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 파랑과 은색의 하모니
네가 사는 세상은 분명 아름답고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이겠지?
친애하는 블랙웰에게. 이렇게 연락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이해해 줘, 왠진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헬라" 프로젝트는 실패율이 지나치게 높고, 유일하게 성공한 실험체도 여전히 폐기물에 지나지 않아. 물론 넌 이런 걸 듣고 싶지 않겠지만, 지금 내 심정을 너에게 전해야만 해서.
몇 가지는 그만 포기하자. 포기한다고 우리가 무얼 잃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은 걸 얻을 수도 있지. 그게 내가 깨달은 점이야.
직접 한 번 만나자. 브레멘의 그곳에서...
2058년 베를린에서, 마이트너가.
2064년 가을. 세상은 폭풍우가 닥칠 기운에 휩싸였다.
마치 거대한 과수원의 과일이 무르익어, 모두가 각자 자신의 몫을 챙기고 싶어하는 분위기.
그런 가운데, 독일 내 정화지대의 중요 도시로서, 브레멘은 독특한 정책으로 자주 난민들의 목적지로 정해지곤 했다.
독일 브레멘, 교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관문 앞이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하루였다.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이곳을 마지막 동앗줄로 삼았다.
......
............
목표 지점에 도착, 브레멘 격리벽 관문까지 약 3.17km.
속히 이동해서 B그룹과 합류해야 한다.
......
안젤리아는 고개를 들어 눈부신 햇빛을 얼굴로 받았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깍지를 끼고 스트레칭을 했고, 뻣뻣한 몸 여기저기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다른 손으로 의수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고서야, 그녀는 깍지를 풀고 하얗게 질린 오른손등을 응시했다.
...괜찮나, 안젤리아?
몸풀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국민체조보다 더 좋은 게 있잖아요.
지금 우리 뒤를 밟는 생쥐들을 쫓아낸다거나요.
흥...
아주 한참 기다리고 있었나 봐?
충분히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이런 외국에서 울릭 여사와 대면하기 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경우 상황이 까다로워질 수 있다.
내가 주목받는 건 다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지 뭐.
내가 위험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말이야. 쟤들은 무시해. RPK?
경로 계획 완료했어요.
참고로, 움직일 거라면 빨리 하는 걸 권할게요. 안 그럼 선배가 안젤리아 결핍증으로 발작할 거예요.
어떡할까, 안젤리아?
안젤리아는 눈썹을 씰룩하며 RPK-16이 건넨 경로 계획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의수를 가볍게 튕기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발작하게 냅둬야겠네.
좀 신경쓰이는 곳이 있어서, 울릭과 만나기 전에 가보려고.
B그룹과 합류는 조금 미루자.
호오...?
RPK-16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젤리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궁금하네요, 안젤리아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곳이라니.
신경 꺼.
이잉, 열심히 경로 계획했는데 너무해요~
브레멘 구도심지의 중고 레코드샵이야.
"백만송이 장미"라는... 꽤 오래된 가게지.
아하아... 알았어요.
......
AN-94는 이해 못한 눈치였지만, 더 물으려 들진 않았다.
안젤리아는 시선을 조금 내리고, 약간 건조해진 입술을 핥으며 12시간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녀가 기존 계획을 변경하고,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든 불가사의한 통신을.
안나 빅토로브나 최 대위, 당신이 찾는 "하얀 참새"는 길다 울릭 곁에 있다.
내가 독일에서 가장 먼저 당신과 만나고 싶다.
사모시나.
얼마 후, 브레멘 구도심지의 레코드샵 "백만송이 장미".
문 앞에서부터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먼지를 머금고 가게 밖까지 새어나와, 안젤리아마저 인상쓰게 했다.
이 제법 낡은 레코드샵이 위치한 곳은 행인도 무척 드물어서, 넓은 길가에 안젤리아 일행 3명만 서 있으니 오히려 어색하게 보였다.
나 혼자 들어갈 테니 너흰 밖에서 지키고 있어.
...눈에 안 띄게 대충 어디 숨어서.
안젤리아... 정말 혼자서 괜찮겠나?
걱정 마, 아무도 안 잡아먹어.
...가까이서 대기하겠다, 통신을 유지해라.
안젤리아가 레코드샵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RPK는 눈을 깜빡였다.
우리도 알아선 안 되는 데이트 상대인가 봐요.
안젤리아에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우리는 그저 따르면 될 뿐이야.
후후훗... 정말이지 우리랑 안 어울리게 귀엽다니까요, AN-94는.
......?
......
............
철컥.
문을 닫는 소리는 좁은 공간에 우렁차게 메아리쳤고, 가까운 천장과 선반에서 먼지까지 떨어뜨려 공기 중에 흩날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런 굉음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찾는 이도 얼마 없는 중고 레코드샵이었으니까.
......
안젤리아는 가볍게 코끝을 훔치고, 먼지를 들이키지 않도록 가판대 사이를 천천히 지나면서 레진열된 레코드판을 한 장 한 장 훑어봤다.
가게 안에는 계산대 앞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 한 명밖에 없었다. 노인은 계산대 뒤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손에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신문지를 든 채 안젤리아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음?
그러던 중, 안젤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가판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은 마침 시야의 사각지대여서, 저 노인이 안젤리아에게 안 보이고 노인도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침묵하며 손을 뻗어, 안젤리아는 자신의 눈길을 끈 앨범을 집어 들었다.
《백만송이 장미》...
누렇게 색이 바랜 표지와, 그 그림 위에 인쇄된 가게 이름과 똑같은 글자.
안젤리아도 이 앨범은 기억했다. 1983년 발매된 《백만송이 장미》.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작이지만, 이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이런 데서 썩고 있다.
이제는 아주 식상하디 식상한 사랑 이야기.
지금 같은 시대엔 아무도 즐기지도, 믿지도 않는 사랑 이야기다.
물론, 안젤리아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 앨범에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낡은 표지는 당장에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지만, 안에는 소중히 보관되어 여전히 새것같은 레코드판이 보였다.
음...?
그리고 앨범의 속표지 포장 위에, 낡은 잉크로 쓰여진 한 문장도 보였다.
비록 종이는 변색된 지 오래지만, 수려한 글씨체와 물 흐르는 듯한 펜촉의 흔적은 여전히 이걸 쓴 작가의 비범한 풍채를 짐작케 했다.
"100년 후의 너에게.
네가 이 앨범을 볼 때면,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겠지.
지금 나의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어.
애석할 노릇이야, 인류는 천재지변이 닥치고서야 비로소 힘을 모으려 하니.
이 글을 읽는 네가 사는 세상은 아마, 붕괴 복사와 환경 오염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서로 돕는 아름다운 세상이겠지?
부러운 마음을 담아 너에게 '참 잘됐구나!'라 말하고 싶구나."
......
안젤리아는 가슴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딸랑 울리며 가게 문이 또 열렸다. 바닥도 삐그덕 소리를 내며 들어온 사람은 단정한 옷차림의 단발 여성이었다.
이렇게 한적한 복고품 전문 가게엔 보통 일주일에 손님이 한 명이나 올까말까한데, 오늘은 그야말로 성수기였다.
삐이——
Hallo, 안젤리아 씨.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으려나?
......
천천히 앨범을 덮고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안젤리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통신으로 말을 걸어온 여성에게 고개를 몸을 돌렸다.
사모시나?
맞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불러도 돼.
여기선 요원 Q라 불러 줘.
단발의 여성은 턱을 까딱하며 안젤리아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옷차림과 현란하게 통신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안젤리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 자신이 이중 스파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
걱정 마셔, 양쪽 일 다 잘하고 있으니까.
어느 쪽도 보스가 멀쩡하면 그만이거든.
그딴 쓸데없는 소리나 들으러 온 거 아니야.
용건이나 간단하게 말해.
그거 좋지, 나도 말 돌려 하기 싫어하거든.
루뱡카에서 네 프로필을 봤어.
패러데우스의 뒤를 캐고 있지?
그럼 그 일에 관해서만큼은 우린 동지야.
어느 쪽 보스의 뜻인데?
뭐랄까... 양쪽 다?
입장은 일치해.
자꾸 그렇게 감질나게 할 거면 관둬.
이게 줄일 수 있는 얘기가 아니긴 하지...
커피 한잔 할래?
난 보드카만 마셔.
여기 메뉴에 보드카 커피가 있긴 한데.
...그건 보드카에 대한 모욕이야.
칫, 까다롭기는.
둘은 비밀 통신을 잠시 멈추고, 평범한 손님처럼 음식과 레코드판을 샀다.
안젤리아는 그 "백만송이 장미"와 "보드카커피, 카페인 빼고"를 주문했다.
반면 요원 Q는 이 가게 메뉴의 모든 디저트와 음료수를 하나씩 거의 전부 주문했다.
...그거 다 먹을 수는 있지?
걱정 마, 이거 점심 저녁 야식 합쳐서야.
"태양 흑점" 사건, 기억해?
슈타지의 대 신소련 첩보력이 20년은 후퇴하게 만든 그 사건?
어, 그거. 그 사건으로 슈타지는 명성은 물론 사회적 입지마저 곤두박질쳤지.
근데 내 독일 쪽 보스가 말이야... 그걸 뭐라더라... 아, 워커홀릭이거든?
파스타 만들기 대회에 참가하면 면발을 지구 3바퀴는 감을 정도로 뽑을 사람.
일중독자도 그런 독종은 흔치 않은데...
그 보스가, 슈타지의 첩보력을 전성기로 되돌리려고 해.
......
큰 뜻을 품으셨구만.
문제는...
이미 해냈단 거지만.
뭐...?
쬐끔 맛만 보여줄게.
......
......
......
............
엄청나지?
이 정도 규모라고...?
루뱡카에서도 이런 시스템은 언급조차 된 적 없는데...
기적 같지?
감상을 듣고 싶다면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밖에 없어.
네 루뱡카 쪽 보스는 이미 슈타지의 개네.
단어 선정이 좀 그렇지만 아니라고 할 순 없지.
아무튼, 이 시스템은 "벌침"이라고 해, 성질상 실시간 감시 체계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최근에 내 독일 쪽 보스가 이것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챘어.
패러데우스.
응.
울릭보다 먼저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래서야?
그런 거지. 울릭 곁의 그 "참새"는... 이미 투명한 상태거든.
그러니까 안젤리아, 우린 협력할 수 있어.
이 꼴을 대체 어떻게 비웃어야 할지 난감하다.
세상이 그런 법 아니겠어, 수많은 발명품들이 겉보기엔 잘 빠진 스포츠카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인력으로 바퀴를 굴리는 모양새잖아.
감시를 피할 방법은?
없어.
그래서 큰 리스크를 지고 이렇게 널 직접 만나러 온 거야. 직접 입에서 귀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어서.
어지간한 원격 수단은 모조리 도청된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네 곁에 통제 불가능한 사람이 있거나, 암호화되지 않은 통신 채널이 있다면...
......
일단 말해 두겠지만, 난 슈타지의 내부 힘싸움엔 관심 없어.
걱정 마 걱정 마, K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어차피 걔 훈련생 시절 때도 날 이기는 과목 하나도 없었어.
......
그러니까 현임 국장 같은 호구 꽁무니나 따라다니지.
허, 네 줄은 무슨 황금 동앗줄이라도 되는 모양이네?
그야 물론.
...무슨 근거로?
내 경비 신청 한도가 녀석의 3배거든.
......
그래서, 울릭 곁의 "참새"는 누구야?
그녀의 비서 몰리도 포거트, 놈들 식으로는 니토.
마지막 남은 브라우니까지 꼭꼭 씹어먹고, Q는 자리에서 일어나 앨범 코너에서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계산 대신 부탁해~
다음엔 내가 쏠 테니까.
......
어이없어 하는 안젤리아를 보며, Q는 싱긋 웃었다.
그리곤 곧장 뒤돌아, 가판대 너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가게 안에 안젤리아만 남겨둔 채.
전체 대사 보기 (127줄)
친애하는 블랙웰에게. 이렇게 연락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이해해 줘, 왠진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헬라" 프로젝트는 실패율이 지나치게 높고, 유일하게 성공한 실험체도 여전히 폐기물에 지나지 않아. 물론 넌 이런 걸 듣고 싶지 않겠지만, 지금 내 심정을 너에게 전해야만 해서.
몇 가지는 그만 포기하자. 포기한다고 우리가 무얼 잃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은 걸 얻을 수도 있지. 그게 내가 깨달은 점이야.
직접 한 번 만나자. 브레멘의 그곳에서...
2058년 베를린에서, 마이트너가.
2064년 가을. 세상은 폭풍우가 닥칠 기운에 휩싸였다.
마치 거대한 과수원의 과일이 무르익어, 모두가 각자 자신의 몫을 챙기고 싶어하는 분위기.
그런 가운데, 독일 내 정화지대의 중요 도시로서, 브레멘은 독특한 정책으로 자주 난민들의 목적지로 정해지곤 했다.
독일 브레멘, 교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관문 앞이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하루였다.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이곳을 마지막 동앗줄로 삼았다.
......
............
목표 지점에 도착, 브레멘 격리벽 관문까지 약 3.17km.
속히 이동해서 B그룹과 합류해야 한다.
......
안젤리아는 고개를 들어 눈부신 햇빛을 얼굴로 받았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깍지를 끼고 스트레칭을 했고, 뻣뻣한 몸 여기저기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다른 손으로 의수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고서야, 그녀는 깍지를 풀고 하얗게 질린 오른손등을 응시했다.
...괜찮나, 안젤리아?
몸풀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국민체조보다 더 좋은 게 있잖아요.
지금 우리 뒤를 밟는 생쥐들을 쫓아낸다거나요.
흥...
아주 한참 기다리고 있었나 봐?
충분히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이런 외국에서 울릭 여사와 대면하기 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경우 상황이 까다로워질 수 있다.
내가 주목받는 건 다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지 뭐.
내가 위험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말이야. 쟤들은 무시해. RPK?
경로 계획 완료했어요.
참고로, 움직일 거라면 빨리 하는 걸 권할게요. 안 그럼 선배가 안젤리아 결핍증으로 발작할 거예요.
어떡할까, 안젤리아?
안젤리아는 눈썹을 씰룩하며 RPK-16이 건넨 경로 계획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의수를 가볍게 튕기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발작하게 냅둬야겠네.
좀 신경쓰이는 곳이 있어서, 울릭과 만나기 전에 가보려고.
B그룹과 합류는 조금 미루자.
호오...?
RPK-16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젤리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궁금하네요, 안젤리아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곳이라니.
신경 꺼.
이잉, 열심히 경로 계획했는데 너무해요~
브레멘 구도심지의 중고 레코드샵이야.
"백만송이 장미"라는... 꽤 오래된 가게지.
아하아... 알았어요.
......
AN-94는 이해 못한 눈치였지만, 더 물으려 들진 않았다.
안젤리아는 시선을 조금 내리고, 약간 건조해진 입술을 핥으며 12시간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녀가 기존 계획을 변경하고,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든 불가사의한 통신을.
<color=#00CCFF>안나 빅토로브나 최 대위, 당신이 찾는 "하얀 참새"는 길다 울릭 곁에 있다.</color>
<color=#00CCFF>내가 독일에서 가장 먼저 당신과 만나고 싶다.</color>
<color=#00CCFF>사모시나.</color>
얼마 후, 브레멘 구도심지의 레코드샵 "백만송이 장미".
문 앞에서부터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먼지를 머금고 가게 밖까지 새어나와, 안젤리아마저 인상쓰게 했다.
이 제법 낡은 레코드샵이 위치한 곳은 행인도 무척 드물어서, 넓은 길가에 안젤리아 일행 3명만 서 있으니 오히려 어색하게 보였다.
나 혼자 들어갈 테니 너흰 밖에서 지키고 있어.
...눈에 안 띄게 대충 어디 숨어서.
안젤리아... 정말 혼자서 괜찮겠나?
걱정 마, 아무도 안 잡아먹어.
...가까이서 대기하겠다, 통신을 유지해라.
안젤리아가 레코드샵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RPK는 눈을 깜빡였다.
우리도 알아선 안 되는 데이트 상대인가 봐요.
안젤리아에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우리는 그저 따르면 될 뿐이야.
후후훗... 정말이지 우리랑 안 어울리게 귀엽다니까요, AN-94는.
......?
......
............
철컥.
문을 닫는 소리는 좁은 공간에 우렁차게 메아리쳤고, 가까운 천장과 선반에서 먼지까지 떨어뜨려 공기 중에 흩날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런 굉음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찾는 이도 얼마 없는 중고 레코드샵이었으니까.
......
안젤리아는 가볍게 코끝을 훔치고, 먼지를 들이키지 않도록 가판대 사이를 천천히 지나면서 레진열된 레코드판을 한 장 한 장 훑어봤다.
가게 안에는 계산대 앞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 한 명밖에 없었다. 노인은 계산대 뒤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손에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신문지를 든 채 안젤리아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음?
그러던 중, 안젤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가판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은 마침 시야의 사각지대여서, 저 노인이 안젤리아에게 안 보이고 노인도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침묵하며 손을 뻗어, 안젤리아는 자신의 눈길을 끈 앨범을 집어 들었다.
《백만송이 장미》...
누렇게 색이 바랜 표지와, 그 그림 위에 인쇄된 가게 이름과 똑같은 글자.
안젤리아도 이 앨범은 기억했다. 1983년 발매된 《백만송이 장미》.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작이지만, 이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이런 데서 썩고 있다.
이제는 아주 식상하디 식상한 사랑 이야기.
지금 같은 시대엔 아무도 즐기지도, 믿지도 않는 사랑 이야기다.
물론, 안젤리아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 앨범에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낡은 표지는 당장에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지만, 안에는 소중히 보관되어 여전히 새것같은 레코드판이 보였다.
음...?
그리고 앨범의 속표지 포장 위에, 낡은 잉크로 쓰여진 한 문장도 보였다.
비록 종이는 변색된 지 오래지만, 수려한 글씨체와 물 흐르는 듯한 펜촉의 흔적은 여전히 이걸 쓴 작가의 비범한 풍채를 짐작케 했다.
"100년 후의 너에게.
네가 이 앨범을 볼 때면,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겠지.
지금 나의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어.
애석할 노릇이야, 인류는 천재지변이 닥치고서야 비로소 힘을 모으려 하니.
이 글을 읽는 네가 사는 세상은 아마, 붕괴 복사와 환경 오염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서로 돕는 아름다운 세상이겠지?
부러운 마음을 담아 너에게 '참 잘됐구나!'라 말하고 싶구나."
......
안젤리아는 가슴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딸랑 울리며 가게 문이 또 열렸다. 바닥도 삐그덕 소리를 내며 들어온 사람은 단정한 옷차림의 단발 여성이었다.
이렇게 한적한 복고품 전문 가게엔 보통 일주일에 손님이 한 명이나 올까말까한데, 오늘은 그야말로 성수기였다.
삐이——
<color=#00CCFF>Hallo, 안젤리아 씨.</color>
<color=#00CCFF>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으려나?</color>
......
천천히 앨범을 덮고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안젤리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통신으로 말을 걸어온 여성에게 고개를 몸을 돌렸다.
<color=#00CCFF>사모시나?</color>
<color=#00CCFF>맞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불러도 돼.</color>
<color=#00CCFF>여기선 요원 Q라 불러 줘.</color>
단발의 여성은 턱을 까딱하며 안젤리아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옷차림과 현란하게 통신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안젤리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color=#00CCFF>너... 자신이 이중 스파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color>
<color=#00CCFF>걱정 마셔, 양쪽 일 다 잘하고 있으니까.</color>
<color=#00CCFF>어느 쪽도 보스가 멀쩡하면 그만이거든.</color>
<color=#00CCFF>그딴 쓸데없는 소리나 들으러 온 거 아니야.</color>
<color=#00CCFF>용건이나 간단하게 말해.</color>
<color=#00CCFF>그거 좋지, 나도 말 돌려 하기 싫어하거든.</color>
<color=#00CCFF>루뱡카에서 네 프로필을 봤어.</color>
<color=#00CCFF>패러데우스의 뒤를 캐고 있지?</color>
<color=#00CCFF>그럼 그 일에 관해서만큼은 우린 동지야.</color>
<color=#00CCFF>어느 쪽 보스의 뜻인데?</color>
<color=#00CCFF>뭐랄까... 양쪽 다?</color>
<color=#00CCFF>입장은 일치해.</color>
<color=#00CCFF>자꾸 그렇게 감질나게 할 거면 관둬.</color>
<color=#00CCFF>이게 줄일 수 있는 얘기가 아니긴 하지...</color>
<color=#00CCFF>커피 한잔 할래?</color>
<color=#00CCFF>난 보드카만 마셔.</color>
<color=#00CCFF>여기 메뉴에 보드카 커피가 있긴 한데.</color>
<color=#00CCFF>...그건 보드카에 대한 모욕이야.</color>
<color=#00CCFF>칫, 까다롭기는.</color>
둘은 비밀 통신을 잠시 멈추고, 평범한 손님처럼 음식과 레코드판을 샀다.
안젤리아는 그 "백만송이 장미"와 "보드카커피, 카페인 빼고"를 주문했다.
반면 요원 Q는 이 가게 메뉴의 모든 디저트와 음료수를 하나씩 거의 전부 주문했다.
...그거 다 먹을 수는 있지?
걱정 마, 이거 점심 저녁 야식 합쳐서야.
<color=#00CCFF>"태양 흑점" 사건, 기억해?</color>
<color=#00CCFF>슈타지의 대 신소련 첩보력이 20년은 후퇴하게 만든 그 사건?</color>
<color=#00CCFF>어, 그거. 그 사건으로 슈타지는 명성은 물론 사회적 입지마저 곤두박질쳤지.</color>
<color=#00CCFF>근데 내 독일 쪽 보스가 말이야... 그걸 뭐라더라... 아, 워커홀릭이거든?</color>
<color=#00CCFF>파스타 만들기 대회에 참가하면 면발을 지구 3바퀴는 감을 정도로 뽑을 사람.</color>
<color=#00CCFF>일중독자도 그런 독종은 흔치 않은데...</color>
<color=#00CCFF>그 보스가, 슈타지의 첩보력을 전성기로 되돌리려고 해.</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큰 뜻을 품으셨구만.</color>
<color=#00CCFF>문제는...</color>
<color=#00CCFF>이미 해냈단 거지만.</color>
<color=#00CCFF>뭐...?</color>
<color=#00CCFF>쬐끔 맛만 보여줄게.</color>
......
......
......
............
<color=#00CCFF>엄청나지?</color>
<color=#00CCFF>이 정도 규모라고...?</color>
<color=#00CCFF>루뱡카에서도 이런 시스템은 언급조차 된 적 없는데...</color>
<color=#00CCFF>기적 같지?</color>
<color=#00CCFF>감상을 듣고 싶다면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밖에 없어.</color>
<color=#00CCFF>네 루뱡카 쪽 보스는 이미 슈타지의 개네.</color>
<color=#00CCFF>단어 선정이 좀 그렇지만 아니라고 할 순 없지.</color>
<color=#00CCFF>아무튼, 이 시스템은 "벌침"이라고 해, 성질상 실시간 감시 체계라고 할 수 있겠지?</color>
<color=#00CCFF>그런데, 최근에 내 독일 쪽 보스가 이것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챘어.</color>
<color=#00CCFF>패러데우스.</color>
<color=#00CCFF>응.</color>
<color=#00CCFF>울릭보다 먼저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래서야?</color>
<color=#00CCFF>그런 거지. 울릭 곁의 그 "참새"는... 이미 투명한 상태거든.</color>
<color=#00CCFF>그러니까 안젤리아, 우린 협력할 수 있어.</color>
<color=#00CCFF>이 꼴을 대체 어떻게 비웃어야 할지 난감하다.</color>
<color=#00CCFF>세상이 그런 법 아니겠어, 수많은 발명품들이 겉보기엔 잘 빠진 스포츠카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인력으로 바퀴를 굴리는 모양새잖아.</color>
<color=#00CCFF>감시를 피할 방법은?</color>
<color=#00CCFF>없어.</color>
<color=#00CCFF>그래서 큰 리스크를 지고 이렇게 널 직접 만나러 온 거야. 직접 입에서 귀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어서.</color>
<color=#00CCFF>어지간한 원격 수단은 모조리 도청된다고 생각하면 돼.</color>
<color=#00CCFF>만약 네 곁에 통제 불가능한 사람이 있거나, 암호화되지 않은 통신 채널이 있다면...</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일단 말해 두겠지만, 난 슈타지의 내부 힘싸움엔 관심 없어.</color>
<color=#00CCFF>걱정 마 걱정 마, K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color>
<color=#00CCFF>어차피 걔 훈련생 시절 때도 날 이기는 과목 하나도 없었어.</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그러니까 현임 국장 같은 호구 꽁무니나 따라다니지.</color>
<color=#00CCFF>허, 네 줄은 무슨 황금 동앗줄이라도 되는 모양이네?</color>
<color=#00CCFF>그야 물론.</color>
<color=#00CCFF>...무슨 근거로?</color>
<color=#00CCFF>내 경비 신청 한도가 녀석의 3배거든.</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그래서, 울릭 곁의 "참새"는 누구야?</color>
<color=#00CCFF>그녀의 비서 몰리도 포거트, 놈들 식으로는 니토.</color>
마지막 남은 브라우니까지 꼭꼭 씹어먹고, Q는 자리에서 일어나 앨범 코너에서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계산 대신 부탁해~
다음엔 내가 쏠 테니까.
......
어이없어 하는 안젤리아를 보며, Q는 싱긋 웃었다.
그리곤 곧장 뒤돌아, 가판대 너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가게 안에 안젤리아만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