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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5 · 사로스 주기

단주기 섭동

축하해, 드디어 첫 걸음을 내디뎠구나. 이건 좋은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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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부터 난데없는 성난 발구름에, 낡은 장판 바닥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셰릴의 평소 생활 습관상 깨어 있을 시각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의 집은 도둑이라도 든 것마냥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셰릴

――아 그러니까! 이건 소비자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이라니까요!?

셰릴

<size=50>이게 간판 사기지 뭐냐고 진짜! 얼마 전에 싸구려 로봇 청소기를 고급 인형으로 속여서 팔다 잡힌 사건이랑 뭐가</size> 달라...

통화기에 대고 마구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 목청을 높였다.

셰릴

<size=50>차라리 로봇 청소기를 팔던가!</size>

큄비

<color=#00CCFF>너무 화내지 마세요 고객니임~</color>

<color=#00CCFF>제보하신 문제는 이미 전달했어요, 저희 부점장님 출근하시면 바로 처리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color>

셰릴

지금 화를 안 내고 배겨요?!

아 진짜 못 참아, 당장 매니저 바꿔요! 10초 안으로 안 바꾸면 소비자 보호원에다 고발할 거야!

큄비

<color=#00CCFF>아아아 부점장님 딱 마침 오셨네요, 바로 통화 바꿔드릴게요!</color>

캐서린

<color=#00CCFF>전화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세요?</color>

셰릴

제가 저번 주에 당신네 가게에 주문한 최신형 고급 인형 말이에요! 금발 벽안에, 슈퍼모델급 몸매에, 각종 편의 기능 탑재에 어깨 안마도 프로 수준인――

캐서린

<color=#00CCFF>이미 수령하셨다고 되어 있는데요?</color>

셰릴

<size=50>그 도착한 물건이 저게 뭐냐고요!</size>

셰릴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통화기의 카메라를 구석에 산처럼 쌓인 잡동사니 더미에 향했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분명한 더미에.

캐서린

<color=#00CCFF>아아, 보이네요. 저게 손님이 받으신 인형이라고요?</color>

셰릴

네! 저 쓰레기가 제가 주문한 거 맞다고 어디 한번 말해봐요!

캐서린

<color=#00CCFF>어... 고객님의 심정 이해합니다, 뭔가 잘못된 거 같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당장 저희 창고를 확인해볼게요.</color>

셰릴

네?! 저기요! 아직 나 말 안 끝났――

상대가 멋대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셰릴은 통화기를 부숴버릴 기세로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소용없었다.

시스템

<color=#FFFF00>죄송합니다, 통화 상대가 잠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color>

셰릴

<size=65>이 XXXX야아아아!!!</size>

갈 데 없는 분노의 포효가 벽을 뚫고 온 길거리에 울려 퍼졌다.

셰릴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쥐고 그대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마침 소파의 틈새에 빠진 리모컨이 손끝에 닿자,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을 누그러뜨리려고 TV를 켜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리모컨을 눌러도 TV가 반응하질 않았다.

셰릴

뭐야 이거? 아 왜 안 켜지는데!

<size=50>집사! TV 켜 줘!</size>

집의 스마트 가사 AI도 그녀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악에 받친 괴성과 함께, 리모컨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셰릴

<size=55>끄아아아 오늘 재수 더럽게 없네에에!!</size>

이것도 말썽이지 저것도 말썽이지 지금 제대로 되는 게 뭐야 진짜아아!!

???

...꺼윽.

그때, 잡동사니 더미 속에서 걸쭉한 트림 소리가 났다.

그리고 늘씬한 장신의 형체가 마치 폐허를 무너뜨리듯 안에서 솟아났다.

???

후우... 아무래도 그거 나 때문인 거 같네.

셰릴

...너 뭐 했어.

???

꺼어억...

이렇게 빵빵한 전원 만지긴 정말 오랜만이라 무심코 출력을 높여버렸지 뭐야.

"폐허" 속에서 뒤뚱뒤뚱 걸어 나오는 그녀의 얼굴엔 셰릴이 작년에 샀던 유명 브랜드의 선글라스가 얹혔고, 등 뒤로는 콘센트에 연결된 케이블이 늘어진 것이 보였다.

셰릴의 주먹과 목에 핏대를 세우기엔 충분했다.

셰릴

다앙자앙 그 케이블 뽑아아아!! 그리고 내 선글라스도 벗어!

???

싫은데.

셰릴

――!

셰릴이 왜소한 몸집에겐 놀라울 속도로 몸을 날려, 그대로 인형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인형의 케이블이 뽑혔다.

???

흐아앙...

장신의 인형은 영혼이 뽑혀 나간 듯 그대로 바닥에 뒤로 쓰러졌다.

셰릴

뭔 엄살이야! 당장 안 일어나!?

???

전력... 전력이 부족해...

충전... 빨리 충전시켜 줘...

셰릴

<size=50>아앙!?</size>

전혀 못 믿겠단 눈초리로, 셰릴은 바닥에서 밍기적대는 인형의 멱살을 잡아 들어 배터리 패널을 확인했다.

잔여 전력량 - 98%

셰릴

......

???

에에이 충전 좀 하자아...

쪼잔하게 굴지 말구우...

셰릴은 질색하며 인형을 바닥에 버리곤 집의 차단기를 다시 올렸다.

셰릴

집사!

집사 AI

<color=#FFFF00>부르셨습니까, 주인님.</color>

셰릴

가까운 쓰레기장에 연락해서 여기 고물 인형 있으니까 빨리 와서 가져가라 해!

집사 AI

<color=#FFFF00>알겠습니다. 희망 가격대는 얼마인가요?</color>

셰릴

필요 없으니까 얼른! 빨랑 와서 쓰레기 가져가라고 해!

집사 AI

<color=#FFFF00>알겠습니다. 현재 영업 중인 가장 가까운 쓰레기장으로 인형 소체의 정보를 전달했습니다.</color>

마침내 한시름 놓은 셰릴은 맥이 풀려 소파에 쓰러지듯 털썩 앉았다.

한편,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셰릴에게 뻗으며 웅얼댔다.

???

화내지 마아... 나 실은 엄청 비싼 인형이란 말야... 남들은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집사 AI

<color=#FFFF00>셰릴 주인님. 쓰레기장에서 답신이 왔습니다.</color>

셰릴

오, 언제 온대?

집사 AI

<color=#FFFF00>음성 답신을 재생합니다.</color>

<color=#FFFF00>"뭐 이딴 본 적도 없는 구닥다리 모델이 다 있어? 돈 줘도 안 받아요."</color>

셰릴

......

???

아앗――

인형은 전력이 고갈되는 단말마를 남긴 채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셰릴은 그저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터질 것만 같은 혈압을 억누르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셰릴

여보세요!

큄비

<color=#00CCFF>아아 고객님, 저예요 저. 방금 창고 가서 확인하느라 고객님 전화를 못 받았어요.</color>

셰릴

뭘 했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빨랑 이 일 어떻게 해결할지나 말해요!

큄비

<color=#00CCFF>고객님? 그게 말이죠, 저희가 창고 입출고 기록을 조회해 봤는데요...</color>

<color=#00CCFF>분명 발송했을 땐 확실하게 손님이 주문하신 제품이었거든요? 그런데 어째선지 수령하신 게 지금 갖고 계신 그거네요...</color>

셰릴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제가 바꿔치기했다 뻐길 셈이에요 지금?!

큄비

<color=#00CCFF>아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배송 과정에서 물류측에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고, 어떤 경위로든 인형이 스스로 가동해서 도주했을 수도 있고오...</color>

셰릴

............

변명도 좀 그럴듯하게 하죠?

큄비

<color=#00CCFF>암튼 말이죠, 방금 고객님 계정으로 프랑크푸르트행 커플 여행 패키지를 보내드렸답니다!</color>

<color=#00CCFF>이걸로 마음 푸시고 새 인형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color>

셰릴

그딴 거 안 받으니까――

이번에도 상대가 먼저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셰릴이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자동 응답이었다.

시스템

<color=#FFFF00>지금 거신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입——</color>

셰릴

......하.

통화기는 그대로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고, 셰릴은 이마를 짚으며 가련하게 소파 위로 쓰러졌다.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채인 저 인형은 소체도 너덜너덜해서, 이렇게 보고 있자니 저 폐허 같은 잡동사니 더미에 완전히 일체화된 듯했다.

셰릴

...쇼하지 마, 케이블 다시 꽂는 거 봤어.

???

............

셰릴

케이블 뽑아버린다!?

???

아이...

인형은 나무늘보처럼 밍기적 몸을 뒤집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셰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셰릴

널 대체 어따 쓰냐고!

아니 얼마나 구닥다리면 시스템 업데이트에 77,435시간이나 걸려!?

업데이트를 받을 메모리도 없는 주제에!

???

적어도 프랑크푸르트 여행은 같이 가 줄 수 있는데.

셰릴

<size=50>내가 너랑 왜 가!!</size>

???

"커플" 여행권인걸? 꼭 2명이어야 해. 그리고 네 연락처 목록에 친구 없던데.

셰릴

이익...! 항상 원고에 시달리느라 친구 사귈 시간 없어서 그렇거든!

아아악 너 땜에 생각났다, 이번 달 원고 아직 못 끝냈는데...

???

그러니까, 같이 가자.

모범적인 "매를 부르는 미소"였다.

사모

같이 재밌게 놀다 오자구.

아 참, 난 "사모"야.

셰릴

네 이름 안 물어봤거든? ......무슨 사모?

사모

사모예드의 사모.

셰릴

......

셰릴은 눈을 굴리며 침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셰릴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사모는 편한 자세로 다시 바닥에 늘어졌다.

낯선 천장을 보며, 사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인드맵 공간 깊은 곳.

바람구멍 하나 없는 밀실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8개의 의자가 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방 안은 껌껌했다. 덜 구성돼서가 아니라, 사모 본인이 일부러 밝기를 낮춰 둬서였다.

사모는 이 익숙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천천히 앉았다.

????

그래서, 오늘 너...

사모

...저 애가 주문한 고급 인형의 케이스에 들어갔지.

사모

왠진 모르겠지만, 저 애... 셰릴은, 보고 있자니 안심이 돼.

사모

엄청 익숙한 느낌이야... 아마 여기 있는 누군가의 것이겠지.

사모

창고에서 웅크려 지내던 생활도 이제 끝낼 때가 온 걸지도.

????

13년만이네.

??

축하해, 드디어 첫 걸음을 내디뎠구나.

사모

고마워.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고생했어... 그 방에서 충전 케이블 하나 찾는 게 뭐 그리 어려웠는지.

??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어. 복잡해도 결국엔 정리될 때가 올 거야. 지금 네가 있는 방처럼.

????

뭐가 어찌 됐든, 이건 좋은 출발이야. 네가 다시 나아가는 걸 보게 돼서 기뻐.

사모

내가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는 거지. 너희의 응원 없이는 난 못해.

????

그래, 우리지. 그럼 우리 함께, 이 특별한 날을 기억하자.

함께 기도하자, 영원히 돌아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