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쇼크
EP.14 · 만성쇼크

L5 우회전-좌회전

인간은... 진장한 창조주를 재현해 낼 수 없어요.

-58-2-R3

1 / 127
전체 대사 보기 (118줄)

아베르누스, 의식의 호수.

영원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한, 호수에 비치는 현란한 빛무리.

눈앞에 기묘한 그림자가 아른거리지 않았다면 아마 꿈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겐 당치도 않은, 천국행 배에 탄 꿈으로.

안젤리아

뭐야, 이... 풍경은?

그레이

"시온"을 아시나요?

안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젤리아

그런 건 전공이 아니라서.

그레이

유적기구의 연구 방향 중 하나예요.

그 당시, 마사 선배는 응용물리학 실험실에서 일하다 보인 뛰어난 성과로 유적기구에 채용됐어요.

그리고 이것 또한 그녀의 핵심 프로젝트의 성과고요.

"시온"의 존재를 시뮬레이션하는 것. 당시엔 아직 "성배"라는 이름의 인류 연결조 프로젝트였죠.

이성, 정서, 그리고 본능까지 시뮬레이션해, "니토 의식", "컨셔스 파노라마", 그리고 이 "의식의 호수"를 창조하는 것.

여기가... 이 의식의 호수가, 모든 니토들의 의식 가장 깊은 곳인 셈이에요.

안젤리아

저 위의 빙산은 뭐야?

그레이

마사 선배의 연구는 순조롭지 않았어요. 본디 이 세 영역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어요.

...사나가 뇌사하기 전까진.

그레이

저는 그 아이를 구하고 싶었어요.

만약 과거의 선배를 만나봤다면, 당신도 선배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 바로 알았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직접 도움을 청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그레이

그래서, 저는 한 장치를 설계했어요. "복음중추".

이것으로 그 아이의 의식을 고정시켰죠.

그레이

사나의 기억을 추출해...

복음중추로, 그걸 컨셔스 파노라마로부터 격리시켰어요.

그리고 기억을 그 안에 넣고, 한 인간의 의식을 재현하려 시도했죠.

그때만 해도, 복음중추에 의한 제어 효과는 얇은 얼음장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에 쌓이는 의식이 점점 많아질수록, 얼음도 점점 두꺼워졌어요.

이제는 저렇게 거대한 빙산이 되었죠.

안젤리아

...그럼 넌 왜 여기에 있어?

그레이

실험자의 악취미랄까요?

건축가가 마지막 벽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듯이요.

그레이는 테스트 삼아 자신의 기억을 이곳에 복사해봤어요.

그리고 그것이 지금 당신과 대화하는, 2051년까지의 기억을 지닌 저예요.

안젤리아

인간의 기억을 여기다 고정하고, 육체를 갈아탄다... 영생이나 다름없는 거 아니야?

그레이

......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영생이 아니에요.

안젤리아

보기에는 그런데.

그레이

예를 들까요. 한 사람의 10대의 기억을 A, 20대의 기억을 B, 30대의 기억을 C라 친다면, 그중 어느 것이 "그 사람"일까요?

안젤리아

시간상 가장 마지막 거.

그레이

아뇨. 무엇이 진짜 "마지막"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20대의 "그 사람"과 40대의 "그 사람"이 각자 다른 육체로,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중 어느 것을 "그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안젤리아

.....

그레이

인간에겐 유일무이함과 진실된 창조성이 있어요.

하지만 복음중추로 통제하는 것엔... 그런 것이 없죠.

그레이

이곳에서 합성되는 소위 "인격"이란, 그저 선택과 재구성에 불과해요.

진실된, 진정한 창조가 아니에요.

온갖 단어로 조립될 수 있지만 27번째 알파벳이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요.

인간은... 진정한 창조주를 재현해낼 수 없어요.

안젤리아

그리고?

그레이

제 수술은 실패했어요.

사나의 의식은 이곳에 확실히 고정돼서, 복음중추로 육체를 조종하도록 시도해 봤지만...

하지만 실패했어요.

생성되는 인격은 전부 불안정해서, 제가 몇 번을 합성하고, 재조립하고, 순서를 섞어보기까지 했지만...

결국 제가 철저하게 실패했단 사실만 깨달았어요.

저는 슬픈 마음으로 선배에게 전부 설명했고, 그리고...

그게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에요.

안젤리아

그래서 네가 한 순간이라 한 거군.

바로 이 순간인 너라서.

그레이

네.

이곳에 남겨진 건 그저 한 "순간". 하지만 인간은 무수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이런 걸 인간이라 칭할 수 있겠어요.

안젤리아

......

패러데우스가 여기저기서 사람을 납치해다 실험하는 것도... 이 영생을 흉내내는 걸 테스트하기 위해서야?

그레이

글쎄요, 어쩌면... 부작용일지도요.

안젤리아

부작용?

그레이

......

제 추측이지만, 이 설계 자체의 부작용이 아닐까 해요.

그레이

인류의 과학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을 흉내내고, 그 뒤에 숨겨진 일종의 로직, "진실"을 찾는 것이죠?

그레이

예를 들어,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선 빛이 필요하죠.

자연에선 태양이 빛을 제공하고요.

과학은 그걸 모방해 태양등을 만들었어요.

그것으로도 식물을 재배할 수는 있죠.

하지만 태양등은 전기 에너지를 소비해요.

이 에너지 소비가 바로 모방의 부작용이에요.

즉, "성배"는 "시온"을 모방한 부작용으로 생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안젤리아

잘도 이딴 끔찍한 걸 설계하셨군...

그레이

말했잖아요, 모르핀도 본디 진통제로 쓰기 위해 아편으로부터 추출한 거지, 그게 판도라의 상자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요.

저는 불로영생의 패스워드를 풀어보려 했지만... 결국 얻은 건 이런... 끔찍한 것이었어요.

당시 저는 동물의 생체 에너지를 사용했고, 사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레이

저 얼음의 두께로 보아, 실험은 성공한 것 같아요. 생체 에너지도 그만큼 엄청난 양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런 경관이 만들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안젤리아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니토"를 공장처럼 찍어내겠어.

그레이

......

안젤리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자세히 알려 주는 거야?

그레이

......

이래서 이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레이

저는 인간인 "제"가 앞으로 무얼 생각하고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 니토라는 기적이 세상 모든 과학자에게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오리란 생각이 들어요.

심지어는, 제 이론은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달성감마저 어렴풋이 느껴져요.

하지만...

제 이성과 도덕 관념이, 이건 완성되어선 안 되는 기술이라 경고하고 있어요.

윤리에 위배되고, 제가 품었던 이상에 어긋나는 거라고요.

안젤리아

자괴감 때문에 털어놓았단 소리군.

그레이

저는... 여기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죽는 것을 보았어요.

아까, 복음중추는 내부 순환계가 아닌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고 했죠?

그렇기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당신도 복음중추에 의해 분해되어 사라질 거예요.

새로운 "의식"을 합성하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단순히 에너지가 되어 복음중추에 소모될 수도 있죠...

그레이

당신이 누구인진 모르지만...

저를 알아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안젤리아

...너, 풀네임 뭐야?

그레이

블랙웰. 그레이 블랙웰.

안젤리아

......역시.

네가 바로 마사 마이트너의 후배, 내 머릿속에서 보이던 그 편지들의 주인이었어.

그레이

편지요?

안젤리아

......

친애하는 블랙웰에게. 이렇게 연락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이해해 줘, 왠진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헬라" 프로젝트는 실패율이 지나치게 높고, 유일하게 성공한 실험체도 여전히 폐기물에 지나지 않아. 물론 넌 이런 걸 듣고 싶지 않겠지만, 지금 내 심정을 너에게 전해야만 해서.

...어쩌면, 과거의 내가 너무 나약했기 때문일지도. 기술적으로는 이미 실행 가능했는데, 단지 내가 겁먹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한 걸지도 몰라...

나도 전에는 모든 준비가 갖춰지길 기다리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

몇 가지는 그만 포기하자. 포기한다고 우리가 무얼 잃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은 걸 얻을 수도 있지. 그게 내가 깨달은 점이야.

선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성이 전부 닳아 사라질 때, 사람들은 무슨 인류의 가치를 내세우려 할까.

마사 선배...

이건 이상에 대한 배신이에요.

더는 당신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아요.

......

아베르누스 동탑, 수술층.

RO635의 도움으로, 콜레다는 데이터베이스 해킹에 성공해 방의 출입 권한을 얻었다.

——Error!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얀 유리방의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열리질 않았다.

콜레다

칫... 역시 안에서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완전히 잠금 해제되는 방식이었어. 최악의 케이스네.

RO635

그럼 어떡하지...?

콜레다

안젤리아가 완전히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RO635

방금 레벨 2 플랫폼에서 우리와 함께 싸운 그 모습... 정말 안젤리아 씨야?

콜레다

그녀인 건 분명해.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진 나도 모르겠어.

RO635

"헬라" 때문에...?

안젤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RO635는 상상할 수도, 상상하기도 싫었다.

삐익.

그때, 통신기가 잠깐의 침묵을 부쉈다.

<color=#FFFF00>아이네이아스 작전 회의실 재가동 성공.</color>

<color=#FFFF00>아니네이아스 작전팀 출석 - 유니콘.</color>

<color=#FFFF00>아니네이아스 작전팀 출석 - 우산.</color>

<color=#FFFF00>아이네이아스 작전 현재 상황...</color>

<color=#FFFF00>제1단계 - 진도 100%</color>

<color=#FFFF00>제2단계 - 진도 50%</color>

<color=#FFFF00>제3단계 - 진도 0%</color>

<color=#FFFF00>제4단계 - 진도 100%</color>

<color=#FFFF00>제5단계 - 진도 0%.</color>

<color=#FFFF00>......</color>

<color=#FFFF00>제0단계... 진도 99%...... 100%.</color>

RO635

......!!!

충격에 잠긴 RO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RO635

......UMP45 씨?

UMP45

<color=#00CCFF>안녕.</color>

RO635

......

UMP45

<color=#00CCFF>...왜, 타이밍 잘못 잡았어?</color>

RO635는 당장에라도 엉엉 울며 UMP45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손으로 뺨을 찰싹 치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입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도로 삼켰다.

RO635

그쪽... 그쪽 상황은?

UMP45

<color=#00CCFF>당분간은 회의실 유지에 문제 없어.</color>

RO635

다른 사람들과 통신은 되나요?

UMP45

<color=#00CCFF>아니, 너 빼고 다 오프라인이야.</color>

RO635

...알겠습니다.

UMP45

<color=#00CCFF>뭐어 계속 연락은 시도해겠지만.</color>

<color=#00CCFF>그래서 넌 어때, 안젤리아 찾았어?</color>

RO635

네, 하지만 지금 여길 벗어날 수가 없어요.

저... 우리끼리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UMP45

<color=#00CCFF>그래애 쉽게 풀릴 리가 없지...</color>

<color=#00CCFF>하지만 다 너한테 맡길 수밖에 없겠네.</color>

RO635

실망 안 시킬게요.

UMP45

<color=#00CCFF>원격 지원은 해 줄게.</color>

RO635

네, 이 실험실의 상황도 계속 전달하겠습니다.

UMP45

<color=#00CCFF>응.</color>

<color=#00CCFF>......</color>

RO635

...? 왜 그러세요?

UMP45

<color=#00CCFF>RO, 부탁할 게 있는데.</color>

RO635

얼마든지요.

UMP45

<color=#00CCFF>......아니 됐다.</color>

<color=#00CCFF>말 안 해도 어차피 네가 다 알아서 해치울 거 같아.</color>

RO635

그럴 거예요.

UMP45

<color=#00CCFF>그럼 부탁할게, RO.</color>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은 다시 침묵에 빠졌지만, 이 침묵 덕분에 RO635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베르누스, 의식의 호수.

우편의 내용을 끝까지 들은 그레이 블랙웰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주위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계속되지 않았다면, 안젤리아는 지금 시간이 멈춘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레이

......아무래도...

선배는... 계획을 중단하지 않았군요.

그저, 프로젝트명을 "성배"에서 "헬라"로 바꿨을 뿐.

안젤리아

맞아.

그레이

그럼, 하나 더 질문하고 싶어요.

안젤리아

뭔데?

그레이

저는... 아직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나요?

안젤리아

......

<color=#A9A9A9>아니, 현실의 "넌" 니토가 되어버렸으니...</color>

안젤리아는 눈을 감고 잠시 고민했다.

안젤리아

아니...

안젤리아

너는, 오래 전에 죽었어. 네 제자들이 장례식도 후하게 치러 줬고.

그레이

......아아.

아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군요...

제 신념을 관철했어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어기지 않았어요...

낮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기분인지는 조금 느껴졌다.

그레이

...묘비문은 무엇이었나요?

안젤리아

......

내가 의료계 사람이 아니라 자세히는 안 봤어.

그냥, 꽤 길었던 것만 기억해.

그레이

제 제자들이 골라 줬겠죠...

아마 제가 평소에 입에 달고 살던 좌우명일지도요.

안젤리아

뭐, 그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레이

아뇨.

"죽음은 피할 수 없기에, 생명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안젤리아

......

그레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례로, 당신에게 선물을 드릴게요.

안젤리아

응?

그레이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하셨죠?

안젤리아

...그랬지.

그레이

복음중추의 영향을 잠시 해제할 수 있어요.

안젤리아

......!

왜 진작에 말 안 했어?

그레이

단 한 번만 할 수 있거든요.

수면 위의 얼음 조각이, 잠시 바람에 갈라졌다 다시 뭉쳐지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그레이

그러니, 딱 바람 한 번 부는 정도의 시간만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 사이에 당신의 육체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다시 이곳에 빠져버릴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레이

준비되셨나요?

안젤리아

...됐어.

그레이

그럼, 제 손을 잡으세요... 놓치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