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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고문을 초청해 지휘를 부탁했다."
[ 긴급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DRF의 섀도리스입니다. 방금 들어온 국제 속보부터 먼저 전해드리겠습니다.
어젯밤, 신소련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신소련 내 다수의 PMC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습격받아, 상당수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전자 봉쇄로 인해 자세한 정보는 입수가 불가능해, 현재 추가적인 조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어서, 국내 시사 뉴스입니다.
근일, 갈라테아 그룹 산하의 제약 공장 다수에 내려진 운영 정지로 인한 여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독일위생보건위원회와 식약청, 갈라테아 그룹의 협력사의 관계자 다수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밝혀진 혐의는 실험 결과 날조, 분석 보고 위조 등이 있습니다.
전 갈라테아 직원 C 씨는 사내 고위직이 횡령과 주가 조작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 폭로했으며, 현재 경찰을 비롯한 관련 부서들이 이를 입건하여 다각도에서 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레이 생명과학연구 센터의 신임 책임자 한나 교수가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전임 책임자 그레이 교수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정황입니다.
아, 취재진이 연구 센터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현장 특파원에게 연결합니다.
......
네, 지금 저희는 현장에 나와 있는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DRF입니다. 최근 들어 소란이 끊이질 않는 갈라테아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전부터 광고 잔뜩 뿌리면서 구세주 행세하더니만, 이게 뭐예요? 믿던 사람들 싹 다 배신하고, 진지하게 연구하던 다른 데까지 탄압받게 생겼잖아요.
...네, 인터뷰에 응해 주셔 감사합니다.
이쪽 분, 갈라테아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망했어, 망했어요... 내가 주식 투자한 거 싹 다 날라갔다고요...
으하하하, 누가 이런 식으로 쫄딱 망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냐고요! 하하하하――
어... 다소 흥분하신 거 같으니 다음 분을 모셔보죠.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여간 돈 많아서 잘난 놈 하나도 없어! 겉으론 순진하고 선량한 척이나 하고, 다 더러운 사기꾼이야!
우리 목숨 가지고 장난치냐? 엉? 콱 다 죽어버려야 돼!
그리고 그레이 너! 보고 있으면 잘 들어!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돈을 먹고 튀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야, 알아들었어!! 야!!
어, 앗, 죄송합니다! 현장 상황이 다소 혼란하여 이만 인터뷰를 마치겠――
격분한 시민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며 당황한 기자가 황급히 방송국과의 통신을 끊었다.
...현장 특파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오늘의 특보를 마치겠습니다. DRF, 섀도리스입니다.
......
패러데우스의 기지. 바쁘게 동분서주하던 검은 니토들이, 들려온 익숙한 소리에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 나가.
그레이 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느닷없는 위협에 화들짝 놀라 품의 서류 더미를 바닥에 쏟은 검은 니토들은, 상관의 사나운 눈빛에 허둥지둥 방에서 빠져나갔다.
별 상관 없는 서류를 밟으며, 그레이는 천천히 의자에 걸어가 앉아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틸도 소리 없이 그녀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를 데려왔구나.
유일한 희소식이지.
잔뜩 곤두섰던 신경을 조금 풀면서, 그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스승님은 아버님께 돌려보냈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돌아와 일을 재개해야 할 텐데...
어쩌면 당분간 휴식을 취하는 편이, 그녀에게도 좋을지 모른다.
틸은 그레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틸, 몰리도는 대체할 수 없어.
내겐 네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틸...
...아버님께선 뭐라 하셨지?
그레이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틸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다만, 기분이 아주 안좋으시다는 것만은 확실해.
스승님이라면 이럴 때 어떡하면 좋을지 아실 텐데...
갈라테아 그룹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타격을 입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빌려" 쓰던 신분의 입지마저 흔들렸다.
어쩌면... 내 지금 신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레이는 의자의 팔걸이를 잡으면서 조금 분한 목소리를 냈다.
"어쩌면"이 아니야, 닥터 그레이.
지금 바로 방 빼야 해.
......!
그때, 건방진 브라메드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더니,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왔다.
...브라메드.
안녕 틸~ 안색 좋아 보이니 다행이야.
네 일은 어쩌고 여기 왔지?
설마, 스승님이 돌아와서 긴장한 거냐?
내가 왜? 몰리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나랑은 상관없는데.
그리고... 아버님께서 내게 새로운 임무를 주셨거든.
아무래도 그녀가 현장에 복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뭐라고...?
냉랭한 눈빛으로 브라메드를 노려보던 그레이가 언성을 높였다.
그 광경에, 브라메드는 실로 유쾌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버님이, 직접, 내게 내려 주신 명령이지.
브라메드는 거침없이 그레이의 맞은편에 앉아, 소파를 퉁퉁 두드리며 자만했다.
...아버님은 늘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지.
그 소련놈들 손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으니, 스승님에게 긴 휴식이 필요한 건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 나르시스를 쓰러뜨린 존재와 접촉했으니까.
스승님이 회복하면, 아버님은 다시 그녀를 중용하실 거다.
그리고 스승님이 나르시스와 함께 돌아왔을 때, 네 그 시건방진 모습을 보면 무어라 할까?
......
그 말에, 득의양양하던 브라메드도 아주 조금 얌전해졌다.
돌아오면 그때 다시 말해 주렴.
그때까진, 네 귀여운 동생이랑, 저기 저 불량품들이랑 쓰레기 다 챙겨서...
방 빼.
……
다행인 줄 알아, 자상하신 아버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으니까.
또 실패하면... 나도 너희를 더는 변호해 줄 수 없어.
......
브라메드를 노려보던 그레이는 차가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부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브라메드.
천만에... 닥터 그레이.
슈타지 본부, 국장 사무실.
사무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소파에서 계속 안절부절하던 J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김이 빠졌다.
...왜 너냐?
뭔데, 나면 안 되냐?
그러는 너는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이렇게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나 30분이나 기다렸거든? 나 참, 맨날 나한테 시간 엄수하라면서 정작 너는 꼭 아슬아슬하게 오는데?
네가 정신 차렸으면 된 거지 뭘.
하지만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는 것도 매너가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K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J의 옆에 앉았다.
가만 못 있겠나 보군?
흥분돼서 손에서 땀이 다 난다 야.
다시 제대로 된 임무를 맡을 수 있다 생각하니까, 자꾸 웃음이 나와.
K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여기가 상관의 사무실인 걸 떠올리고는 아쉬운 눈치로 도로 집어넣았다.
번아웃이라도 되진 않았을까 했더니만.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모나가 아직도 수복실에 누워있잖냐. 걔가 마인드맵의 마지막 기억이 내가 자살하려는 꼴이었는데.
기운 안 내면 걔가 돌아와서 내 머리통 깨버릴 거다 아마.
하하하, 그건 그렇군.
K가 안도하며 웃다 목소리를 낮췄다.
...다 너 혼자 짊어지려 하진 마라.
예이 예이.
또다시 문이 열려,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로미 국장이었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둘에게는 눈총도 주지 않고 자료 더미를 탁상에 쿵 내려놓기만 했다.
됐으니까 앉아.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막 일어나려던 둘을 고개도 안 돌리고 제지했다.
...이번 임무는 뭡니까?
아주 중요한 임무지.
하지만 난 따로 용무가 있어, 이번 임무의 책임자로...
K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쫙 폈다.
...특별 고문을 초청해 지휘를 부탁했다.
특별 고문이요?
그 사람의 지휘를 얌전히 따르고, 날 귀찮게 하지 마라.
임무 내용은 고문에게 다 전달했으니, 설명은 본인에게 듣도록.
알았... 슈바벤, 표정이 그게 뭐지?
...암 것도 아님다.
K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눈치였다.
그럼 나머진 알아서 해라. 슈타지의 명예에 먹칠만 하지 말도록.
말을 마치고 로미는 바로 떠나려했다.
잠깐만요.
뭐지, 케빈 요원?
이대로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 특별 고문이란 사람 소개부터 시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때, 누가 똑똑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라.
사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둘에게 아주 익숙한 얼굴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어, K? 오랜만이다.
......
K는 벙찐 표정으로 그 "특별 고문"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소개할 필요 없다 한 거다.
로미 국장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로미 국장이 우리에게 지시한 사항은, 이 갈라테아 소유의 시설들을 전부 조사해보란 거다.
지휘관은 로미 국장이 두고 간 서류를 집어, 빠르게 펼쳐 넘겨보였다.
서류에는 의도적으로 먹칠된 곳이 잔뜩이어서,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음이 명백했다.
그렇군... 그렇구나...
J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했다.
드디어 놈들한테 한방 먹이러 가는구나!
그거엔 나도 이견 없다만, 내용은 둘째 치고 이 두께...
처리할 곳이 상당할 것 같은데?
지휘관이 펼쳐 보인 서류의 두께를 가늠하며, K는 눈살을 찌푸리고 의견을 피력했다.
할 거면 신속히 움직여야 한다.
이건 놈들과의 시간 싸움이야.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증거를 빼돌리면, 우리의 패배다.
그러니 가장 중요도가 높은 곳을 정해, 그곳을 중점적으로 파헤치는 게 좋겠지.
그야 고민할 것도 없지, 그레이 그년의 사무실은 아주 비밀투성이일 테니까.
괜찮은 생각이군.
지금까지 우리의 수사에 도움이 된 정보 거의 대부분이, 거기서 유출된 것이니 말이지.
게다가 그곳은 지금 폐쇄되었으니, 자료도 제자리에 남아있을 터다.
......
지휘관은 수중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다, J와 K가 한창 토론을 벌일 때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은 좀 달라.
뭐지?
지휘관이 이의를 제기하리라 예상 못했는지, K가 궁금해하며 지휘관을 보았다.
베를린 교도소를 조사해봐야겠어.
교도소요? 그러니까 그... 저번에 댁이 한바탕 날뛰어서 잠시 폐쇄된 그 교도소 말입니까?
하지만 거기엔 딱히 남은 것도 없지 않나요? 왜 거길 조사하잔 겁니까?
어제, 잠깐이나마 안젤리아와 대화할 수 있었어.
그날의 싸움을 다시 떠올리니, 지휘관이 손에 쥔 자료에 주름이 잡혔다.
뭐라고요...?
J도 눈을 부릅 떴다.
사정이 복잡하니 요점만 말하지.
그때, 안젤리아는 패러데우스에게 협박을 받는 상황이었어.
내게 한두 마디밖에 못했지만, 힌트를 주기엔 충분했지.
힌트... 교도소와 관련된 힌트를?
K는 즉시 지휘관의 뜻을 이해했다.
소련에서 "문신"이라 하면, 딱 한 곳밖에 없거든.
지휘관은 안젤리아의 굴하지 않는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 그녀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알겠다.
그럼 다른 팀들에게 갈라테아 산하 실험실을 수사하라 지시하지.
우리는 주 부대와 그 문닫은 교도소에 가서 뭐가 있는지 살펴보자고.
그래.
K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지휘관의 시선은 다시 자료 속의 그레이의 사진을 향했다.
......
왜 그러지?
아뇨... 그냥, 댁이 와 줘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J는 웃으며 지휘관의 어깨를 툭툭 치곤, K를 뒤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
......
국장 사무실 안에는 지휘관만 남게 되었지만, 조용해지진 않았다. 얼마 안 가 바깥에서 J가 경악하며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형 아가씨들 이게 뭡니까 대체!! 슈타지의 무기고가 무슨 아가씨들 놀이터인 줄 알아요!?
에이, 쪼잔하게스리! 우리 이제 동료잖아!
이봐요 거기 당신! 짐가방에 탄약 집어넣는 거 다 봤어요! 그거 당신 총이랑 구경도 안 맞는 거잖습니까!!
어머, 나 말이야?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을 모함하면 안 되지~
아오 진짜... 그래, 탄약 털어 가는 건 이해한다 칩시다. 근데 당신은 왜 여기서 칼 갈아요?!
응? 여기서 칼 갈면 안 된다는 말 있어?
지휘관!! 애들 간수 안 합니까!?
푸흡...
결국 웃음 참지 못한 지휘관은 계속 자료를 넘겨 보면서 못 들은 척 낄낄댔다.
......
폐쇄된 베를린 교도소.
팽팽하게 쳐진 차단 테이프가 벽에 난 구멍을 막았고, 그 너머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폭동 사건 이후 불가피하게 폐쇄된 이곳의 수감자들은 전부 다른 교도소로 이송됐다.
거기에 일련의 사건들까지 겹쳐, 지금까지도 정부가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해 방치된 상태였다.
그걸 감안한다면, 여기는 확실히 눈을 피하기 좋은 사각지대야.
엄청 썰렁하네... 저번에 왔을 땐 시끌시끌했는데.
ELID의 퍼레이드를 볼 바에야 지금처럼 조용한 게 백 배는 나아...
AR-15, 무슨 생각해?
......
AR-15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하자, 지휘관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언젠가 비명횡사하더라도, 운명이 그리 정했기 때문이라 믿기로 했어요.
그녀가 햇살을 받으며 걸어와, 그 촉촉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휘관은 급히 머리를 저어 잡념을 뿌리쳤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뭣 좀 찾았어?
중앙 제어 시스템도 저번에 봤을 때랑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
이쪽 구역도 별거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수감자 생활관이에요.
여기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군.
계속 수색해줘.
나 말 아직 안 끝났거든? 저번이랑 똑같다고만 했지 아무것도 못 찾았다곤 안 했어.
뭐지?
감시 시스템은 전부 정지했고 이전의 영상 기록도 싹 다 지워졌지만, 카메라의 설치 위치는 이전 그대로야.
카메라의 배치도 화장실에서 욕실까지 커버할 정도로 빈틈없는데...
딱 한 곳, 한 물품 보관실엔 카메라가 없어.
어느 구역이지? 지도에 표시해 줘.
벌써 했지. 위치상 J가 제일 가깝네.
확인했습니다, 당장 가서 살펴봅죠.
우리도 가보자.
UMP45가 표시한 물품 보관실.
엥, 댁도 왔어요?
단서가 될 만한 건 찾았어?
아뇨, 제 부하들이 이 잡듯 뒤졌는데 청소도구 말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RO, 물건들 하나씩 다 검사해 봐.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물건을 전부 빼낸 물품 보관실에 들어가, 벽과 바닥의 모든 타일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여기, 뒤가 비었습니다.
뭐?
지휘관, 지금 거기서 뒤로 돌아봐. 응, 문 맞은편의 그 벽.
이쪽 맞아?
네, 그쪽입니다.
...지휘관님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SOP2.
나한테 맡겨!
SOP2가 지휘관을 비켜 세우고, 냅다 그 벽을 손바닥으로 쾅 쳤다.
드르륵——
어?!
우왁!?
벽이 순식간에 열려, SOP2는 내지른 팔의 관성에 덤블링을 하며 벽 너머로 사라졌다.
이건...?
비밀 문...! 아, SOP2!? 괜찮아?!
역시 뭐가 있었네. 잠깐 기다려, 우리도 거기로 갈게.
J, 너희 인원도 집합시켜.
이봐, K! 이쪽에 월척이다!
다 같이 쳐들어가 보자고.
드러난 엘레베이터의 버튼은, 수상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엘레베이터는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넓다란 창고가 나타났다.
...안젤리아 씨.
눈앞의 광경에, 지휘관은 경이로워하며 중얼거렸다.
곳곳에 버려진 화물 상자에는 갈라테아의 로고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교도소 밑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갈라테아는 이제 뭐가 나와도 이상할 거 없군.
전원, 경계 유지. J와 K는 위에 연락해 여기 있는 물건들 전부 회수해.
우리는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경계는 RO와 45가 맡는다.
에이전트, 호위를 부탁한다.
하나도 안 남기고 싹 다 챙기죠.
주인님의 명을 받드나이다. 발밑에 주의하시옵소서.
바닥에 쌓인 먼지 사이로 난 흔적을 따라, 지휘관은 패러데우스의 뒤를 쫓았다.
넓은 창고 안으로 난 미로 같은 통로를, 지휘관은 철혈 인형들의 호위와 함께 천천히 나아갔다.
진짜 적응 안 되는 광경이야...
내 말이.
AR팀의 비아냥에도 아랑곳않고, 에이전트는 말없이 계속 선두를 맡았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 여기 이 발자국은 아직 선명합니다.
흠?
지휘관이 철혈 인형들의 호위에서 잠시 벗어나, 에이전트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제 막 짐을 옮기기 시작했나 보군... 놈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아키텍트도 함께 왔다면 바로 여길 폭파해버렸을 텐데.
지휘관, 호위 범위에서 벗어나지 말아 줄래? 상대가 그 괴물들이라면 잠깐의 방심도 금물이라고.
아직까지는 적의 기척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을 수색해 보시겠사옵니까?
댄들라이?
이 창고에서 익숙한 기운이 풍기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습니다.
애매모호한 정보에, 지휘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경계했다.
...잠깐.
위치를 모르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중입니다.
초고속이동... 너무 빠릅니다. 지휘관님! 물러나세요!
부웅——
귀에 익은 진동음이 다시 들렸고, 지휘관이 반응했을 땐 이미 그 하얀 그림자가 코앞에 있었다.
검은 칼과 하얀 검이 부딪혀 튀긴 불똥이, 한순간 통로를 밝혔다.
치잇, 너 뭐야 인마!
......
눈깜짝할 새에 10m 넘게 물러난 틸이, 잽싸게 나섰던 엑스큐셔너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엑스큐셔너, 괜찮느냐?
아니.
틸의 검을 받아낸 엑스큐셔너의 팔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놈이랑 칼 몇 번 더 맞대면 인공근육 교체비로 통장 거덜나겠어.
......
지휘관도 틸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여기 나타났다는 것은, 즉...
......!
틸이 고개를 살짝 들더니, 잔상을 남기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놈이 도망친다! 쫓아라!
예!
......
발자국은 여기서 끊겼사옵니다.
이 주변에 숨을 만한 공간은 안 보이는데...
목표를 놓쳤다. 45, 눈에 띄는 거 없어?
아니, 아무것도. 화물 몇 개 찾아낸 건 J랑 K한테 넘겼어.
우리도 지금 지휘관한테 가는 중이야.
알았다, 오면서 흔적은 없나 주의해.
지휘관을 통신을 종료하고 태블릿의 화면을 껐다.
매끄러운 액정 표면에 비치는 것은 지휘관의 얼굴과... 하얀 그림자.
뒤다!
부웅——
챙! 챙!
금속이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두 번 일었다. 이번엔 엑스큐셔너와 알케미스트가 동시에 반응해 틸의 검을 받아낸 것이었다.
하핫, 기다렸다!
지나치게 예리한 칼인걸... 바람 가르는 소리가 너무 커.
눈치를 안 챌래야 안 챌 수가 없어.
......
틸은 패러데우스가 남긴 실험 설비 위에 서, 칼을 가볍게 털어 다시 진동음을 냈다.
더 이상 오지 마라.
돌아가라.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렇게 걱정되나? 저 안에 뭐가 있길래 그러지?
......
...휠체어다.
뭐가 있다고?
문앞에 휠체어가 있는 것 같다.
스케어크로우?
드론, 위치했습니다. ...호오.
수갑과 족쇄에, 아직 닦지 못한 신선한 혈흔까지.
누군가를 포박하기 위한 휠체어가 분명하군요.
안젤리아... 안젤리아 씨다!
안젤리아 씨! 거기 있습니까!!
매우 두꺼운 문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더라도 듣지 못할 겁니다.
안젤리아 씨!!
부웅——
하얀 검이 지휘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
...막을 셈이라면, 너부터 해치울 수밖에.
지휘관 옆에서 나선 엑스큐셔너가 검은 칼을 스윽 닦았다.
다른 쪽의 알케미스트도, 틸의 얼굴을 보며 흥분했다.
주인님의 명이시다.
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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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DRF의 섀도리스입니다. 방금 들어온 국제 속보부터 먼저 전해드리겠습니다.
어젯밤, 신소련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신소련 내 다수의 PMC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습격받아, 상당수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전자 봉쇄로 인해 자세한 정보는 입수가 불가능해, 현재 추가적인 조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어서, 국내 시사 뉴스입니다.
근일, 갈라테아 그룹 산하의 제약 공장 다수에 내려진 운영 정지로 인한 여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독일위생보건위원회와 식약청, 갈라테아 그룹의 협력사의 관계자 다수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밝혀진 혐의는 실험 결과 날조, 분석 보고 위조 등이 있습니다.
전 갈라테아 직원 C 씨는 사내 고위직이 횡령과 주가 조작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 폭로했으며, 현재 경찰을 비롯한 관련 부서들이 이를 입건하여 다각도에서 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레이 생명과학연구 센터의 신임 책임자 한나 교수가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전임 책임자 그레이 교수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정황입니다.
아, 취재진이 연구 센터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현장 특파원에게 연결합니다.
......
네, 지금 저희는 현장에 나와 있는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DRF입니다. 최근 들어 소란이 끊이질 않는 갈라테아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전부터 광고 잔뜩 뿌리면서 구세주 행세하더니만, 이게 뭐예요? 믿던 사람들 싹 다 배신하고, 진지하게 연구하던 다른 데까지 탄압받게 생겼잖아요.
...네, 인터뷰에 응해 주셔 감사합니다.
이쪽 분, 갈라테아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망했어, 망했어요... 내가 주식 투자한 거 싹 다 날라갔다고요...
으하하하, 누가 이런 식으로 쫄딱 망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냐고요! 하하하하――
어... 다소 흥분하신 거 같으니 다음 분을 모셔보죠. 제약 공장 가동 정지 사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여간 돈 많아서 잘난 놈 하나도 없어! 겉으론 순진하고 선량한 척이나 하고, 다 더러운 사기꾼이야!
우리 목숨 가지고 장난치냐? 엉? 콱 다 죽어버려야 돼!
그리고 그레이 너! 보고 있으면 잘 들어!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돈을 먹고 튀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야, 알아들었어!! 야!!
어, 앗, 죄송합니다! 현장 상황이 다소 혼란하여 이만 인터뷰를 마치겠――
격분한 시민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며 당황한 기자가 황급히 방송국과의 통신을 끊었다.
...현장 특파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오늘의 특보를 마치겠습니다. DRF, 섀도리스입니다.
......
패러데우스의 기지. 바쁘게 동분서주하던 검은 니토들이, 들려온 익숙한 소리에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 나가.
그레이 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느닷없는 위협에 화들짝 놀라 품의 서류 더미를 바닥에 쏟은 검은 니토들은, 상관의 사나운 눈빛에 허둥지둥 방에서 빠져나갔다.
별 상관 없는 서류를 밟으며, 그레이는 천천히 의자에 걸어가 앉아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틸도 소리 없이 그녀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를 데려왔구나.
유일한 희소식이지.
잔뜩 곤두섰던 신경을 조금 풀면서, 그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스승님은 아버님께 돌려보냈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돌아와 일을 재개해야 할 텐데...
어쩌면 당분간 휴식을 취하는 편이, 그녀에게도 좋을지 모른다.
틸은 그레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틸, 몰리도는 대체할 수 없어.
내겐 네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틸...
...아버님께선 뭐라 하셨지?
그레이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틸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다만, 기분이 아주 안좋으시다는 것만은 확실해.
스승님이라면 이럴 때 어떡하면 좋을지 아실 텐데...
갈라테아 그룹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타격을 입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빌려" 쓰던 신분의 입지마저 흔들렸다.
어쩌면... 내 지금 신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레이는 의자의 팔걸이를 잡으면서 조금 분한 목소리를 냈다.
"어쩌면"이 아니야, 닥터 그레이.
지금 바로 방 빼야 해.
......!
그때, 건방진 브라메드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더니,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왔다.
...브라메드.
안녕 틸~ 안색 좋아 보이니 다행이야.
네 일은 어쩌고 여기 왔지?
설마, 스승님이 돌아와서 긴장한 거냐?
내가 왜? 몰리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나랑은 상관없는데.
그리고... 아버님께서 내게 새로운 임무를 주셨거든.
아무래도 그녀가 현장에 복귀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뭐라고...?
냉랭한 눈빛으로 브라메드를 노려보던 그레이가 언성을 높였다.
그 광경에, 브라메드는 실로 유쾌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버님이, 직접, 내게 내려 주신 명령이지.
브라메드는 거침없이 그레이의 맞은편에 앉아, 소파를 퉁퉁 두드리며 자만했다.
...아버님은 늘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지.
그 소련놈들 손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으니, 스승님에게 긴 휴식이 필요한 건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 나르시스를 쓰러뜨린 존재와 접촉했으니까.
스승님이 회복하면, 아버님은 다시 그녀를 중용하실 거다.
그리고 스승님이 나르시스와 함께 돌아왔을 때, 네 그 시건방진 모습을 보면 무어라 할까?
......
그 말에, 득의양양하던 브라메드도 아주 조금 얌전해졌다.
돌아오면 그때 다시 말해 주렴.
그때까진, 네 귀여운 동생이랑, 저기 저 불량품들이랑 쓰레기 다 챙겨서...
방 빼.
……
다행인 줄 알아, 자상하신 아버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으니까.
또 실패하면... 나도 너희를 더는 변호해 줄 수 없어.
......
브라메드를 노려보던 그레이는 차가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부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브라메드.
천만에... 닥터 그레이.
슈타지 본부, 국장 사무실.
사무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소파에서 계속 안절부절하던 J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김이 빠졌다.
...왜 너냐?
뭔데, 나면 안 되냐?
그러는 너는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이렇게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나 30분이나 기다렸거든? 나 참, 맨날 나한테 시간 엄수하라면서 정작 너는 꼭 아슬아슬하게 오는데?
네가 정신 차렸으면 된 거지 뭘.
하지만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는 것도 매너가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K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J의 옆에 앉았다.
가만 못 있겠나 보군?
흥분돼서 손에서 땀이 다 난다 야.
다시 제대로 된 임무를 맡을 수 있다 생각하니까, 자꾸 웃음이 나와.
K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여기가 상관의 사무실인 걸 떠올리고는 아쉬운 눈치로 도로 집어넣았다.
번아웃이라도 되진 않았을까 했더니만.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모나가 아직도 수복실에 누워있잖냐. 걔가 마인드맵의 마지막 기억이 내가 자살하려는 꼴이었는데.
기운 안 내면 걔가 돌아와서 내 머리통 깨버릴 거다 아마.
하하하, 그건 그렇군.
K가 안도하며 웃다 목소리를 낮췄다.
...다 너 혼자 짊어지려 하진 마라.
예이 예이.
또다시 문이 열려,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로미 국장이었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둘에게는 눈총도 주지 않고 자료 더미를 탁상에 쿵 내려놓기만 했다.
됐으니까 앉아.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막 일어나려던 둘을 고개도 안 돌리고 제지했다.
...이번 임무는 뭡니까?
아주 중요한 임무지.
하지만 난 따로 용무가 있어, 이번 임무의 책임자로...
K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쫙 폈다.
...특별 고문을 초청해 지휘를 부탁했다.
특별 고문이요?
그 사람의 지휘를 얌전히 따르고, 날 귀찮게 하지 마라.
임무 내용은 고문에게 다 전달했으니, 설명은 본인에게 듣도록.
알았... 슈바벤, 표정이 그게 뭐지?
...암 것도 아님다.
K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눈치였다.
그럼 나머진 알아서 해라. 슈타지의 명예에 먹칠만 하지 말도록.
말을 마치고 로미는 바로 떠나려했다.
잠깐만요.
뭐지, 케빈 요원?
이대로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 특별 고문이란 사람 소개부터 시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때, 누가 똑똑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라.
사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둘에게 아주 익숙한 얼굴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어, K? 오랜만이다.
......
K는 벙찐 표정으로 그 "특별 고문"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소개할 필요 없다 한 거다.
로미 국장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로미 국장이 우리에게 지시한 사항은, 이 갈라테아 소유의 시설들을 전부 조사해보란 거다.
지휘관은 로미 국장이 두고 간 서류를 집어, 빠르게 펼쳐 넘겨보였다.
서류에는 의도적으로 먹칠된 곳이 잔뜩이어서,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음이 명백했다.
그렇군... 그렇구나...
J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했다.
드디어 놈들한테 한방 먹이러 가는구나!
그거엔 나도 이견 없다만, 내용은 둘째 치고 이 두께...
처리할 곳이 상당할 것 같은데?
지휘관이 펼쳐 보인 서류의 두께를 가늠하며, K는 눈살을 찌푸리고 의견을 피력했다.
할 거면 신속히 움직여야 한다.
이건 놈들과의 시간 싸움이야.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증거를 빼돌리면, 우리의 패배다.
그러니 가장 중요도가 높은 곳을 정해, 그곳을 중점적으로 파헤치는 게 좋겠지.
그야 고민할 것도 없지, 그레이 그년의 사무실은 아주 비밀투성이일 테니까.
괜찮은 생각이군.
지금까지 우리의 수사에 도움이 된 정보 거의 대부분이, 거기서 유출된 것이니 말이지.
게다가 그곳은 지금 폐쇄되었으니, 자료도 제자리에 남아있을 터다.
......
지휘관은 수중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다, J와 K가 한창 토론을 벌일 때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은 좀 달라.
뭐지?
지휘관이 이의를 제기하리라 예상 못했는지, K가 궁금해하며 지휘관을 보았다.
베를린 교도소를 조사해봐야겠어.
교도소요? 그러니까 그... 저번에 댁이 한바탕 날뛰어서 잠시 폐쇄된 그 교도소 말입니까?
하지만 거기엔 딱히 남은 것도 없지 않나요? 왜 거길 조사하잔 겁니까?
어제, 잠깐이나마 안젤리아와 대화할 수 있었어.
그날의 싸움을 다시 떠올리니, 지휘관이 손에 쥔 자료에 주름이 잡혔다.
뭐라고요...?
J도 눈을 부릅 떴다.
사정이 복잡하니 요점만 말하지.
그때, 안젤리아는 패러데우스에게 협박을 받는 상황이었어.
내게 한두 마디밖에 못했지만, 힌트를 주기엔 충분했지.
힌트... 교도소와 관련된 힌트를?
K는 즉시 지휘관의 뜻을 이해했다.
소련에서 "문신"이라 하면, 딱 한 곳밖에 없거든.
지휘관은 안젤리아의 굴하지 않는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 그녀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알겠다.
그럼 다른 팀들에게 갈라테아 산하 실험실을 수사하라 지시하지.
우리는 주 부대와 그 문닫은 교도소에 가서 뭐가 있는지 살펴보자고.
그래.
K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지휘관의 시선은 다시 자료 속의 그레이의 사진을 향했다.
......
왜 그러지?
아뇨... 그냥, 댁이 와 줘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J는 웃으며 지휘관의 어깨를 툭툭 치곤, K를 뒤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
......
국장 사무실 안에는 지휘관만 남게 되었지만, 조용해지진 않았다. 얼마 안 가 바깥에서 J가 경악하며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size=55>인형 아가씨들 이게 뭡니까 대체!! 슈타지의 무기고가 무슨 아가씨들 놀이터인 줄 알아요!?</size>
에이, 쪼잔하게스리! 우리 이제 동료잖아!
이봐요 거기 당신! 짐가방에 탄약 집어넣는 거 다 봤어요! 그거 당신 총이랑 구경도 안 맞는 거잖습니까!!
어머, 나 말이야?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을 모함하면 안 되지~
아오 진짜... 그래, 탄약 털어 가는 건 이해한다 칩시다. 근데 당신은 왜 여기서 칼 갈아요?!
응? 여기서 칼 갈면 안 된다는 말 있어?
지휘관!! 애들 간수 안 합니까!?
푸흡...
결국 웃음 참지 못한 지휘관은 계속 자료를 넘겨 보면서 못 들은 척 낄낄댔다.
......
폐쇄된 베를린 교도소.
팽팽하게 쳐진 차단 테이프가 벽에 난 구멍을 막았고, 그 너머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폭동 사건 이후 불가피하게 폐쇄된 이곳의 수감자들은 전부 다른 교도소로 이송됐다.
거기에 일련의 사건들까지 겹쳐, 지금까지도 정부가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해 방치된 상태였다.
그걸 감안한다면, 여기는 확실히 눈을 피하기 좋은 사각지대야.
엄청 썰렁하네... 저번에 왔을 땐 시끌시끌했는데.
ELID의 퍼레이드를 볼 바에야 지금처럼 조용한 게 백 배는 나아...
AR-15, 무슨 생각해?
......
AR-15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하자, 지휘관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언젠가 비명횡사하더라도, 운명이 그리 정했기 때문이라 믿기로 했어요.
그녀가 햇살을 받으며 걸어와, 그 촉촉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휘관은 급히 머리를 저어 잡념을 뿌리쳤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뭣 좀 찾았어?
<color=#00CCFF>중앙 제어 시스템도 저번에 봤을 때랑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color>
<color=#00CCFF>이쪽 구역도 별거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수감자 생활관이에요.</color>
<color=#00CCFF>여기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군.</color>
계속 수색해줘.
<color=#00CCFF>나 말 아직 안 끝났거든? 저번이랑 똑같다고만 했지 아무것도 못 찾았다곤 안 했어.</color>
뭐지?
<color=#00CCFF>감시 시스템은 전부 정지했고 이전의 영상 기록도 싹 다 지워졌지만, 카메라의 설치 위치는 이전 그대로야.</color>
<color=#00CCFF>카메라의 배치도 화장실에서 욕실까지 커버할 정도로 빈틈없는데...</color>
<color=#00CCFF>딱 한 곳, 한 물품 보관실엔 카메라가 없어.</color>
어느 구역이지? 지도에 표시해 줘.
<color=#00CCFF>벌써 했지. 위치상 J가 제일 가깝네.</color>
<color=#00CCFF>확인했습니다, 당장 가서 살펴봅죠.</color>
우리도 가보자.
UMP45가 표시한 물품 보관실.
엥, 댁도 왔어요?
단서가 될 만한 건 찾았어?
아뇨, 제 부하들이 이 잡듯 뒤졌는데 청소도구 말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RO, 물건들 하나씩 다 검사해 봐.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물건을 전부 빼낸 물품 보관실에 들어가, 벽과 바닥의 모든 타일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여기, 뒤가 비었습니다.
뭐?
<color=#00CCFF>지휘관, 지금 거기서 뒤로 돌아봐. 응, 문 맞은편의 그 벽.</color>
이쪽 맞아?
네, 그쪽입니다.
...지휘관님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SOP2.
나한테 맡겨!
SOP2가 지휘관을 비켜 세우고, 냅다 그 벽을 손바닥으로 쾅 쳤다.
드르륵——
어?!
우왁!?
벽이 순식간에 열려, SOP2는 내지른 팔의 관성에 덤블링을 하며 벽 너머로 사라졌다.
이건...?
비밀 문...! 아, SOP2!? 괜찮아?!
<color=#00CCFF>역시 뭐가 있었네. 잠깐 기다려, 우리도 거기로 갈게.</color>
J, 너희 인원도 집합시켜.
이봐, K! 이쪽에 월척이다!
다 같이 쳐들어가 보자고.
드러난 엘레베이터의 버튼은, 수상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엘레베이터는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넓다란 창고가 나타났다.
...안젤리아 씨.
눈앞의 광경에, 지휘관은 경이로워하며 중얼거렸다.
곳곳에 버려진 화물 상자에는 갈라테아의 로고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교도소 밑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갈라테아는 이제 뭐가 나와도 이상할 거 없군.
전원, 경계 유지. J와 K는 위에 연락해 여기 있는 물건들 전부 회수해.
우리는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경계는 RO와 45가 맡는다.
에이전트, 호위를 부탁한다.
하나도 안 남기고 싹 다 챙기죠.
주인님의 명을 받드나이다. 발밑에 주의하시옵소서.
바닥에 쌓인 먼지 사이로 난 흔적을 따라, 지휘관은 패러데우스의 뒤를 쫓았다.
넓은 창고 안으로 난 미로 같은 통로를, 지휘관은 철혈 인형들의 호위와 함께 천천히 나아갔다.
진짜 적응 안 되는 광경이야...
내 말이.
AR팀의 비아냥에도 아랑곳않고, 에이전트는 말없이 계속 선두를 맡았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 여기 이 발자국은 아직 선명합니다.
흠?
지휘관이 철혈 인형들의 호위에서 잠시 벗어나, 에이전트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제 막 짐을 옮기기 시작했나 보군... 놈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아키텍트도 함께 왔다면 바로 여길 폭파해버렸을 텐데.
지휘관, 호위 범위에서 벗어나지 말아 줄래? 상대가 그 괴물들이라면 잠깐의 방심도 금물이라고.
아직까지는 적의 기척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을 수색해 보시겠사옵니까?
댄들라이?
이 창고에서 익숙한 기운이 풍기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습니다.
애매모호한 정보에, 지휘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경계했다.
...잠깐.
위치를 모르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중입니다.
초고속이동... 너무 빠릅니다. 지휘관님! 물러나세요!
부웅——
귀에 익은 진동음이 다시 들렸고, 지휘관이 반응했을 땐 이미 그 하얀 그림자가 코앞에 있었다.
검은 칼과 하얀 검이 부딪혀 튀긴 불똥이, 한순간 통로를 밝혔다.
치잇, 너 뭐야 인마!
......
눈깜짝할 새에 10m 넘게 물러난 틸이, 잽싸게 나섰던 엑스큐셔너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엑스큐셔너, 괜찮느냐?
아니.
틸의 검을 받아낸 엑스큐셔너의 팔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놈이랑 칼 몇 번 더 맞대면 인공근육 교체비로 통장 거덜나겠어.
......
지휘관도 틸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여기 나타났다는 것은, 즉...
......!
틸이 고개를 살짝 들더니, 잔상을 남기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놈이 도망친다! 쫓아라!
예!
......
발자국은 여기서 끊겼사옵니다.
이 주변에 숨을 만한 공간은 안 보이는데...
목표를 놓쳤다. 45, 눈에 띄는 거 없어?
<color=#00CCFF>아니, 아무것도. 화물 몇 개 찾아낸 건 J랑 K한테 넘겼어.</color>
<color=#00CCFF>우리도 지금 지휘관한테 가는 중이야.</color>
알았다, 오면서 흔적은 없나 주의해.
지휘관을 통신을 종료하고 태블릿의 화면을 껐다.
매끄러운 액정 표면에 비치는 것은 지휘관의 얼굴과... 하얀 그림자.
뒤다!
부웅——
챙! 챙!
금속이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두 번 일었다. 이번엔 엑스큐셔너와 알케미스트가 동시에 반응해 틸의 검을 받아낸 것이었다.
하핫, 기다렸다!
지나치게 예리한 칼인걸... 바람 가르는 소리가 너무 커.
눈치를 안 챌래야 안 챌 수가 없어.
......
틸은 패러데우스가 남긴 실험 설비 위에 서, 칼을 가볍게 털어 다시 진동음을 냈다.
더 이상 오지 마라.
돌아가라.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렇게 걱정되나? 저 안에 뭐가 있길래 그러지?
......
...휠체어다.
뭐가 있다고?
문앞에 휠체어가 있는 것 같다.
스케어크로우?
드론, 위치했습니다. ...호오.
수갑과 족쇄에, 아직 닦지 못한 신선한 혈흔까지.
누군가를 포박하기 위한 휠체어가 분명하군요.
안젤리아... 안젤리아 씨다!
안젤리아 씨! 거기 있습니까!!
매우 두꺼운 문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더라도 듣지 못할 겁니다.
안젤리아 씨!!
부웅——
하얀 검이 지휘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
...막을 셈이라면, 너부터 해치울 수밖에.
지휘관 옆에서 나선 엑스큐셔너가 검은 칼을 스윽 닦았다.
다른 쪽의 알케미스트도, 틸의 얼굴을 보며 흥분했다.
주인님의 명이시다.
해치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