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 경사각
과거가 너를 따라잡았을 때야 너는 도피가 해결법이 아니란 것을 깨닫지.
............
베를린, 그리폰 임시 기지.
부웅――
전자 스크린만이 빛을 발하던 어두운 방의 문이 활짝 열려, 밖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광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페르시카는 문 옆에 서 있던 AR-15와 가장 먼저 눈을 마주쳤다.
...설탕 3배로 부탁해.
페르시카 씨,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진찰 안 받으셔도 되겠어요?
엘리아나가 힘조절은 했겠지만 한참을 기절하셨는데...
너야말로 머리에 문제 없는지나 보라고... 2주 연속으로 눈 붙일 새도 없이 작업해서 간만에 좀 푹 잤더니 왜 자꾸 기절했네 마네 하는 건데.
그때 엘리아나 보러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정말 기절당한 게 아닌 거 맞아요?
AR-15도 얼굴이 새파래져서 의료팀 부르려고 난리였는데.
그 침대 얼마나 안 썼으면 먼지가 그렇게 잔뜩 쌓여있어? 왜 눈 떠 보니 침대 위인가 했다.
아무튼 내 실험실은 왜 또 폭격당한 것처럼 엉망이야? 너네 짓이야?
아니 바닥에 커피까지 엎질러진 채로 널브러져 계셨던데 어떻게 그게 그냥 엎어져 잔 겁니까... 진짜 후두부 맞고 기절한 게 아니라고요?
아 진짜 실험실에 발 디딜 틈도 없어서 아래층 가서 좀 누웠다니까!
어휴 그만그만. SCAR-L... 아, 지가 엘리아나랬나? 걔 이야기나 계속하자. 걔, 마인드맵에 문제가 좀 있어.
네? 무슨 문제요?!
지휘관이 벌써 녀석한테 임무 주고 보냈는데요!?
내심 예상했던 바인지, 지휘관은 힘없이 한숨을 푹 쉬기만 했다.
어떤 문제인가요? 심각한 수준입니까?
눈 뜨자마자 날뛰면서 인질극까지 벌인 걸로 봐서는 멀쩡한 것 같지만 말이죠.
에휴, 너네 수준으로 알아챘으면 내가 여기 있지도 않았지.
뭐어 별로 심각한 건 아니야, 그냥 마인드맵에 삭제 불가능한 프로그램이 하나 심어져 있는데, 대충 바이러스 비슷한 거라 생각하면 돼.
바이러스라니 충분히 심각한 문제잖아요! 중요한 비밀 임무까지 맡겼다고요!
아 글쎄 괜찮대도? 그 프로그램은 지정된 환경이 완벽하게 갖춰져야만 실행되는 거야. 원래 군에서 구르던 애니까 아마 보안을 위해 심은 기반 명령이겠지.
하지만 전쟁은 끝난 지 오래에 설계자도 이젠 찾을 수 없으니 딱히 큰 영향 없을걸?
...어떤 "바이러스"인가요?
그건 아직 잘 몰라서 알아봐야 해, 전쟁통이라 괜찮을 법한 건 죄다 해보던 시대라서 말이지... 그래도 걔를 상시 관찰하는 정도로 커버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수준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임무 수행에 말썽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군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급하다고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임무 보내놓고선 왜 나한테 클레임이야?
AR-15, 커피 멀었어? 나 당분 없인 머리 안 돌아가.
윽... 바로 가요!
베를린의 중앙 철도역, 인산인해를 이루는 검표소 앞.
예정 출발 시각으로부터 벌써 30분이나 지났건만 열차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아, 셰릴은 초조해하며 연거푸 시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야, 내가 직원한테 물어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짐 보고 있어.
잠깐!
...잠깐만.
짐을 한아름 안은 채 계단에 앉아 있던 시모가 갑자기 팔을 붙잡자, 셰릴은 그 이유를 대강 파악했다.
너 설마 보조 배터리 8개 벌써 다 써버린 건 아니지...?
응, 여기.
사모가 짐가방 하나를 셰릴에게 돌려줬다.
아니 다 썼다고 왜 나한테 주는데!?
넌 진짜 어휴... 적당한 사람만 찾았어도 넌 집에다 처박아 두고 왔어! 어떻게 일주일 내내 알아봤는데 아무도 없냐고...
사모가 비실대며 머리를 기대니, 셰릴은 또 눈알을 굴렸다.
싫은 티 팍팍 내며 한손으로 사모를 부축하던 셰릴이 문득 무언가 떠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을 반짝이며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야, 저기 가서 앉아!
셰릴은 인파를 헤치며 사모를 자판기 옆으로 끌고 가 앉혔다.
그리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 자판기의 플러그를 뽑고 사모의 케이블을 꽂았다.
후아아... 진정된다아...
하아아아...
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지금으로선 셰릴도 어쩔 수 없었다. 사모의 뒤로 짐들을 쌓아 케이블을 숨긴 그녀는 툭 내뱉듯 쏘아붙였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가서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글쎄... 역무원들 지금 너 상대할 시간 없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사모가 졸린 눈으로 역의 천장에 걸린 스크린을 가리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돌아가던 열차 도착 예정 카운트다운이 붉은색의 "운행 정지"로 바뀌어 있었다.
개찰구 근처의 역무원들도 어디론가 급하게 향하며 무전기에 대고 조용히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어...? 뭐야, 저게 무슨 일――
그 물음에 답하듯, 역 전체에 안내 방송이 흘렀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런 시설의 고장으로 인해 베를린 중앙 철도역은 현시간부로 임시 교통 관제에 들어가, 모든 열차의 운행이 긴급 중단됐습니다. 운행 정상화 시간은 별도 통지해 드리겠습니다.
승차권의 환불을 희망하시는 손님께서는 1번부터 4번 유인창구에서 가능하오니, 승차권을 가지고 문의해 주십시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승객 여러분의 협조와 양해에 감사드립니다.
뭣... 내가... 내가 밤을 새면서 짐을 쌌더니만!
뭐어 여행권 환불하게 됐으니 상관없지만... 왜 하필이면 짐덩이들 끌고 여기까지 와서 방송하는 거냐고오오! 좀 진작에 말하면 어디 덧나냐!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닐 거야.
갑자기 벌떡 일어선 사모는 웬일인지 표정까지 진지했다.
평범한 시설 고장이라면 신호까지 차단할 필요는 없지.
여기, 네트워크가 단절됐어.
...그러니까 신호 안 잡힌다고?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와이파이 느려진 게 아니...라...?
셰릴이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마구 두드려 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연결이 되질 않았다.
뭐야 이거...? 진짜야? 왜 기차역이 전파를 차단해?
쟤네가 그런 짓을 왜 해.
전파 송신탑이나 교통 허브가 마비된다면, 보통 그건 그런 데를 노리는 테러범 짓이지.
...테러?
셰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의외로 상상력 좀 되는구나? 소설에 쓸 소재 생각해내는 데 딱이겠어! 잘됐다, 표 환불한 다음에 우리 얘기 좀 하자!
아앗——
셰릴이 다시 사모를 끌고 기세 좋게 표를 환불해 주는 창구를 찾아 나섰지만, 넓은 역사에 사람들로 북적이니 금세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 환불 창구가 어디였더라? 분명 이 근처였는데...
찾아내도 지금은 줄 엄청 길 테니까 그냥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돼?
...엄청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그냥 사람이 드글드글할 뿐인데 불길하긴 뭐가 불길해?
입으론 그리 말하면서도, 셰릴도 내심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앞뒤로 각양각색의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는 광경은 마치 거센 물길이 몰아치는 강의 한가운데에 고립된 것만 같았다.
"그나마 이 녀석이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셰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셰릴.
왜 또?
무언가를 본 사모가 우뚝 멈춰 섰다. 셰릴은 눈앞의 인파에 시야가 가려져 사모가 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들었다. 기억 속 저 깊은 곳에서 끄집어져 나온, 아주 익숙한 소리를.
――――
......!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일상. 모두가 기대어 살아가는 일상이란 익숙한 환경, 익숙한 사람, 익숙한 일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일상을 깨부수는 것은 생소함의 침입이다.
한 번 생소함이 침입하고 나면, 그 원인을 제거하더라도 깨지기 이전의 일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셰릴이 매일 지나던 학교 복도에 무장한 괴한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
아직 어린아이였던 셰릴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총을 든 생소한 사람들이 익숙했던 복도에 쳐들어와, 익숙했던 학우들과 선생님을 쏴 죽이곤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기밖에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과거의 먹구름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셰릴은 짐가방 위에 눕혀진 자신을 발견했다.
사모는 그런 그녀를 짐가방째로 밀며 패닉에 빠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숨을 데 찾으러. 역사 출입구는 교통이 정체돼서 안 돼, 목숨을 부지하려면 저거 해결될 때까지 숨어있어야 해.
............
콰앙!!
폭음에 셰릴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인 것은, 점점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겁에 질려 성난 욕설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앞다퉈 출입구로 몰려드는 광경이었다.
익숙한 광경과 익숙한 무력감에, 셰릴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이쪽!
잠깐, 여긴――꺄악!
셰릴이 더 따지기 전에, 사모는 그녀를 여자 화장실 안으로 쑤셔넣었다.
베를린 중앙 철도역, 관계자용 통로.
아수라장이 된 철도역 안팎으로 사람들이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통에, 몇 안 되는 출입구는 완전히 접근 불가였다.
그 와중, 엘리아나는 팀을 이끌고 봉쇄 구역에 발을 디뎠다.
정지!
통제 중이던 경찰이 멀리서 이 완전무장한 "무리"를 발견하곤 한걸음에 달려와 엘리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현재 중앙 철도역은 비상 경계 상태라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다.
너희는 누구지? 통행증 있나?
......
엘리아나는 대답 대신 품에서 통행증을 꺼내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걸 힐끗 훑어본 경찰은 전혀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건 우리 시스템에서 발급한 게 아니다.
뭐예요? 이건――
......
엘리아나가 먼저 SCR을 툭 쳐서 제지하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M26, 슈타지 특수 채널로 연결.
...지금 이게 뭐하잔 거지?
경찰은 그들의 태도가 무척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인형들이군. 말을 못 알아듣는 거냐?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하기 전에 썩 꺼져!
...해결.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을――
삐빅.
M26이 입을 연 거의 동시에, 경찰이 허리춤에 찬 무전기가 소리를 냈다.
받아.
............
경찰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는 엘리아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흘기면서 무전기에 응답했다. 액정 스크린에 표기된 번호는 이 지역의 담당 경감이었다.
상층부에서 긴급 통지다, 통행증 No. 425093을 소지한 부대를 들여보내라.
...예.
그들의 요구에도 협조하도록.
그리고 앞으로 뒷자리 090에서 150의 통행증은 전부 통행 허가하고 협조하라, 이상.
...알겠습니다.
경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관계자용 통로로 진입하십시오, 이쪽입니다.
엘리아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원들과 함께 경찰의 안내에 따라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현재 상황 보고.
약 10분 전, 다수의 철도역에서 역무원이 폭발물로 의심되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어 즉시 베를린의 모든 철도역을 봉쇄했습니다.
현재 대테러 부대와 폭발물 처리반이 오는 중입니다.
그게 우리다.
현시간부로 모든 위험물품 검사 권한을 우리에게 이관해.
주목. 중앙 철도역의 지도를 공유했으니, 지금부터 각자 임무를 내리겠다.
M26, 너는 B2층 주차장과 지상의 승객 이용 공간을 수색해.
M249는 베를린에서 출발하는 모든 차량을 점검.
컨텐더, 너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든 차량.
SCR, 넌 나와 함께 화물 차량과 물류 창고를 수색한다.
잠깐만요, 제3자의 화물 검사엔 특수 수사 영장이 필요합니다.
검사용 장비가 있어 가방을 열어보진 않을 거다.
의심되는 것은 통째로 가져가고 필요한 절차는 후속 처리하겠어.
그러니 경찰은 용의자 색출 및 몸수색에 집중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신 여기에 서명해 주겠습니까? 다른 부서에 설명해야 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통행증을 두고 가겠다. 그게 서명보다 확실하겠지.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때, 중앙홀에서의 소란이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벌써 잊혀진 듯한 화장실 안. 셰릴이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배낭에 걸린 곰돌이 액세서리를 마구 주물러대서, 불쌍한 곰돌이는 점점 얼굴이 찌그러져 가는 중이었다.
사모는 슬그머니 문에 걸린 팻말을 "청소 중"으로 뒤집은 뒤 셰릴의 상태를 관찰했다.
이 인간 아가씨는 평소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사니까 잔뜩 겁에 질렸겠지.
울거나 하면 귀찮아지는데... 그런 상황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그럼...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때마침 셰릴도 동동 구르던 발을 멈추곤 사모를 등진 채 무어라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모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고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마, 내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줄게..
......헤헤.
에헤헤헤헤...!
셰릴은 예상 밖의 얼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소름끼치는 미소에 오히려 사모가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는 사모를 역으로 셰릴이 덥석 붙잡았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야! 내게 행운이 찾아왔어!
엑... 행운?
지금 철도역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해? 네 상상력을 다시 발휘해 봐.
......강도?
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역 한복판에서 강도는 무슨 강도야, 누가 누구한테 강도짓을 하는데?
어......
대체 어떤 강도가 통신망도 차단하고 열차 탑승장도 봉쇄하고 베를린의 모든 열차 운행을 멈추겠어?
나한테 물어봐봐, 얼른!
어어... 뭔데?
이런 거 아닐까?! 어느 범죄 집단이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는 계획이 타기도 전에 들통나 버려서,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고 승객들 사이에 숨어서 빠져나가려는 거라든가! 그 왜 있잖아, 리X X슨 나오는 영화처럼!
그렇다기엔 경찰의 반응이 너무 과격한데...에...
사모는 말을 아끼고 싶었지만, 셰릴의 반짝이는 두 눈이 뿜는 빛이 워낙에 강렬해 당황스러워 우물쭈물했다.
그럼 이런 건? 이 역에 ELID 반응이 포착된 거야! ELID 감염자가 섞여 들어왔다던가, 아니면 생화학 테러라던가...
...경보기 조용한데?
사모가 천장에 설치된 붕괴 복사 경보기를 가리켰다. 그 말대로, 지금은 아무 이상 없었다.
그래, 모든 가능성이 배제됐지. 그렇다면 정답은 단 하나!
그건 바로――!
......
일단 내려와서 물 마시고 진정할래?
사모는 흥분할대로 흥분해 아예 세면대 위로 올라 추리를 늘어놓는 셰릴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봤다.
끊지 마 지금 영감이 샘솟는단 말이야! 분명 창작의 신이 날 가엾이 여기셔서 내게 선물을 내려 주신 거야! 이곳을 내 신작의 무대로 만들어 준 거라고!
아무튼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이 철도역에 폭탄이 설치됐고, 범죄 집단은 역 안에 갇힌 승객들을 인질로 삼은 거지! 그래, 우리도 말이야!
......
셰릴은 전혀 위로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고 싶어진 사모는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기운 넘쳐 보이네... 그래도 바깥 상황이 정리되면 빨리 떠나야――
삐이...
불현듯 알람 시계의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방금 들었어?
설마...
내 이야기에 너무 어울리는 효과음인데...?
삑... 삑... 삑...
첫 알림음을 시작으로, 그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주 침착한 속도로, 불길하게 반복됐다.
......
어쩜 저리도 끝내주는 직감을 가졌을까. 사모는 이젠 아예 울고 싶어졌다.
시한 폭탄이야.
소리가 나는 세면대의 아래를 보니, 구석에 정말로 시한 폭탄이 붙어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21초.
사모는 이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자신이 셰릴을 업고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을지 계산했다.
바깥의 인파를 고려하면 폭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긴 어렵지만, 적어도 경상에 그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해!
사모가 방금 셰릴이 있던 위치로 몸을 날렸지만, 허탕이었다.
엑, 셰릴?
......
셰릴은 어느샌가 세면대 밑으로 내려와 사모처럼 아래를 보고 있었다.
역시 내 추리는 틀리지 않았어! 드디어 이 날이 왔다!
무슨 소리야!? 시간 없――뭐해 지금?!
셰릴이 갑자기 무거운 짐가방을 벌컥 열더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시간은 무자비하게 4초가 흘렀다.
잔량 경고가 뜬 배터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 사모가 당장 셰릴을 끌고 나가려 했지만, 그 전에 셰릴이먼저 꺼낸 튼튼한 상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윽... 뭐, 뭐야 그건?
상자를 열고 셰릴이 안에서 꺼낸 것은...
질! 소! 냉! 동! 총~!
뭣...
그런 게 왜 있어?! 여행인데 짐가방에다...
드디어 이걸 쓸 때가 온 거야.
셰릴은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게 질소냉동총의 노즐을 폭탄의 틈새에 쑤셔넣고 방아쇠를 당겨 내부로 액체 질소를 주입했다.
능숙한 자세와 침착한 뒷모습. 사모의 기억 속 단편과 겹쳐 보였다.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엄청 능숙하잖아? 그리고 이 자세, 눈에 익은데...
셰릴의 "처치"에, 빠르게 흐르던 타이머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다만 셰릴은 어째선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허무해하는 얼굴이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 없어 셰릴, 빨리 가자.
......응.
사모가 셰릴을 감싸고 화장실 밖으로 나서자, 그 순간 온 세상의 소음이 한꺼번에 그들에게 쏟아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마치 총이 겨눠진 듯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저쪽이 출구인가 봐!
인파에서 좀 떨어지는 게 좋겠어, 넌 밟혔다간 큰일 나.
알아, 하지만——
퍼엉!!
승강장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거리는 있었지만, 셰릴을 펄쩍 뛰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폭탄이 더 있나 봐!
그렇겠지.
폭발로 인한 충격과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한층 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저수지에 쏟아진 먹물처럼, 공포가 저절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혼탁해진 물은 이내 요동치고, 험악한 파도로 변했다.
도망쳐! 저 안에 폭탄이 있어!!
빨리 내보내 줘! 안에 사람이 죽었다고! 살려줘!!
미, 밀지 마십시오!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대피하십시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까지 폭발이 일어나니, 사람들은 앞의 통로가 무너진 돌더미로 막힌 것도 모른 채 그저 출구를 향해 몰려들 뿐이었다.
보안요원들에 더해 파견된 경찰들까지 이들을 소산시키려 했지만, 파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막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멍때리지 마, 우리도 빨리 빠져나가야 해.
양팔에 짐가방 4개를 든 사모가 힘겹게 인파를 헤치며 다른 출구로 통하는 길을 찾았다.
그런데 셰릴은 화장실 문 앞에서 우두커니, 저 요동치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어.
지금 무슨 헛소리를——
그때, 저 인파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여기도 폭탄이 있다! 곧 터진다!"
사람의 파도는 그 말에 끓는 물처럼 솟구쳤고, 아무도 저지 못할 기세로 사방으로 다시 퍼쳤다.
그 파도 속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바닥에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젠장, 이쪽으로 온다!
다른 데로 피하자!
하지만 인파는 순식간에 들이닥쳐, 셰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거구의 남성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균형까지 잃었지만, 다행히 그대로 인파 바깥으로 튕겨나가 밟히는 것은 면했다.
괜찮아?
괜찮아...
부축해 줄 테니까 얼른 일어나, 저쪽으로 가자.
...폭탄이 고작 한두 개 설치됐을 리가 없어. 저 사람들 따라가도 덩달아 죽을 뿐이야.
통로도 막혀서 폭발물 처리반이 제때 도착할 수 없을 테고, 경찰도 뾰족한 수 없을 테고...
아무래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봐...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삐끗한 발목을 문지르며, 셰릴은 상심한 듯 툴툴댔다.
...그거 내놔.
사모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뭘?
질소냉동총.
터지기 전에 얼리면 처리반 올 때까지 시간 벌 수 있겠지? 그럼 우리 모두 구조받을 수 있어.
일리 있는 말이네, 하지만 너 이거 쓸 줄이나 알아? 그냥 내가――
네가 쓰는 거 봐서 이젠 알아. 그리고 지금 그 상태로 어떻게 막 달려? 내가 하는 게 나아.
사모는 건네받은 질소냉동총을 자연스레 고쳐쥐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녀가 쓰던 물건인 것처럼.
그럼 난...
일단 너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연락 유지해야 하니까 휴대폰 간수 잘 하고, 배터리 바닥나기 전에는 돌아올게.
알았어... 그럼,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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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그리폰 임시 기지.
부웅――
전자 스크린만이 빛을 발하던 어두운 방의 문이 활짝 열려, 밖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광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페르시카는 문 옆에 서 있던 AR-15와 가장 먼저 눈을 마주쳤다.
...설탕 3배로 부탁해.
페르시카 씨,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진찰 안 받으셔도 되겠어요?
엘리아나가 힘조절은 했겠지만 한참을 기절하셨는데...
너야말로 머리에 문제 없는지나 보라고... 2주 연속으로 눈 붙일 새도 없이 작업해서 간만에 좀 푹 잤더니 왜 자꾸 기절했네 마네 하는 건데.
그때 엘리아나 보러 오라고 하셨잖습니까, 정말 기절당한 게 아닌 거 맞아요?
AR-15도 얼굴이 새파래져서 의료팀 부르려고 난리였는데.
그 침대 얼마나 안 썼으면 먼지가 그렇게 잔뜩 쌓여있어? 왜 눈 떠 보니 침대 위인가 했다.
아무튼 내 실험실은 왜 또 폭격당한 것처럼 엉망이야? 너네 짓이야?
아니 바닥에 커피까지 엎질러진 채로 널브러져 계셨던데 어떻게 그게 그냥 엎어져 잔 겁니까... 진짜 후두부 맞고 기절한 게 아니라고요?
아 진짜 실험실에 발 디딜 틈도 없어서 아래층 가서 좀 누웠다니까!
어휴 그만그만. SCAR-L... 아, 지가 엘리아나랬나? 걔 이야기나 계속하자. 걔, 마인드맵에 문제가 좀 있어.
네? 무슨 문제요?!
지휘관이 벌써 녀석한테 임무 주고 보냈는데요!?
내심 예상했던 바인지, 지휘관은 힘없이 한숨을 푹 쉬기만 했다.
어떤 문제인가요? 심각한 수준입니까?
눈 뜨자마자 날뛰면서 인질극까지 벌인 걸로 봐서는 멀쩡한 것 같지만 말이죠.
에휴, 너네 수준으로 알아챘으면 내가 여기 있지도 않았지.
뭐어 별로 심각한 건 아니야, 그냥 마인드맵에 삭제 불가능한 프로그램이 하나 심어져 있는데, 대충 바이러스 비슷한 거라 생각하면 돼.
바이러스라니 충분히 심각한 문제잖아요! 중요한 비밀 임무까지 맡겼다고요!
아 글쎄 괜찮대도? 그 프로그램은 지정된 환경이 완벽하게 갖춰져야만 실행되는 거야. 원래 군에서 구르던 애니까 아마 보안을 위해 심은 기반 명령이겠지.
하지만 전쟁은 끝난 지 오래에 설계자도 이젠 찾을 수 없으니 딱히 큰 영향 없을걸?
...어떤 "바이러스"인가요?
그건 아직 잘 몰라서 알아봐야 해, 전쟁통이라 괜찮을 법한 건 죄다 해보던 시대라서 말이지... 그래도 걔를 상시 관찰하는 정도로 커버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수준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임무 수행에 말썽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군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급하다고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임무 보내놓고선 왜 나한테 클레임이야?
AR-15, 커피 멀었어? 나 당분 없인 머리 안 돌아가.
윽... 바로 가요!
베를린의 중앙 철도역, 인산인해를 이루는 검표소 앞.
예정 출발 시각으로부터 벌써 30분이나 지났건만 열차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아, 셰릴은 초조해하며 연거푸 시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야, 내가 직원한테 물어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짐 보고 있어.
잠깐!
...잠깐만.
짐을 한아름 안은 채 계단에 앉아 있던 시모가 갑자기 팔을 붙잡자, 셰릴은 그 이유를 대강 파악했다.
너 설마 보조 배터리 8개 벌써 다 써버린 건 아니지...?
응, 여기.
사모가 짐가방 하나를 셰릴에게 돌려줬다.
아니 다 썼다고 왜 나한테 주는데!?
넌 진짜 어휴... 적당한 사람만 찾았어도 넌 집에다 처박아 두고 왔어! 어떻게 일주일 내내 알아봤는데 아무도 없냐고...
사모가 비실대며 머리를 기대니, 셰릴은 또 눈알을 굴렸다.
싫은 티 팍팍 내며 한손으로 사모를 부축하던 셰릴이 문득 무언가 떠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을 반짝이며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야, 저기 가서 앉아!
셰릴은 인파를 헤치며 사모를 자판기 옆으로 끌고 가 앉혔다.
그리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 자판기의 플러그를 뽑고 사모의 케이블을 꽂았다.
후아아... 진정된다아...
하아아아...
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지금으로선 셰릴도 어쩔 수 없었다. 사모의 뒤로 짐들을 쌓아 케이블을 숨긴 그녀는 툭 내뱉듯 쏘아붙였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가서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글쎄... 역무원들 지금 너 상대할 시간 없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사모가 졸린 눈으로 역의 천장에 걸린 스크린을 가리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돌아가던 열차 도착 예정 카운트다운이 붉은색의 "운행 정지"로 바뀌어 있었다.
개찰구 근처의 역무원들도 어디론가 급하게 향하며 무전기에 대고 조용히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어...? 뭐야, 저게 무슨 일――
그 물음에 답하듯, 역 전체에 안내 방송이 흘렀다.
<color=#00CCFF>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런 시설의 고장으로 인해 베를린 중앙 철도역은 현시간부로 임시 교통 관제에 들어가, 모든 열차의 운행이 긴급 중단됐습니다. 운행 정상화 시간은 별도 통지해 드리겠습니다.</color>
<color=#00CCFF>승차권의 환불을 희망하시는 손님께서는 1번부터 4번 유인창구에서 가능하오니, 승차권을 가지고 문의해 주십시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승객 여러분의 협조와 양해에 감사드립니다.</color>
뭣... 내가... 내가 밤을 새면서 짐을 쌌더니만!
뭐어 여행권 환불하게 됐으니 상관없지만... 왜 하필이면 짐덩이들 끌고 여기까지 와서 방송하는 거냐고오오! 좀 진작에 말하면 어디 덧나냐!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닐 거야.
갑자기 벌떡 일어선 사모는 웬일인지 표정까지 진지했다.
평범한 시설 고장이라면 신호까지 차단할 필요는 없지.
여기, 네트워크가 단절됐어.
...그러니까 신호 안 잡힌다고?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와이파이 느려진 게 아니...라...?
셰릴이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마구 두드려 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연결이 되질 않았다.
뭐야 이거...? 진짜야? 왜 기차역이 전파를 차단해?
쟤네가 그런 짓을 왜 해.
전파 송신탑이나 교통 허브가 마비된다면, 보통 그건 그런 데를 노리는 테러범 짓이지.
...테러?
셰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의외로 상상력 좀 되는구나? 소설에 쓸 소재 생각해내는 데 딱이겠어! 잘됐다, 표 환불한 다음에 우리 얘기 좀 하자!
아앗——
셰릴이 다시 사모를 끌고 기세 좋게 표를 환불해 주는 창구를 찾아 나섰지만, 넓은 역사에 사람들로 북적이니 금세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 환불 창구가 어디였더라? 분명 이 근처였는데...
찾아내도 지금은 줄 엄청 길 테니까 그냥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돼?
...엄청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그냥 사람이 드글드글할 뿐인데 불길하긴 뭐가 불길해?
입으론 그리 말하면서도, 셰릴도 내심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앞뒤로 각양각색의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는 광경은 마치 거센 물길이 몰아치는 강의 한가운데에 고립된 것만 같았다.
"그나마 이 녀석이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셰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셰릴.
왜 또?
무언가를 본 사모가 우뚝 멈춰 섰다. 셰릴은 눈앞의 인파에 시야가 가려져 사모가 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들었다. 기억 속 저 깊은 곳에서 끄집어져 나온, 아주 익숙한 소리를.
――――
......!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일상. 모두가 기대어 살아가는 일상이란 익숙한 환경, 익숙한 사람, 익숙한 일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일상을 깨부수는 것은 생소함의 침입이다.
한 번 생소함이 침입하고 나면, 그 원인을 제거하더라도 깨지기 이전의 일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셰릴이 매일 지나던 학교 복도에 무장한 괴한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
아직 어린아이였던 셰릴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총을 든 생소한 사람들이 익숙했던 복도에 쳐들어와, 익숙했던 학우들과 선생님을 쏴 죽이곤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기밖에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과거의 먹구름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셰릴은 짐가방 위에 눕혀진 자신을 발견했다.
사모는 그런 그녀를 짐가방째로 밀며 패닉에 빠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숨을 데 찾으러. 역사 출입구는 교통이 정체돼서 안 돼, 목숨을 부지하려면 저거 해결될 때까지 숨어있어야 해.
............
콰앙!!
폭음에 셰릴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인 것은, 점점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겁에 질려 성난 욕설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앞다퉈 출입구로 몰려드는 광경이었다.
익숙한 광경과 익숙한 무력감에, 셰릴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이쪽!
잠깐, 여긴――꺄악!
셰릴이 더 따지기 전에, 사모는 그녀를 여자 화장실 안으로 쑤셔넣었다.
베를린 중앙 철도역, 관계자용 통로.
아수라장이 된 철도역 안팎으로 사람들이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통에, 몇 안 되는 출입구는 완전히 접근 불가였다.
그 와중, 엘리아나는 팀을 이끌고 봉쇄 구역에 발을 디뎠다.
정지!
통제 중이던 경찰이 멀리서 이 완전무장한 "무리"를 발견하곤 한걸음에 달려와 엘리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현재 중앙 철도역은 비상 경계 상태라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다.
너희는 누구지? 통행증 있나?
......
엘리아나는 대답 대신 품에서 통행증을 꺼내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걸 힐끗 훑어본 경찰은 전혀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건 우리 시스템에서 발급한 게 아니다.
뭐예요? 이건――
......
엘리아나가 먼저 SCR을 툭 쳐서 제지하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M26, 슈타지 특수 채널로 연결.
...지금 이게 뭐하잔 거지?
경찰은 그들의 태도가 무척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인형들이군. 말을 못 알아듣는 거냐?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하기 전에 썩 꺼져!
...해결.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을――
삐빅.
M26이 입을 연 거의 동시에, 경찰이 허리춤에 찬 무전기가 소리를 냈다.
받아.
............
경찰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는 엘리아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흘기면서 무전기에 응답했다. 액정 스크린에 표기된 번호는 이 지역의 담당 경감이었다.
<color=#00CCFF>상층부에서 긴급 통지다, 통행증 No. 425093을 소지한 부대를 들여보내라.</color>
...예.
<color=#00CCFF>그들의 요구에도 협조하도록.</color>
<color=#00CCFF>그리고 앞으로 뒷자리 090에서 150의 통행증은 전부 통행 허가하고 협조하라, 이상.</color>
...알겠습니다.
경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관계자용 통로로 진입하십시오, 이쪽입니다.
엘리아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원들과 함께 경찰의 안내에 따라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현재 상황 보고.
약 10분 전, 다수의 철도역에서 역무원이 폭발물로 의심되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어 즉시 베를린의 모든 철도역을 봉쇄했습니다.
현재 대테러 부대와 폭발물 처리반이 오는 중입니다.
그게 우리다.
현시간부로 모든 위험물품 검사 권한을 우리에게 이관해.
주목. 중앙 철도역의 지도를 공유했으니, 지금부터 각자 임무를 내리겠다.
M26, 너는 B2층 주차장과 지상의 승객 이용 공간을 수색해.
M249는 베를린에서 출발하는 모든 차량을 점검.
컨텐더, 너는 베를린에 도착한 모든 차량.
SCR, 넌 나와 함께 화물 차량과 물류 창고를 수색한다.
잠깐만요, 제3자의 화물 검사엔 특수 수사 영장이 필요합니다.
검사용 장비가 있어 가방을 열어보진 않을 거다.
의심되는 것은 통째로 가져가고 필요한 절차는 후속 처리하겠어.
그러니 경찰은 용의자 색출 및 몸수색에 집중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신 여기에 서명해 주겠습니까? 다른 부서에 설명해야 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통행증을 두고 가겠다. 그게 서명보다 확실하겠지.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때, 중앙홀에서의 소란이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벌써 잊혀진 듯한 화장실 안. 셰릴이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배낭에 걸린 곰돌이 액세서리를 마구 주물러대서, 불쌍한 곰돌이는 점점 얼굴이 찌그러져 가는 중이었다.
사모는 슬그머니 문에 걸린 팻말을 "청소 중"으로 뒤집은 뒤 셰릴의 상태를 관찰했다.
<color=#A9A9A9>이 인간 아가씨는 평소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사니까 잔뜩 겁에 질렸겠지.</color>
<color=#A9A9A9>울거나 하면 귀찮아지는데... 그런 상황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color>
<color=#A9A9A9>그럼...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color>
때마침 셰릴도 동동 구르던 발을 멈추곤 사모를 등진 채 무어라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모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고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마, 내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줄게..
......헤헤.
에헤헤헤헤...!
셰릴은 예상 밖의 얼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소름끼치는 미소에 오히려 사모가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는 사모를 역으로 셰릴이 덥석 붙잡았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야! 내게 행운이 찾아왔어!
엑... 행운?
지금 철도역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해? 네 상상력을 다시 발휘해 봐.
......강도?
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역 한복판에서 강도는 무슨 강도야, 누가 누구한테 강도짓을 하는데?
어......
대체 어떤 강도가 통신망도 차단하고 열차 탑승장도 봉쇄하고 베를린의 모든 열차 운행을 멈추겠어?
나한테 물어봐봐, 얼른!
어어... 뭔데?
이런 거 아닐까?! 어느 범죄 집단이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는 계획이 타기도 전에 들통나 버려서,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고 승객들 사이에 숨어서 빠져나가려는 거라든가! 그 왜 있잖아, 리X X슨 나오는 영화처럼!
그렇다기엔 경찰의 반응이 너무 과격한데...에...
사모는 말을 아끼고 싶었지만, 셰릴의 반짝이는 두 눈이 뿜는 빛이 워낙에 강렬해 당황스러워 우물쭈물했다.
그럼 이런 건? 이 역에 ELID 반응이 포착된 거야! ELID 감염자가 섞여 들어왔다던가, 아니면 생화학 테러라던가...
...경보기 조용한데?
사모가 천장에 설치된 붕괴 복사 경보기를 가리켰다. 그 말대로, 지금은 아무 이상 없었다.
그래, 모든 가능성이 배제됐지. 그렇다면 정답은 단 하나!
그건 바로――!
......
일단 내려와서 물 마시고 진정할래?
사모는 흥분할대로 흥분해 아예 세면대 위로 올라 추리를 늘어놓는 셰릴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봤다.
끊지 마 지금 영감이 샘솟는단 말이야! 분명 창작의 신이 날 가엾이 여기셔서 내게 선물을 내려 주신 거야! 이곳을 내 신작의 무대로 만들어 준 거라고!
아무튼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이 철도역에 폭탄이 설치됐고, 범죄 집단은 역 안에 갇힌 승객들을 인질로 삼은 거지! 그래, 우리도 말이야!
......
셰릴은 전혀 위로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고 싶어진 사모는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기운 넘쳐 보이네... 그래도 바깥 상황이 정리되면 빨리 떠나야――
삐이...
불현듯 알람 시계의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방금 들었어?
<color=#A9A9A9>설마...</color>
내 이야기에 너무 어울리는 효과음인데...?
삑... 삑... 삑...
첫 알림음을 시작으로, 그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주 침착한 속도로, 불길하게 반복됐다.
......
어쩜 저리도 끝내주는 직감을 가졌을까. 사모는 이젠 아예 울고 싶어졌다.
시한 폭탄이야.
소리가 나는 세면대의 아래를 보니, 구석에 정말로 시한 폭탄이 붙어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21초.
사모는 이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자신이 셰릴을 업고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을지 계산했다.
바깥의 인파를 고려하면 폭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긴 어렵지만, 적어도 경상에 그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해!
사모가 방금 셰릴이 있던 위치로 몸을 날렸지만, 허탕이었다.
엑, 셰릴?
......
셰릴은 어느샌가 세면대 밑으로 내려와 사모처럼 아래를 보고 있었다.
역시 내 추리는 틀리지 않았어! 드디어 이 날이 왔다!
무슨 소리야!? 시간 없――뭐해 지금?!
셰릴이 갑자기 무거운 짐가방을 벌컥 열더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시간은 무자비하게 4초가 흘렀다.
잔량 경고가 뜬 배터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 사모가 당장 셰릴을 끌고 나가려 했지만, 그 전에 셰릴이먼저 꺼낸 튼튼한 상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윽... 뭐, 뭐야 그건?
상자를 열고 셰릴이 안에서 꺼낸 것은...
질! 소! 냉! 동! 총~!
뭣...
그런 게 왜 있어?! 여행인데 짐가방에다...
드디어 이걸 쓸 때가 온 거야.
셰릴은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게 질소냉동총의 노즐을 폭탄의 틈새에 쑤셔넣고 방아쇠를 당겨 내부로 액체 질소를 주입했다.
능숙한 자세와 침착한 뒷모습. 사모의 기억 속 단편과 겹쳐 보였다.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color=#A9A9A9>엄청 능숙하잖아? 그리고 이 자세, 눈에 익은데...</color>
셰릴의 "처치"에, 빠르게 흐르던 타이머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다만 셰릴은 어째선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허무해하는 얼굴이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 없어 셰릴, 빨리 가자.
......응.
사모가 셰릴을 감싸고 화장실 밖으로 나서자, 그 순간 온 세상의 소음이 한꺼번에 그들에게 쏟아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마치 총이 겨눠진 듯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저쪽이 출구인가 봐!
인파에서 좀 떨어지는 게 좋겠어, 넌 밟혔다간 큰일 나.
알아, 하지만——
퍼엉!!
승강장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거리는 있었지만, 셰릴을 펄쩍 뛰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폭탄이 더 있나 봐!
그렇겠지.
폭발로 인한 충격과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한층 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저수지에 쏟아진 먹물처럼, 공포가 저절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혼탁해진 물은 이내 요동치고, 험악한 파도로 변했다.
도망쳐! 저 안에 폭탄이 있어!!
빨리 내보내 줘! 안에 사람이 죽었다고! 살려줘!!
미, 밀지 마십시오!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대피하십시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까지 폭발이 일어나니, 사람들은 앞의 통로가 무너진 돌더미로 막힌 것도 모른 채 그저 출구를 향해 몰려들 뿐이었다.
보안요원들에 더해 파견된 경찰들까지 이들을 소산시키려 했지만, 파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막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멍때리지 마, 우리도 빨리 빠져나가야 해.
양팔에 짐가방 4개를 든 사모가 힘겹게 인파를 헤치며 다른 출구로 통하는 길을 찾았다.
그런데 셰릴은 화장실 문 앞에서 우두커니, 저 요동치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어.
지금 무슨 헛소리를——
그때, 저 인파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여기도 폭탄이 있다! 곧 터진다!"
사람의 파도는 그 말에 끓는 물처럼 솟구쳤고, 아무도 저지 못할 기세로 사방으로 다시 퍼쳤다.
그 파도 속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바닥에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젠장, 이쪽으로 온다!
다른 데로 피하자!
하지만 인파는 순식간에 들이닥쳐, 셰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거구의 남성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균형까지 잃었지만, 다행히 그대로 인파 바깥으로 튕겨나가 밟히는 것은 면했다.
괜찮아?
괜찮아...
부축해 줄 테니까 얼른 일어나, 저쪽으로 가자.
...폭탄이 고작 한두 개 설치됐을 리가 없어. 저 사람들 따라가도 덩달아 죽을 뿐이야.
통로도 막혀서 폭발물 처리반이 제때 도착할 수 없을 테고, 경찰도 뾰족한 수 없을 테고...
아무래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봐...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삐끗한 발목을 문지르며, 셰릴은 상심한 듯 툴툴댔다.
...그거 내놔.
사모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뭘?
질소냉동총.
터지기 전에 얼리면 처리반 올 때까지 시간 벌 수 있겠지? 그럼 우리 모두 구조받을 수 있어.
일리 있는 말이네, 하지만 너 이거 쓸 줄이나 알아? 그냥 내가――
네가 쓰는 거 봐서 이젠 알아. 그리고 지금 그 상태로 어떻게 막 달려? 내가 하는 게 나아.
사모는 건네받은 질소냉동총을 자연스레 고쳐쥐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녀가 쓰던 물건인 것처럼.
그럼 난...
일단 너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연락 유지해야 하니까 휴대폰 간수 잘 하고, 배터리 바닥나기 전에는 돌아올게.
알았어... 그럼,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