#A9A9A9>어떻게든 놈들을 딴 방향으로 유인해야 해!</color>
타타탕!!
결심한 토카레프가 반격하며 엄폐물 밖으로 뛰어나와, 전원 공급선과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놓치지 마라!
쏴라!
......
탄창의 마지막 탄환으로 적을 주춤하게 만들면서, 토카레프는 문 뒤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수류탄 하나가, 그녀를 앞질렀다.
퍼엉——!
큭...!
충격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소체의 상태를 점검할 겨를이 없었다. 전원 공급선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color=#A9A9A9>헬리안 씨에게 최대한 시간을 벌어 줘야 해...</color>
<color=#A9A9A9>모두의 희생을 절대 헛되이 할 수 없어...!</color>
목표가 계속 이동한다!
비켜, 하나 더 던진다!
콰앙!!
이번엔 폭발이 바로 뒤에서 터져, 중심을 잃은 토카레프는 한참을 바닥에 나뒹굴었다.
적들은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저놈...
피해! 아직도 총을 가졌다!
타탕——!
흐릿한 시야 속에서, 토카레프는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간신히 눈의 초점을 조절해 보니, 그건 총을 쥐고 있던 자신의 팔이었다.
영원한 어둠이 찾아와, 토카레프의 눈꺼풀을 짓눌렀다.
저도... 지금 갈게요...
그때, 그 어둠을 뚫고 차가운 손 하나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 토카레프의 눈에, 웃음기 가득한 PPK의 얼굴이 보였다.
PPK...
일어나, 이 바보야. 우리 모두 널 지켜보고 있어.
모두들...
PPK의 얼굴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토카레프는 마치 저 빛을 따라잡으려는 듯, 귀신에 홀린 듯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 저딴 괴물이 다 있어!?
타타탕!!
그 소리에 다리의 반응을 잃었다. 토카레프의 몸뚱이는 철렁하는 감각과 함께 다시 단단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의 어둠이 소용돌이쳤고, 토카레프의 마인드맵도 거기에 빨려드는 듯했다.
접근하지 마라, 이 인형들 근접전에 도가 텄어. 수류탄 하나 더 던져서 처리해.
차가운 바닥에 닿은 귀를 통해, 적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토카레프의 마음을 두들겼다.
오류일까 장난일까, 이 순간 토카레프의 마인드맵은 지금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을 떠올렸다.
끝이 다가온 그녀의 눈을 가려 주는 것처럼.
같은 날의 조금 이른 저녁 시간, 창고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던 도중.
어라? 내가 이거 여기다 뒀었구나~
그게 뭐예요?
로봇견의 잔해야.
엑... 그런 건 왜 갖고 있어요?
그냥 로봇견이 아니야, 뉴스에 나온 로봇견이지!
자기 주인을 구하려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폭탄을 막았대.
아하... 충성심의 상징이군요.
에이, 그렇게 시시한 이유로 수집한 게 아니지~
인형인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란 걸, 나 스스로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야.
어느날 어딘가에서 싸우던 우리가 무기와 탄약을 몽땅 잃더라도, 아직 내겐 이 몸뚱이가 있다!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용기를 잃지 말자는 뜻이지.
말 잘했다, 그라치!
박수 소리가 토카레프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토카레프의 눈에, 만신창이인 웰로드가 적들 사이로 걸어가, 수류탄을 꺼내는 병사 옆에 섰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에, 적의 모습은 점점 웰로드와 겹쳐 보였다.
웰로드...
눈물에 앞이 흐려졌다.
..."순순히 저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스러져 가는 이여, 저무는 날에 맞서 소리치고 격노하라.
이제 토카레프의 눈엔 웰로드의 모습만이 남았다.
적이 있다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포성도 잊고, 자신마저 잊었다.
"격노하라."
그녀의 마인드맵엔 단 한 줄의 명령어만 남았다.
달려라.
<size=40>달려라!</size>
<size=50>앞으로 달려!!</size>
인형인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무기야.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
맡겨 주세요...
<size=50>으아아아아아아!!!</size>
야수와 같은 포효에 특전사들이 흠칫했고, 토카레프는 괴물 같은 자세로 내달렸다.
웰로드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끝내 토카레프는 웰로드를 껴안았다.
토카레프에게,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는 웰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size=50>"꺼져 가는 빛에 격노하라!!!"</size>
<size=50>이야아아아아아압!!!</size>
토카레프는 그대로,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를 놓은 적을 덮쳤다.
콰앙——
사무실로 돌아온 비서가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국장님? 왜 불을 끄고 계십니까?
지도를 보고 있었다.
눈앞의 홀로그램 지도를 응시하던 젤린스키는 홀로그램을 끄며 비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소식인가?
네. 일부 군사기지의 반역 혐의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들도 이제 언제든지 동원 가능합니다.
소란도 해결됐고?
네,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누군가 국방부의 중추 시스템을 교란해, 내부에서 허위 지시를 퍼뜨렸습니다.
대다수의 부대가 이 허위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현재 일부 기지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되찾아, 오프라인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웃음거리가 될 일이군... 군의 시스템을 공원처럼 들락날락하다니.
어쨌든 이것으로 우리 군에게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됐어.
다행히 주도권도 우리 손 안에 있고.
젤린스키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재 상황을 상층부에게 보고해라.
네.
그리고 젤린스키는 다시 자리에 앉아, 홀로그램 지도를 다시 켜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폭풍이 다가오는구나...
타타타탕——!!
콰앙!!
콰앙——!!
끝도 없이 쏟아지는 적의 화력이 헬리안 일행을 궁지로 몰았다. 지금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며 전원이 복구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토카레프!
통신이 끊어져서 연락이 안 돼...
콰아앙!!
적은 무작정 돌입하지 않고, 포격으로 상대를 끌어낼 심산이었다.
포화 세례에 인형들 주위의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사방이 연기로 가득찼다.
어떻게든 좀 해 봐, 이러다 내 실험 기구들까지 다 작살나겠어!
톰슨... 방어선을 구축해라. 놈들의 접근을 막아...
라저!
크루거 님...
헬리안은 중상을 입은 크루거를 부축했다.
크루거 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울지 말게, 헬리안... 오늘은 본디 기쁜 날 아니었나...
기쁘긴 뭐가 기쁩니까!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습니다!
크루거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더니,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뭘 찾으십니까? 대신 꺼내드리겠습니다.
아니... 이것만큼은 내가 직접 주고 싶어...
잠시 후, 크루거의 손이 피로 얼룩진 편지 봉투를 헬리안에게 건넸다.
소박하고 간결한 통지서였다.
"친애하는 헬리안 귀하."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귀하에게 종신 계약을 제안하는 바, 이를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통지해드립니다."
"종신 계약 시작일은, 이 통지서를 받는 오늘부터 평생토록입니다."
이건...
그리폰이 존재하는 한... 자네는 우리가 지켜 주겠네.
자네에게 평생 기댈 수 있는 곳이 되어서 말이야...
그럼... 억지로라도 소개팅 나갈 필요도 없겠지? 하하하...
......
크루거 님은 "평생"이라 단어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입사 당시 그것 때문에 한소리 듣기까지 했어요.
하하... 그랬나...?
헬리안투스, 신고합니다. 금일부로 크루거 님의 대리인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 신뢰가 틀리지 않았길 바라지.
평생토록 그 신뢰에 부응하겠습니다.
어허, 신참. "평생"이란 함부로 써도 되는 말이 아니야.
자네는...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어...
덕분에, 나도 평생이란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네... 평생이란...
크루거는 묵묵히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
정말 최악의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네만... 오늘 아님 언제 말해 주겠나.
입사 10주년 축하하네, 헬리안.
깜짝 파티도 준비했는데... 아쉽게도 다 망쳐버렸군.
크루거님... 너희들도...?
그 말에, 헬리안은 놀란 얼굴로 인형들을 돌아봤다.
미안하다, 헬리안. 케이크도 다 박살이 났다...
마담 몰래 파티장 꾸미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그런데 그 XX들이 싹 다 날려버렸으니 원...
...고마워.
너희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난 충분해...
적이 불타는 잔해로 파묻힌 통로를 파헤치는 소리가 들리자, 헬리안은 그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임을 깨달았다.
눈물이, 매연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더라도...
...우린 끝까지 싸워야 해.
크루거 님...
크루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상이 심해 힘을 줄 때마다 등의 상처가 흉측하게 벌어졌다.
우린... 아직 지지 않았어.
......
크루거 씨, 제발 가만 있어요!
안 돼...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헬리안도 크루거를 말리며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그를 눕히려 했지만, 그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헬리안의 팔을 타고 떨어졌다.
크루거 님... 위험합니다, 제발...
비켜!
그의 고함에 고개를 떨군 헬리안의 눈물도 바닥에 떨어졌다.
......
크루거는 다시 바닥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형들도 모여들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쿠구궁...
계속되는 폭발에, 바닥이 요람처럼 흔들렸다.
...폭격기?
그때, 전력망이 복구되어 엘레베이터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 애들... 성공했구나!
토카레프? MP443! PPK! 리베...
황급히 지휘 태블릿을 확인했지만, 그녀들의 위치를 표시하던 반점은 더는 반짝이지 않았다.
그녀들의 희생도 헛되이 해선 안 되네... 전진해야 해...
먼저 지하 3층으로 돌아가죠. 크루거 님의 치료가 급선무입니다.
아니... 더 위로 올라간다.
예?!
저건 폭격기 소리다.
우리의 지상 건물은 진작에 전부 파괴됐어... 그런데 폭격기가 날아와 폭격했다는 건, 우릴 노린 게 아니란 뜻이다. 우리의 지원군이야.
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린 끝장입니다! 다시 퇴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토론은 둘이서 실컷 하세요, 난 내내 뛰어다녀서 이제 진짜 못 움직이겠어...
가봐서 지원군 맞으면 데리러 와 줘요.
그래서, 어떡하겠나?
......
크루거 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페르시카, 더미 AR팀을 가동하게. 다만 자네가 따라오지 않으면 이 더미들이 멀쩡하게 살아남을진 장담 못해.
엑!? 아, 안 돼요! 얘네 컨트롤만큼은 절대 양보 못해!
전원, 돌파 준비! 우리의 지원군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