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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 만성쇼크

AUT 지붕위의 바이올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 셋이 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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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어느 고속도로.

도로변의 햇빛에 반짝이는 참나무들이 나뭇가지로 보이도록, 명품 SUV 한 대가 시속 120km로 질주했다.

으리으리한 차량과 이에 손색없는 경치건만, 딱 한 가지가 분위기를 완전히 깨고 있었다.

바로 "물" 나쁜 나이트 클럽에서나 틀 법한 음악이었다.

안젤리아

...딴 거 틀어.

이딴 노래 들으면서 어떻게 자냐?

요원 Q

맞아, 졸음 운전 방지용이야.

삐삑.

통신기가 울렸다.

AK12

<color=#00CCFF>미안해, 몰리도를 놓쳤어.</color>

안젤리아

비행기에서?

AK12

<color=#00CCFF>응...</color>

<color=#00CCFF>400피트 상공인데도 번지점프하듯 뛰어내리더라. 슈타지가 밑의 강을 반나절이나 뒤졌는데도 아무것도 못 찾았대.</color>

안젤리아

K는 뭐래?

AK12

<color=#00CCFF>그게... 독일 정부의 일이라고 선 긋더라고.</color>

안젤리아

...그러고 끝?

AK12

<color=#00CCFF>응.</color>

안젤리아

알았다. 너희는 알아서 베를린으로 와, 장소는 AN-94가 보내 줄 거야.

AK12

<color=#00CCFF>안 그래도 벌써 운전 중이야.</color>

<color=#00CCFF>아 참, RPK가 할 말 있대.</color>

RPK16

<color=#00CCFF>내부 통신망으로 메시지를 받았답니다~</color>

<color=#00CCFF>제 방화벽을 완벽하게 우회해서, 수신하고 나서야 눈치챘다니까요.</color>

<color=#00CCFF>역추적해보려 했지만... 말 안 해도 알겠죠? 흔적조차 안 남겼어요.</color>

안젤리아

내용은?

RPK16

<color=#00CCFF>우선, 제목은 그냥 ID예요.</color>

RPK16

<color=#00CCFF>"요한복음.8.12".</color>

안젤리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안젤리아

...겉멋만 잔뜩 든 놈이군.

AK12

<color=#00CCFF>진짜 징그럽네. 괜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짐작 가는 사람 있어?</color>

안젤리아

내가 이렇게 폼이나 잡는 사람을 알 거 같아?

RPK16

<color=#00CCFF>메시지 내용도 그냥 인사치레예요.</color>

<color=#00CCFF>"경애하는 안나 빅토로브나 최 양."</color>

<color=#00CCFF>"저의 참견에 미리 사과드리며, 브레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과, 슈타지의 내부 경쟁과 그로 인한 그릇된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color>

<color=#00CCFF>"패러데우스에 관해 필히, 그리고 긴히 상담할 일이 있사오니, 오늘 오후까지 만나러 와 주시기를 요청합니다."</color>

<color=#00CCFF>마지막은 주소고요. 확인해보니 구시가지의 술집이라네요?</color>

<color=#00CCFF>"미네르바의 부엉이"래요.</color>

안젤리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 셋이 뭔지 알아?

RPK16

<color=#00CCFF>AK-12랑 저 같은 사람이요?</color>

안젤리아

쓸데없이 의지박약한 놈이랑 같잖게 허세 부리는 놈.

RPK16

<color=#00CCFF>또 하나는요?</color>

안젤리아

윌리엄.

AK12

<color=#00CCFF>갈 거야?</color>

안젤리아

안 가.

예전 같았다면 조금 흥미가 있었겠지만... 지금?

안젤리아

너무 늦었어, 지금은 사람 만나러 갈 시간 없다고.

그건 무시하고, 그 양옥에서 합류하자.

RPK16

<color=#00CCFF>너무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 아닐까요?</color>

AK12

<color=#00CCFF>냅둬, 안젤리아가 한 번 결심하면 나도 못 꺾는다고.</color>

AK12

<color=#00CCFF>얌전히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color>

RPK16

<color=#00CCFF>...선배님도 그리 말하신다면야.</color>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통신을 종료하고 조수석에서 백미러로 뒷자석의 AN-94와 AK-15에게 눈짓했다.

안젤리아

둘한테 좌표 공유해.

AN94

알았다.

빵빵!

갑자기 뒷차가 경적을 울려대, 안젤리아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안젤리아

뭐야 저건?

요원 Q

아아, 시속 제한 구간 지났네.

안젤리아

응?

Q가 핸들을 틀어 차를 1차선 밖으로 옮겼다.

요원 Q

이 고속도로는 시속 제한 130인데 여기 중간쯤부터 속도 제한이 없는 구간이 있거든.

나오기가 무섭게, 뒷차가 묵직한 엔진음으로 포효하며 왼편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젤리아

...이걸 양보해?

요원 Q

이봐 이봐, 지금 우리는 평범한 민간 차량인 척을 해야 한대도?

안젤리아

에라이... 차 세워, 내가 "교과서 같은 위장"이 뭔지 보여주지.

Q는 얼굴을 찡그리며 차를 갓길에 세운 다음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원 Q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거 우리 보스 차다?

안젤리아

늦기 전에 더 있음 얼른 말해.

요원 Q

나 오늘 아침 든든하게 먹어서 차 안에다 토하기 싫<size=50>으어어허억——!?</size>

마저 당부하기도 전에, 검은 SUV는 로켓처럼 가속해 시속 200km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했다.

......

......

이 세상에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공허로 사라진다.

생명이란 이토록 나약하다. 총탄과 화재, 심지어는 아주 잠깐의 불행만으로도 잃을 수 있다.

안젤리아

......

이젠 무섭지도 않아.

뇌리에 파고드는 회상 속을 걷던 안젤리아는 어느 재난의 한복판에 섰다.

폭탄이 든 상자 뒤에 웅크려 벌벌 떠는 소녀는 기도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소녀를 바라보는 안젤리아의 주위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터져 나오는 아비규환이었다.

안젤리아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임마.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들어, 안젤리아를 마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소녀의 눈동자 속 깊은 어둠은, 그야말로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에, 안젤리아의 의식은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갔다.

......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어질어질 침대에서 일어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머릿속을 휘젓는 것들을 쫓아냈다.

AK12

......

왜 AK-12가 또 자신의 방에 있는지도 묻기 귀찮았다.

안젤리아

차나 한 잔 줘.

AK12

...괜찮아?

잠기운이 좀 가시고 나니, 안젤리아는 AK-12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 것을 깨달았다.

안젤리아

왜, 어디 이상해?

AK12

그건 아니지만, 계속 잠꼬대하길래.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어. 평소의 너랑 하나도 안 어울리더라.

그래서 좀 징그러웠어.

안젤리아

아, 맞아...

일 다 끝나고 안전국으로 복귀했더니 젤린스키가 진수성찬 차리고 환영하는 꿈이었지.

요리가 죄다 오리고기더라고.

AK12

오리고기 싫어해?

안젤리아

차라리 흙을 먹고 말지.

안젤리아는 침대에 똑바로 앉아, 손으로 목덜미를 받치고 고개를 꺾었다.

AK-12는 눈치껏 더 묻지 않고, 대충 차를 진하게 우려내 테이블에 두었다.

AK12

그리폰의 지휘관이 베를린에 도착했어.

2시간 전에 메시지도 보냈고.

안젤리아

......

훈작사가 부른 거겠지.

AK12

뻔할 뻔자지.

네가 장단 안 맞춰 주니까 잘 맞춰 주는 사람 따로 부른 게 아니겠어.

안젤리아

AK-12, 넌 훈작사가 신용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해?

AK12

그건 내 입으로 말하기 어렵겠어.

어쨌든 G&K의 실질적인 지배자잖아? 이 시국에 우리 보스 못 믿겠어요~는 줄 갈아타려는 사람이나 할 거야.

안젤리아

난 그 양반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도저히 못 어울려 주겠더라고.

AK12

그럼 Q랑은 짝짜꿍이 맞고?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같잖아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안젤리아

그 여자는 절반밖에 못 믿지.

AK12

지휘관 만나러 갈래?

안젤리아

아니, 됐어. 나랑 훈작사 사이에 꼈다면 괜히 그쪽 일만 힘들어질 거야.

AK12

그럼 읽씹이네, 매정해라.

안젤리아

......

네가 몰리도와 교전했던 정보 공유하고,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전해.

안젤리아

그리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도.

특히 훈작사.

AK12

......

알았어.

안젤리아

Q는?

AK12

계속 이쪽 슈타지랑 연락 중이야.

아참참, K 그쪽한테도 메시지 왔어. 코드네임 U라는 요원을 보냈으니 베를린에서 필요한 거 있으면 걔한테 말하래.

안젤리아

감시역이 바꿘 거야?

AK12

몰라, 답장 안 해서.

근데 저쪽도 마찬가지로 슈타지니까 여길 찾아내는 건 시간 문제일 거야... 만약에 Q랑 U랑 싸우면 누구 편 들까?

안젤리아

우린 그냥 갈 길 가면 돼, 지들끼리 싸워서 이긴 쪽이 알아서 따라오게 냅둬.

AK12

후훗, 이래야 우리 안젤리아지.

안젤리아

난 여기에 윌리엄을 조사하러 왔어.

다른 건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안젤리아는 옷걸이에서 아무 코트나 집어 두르고 방의 문을 열었다.

세이프하우스 안에는 나란히 늘어선 열 명 남짓한 슈타지 요원들과, 바닥에 각종 탄약과 구급상자, 그리고 몇 상자나 되는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다 보니 한 켠의 유탄발사기 두 자루는 그냥 덤처럼 느껴졌다.

안젤리아

...잘도 이만큼 구해 왔네.

요원 Q

잘 잤어? 아무거나 골라.

Q는 이어폰을 쓰고 누군가와 통신 중이었고, 입을 멈추지 않으면서 안젤리아에게 슬쩍 눈치를 보냈다.

요원 Q

네 네, 두 부대 정도는 더 증원해 주셔야겠어요.

요원 Q

아 물론 지금도 충분하죠. 하지만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잖아요?

그리고, 우리 인형들은 언제 오나요? 우린 쇳덩이가 아니라 핏덩이라 약하단 말예요.

에이 엄살 부린다뇨. 제 말은, 언제든지 백업 가능한 기계보단 하나밖에 없는 인간 부하들 목숨이 더 소중하단 뜻이죠.

요원 Q

네네... 알았어요, 그럼 당장은 그렇게 할게요.

이어폰을 벗은 Q는 M4A1 카빈을 들고 203 유탄발사기 앞에 선 안젤리아를 제지했다.

요원 Q

그건 예비용이야, 그리고 나한테 남겨 줬으면 해.

안젤리아

쯧...

그 낡은 집을 아예 철거해버리기라도 하려고?

요원 Q

400피트 맨몸 스카이다이빙을 하고도 멀쩡한 괴물 상대로는 가볍게 인사하는 수준이지.

안젤리아

이렇게 스케일 크게 노는 특수요원은 내가 살다살다 처음 본다.

요원 Q

통 큰 슈타지는 기본 전략도 크다고.

안젤리아

언제 움직여?

요원 Q

60분 뒤.

안젤리아

내가 양옥을 조사할 시간으로 겨우 60분만 주겠다고?

요원 Q

그런 셈이지.

다만 우리가 정한 게 아니야.

요원 Q

우리가 노리는 월척이 여기로 오기까지 60분밖에 안 남은 거야.

안젤리아

그게 누군데?

요원 Q

패러데우스의 중요인물.

안젤리아

쳇... 그럼 얼른 미끼를 던져야겠네.

안젤리아는 총을 내려놓았고, 리벨리온 대원들은 바로 따라갔다.

요원 Q

어? 무기 안 가져가?

AK12

여깄잖아, 4개나.

......

베를린 노이템펠호프 구역.

"윌리엄"의 옛 거처.

AK12

마당에 잡초가 무성한 게 베트남 생각나네.

AN94

가본 적 있었나?

AK15

비유다, AN-94.

안젤리아

......

조금 녹슨 철문을 연 안젤리아의 찌푸린 눈이 바닥에 떨어진 쇠사슬로 향했다.

AK12

...선객이 있었네.

이 절단면... 오래되지 않았어.

RPK16

그렇다니 더더욱 수상해요, 안젤리아.

여기선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해요. 저랑 AN-94가 먼저 돌입해 정찰하는 건 어떨까요?

안젤리아

......

RPK-16의 충고를 무시하고, 안젤리아는 앞장서서 이 낯선 마당에 발을 디뎠다.

AK12

뭐,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앞장서는 안젤리아는 고개를 들어 이 양옥을 바라봤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안젤리아 일행은 그대로 정원사가 마지막으로 손질한 게 아마 십수 년 전일 터인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따금씩 날아가는 벌을 빼면, 이곳에 살아있는 동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AN94

...너무 조용하다.

AK15

내부에서 열원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안젤리아의 신경을 쿡쿡 찔렀다. 그녀의 직감이 경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향은 틀림없었다.

이곳에 분명, 그녀가 찾는 것이 있다.

안젤리아

RPK, AN-94, 문 지켜.

RPK16

...네.

약간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RPK-16은 주위에 감시 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쿵!

AK-15가 힘껏 밀어 양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먼지를 잔뜩 토해내며 흔들리는 두 문짝은 언제라도 경첩이 부러져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안젤리아는 태연하게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양옥 안에선 세 명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젤리아

...AK-12.

AK12

지금 연결했어.

안젤리아

바꿔.

삑.

통신 연결.

요원 Q

<color=#00CCFF>낚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내심이야.</color>

안젤리아

아주 토실토실한 월척이길 바라지.

요원 Q

<color=#00CCFF>물론.</color>

<color=#00CCFF>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color>

삑.

통신 종료.

AK12

뭐래?

안젤리아

......

안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뒤로 돌아, 방금 AK-15가 열었던 문으로 다시 향했다.

아주 잠깐 어리둥절해 했지만, AK-12와 AK-15는 동시에 반응했다.

AK15

열원 다수 접근 중.

패러데우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