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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 · 고정점

종점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저 이후에도 분명 같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분명 나타날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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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도

......

몰리도는 철수하는 리벨리온의 두 인형들을 뒤쫓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난장판이 된 플랫폼을 옅은 미소로 훑어보곤, 그대로 탑으로 돌아가려 했다.

몰리도

...어?

그런데 그녀가 뒤로 돌으니, 입구 앞에 틸이 서 있었다.

부탁...

몰리도

수복이 덜 된 모양이네?

얌전히 수복 캡슐에 누워있지 않고 여기서 뭐하니?

부탁한다...

몰리도의 말에 섞인 조소는, 틸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를, 제발 그레이를 구해 줘.

몰리도

......

몰리도가 시선을 살짝 내리니, 틸의 품에는 그녀가 탑의 밑바닥에서 겨우 건져낸 그레이의 몸뚱이가 안겨 있었다.

몰리도

...이미 죽었잖아.

아버님께... 아버님은 되살려 주실 수 있잖나...

몰리도 언니가, 아버님께 청원한다면...

몰리도

포기해.

몰리도는 고개를 저으며 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쳤다.

<size=50>"우리"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나!?</size>

몰리도

아니, 저것들과 다를 바 없어.

애초에, 니토는 완전면역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부수적인 폐기물일 뿐인걸.

우리도 니토인 이상, 그냥 실패작인 거야.

우린 되살아날 수 없어. 되살릴 방법도 없고, 되살릴 가치도 없어.

뭣...

몰리도

모두 일회용품인 거야.

너도, 나도,

...그레이도.

......

털썩.

틸은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몰리도는 탑의 계단을 올랐다. 저 뒤에서 처절한 통곡이 들려와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베를린 시가지의 어느 병원.

조용하던 복도에 다급한 발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달리는 지휘관이었다.

지휘관

드디어... 드디어 이 때가 왔구나...

크루거의 병실에 다다른 지휘관은 노크할 겨를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헬리안

지휘관?! 깜짝이야...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페르시카

아직 준비 안 끝났는데!

크루거

허허허, 뭐 어떤가. 어서 오게.

지휘관

여러분... 크루거 씨!

하고픈 말이 수백 개는 됐지만, 하나도 목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크루거

다 아네, 다 알아.

헬리안

...이런 장면은 영 어색하군요.

페르시카

저기, 나 팔 저리니까 빨리 해 줄래?

나 평소에 드는 물건 중에 제일 무거운 게 커피잔이거든?

지휘관

...제가 들죠.

모두를 한 번씩 와락 껴안은 뒤, 지휘관은 페르시카에게서 케이크를 넘겨 받았다.

지휘관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크루거

지금 당장 자네와 한잔 하고 싶을 정도로 좋지. 다만...

크루거가 옆을 힐끔 보자 과연, 헬리안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지휘관과 크루거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

알겠습니다, 일단은 안정을 취하셔야죠. 크루거 씨의 상태가 호전되면 그때 한잔하겠습니다.

페르시카

대체 왜 그런 정신줄 놓게 만드는 걸 마시나 몰라...

헬리안

페르시카 씨, 간식이나 사러 갈까요?

무슨 비밀 신호라도 받은 듯, 헬리안이 대뜸 페르시카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페르시카

아 참, 그러고 보니 기지 나오면서 나 커피랑 설탕 하나도 못 챙겼어!

헬리안

그런 건 좀 잊어버리면――

두 사람이 나가고, 병실에는 크루거와 지휘관만 남았다.

크루거

......

지휘관

......

잠깐의 요란함이 사라지니, 병실도 바깥도 다시 조용해졌다.

지휘관은 크루거를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휘관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까?

혹시 제가 또 뭐 잘못했나요?

크루거

지금 자네와 단둘이 남아서 한소리할 생각이라면...

세상에 인정미가 어딨겠나.

지휘관

......

크루거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어.

자네에겐 턱없이 부족한 말인 건 아네만, 그래도 정말 수고했네.

지휘관

뭐... 이쪽 업계가 힘들다는 건 알고 시작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첫날에 카리나가 저한테 "철혈 찌끄래기나 간간히 해치우면 된다"고 했을 때를 생각하면, 사장님이 정말 너무했단 생각은 듭니다.

크루거

하하핫... 세상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래도, 결과적으로 자네는 그 모든 것을 견뎌내지 않았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잠재력은 스스로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일을 해내게 만들지.

지휘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크루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관과 눈빛을 교환했다.

지휘관

게다가 제게 한 번 그만둘 기회를 주셨지만, 제 의지로 거절했죠.

탈린에서 팔디스키까지 가면서, 저 같은 사람이 보면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때부터인가 한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제 힘이 닿는 한 모두를 구하고, 소중한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요.

거기에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제 눈앞에서는 절대 어떤 비극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가 정말 뭔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루거

......

지휘관

하지만 베를린에서 그 환상은 처참하게 깨졌습니다.

크루거 씨... 저는 한없이 보잘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제 힘이 닿는 범위는, 제 생각보다 훨씬 좁았습니다.

훈작사가 말하기론, 이런 게 현실이라더군요.

크루거

...그래서, 자넨 어쩔 셈인가?

지휘관

승복할 수 없습니다.

2년 전의 저라면, "사려 깊고 원대한 안목을 가진" 훈작사의 명령에 순종했겠죠.

하지만 지금은 승복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장담하는 미래는 너무 아름다워서, 제게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허황된 기대 속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를 붙잡고 싶습니다.

크루거

......

크루거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 관두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루거

...내가 알던 친구가 있네.

자넨 그를 떠올리게 해. 지금의 자네는 그와 똑같았어.

지휘관

...어떤 분이었습니까?

크루거

나와 그 친구는 입대한 지 몇 년 안 된 풋내기였지.

나는 정찰병, 그는 전투공병. 어지간해서는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었을 게야.

그런데 어느 날, 우린 같은 일에 휘말리고 말았어.

지휘관

일이라니, 설마...

크루거

우리가 맡은 유적 탐사 작업에 문제가 발생했네.

북란도 사건 이래, 유적에서 뭐가 잘못되면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두가 알고 있었지.

하도 오래돼서 자세히는 이제 기억도 안 나네만... 결과적으로는, 나와 그 친구가 함께 현장에 돌입해, 그 사건을 막아냈네.

크루거

그 일로 우리는 영웅이라 칭송받았지. 그리고 그 일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지휘관

......

크루거

그 후로 몇 번 만나 보니, 그 친구와 나의 생각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는 것을 알았네.

미래로의 방향성, 이상, 그리고 조국에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그때만 해도, 난 우리가 평생 함께할 전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지휘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군요.

크루거

그래, 결국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었어.

지휘관. 자네가 지금까지 겪은 일처럼, 현실은 잔혹하다네.

이상도, 혈기도, 노력도,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보잘것없어.

결국 나는 떠나는 길을 택했네.

지휘관

그럼... 그 친구분은?

크루거

그는 군대에 남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네.

처음엔 그 친구가 무슨 생각인지 몰랐어. 어쩌면, 우리 둘 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바꾸려 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는 이상에 뒤틀린 괴물이 되어버렸네.

나는 내 길의 끝이 전혀 보이질 않고.

지휘관

......

크루거

그래서 자네에게서 과거의 그림자가 보이는 걸세.

자네가 걷는 길은, 우리가 걸었던 길과 똑같아. 너무나도 길고, 더없이 괴롭지.

나는 내 반평생 동안 수많은 것을 잃었네. 이상, 혈기, 그리고 그 친구.

그래서 의심이 들어. 정말 이 길에 끝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지휘관

...그 친구분의 성함,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크루거

카터.

지휘관

......

크루거

내 이렇게 말하는데도, 자네는 계속 이 길을 고집할 셈인가?

지휘관

...예.

크루거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지휘관의 시선이 교차했다. 과거를 이야기하며 점점 수심이 가득해지는 크루거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르게, 지휘관의 눈동자 속 불길은 점점 거세게 불타올랐다.

크루거

어째서지?

지휘관

아무리 멀고, 아무리 길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길이더라도...

단 하나, 사장님과는 견해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을, 지휘관은 또박또박 말했다.

지휘관

저는 굳게 믿습니다. 이 길에는, 분명 끝이 있다고.

크루거

...자네에겐 보이나?

지휘관은 싱긋 웃었다.

지휘관

아뇨,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쩌면 그 끝을 보고, 또 도달하는 게 제가 아닐 수도 있죠.

그럼에도 저는 그 끝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겠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저 이후에도 분명 같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분명 나타날 테죠.

크루거 씨, 우리의 이상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걸리더라도, 분명 그 끝은 나타날 겁니다.

크루거

......

지휘관의 말을 들은 크루거가 입을 살짝 벌렸다.

가만 있지 못하고, 흥분에 몸서리쳤다.

만약 몸 상태가 조금만 더 나았어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크루거

...그렇군.

그래, 맞는 말이야... 어쩌면 우린 그 끝을 보지도 못하고 스러져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한 일은 결코 헛되지 않고, 끝을 향한 또 하나의 초석이 될 게야.

그는 지휘관을 바라보며 심호흡하며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크루거

어쩌면... 자네에게서 나아가기 마땅한 방향을 볼 수도 있겠구만.

나는 거의 포기했었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자네 말을 들으니, 조금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지휘관

네, 함께 세상을 새로 써야지 않겠습니까.

크루거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자네는 벌써 여기서 소중한 것을 얻었군.

그래도 베를린 여행은 이제 마무리해야지.

지휘관

예.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나에게는, 이제 시작이다.

분명 가시투성이인 길이다.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아직 몰랐다.

머뭇거릴 때, 뒤돌아볼 수 없었다.

멈춰 섰을 때, 내 눈은 원한으로 충혈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았던 맹세는 전부 백지가 되어버렸다.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웠던 전우들도, 함께 절망을 마주했다.

그러나, 몸뚱이는 바스러질지언정,

몸부림쳤던 흔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내게는 이제 달리 선택지가 없다.

그저, 맞서 싸울 수밖에.

......

[고정점 - END]

......

............

............

아베르누스.

잊은 줄 알았던 익숙한 발소리가 귓가를 때리자, 안젤리아는 눈을 떴다.

몰리도

오랜만이에요, 안젤리아 씨.

안젤리아

......몰리도냐.

모습이 완전히 변했음에도, 안젤리아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몰리도

보고 싶지 않았나요? 브레멘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때가 그립진 않았어요?

...그때 말했잖아요. 금방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음흉하게 미소지으며, 몰리도는 허리를 살짝 숙여 유리벽 너머의 안젤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몰리도

아베르누스에 온 걸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