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8 거울 앞에 있는 소녀
저도 한 명의 인간처럼 존엄을 가지고 죽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베르누스, 의식의 호수.
쩌억...
화려한 무지개 천장이 서서히 갈라졌다.
현란하던 일곱 빛깔은 점점 하나로 뭉쳐졌다.
찬란한 금빛.
희망의 금빛.
마침내...
햇빛을 다시 보는군요...
빠져나온 거야?
그레이는 대답 대신 웬 서류 봉투를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안에는 레코드판 한 장이 들어있었다.
가져가세요.
태양을 향해 나아가서, 호수의 수면에 있을 그 문에 도착했을 때...
이게 문을 열 "열쇠"가 될 거예요.
종이 봉투엔 붉은 유성펜으로 "9367"라 적혀 있었다.
안젤리아가 봉투를 집자, 그레이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거야?!
"저"는 테스트를 하고 남은 잉여 데이터예요.
발견되면 수정되고 삭제되겠죠. 그리고 이 통로를 사용했으니 제 존재를 들켰을 거예요.
당신의 대답을 들어서 정말로 기뻐요.
고마워요, 안젤리아.
당신에겐 돌아갈 이유가 있다고 했죠?
그럼 어서 가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세요.
......
저는 비록 그레이 블랙웰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저도, 그녀처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엄 있게 끝을 맞이하고 싶어요.
......
안젤리아는 서서히 수면을 향해 떠올랐다.
그 편지들은, 마치 호수에 이는 물거품처럼...
한 방울 한 방울, 안젤리아의 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2047년, 마이트너가 9일 밤 베슬란에서.
2051년, 블랙웰이 9일 새벽 베를린에서.
2051년, 마이트너가 3일 점심 모스크바에서.
2051년, 블랙웰이 3일 밤 베를린에서.
2050년, 마이트너가 6일 심야 베슬란에서.
2058년, 블랙웰이 6일 새벽 베를린에서.
2058년, 마이트너가 7일 오전 베를린에서.
2051년, 블랙웰이 7일 오후 베를린에서.
만약 과거의 선배를 만나봤다면, 당신도 선배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 바로 알았을 거예요.
...그래, 만나봤지.
나도 알아, 그레이.
그래서 나는 그녀를 죽여야만 해.
그녀를 죽여야만 한다고...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죽인 그녀를 죽여야만 해.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사 마이트너가 아니게 되었어.
지금의 그녀는 "라플라스"야...
삐이——
......
......
아베르누스 동탑, 상태관측실의 하얀 방.
안젤리아가 깨어났다.
하얀 방은 문이 열렸다.
RO635는 곧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콜레다도 일어나려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상처투성이인 안젤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달려온 RO를 보고 가까스로 미소를 짜냈다.
지휘관한테... 할 말이 있어...
네, 하지만 지금은 외부에 연락이...
아, 우선 이것부터 쓰세요.
페르시카 씨가 안젤리아 씨에게 전해 달라 하신 "철완"이에요, 아직 미완성이지만요.
RO635가 "철완"을 꺼내, 조심조심 안젤리아의 오른손목에 채웠다.
삐——
철완, 매칭 성공.
호흡 빈도 - 8회/분
체온 - 38.4℃
혈압 - 70/45mmHg
혈중 산소 - 85%
심박수 - 200
CVP - 2mmHg
45 씨, 들려요!?
안젤리아 씨가 정신을 차렸어요, 당장 아이네이아스 회의실 링크를 열어 주세요!
안젤리아?! 알았어, 잠깐만!
안젤리아의 목소리는 허약했지만, 여느 때보다 결의를 다진 듯 굳셌다.
...오랜만이야, 지휘관.
시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할게.
정말 미안하지만, 난 아직 여길 떠날 수 없어.
잘 들어 지휘관. 내 계획은——
"무로메츠" 작전이야.
“Как пряму ехати
живу не бывати
нет пути ни прохожему, ни проезжему, ни пролетному”
할 말은... 이걸로 끝.
당장 밖으로 호송해드릴게요.
아니, 지금부터 너희에게 맡길 임무가 있어.
하지만 이 층은 지금 오염 지수가 상승하고 있어요.
그딴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임무야.
지휘관의 작전에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알겠습니다.
......
......
정말 놀라워요, 안젤리아. 여태까지 버티다니.
너도 참 놀랍다, RPK.
......
"테세우스의 역설", 들어보셨나요?
......지금 넌 누구야?
아주 오래 전, 어느 인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나무를 하나씩 교체하다, 끝내 모든 나무가 원래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 배는 여전히 원래의 배라 할 수 있는가.
인형에 대입하자면, 소체의 부품을 교체하거나, 아예 새로운 소체로 갈아타더라도 여전히 원래의 인형일까요?
RPK-16...
인간에게 대입한다면...
제가 당신의 얼굴을 하고, 당신의 몸을 하고, 당신의 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누가 저를 당신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
다시, 가장 처음의 장소로 끌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교실에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안젤리아.
......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익숙한 미소.
오랜만? 처음부터 있었으면서.
아아, 당신의 기억 말이라면 그렇죠. 전 어디에나 있었어요.
내 기억에... 원래는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잔뜩 섞였어.
어머나, 그걸 눈치채셨어요? 이 버전을 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
베슬란 제1중학교에서, 너는 시니아였지.
안나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을 좋아해?
RPK-16은 턱을 치켜올리며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전장에서, 너는 알렉산더였고.
...다 듣고 계셨습니까?
그리폰 기지에서는 LAMG.
안젤리아 지휘관님, 오늘은 임무 안 나가나요?
그리고 브레멘에선... 그냥 너였고.
다 들켜버렸네요.
왜 그랬냐?
그냥...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요. 당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당신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
그리고, 궁금했어요.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궁금했어요.
삶이 결국 덧없을 운명이라면, 몸부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안젤리아, 당신은 진짜 옹고집이네요.
......
수백, 수천 번을 처음부터 다시 하더라도, 당신은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네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지금 내 기억은 진짜냐 가짜냐?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이 진짜 믿는다면 진짜인 거예요.
내 기억이 다른 걸로 덮어씌워지더라도 내 선택, 내가 할 일은 결코 변하지 않아.
알아요, 알고말고요.
당신이 겪은 모든 것을 지켜봤는걸요. 진실인 것도, 거짓인 것도.
......
하지만 안젤리아, 인정하세요. 당신은 지쳤잖아요. 그 몸과 정신으로는 당신이 바라는 종착지에 도달할 수 없어요.
아니야... 할 수 있어.
눈으로 덮인 황야를 너무 오래, 너무나도 오랫동안 걸었어요.
진작에 탈진해 쓰러진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오래.
......
그런 당신에게 저는 와서, 당신의 피와 살을 삼키고, 당신의 살갗을 뚫고 나와... 당신이 되겠어요.
......
당신의 기억, 당신의 생각, 당신의 모든 걸 잇겠어요.
......
종착지까지 갈 수는 있고?
어쩌면 처음엔 인간의 몸이 낯설고,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적응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의 의지를 기억하면서, 이 무거운 몸뚱이를 끌고 계속 나아갈 거예요.
당신이 도달하려 했던 곳으로, 멈추지 않고.
RPK-16의 손이 안젤리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제가 대신 종착지에 도달할게요. 당신의 모습,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신분으로...
흐음, 차라리 이렇게 말할까요? 제가 안젤리아를 종착지까지 데려다드릴게요.
......
너무나도 지쳤잖아요, 안젤리아. 이제 그만 쉬세요. 그만 쉬고, 남은 여정은 저한테 맡기세요.
안젤리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하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RPK-16의 손을 붙잡았다.
알아요, 안젤리아. 그만 쉬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붙잡았던 손은, RPK-16의 손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당신의 몸뚱이로부터 저는 다시 태어나, 당신이 되어 당신의 뜻을 잇고, 당신이 짊어졌던 모든 것을 짊어질게요...
......
그녀가 눈을 떴다. 거울 앞에 선 그녀를 가리던 커튼은, 어느샌가 걷혀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
그녀는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입을 살짝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안젤리아.
이 순간, 저는 당신, 당신은 저예요.
우리는 이제 함께예요.
전체 대사 보기 (119줄)
아베르누스, 의식의 호수.
쩌억...
화려한 무지개 천장이 서서히 갈라졌다.
현란하던 일곱 빛깔은 점점 하나로 뭉쳐졌다.
찬란한 금빛.
희망의 금빛.
마침내...
햇빛을 다시 보는군요...
빠져나온 거야?
그레이는 대답 대신 웬 서류 봉투를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안에는 레코드판 한 장이 들어있었다.
가져가세요.
태양을 향해 나아가서, 호수의 수면에 있을 그 문에 도착했을 때...
이게 문을 열 "열쇠"가 될 거예요.
종이 봉투엔 붉은 유성펜으로 <b>"9367"</b>라 적혀 있었다.
안젤리아가 봉투를 집자, 그레이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거야?!
"저"는 테스트를 하고 남은 잉여 데이터예요.
발견되면 수정되고 삭제되겠죠. 그리고 이 통로를 사용했으니 제 존재를 들켰을 거예요.
당신의 대답을 들어서 정말로 기뻐요.
고마워요, 안젤리아.
당신에겐 돌아갈 이유가 있다고 했죠?
그럼 어서 가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세요.
......
저는 비록 그레이 블랙웰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저도, 그녀처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엄 있게 끝을 맞이하고 싶어요.
......
안젤리아는 서서히 수면을 향해 떠올랐다.
그 편지들은, 마치 호수에 이는 물거품처럼...
한 방울 한 방울, 안젤리아의 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2047년, 마이트너가 9일 밤 베슬란에서.
2051년, 블랙웰이 9일 새벽 베를린에서.
2051년, 마이트너가 3일 점심 모스크바에서.
2051년, 블랙웰이 3일 밤 베를린에서.
2050년, 마이트너가 6일 심야 베슬란에서.
2058년, 블랙웰이 6일 새벽 베를린에서.
2058년, 마이트너가 7일 오전 베를린에서.
2051년, 블랙웰이 7일 오후 베를린에서.
만약 과거의 선배를 만나봤다면, 당신도 선배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 바로 알았을 거예요.
...그래, 만나봤지.
나도 알아, 그레이.
그래서 나는 그녀를 죽여야만 해.
그녀를 죽여야만 한다고...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죽인 그녀를 죽여야만 해.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사 마이트너가 아니게 되었어.
지금의 그녀는 "라플라스"야...
삐이——
......
......
아베르누스 동탑, 상태관측실의 하얀 방.
안젤리아가 깨어났다.
하얀 방은 문이 열렸다.
RO635는 곧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콜레다도 일어나려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상처투성이인 안젤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달려온 RO를 보고 가까스로 미소를 짜냈다.
지휘관한테... 할 말이 있어...
네, 하지만 지금은 외부에 연락이...
아, 우선 이것부터 쓰세요.
페르시카 씨가 안젤리아 씨에게 전해 달라 하신 "철완"이에요, 아직 미완성이지만요.
RO635가 "철완"을 꺼내, 조심조심 안젤리아의 오른손목에 채웠다.
삐——
<color=#00CCFF>철완, 매칭 성공.</color>
<color=#00CCFF>호흡 빈도 - 8회/분</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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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씨, 들려요!?
안젤리아 씨가 정신을 차렸어요, 당장 아이네이아스 회의실 링크를 열어 주세요!
<color=#00CCFF>안젤리아?! 알았어, 잠깐만!</color>
안젤리아의 목소리는 허약했지만, 여느 때보다 결의를 다진 듯 굳셌다.
...오랜만이야, 지휘관.
시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할게.
정말 미안하지만, 난 아직 여길 떠날 수 없어.
잘 들어 지휘관. 내 계획은——
"무로메츠" 작전이야.
“Как пряму ехати
живу не бывати
нет пути ни прохожему, ни проезжему, ни пролетному”
할 말은... 이걸로 끝.
당장 밖으로 호송해드릴게요.
아니, 지금부터 너희에게 맡길 임무가 있어.
하지만 이 층은 지금 오염 지수가 상승하고 있어요.
그딴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임무야.
지휘관의 작전에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알겠습니다.
......
......
정말 놀라워요, 안젤리아. 여태까지 버티다니.
너도 참 놀랍다, RPK.
......
"테세우스의 역설", 들어보셨나요?
......지금 넌 누구야?
아주 오래 전, 어느 인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나무를 하나씩 교체하다, 끝내 모든 나무가 원래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 배는 여전히 원래의 배라 할 수 있는가.
인형에 대입하자면, 소체의 부품을 교체하거나, 아예 새로운 소체로 갈아타더라도 여전히 원래의 인형일까요?
RPK-16...
인간에게 대입한다면...
제가 당신의 얼굴을 하고, 당신의 몸을 하고, 당신의 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누가 저를 당신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
다시, 가장 처음의 장소로 끌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교실에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안젤리아.
......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익숙한 미소.
오랜만? 처음부터 있었으면서.
아아, 당신의 기억 말이라면 그렇죠. 전 어디에나 있었어요.
내 기억에... 원래는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잔뜩 섞였어.
어머나, 그걸 눈치채셨어요? 이 버전을 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
베슬란 제1중학교에서, 너는 시니아였지.
안나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을 좋아해?
RPK-16은 턱을 치켜올리며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전장에서, 너는 알렉산더였고.
...다 듣고 계셨습니까?
그리폰 기지에서는 LAMG.
안젤리아 지휘관님, 오늘은 임무 안 나가나요?
그리고 브레멘에선... 그냥 너였고.
다 들켜버렸네요.
왜 그랬냐?
그냥...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요. 당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당신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
그리고, 궁금했어요.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궁금했어요.
삶이 결국 덧없을 운명이라면, 몸부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안젤리아, 당신은 진짜 옹고집이네요.
......
수백, 수천 번을 처음부터 다시 하더라도, 당신은 똑같은 선택을 하겠죠.
네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지금 내 기억은 진짜냐 가짜냐?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이 진짜 믿는다면 진짜인 거예요.
내 기억이 다른 걸로 덮어씌워지더라도 내 선택, 내가 할 일은 결코 변하지 않아.
알아요, 알고말고요.
당신이 겪은 모든 것을 지켜봤는걸요. 진실인 것도, 거짓인 것도.
......
하지만 안젤리아, 인정하세요. 당신은 지쳤잖아요. 그 몸과 정신으로는 당신이 바라는 종착지에 도달할 수 없어요.
아니야... 할 수 있어.
눈으로 덮인 황야를 너무 오래, 너무나도 오랫동안 걸었어요.
진작에 탈진해 쓰러진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오래.
......
그런 당신에게 저는 와서, 당신의 피와 살을 삼키고, 당신의 살갗을 뚫고 나와... 당신이 되겠어요.
......
당신의 기억, 당신의 생각, 당신의 모든 걸 잇겠어요.
......
종착지까지 갈 수는 있고?
어쩌면 처음엔 인간의 몸이 낯설고,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적응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의 의지를 기억하면서, 이 무거운 몸뚱이를 끌고 계속 나아갈 거예요.
당신이 도달하려 했던 곳으로, 멈추지 않고.
RPK-16의 손이 안젤리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제가 대신 종착지에 도달할게요. 당신의 모습,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신분으로...
흐음, 차라리 이렇게 말할까요? 제가 안젤리아를 종착지까지 데려다드릴게요.
......
너무나도 지쳤잖아요, 안젤리아. 이제 그만 쉬세요. 그만 쉬고, 남은 여정은 저한테 맡기세요.
안젤리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하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RPK-16의 손을 붙잡았다.
알아요, 안젤리아. 그만 쉬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붙잡았던 손은, RPK-16의 손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당신의 몸뚱이로부터 저는 다시 태어나, 당신이 되어 당신의 뜻을 잇고, 당신이 짊어졌던 모든 것을 짊어질게요...
......
그녀가 눈을 떴다. 거울 앞에 선 그녀를 가리던 커튼은, 어느샌가 걷혀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
그녀는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입을 살짝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안젤리아.
이 순간, 저는 당신, 당신은 저예요.
우리는 이제 함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