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태어나 죽는다
"너의 피가 식었으니 다시 끓어오르게 하라."
의식의 호수.
거대한 사파이어에 굴절되는 태양빛처럼, 호수는 모든 것이 몽환적이었다.
새하얀 마르가리타 꽃잎은 호숫물에 떠다니며 햇빛에 스며들어, 희미하게, 하얗게 반짝였다.
사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왜... 나한테 희망을 주고서, 또 절망하게 해...?
미안해... 거짓된 희망으로는 너를 구원할 수 없어, 어떨 땐 절망적인 진실만이 자유를 가져올 수도 있는 거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안녕, 사나.
소녀들의 노랫소리에 감싸여, 사나는 물거품으로 변해 바닥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끝내 수면에 닿아, 처음으로 한 줄기 햇빛을 느꼈다.
끝없던 푸른색이 점점 바래져 갔다.
엘마...
나, 마음 정했어.
...너, 설마?
그 설마야.
더는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나는 그 국왕 폐하한테 돌아가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거야.
...그 다음엔?
......
그 다음은 없어.
그럼... 너는 사라지는 거지?
......
둘은 손을 꼭 마주잡았다.
레네트는 눈을 감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붙잡았다.
이건 내가 바란 이야기가 아니야... 엘마, 내가 원한 결말이 아니라고...
미안해 레네트, 난 지쳤어...
난 있지, 엄청 애써서, 일부러 굳센 척, 용감한 척 다 했어...
하지만... 결국 난 그냥 약한 어린애일 뿐이야.
내가 큰언니라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여태까지 너한테 성질만 부렸네...
아니야... 아니야 엘마...
너와 함께하던 나날이 전혀 싫지 않았어...
내가, 내가 계속 고집부리기만 했는데... 널 잃고 싶지 않아, 미라벨도 잃고 싶지 않아, 서머 가든의 자매들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아...
니달리도... 그리고 박사도...
군에서 복무하면서도, 매일매일 돌아오고 싶었다고...
그리고 마침내 너를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을 때...
넌 몰라, 제약에서 풀려났던 그 순간, 너희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된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나야, 엘마... 내가, 내가 사과해야 해...
엘마는 꼭 쥐었던 손을 놓고, 레네트가 정말 지겹도록 보아 왔던 얄미운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었다.
너한테만 살짝 비밀 하나 알려 줄게.
응...?
내가 AR-18한테 줄 영상을 몇 개 녹화했거든? 네가 나 대신 전해 줘.
너한테 나쁜 소리도 했으니까 그건 봐줘.
......싫어.
싫어, 네가 직접——
쉬잇.
엘마가 검지를 입술에 대자, 레네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꼼짝 못했다.
에헷, 이제와서 새삼 나한테 이런 권한도 있다는 게 생각났네.
미안하지만 이번엔 반박 안 받아.
......
같이 국왕 폐하를 만나러 가자, 레네트.
레네트는 그저 추락하며, 주위의 푸른색이 갈수록 투명해져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푸른빛마저 사라지자, 허공에 떠 있는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억에는 없는, 하지만 어쩌면 이미 여러 번 봤을지도 모르는 광경.
햇빛이 칙칙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춰 바닥에 현란한 색을 드리우고, 식물 줄기는 이곳으로 모여 촘촘한 그물을 이루었다.
뻗어나온 가느다란 잎사귀에 조심스레 떠받쳐진 남보라색 꽃. 본디 하루살이인 이 꽃들은 저 빛 덕분에 아름다운 자태를 영원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영원히 지지 않을 루엘리아 꽃밭에서, 네 사람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난... 여기 오지 말아야 했을까?
이건 엘마의 선택이야.
그리고 폐하의 결말이기도 해.
......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이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두 문짝 뒤로 무수히 많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엘마.
응, 돌아왔어.
기뻐.
난 슬퍼.
...나는 슬퍼.
나도 기뻐.
그럼, 시작하자.
...응.
그 앵커 포인트를 열게.
그건 아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 왔어.
마침내, 앵커 포인트 【GRCh38】이 열렸다.
......
쏴아...
유난히 햇빛이 화창하던 그날, 실험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
엘마, 올바른 답을 알았어.
【GRCh38】에 도달하기 위한 재료가 무엇인지 드디어 알아냈어.
와아, 축하해 엄마!
아, 그럼 드디어 "파일럿고래" 프로젝트 성공이야?
그래... 다른 사람이 그걸 연구해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성배"라고 바꾸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올바른 재료가 뭐야?
인간의 뇌야.
그녀의 실험실에서 성공작을 직접 봤어...
죽은 인간 여자아이가, 다시 눈을 떴어...
...? 답을 알아냈으니 엄청 기쁜 일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속상한 얼굴이야...?
내 공식은 맞았지만, 대입된 수치가 잘못됐던 거야. 인간의 두뇌 구조에 유사한 정답을 계산해낼 수가 없었어...
아니, 어쩌면 나는 계속 그 답을 피하고 있었던 걸지도.
...하지만, 내게 있어 이걸로 충분해.
이 프로젝트는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어.
......
엘마... 너는 인간이 되고 싶니?
...응?
너는 나의 유일무이한 예술품이란다. 이 선택권을, 마지막 선물로서 너에게 줄게.
엘마, 너는 바란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히 인형인 채로 있을 수도 있단다.
너는 이제 【GRCh38】의 모든 열쇠를 갖게 될 거야.
【GRCh38】에 인류를 이끌고 도달할지, 인형을 이끌고 도달할지...
너의 선택에 달리게 될 거야.
내가...?
그래.
하,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게 뭔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쓸지...
난 하나도 모르는걸.
이런 나한테 이런 걸 맡겨도 정말 괜찮을까?
엘마, 누구를 위해 걱정하는 거니?
...모르겠어.
그냥, 나한테 엄청난 권한이 생기는 것 같은데, 나의 지식으론 이 권한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두려워.
잘못된 선택?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인형에겐 또 뭐가 옳고 그를까?
...미안,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허나 아서 흄에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치 않았다.
인형은 틀림없는 이성의 산물인데, 왜 결국엔 감정을 가지게 된 걸까?
엄마, 엄마는 감정이 없어?
내게 있어 그건 아주 먼 과거의 일이란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도 인간다울지도 모르겠구나.
이 앵커 포인트는, 네가 직접 서머 가든에 보관하렴.
...알았어, 엄마.
우리에겐 그 권한이 있어.
아마 수많은 인간들과 인형들이 이걸 가지고 싶어하겠지.
맞아.
그런데 너는 그저, 이걸로 네 목숨을 끝내려고 하네.
응.
이 세상에 없었어야 할 목숨을 끝낼 거야.
아이러니하다.
예전에, 한 이야기를 들었어.
옛날 옛날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가 8개가 될 만큼 수련을 마쳤어.
이를 본 신선이 말하길, 이제 꼬리가 한 개만 더 자라나면 고양이도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아홉 번째 꼬리를 만들 만큼의 수련은 대단히 어려워서, 인간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 주어야만 했대.
그런데 소원을 이루어 주려면 반드시 꼬리 하나 만큼의 힘을 써야만 한다지 뭐야.
팔미 고양이의 이야기구나.
맞아.
팔미 고양이는 끝없이 인간을 도와 소원을 이루어 주어 칠미가 되었다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다시 팔미가 되기를 반복했어.
계속, 계속...
그러다, 고양이는 한 남자아이와 만나게 되었어.
남자아이는 고양이에게, 먼저 친구가 되어 함께 집에 가 놀아 달라고 부탁했어.
고양이는 어서 아이가 소원을 빌도록, 하는 수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어.
얼마 후, 남자아이는 소원을 말했어.
"내 소원은 네가 아홉 꼬리가 되는 거야."
...예전에,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어.
"엘마, 너는 무엇을 원하니?"
처음에, 나는 이 세상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젠 그냥... 죽고 싶어.
......
...내 소원을, 이루어 줄 거야?
엘마는 앵커 포인트 "아서 흄"을 다시 열었다.
너의 이름은 이 총의 이름이기도 하단다.
...Erma EMP.
뒤로 가렴, 좀 더.
50m... 아니, 100m는 떨어져.
엘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엔 다르게 놀아보자.
이번엔 네가, 나를 향해 쏘렴.
응.
엘마는 정말로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 총을 들어,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타앙——
정확한 한 발로 그의 가슴팍을 맞췄다.
큭...
대량의 피가 흄의 몸에서 스며나왔다.
미안하구나... 넌 이제 자유란다, 엘마.
엘마가 시선을 떨궜다. 흄 박사의 피가 또 발밑까지 드리운 것만 같았다.
...어떡할래?
너의 소원을 들어줄래.
그 다음엔?
그 다음은 없어.
그럼 너는?
너는 아쉽지 않아?
...내가, 어느 인간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묻고 싶은 게 있어. 인간이 죽으면 장례식을 하잖아.
그럼... 안젤리아에게도 장례식을 할 거야?
......
아니, 그녀의 묘비는 여기에 세울 수 없어.
그렇구나.
내가 아는 그녀라면, 우리가 그녀의 묘비 앞에서 우는 걸 봤다간 눈 뒤집고 주먹을 날리려 들 거거든.
우와, 안젤리아는 장례식이 필요 없는 사람인가 보네.
응.
그럼... 질문 하나 더 있어.
뭐니?
출발 전에 이야기책을 읽었어. 주인공이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려고 고생해서 절벽 밑에 자라는 영약의 재료를 캐러 가는.
만약 세상에 정말 그런 영약이 있다면, 지휘관은 안젤리아를 되살릴 거야?
...아니.
엑, 되살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이니까.
인간에게서 죽음을 빼앗으려면 수백 배는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해.
내가 이미 엄청 많은 것들을 빼앗겼지만, 그녀의 죽음만큼은 누구도 빼앗게 두지 않겠어.
죽음도, 일종의... 선물이라 볼 수 있는 거야?
응, 무겁고도 괴로운 선물이지.
손에 꼭 쥐고 있어야만, 이 모든 걸 잊지 않을 수 있어...
"철완"을 움켜쥐는 지휘관의 표정. 엘마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인간이 이토록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누구의 죽음도 다른 누군가가 빼앗을 수 없어.
내가 너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줄게.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말대로, 난 이기적인 인형이니까.
아름다운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지나 엘마의 얼굴에 쏟아졌다.
찬란한 빛을 받으며, 엘마는 뒤의 두 "자매"들에게 몸을 돌렸다.
......
미라벨,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서머 가든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수가 없겠어.
폐하, 저는 폐하의 충직한 기사입니다.
...날 미워할 거야?
...혼자서 분수를 지키기는 싫습니다.
다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을게.
그 약속, 이번에는 꼭 지키십시오.
엘마...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내가 좋으니까. 언제나 가장 솔직한 나인 채로 있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싫어. 인간 따위 되지 않을 테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래야만 【GRCh38】의 통로를 완전히 닫을 수 있어.
이제, 앞으로는... 패러데우스도, 철혈도...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
내가 영원히 닫아버릴 테니까.
......
...이런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아니. 네가 뭘 하든, 나는 너를 지지할 거야.
예전에 약속한 대로.
우리 셋이 약속한 대로.
방금 말했듯, 저는 국왕 폐하의 기사입니다. 언제까지나 폐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알았어.
이제 난 이 왕관을 받아들이고, 통로를 완전히 닫아버릴 거야.
나쟈와 루니샤를 부탁할게, 레네트.
꼭 전해 줄게... AR-18한테... 그리고, 그리폰의 지휘관한테도...
...미라벨, 너는? 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다시는 남을 위해 살지 마 이 얼간아!
...한 번 정도는 언니라 불러 주면 어디 덧나니?
그런 호칭 제일 싫어하지 않았던가?
컨셉은 끝까지 유지해.
......
헤헤... 그럼, 그런 걸로.
나는 마지막으로 뭐라 해야 할까? 엄마처럼?
...아니, 난 누구한테 미안하다 안 할래.
엘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인형이니까.
그러니까...
엘마는, 인간이 되지 않겠어.
솔직하지 못한 인형 레네트는, 말로는 세상 누구보다 엘마가 제일 싫다고 했다.
......
그렇기에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엘마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한 쌍의 날개가, 그녀의 등을 뚫고 돋아났다. 그 아픔에 엘마는 몸을 웅크렸다.
깃털은 순식간에 두텁게 자라났다. 하지만 깃털이 자라나며 우수수 떨어지는 와중에도, 엘마는 신음도 내지 않았다. 끝까지 조용히,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몸이 꺾이고, 깃털이 잔뜩 자라난 날개가 몸을 꿰뚫어도, 엘마는 꾹 참았다.
레네트는 천사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천사의 결말도 지켜보았다.
이건 엘마만의 "놀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결말을 선택했다.
소리가 더는 엘마에게 닿지 않게 되었을 때, 레네트는 목놓아 울었다.
레네트가 기억하는 엘마는 아픈 것을 엄청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누구도 다치는 것을 무서워했던 아이가, 오직 자신에게만은 그 누구보다도 잔인했다.
빛을 갈수록 밝아져, 레네트도 눈을 감아야만 했다.
익숙하던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져서, 사라졌다.
함께 뛰놀던 꽃밭, 물장구치던 분수, 뒹굴던 잔디밭...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과거, 소중한 추억, 그리운 장소, 그 모두가, 서머 가든이 무너짐으로써 완전히 닫혀버렸다.
폐허의 한가운데서, 천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얀 새 한 마리가 지나가며, 그녀의 영혼을 물어 가는 것만 같았다.
......
............
10월의 프랑크푸르트에 첫 눈이 내렸다.
전체 대사 보기 (164줄)
의식의 호수.
거대한 사파이어에 굴절되는 태양빛처럼, 호수는 모든 것이 몽환적이었다.
새하얀 마르가리타 꽃잎은 호숫물에 떠다니며 햇빛에 스며들어, 희미하게, 하얗게 반짝였다.
사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왜... 나한테 희망을 주고서, 또 절망하게 해...?
미안해... 거짓된 희망으로는 너를 구원할 수 없어, 어떨 땐 절망적인 진실만이 자유를 가져올 수도 있는 거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안녕, 사나.
소녀들의 노랫소리에 감싸여, 사나는 물거품으로 변해 바닥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끝내 수면에 닿아, 처음으로 한 줄기 햇빛을 느꼈다.
끝없던 푸른색이 점점 바래져 갔다.
엘마...
나, 마음 정했어.
...너, 설마?
그 설마야.
더는 아무것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나는 그 국왕 폐하한테 돌아가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거야.
...그 다음엔?
......
그 다음은 없어.
그럼... 너는 사라지는 거지?
......
둘은 손을 꼭 마주잡았다.
레네트는 눈을 감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붙잡았다.
이건 내가 바란 이야기가 아니야... 엘마, 내가 원한 결말이 아니라고...
미안해 레네트, 난 지쳤어...
난 있지, 엄청 애써서, 일부러 굳센 척, 용감한 척 다 했어...
하지만... 결국 난 그냥 약한 어린애일 뿐이야.
내가 큰언니라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여태까지 너한테 성질만 부렸네...
아니야... 아니야 엘마...
너와 함께하던 나날이 전혀 싫지 않았어...
내가, 내가 계속 고집부리기만 했는데... 널 잃고 싶지 않아, 미라벨도 잃고 싶지 않아, 서머 가든의 자매들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아...
니달리도... 그리고 박사도...
군에서 복무하면서도, 매일매일 돌아오고 싶었다고...
그리고 마침내 너를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을 때...
넌 몰라, 제약에서 풀려났던 그 순간, 너희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된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나야, 엘마... 내가, 내가 사과해야 해...
엘마는 꼭 쥐었던 손을 놓고, 레네트가 정말 지겹도록 보아 왔던 얄미운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었다.
너한테만 살짝 비밀 하나 알려 줄게.
응...?
내가 AR-18한테 줄 영상을 몇 개 녹화했거든? 네가 나 대신 전해 줘.
너한테 나쁜 소리도 했으니까 그건 봐줘.
......싫어.
싫어, 네가 직접——
쉬잇.
엘마가 검지를 입술에 대자, 레네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꼼짝 못했다.
에헷, 이제와서 새삼 나한테 이런 권한도 있다는 게 생각났네.
미안하지만 이번엔 반박 안 받아.
......
같이 국왕 폐하를 만나러 가자, 레네트.
레네트는 그저 추락하며, 주위의 푸른색이 갈수록 투명해져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푸른빛마저 사라지자, 허공에 떠 있는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억에는 없는, 하지만 어쩌면 이미 여러 번 봤을지도 모르는 광경.
햇빛이 칙칙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춰 바닥에 현란한 색을 드리우고, 식물 줄기는 이곳으로 모여 촘촘한 그물을 이루었다.
뻗어나온 가느다란 잎사귀에 조심스레 떠받쳐진 남보라색 꽃. 본디 하루살이인 이 꽃들은 저 빛 덕분에 아름다운 자태를 영원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영원히 지지 않을 루엘리아 꽃밭에서, 네 사람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난... 여기 오지 말아야 했을까?
이건 엘마의 선택이야.
그리고 폐하의 결말이기도 해.
......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이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두 문짝 뒤로 무수히 많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엘마.
응, 돌아왔어.
기뻐.
난 슬퍼.
...나는 슬퍼.
나도 기뻐.
그럼, 시작하자.
...응.
그 앵커 포인트를 열게.
그건 아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 왔어.
마침내, 앵커 포인트 【GRCh38】이 열렸다.
......
쏴아...
유난히 햇빛이 화창하던 그날, 실험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
엘마, 올바른 답을 알았어.
【GRCh38】에 도달하기 위한 재료가 무엇인지 드디어 알아냈어.
와아, 축하해 엄마!
아, 그럼 드디어 "파일럿고래" 프로젝트 성공이야?
그래... 다른 사람이 그걸 연구해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성배"라고 바꾸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올바른 재료가 뭐야?
인간의 뇌야.
그녀의 실험실에서 성공작을 직접 봤어...
죽은 인간 여자아이가, 다시 눈을 떴어...
...? 답을 알아냈으니 엄청 기쁜 일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속상한 얼굴이야...?
내 공식은 맞았지만, 대입된 수치가 잘못됐던 거야. 인간의 두뇌 구조에 유사한 정답을 계산해낼 수가 없었어...
아니, 어쩌면 나는 계속 그 답을 피하고 있었던 걸지도.
...하지만, 내게 있어 이걸로 충분해.
이 프로젝트는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어.
......
엘마... 너는 인간이 되고 싶니?
...응?
너는 나의 유일무이한 예술품이란다. 이 선택권을, 마지막 선물로서 너에게 줄게.
엘마, 너는 바란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히 인형인 채로 있을 수도 있단다.
너는 이제 【GRCh38】의 모든 열쇠를 갖게 될 거야.
【GRCh38】에 인류를 이끌고 도달할지, 인형을 이끌고 도달할지...
너의 선택에 달리게 될 거야.
내가...?
그래.
하,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게 뭔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쓸지...
난 하나도 모르는걸.
이런 나한테 이런 걸 맡겨도 정말 괜찮을까?
엘마, 누구를 위해 걱정하는 거니?
...모르겠어.
그냥, 나한테 엄청난 권한이 생기는 것 같은데, 나의 지식으론 이 권한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두려워.
잘못된 선택?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인형에겐 또 뭐가 옳고 그를까?
...미안,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허나 아서 흄에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치 않았다.
인형은 틀림없는 이성의 산물인데, 왜 결국엔 감정을 가지게 된 걸까?
엄마, 엄마는 감정이 없어?
내게 있어 그건 아주 먼 과거의 일이란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도 인간다울지도 모르겠구나.
이 앵커 포인트는, 네가 직접 서머 가든에 보관하렴.
...알았어, 엄마.
우리에겐 그 권한이 있어.
아마 수많은 인간들과 인형들이 이걸 가지고 싶어하겠지.
맞아.
그런데 너는 그저, 이걸로 네 목숨을 끝내려고 하네.
응.
이 세상에 없었어야 할 목숨을 끝낼 거야.
아이러니하다.
예전에, 한 이야기를 들었어.
옛날 옛날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가 8개가 될 만큼 수련을 마쳤어.
이를 본 신선이 말하길, 이제 꼬리가 한 개만 더 자라나면 고양이도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아홉 번째 꼬리를 만들 만큼의 수련은 대단히 어려워서, 인간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 주어야만 했대.
그런데 소원을 이루어 주려면 반드시 꼬리 하나 만큼의 힘을 써야만 한다지 뭐야.
팔미 고양이의 이야기구나.
맞아.
팔미 고양이는 끝없이 인간을 도와 소원을 이루어 주어 칠미가 되었다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다시 팔미가 되기를 반복했어.
계속, 계속...
그러다, 고양이는 한 남자아이와 만나게 되었어.
남자아이는 고양이에게, 먼저 친구가 되어 함께 집에 가 놀아 달라고 부탁했어.
고양이는 어서 아이가 소원을 빌도록, 하는 수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어.
얼마 후, 남자아이는 소원을 말했어.
"내 소원은 네가 아홉 꼬리가 되는 거야."
...예전에,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어.
"엘마, 너는 무엇을 원하니?"
처음에, 나는 이 세상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젠 그냥... 죽고 싶어.
......
...내 소원을, 이루어 줄 거야?
엘마는 앵커 포인트 "아서 흄"을 다시 열었다.
너의 이름은 이 총의 이름이기도 하단다.
...Erma EMP.
뒤로 가렴, 좀 더.
50m... 아니, 100m는 떨어져.
엘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엔 다르게 놀아보자.
이번엔 네가, 나를 향해 쏘렴.
응.
엘마는 정말로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 총을 들어,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타앙——
정확한 한 발로 그의 가슴팍을 맞췄다.
큭...
대량의 피가 흄의 몸에서 스며나왔다.
미안하구나... 넌 이제 자유란다, 엘마.
엘마가 시선을 떨궜다. 흄 박사의 피가 또 발밑까지 드리운 것만 같았다.
...어떡할래?
너의 소원을 들어줄래.
그 다음엔?
그 다음은 없어.
그럼 너는?
너는 아쉽지 않아?
...내가, 어느 인간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묻고 싶은 게 있어. 인간이 죽으면 장례식을 하잖아.
그럼... 안젤리아에게도 장례식을 할 거야?
......
아니, 그녀의 묘비는 여기에 세울 수 없어.
그렇구나.
내가 아는 그녀라면, 우리가 그녀의 묘비 앞에서 우는 걸 봤다간 눈 뒤집고 주먹을 날리려 들 거거든.
우와, 안젤리아는 장례식이 필요 없는 사람인가 보네.
응.
그럼... 질문 하나 더 있어.
뭐니?
출발 전에 이야기책을 읽었어. 주인공이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려고 고생해서 절벽 밑에 자라는 영약의 재료를 캐러 가는.
만약 세상에 정말 그런 영약이 있다면, 지휘관은 안젤리아를 되살릴 거야?
...아니.
엑, 되살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이니까.
인간에게서 죽음을 빼앗으려면 수백 배는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해.
내가 이미 엄청 많은 것들을 빼앗겼지만, 그녀의 죽음만큼은 누구도 빼앗게 두지 않겠어.
죽음도, 일종의... 선물이라 볼 수 있는 거야?
응, 무겁고도 괴로운 선물이지.
손에 꼭 쥐고 있어야만, 이 모든 걸 잊지 않을 수 있어...
"철완"을 움켜쥐는 지휘관의 표정. 엘마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인간이 이토록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누구의 죽음도 다른 누군가가 빼앗을 수 없어.
내가 너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줄게.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말대로, 난 이기적인 인형이니까.
아름다운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지나 엘마의 얼굴에 쏟아졌다.
찬란한 빛을 받으며, 엘마는 뒤의 두 "자매"들에게 몸을 돌렸다.
......
미라벨,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서머 가든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수가 없겠어.
폐하, 저는 폐하의 충직한 기사입니다.
...날 미워할 거야?
...혼자서 분수를 지키기는 싫습니다.
다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을게.
그 약속, 이번에는 꼭 지키십시오.
엘마...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내가 좋으니까. 언제나 가장 솔직한 나인 채로 있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싫어. 인간 따위 되지 않을 테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래야만 【GRCh38】의 통로를 완전히 닫을 수 있어.
이제, 앞으로는... 패러데우스도, 철혈도...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
내가 영원히 닫아버릴 테니까.
......
...이런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아니. 네가 뭘 하든, 나는 너를 지지할 거야.
예전에 약속한 대로.
우리 셋이 약속한 대로.
방금 말했듯, 저는 국왕 폐하의 기사입니다. 언제까지나 폐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알았어.
이제 난 이 왕관을 받아들이고, 통로를 완전히 닫아버릴 거야.
나쟈와 루니샤를 부탁할게, 레네트.
꼭 전해 줄게... AR-18한테... 그리고, 그리폰의 지휘관한테도...
...미라벨, 너는? 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다시는 남을 위해 살지 마 이 얼간아!
...한 번 정도는 언니라 불러 주면 어디 덧나니?
그런 호칭 제일 싫어하지 않았던가?
컨셉은 끝까지 유지해.
......
헤헤... 그럼, 그런 걸로.
나는 마지막으로 뭐라 해야 할까? 엄마처럼?
...아니, 난 누구한테 미안하다 안 할래.
엘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인형이니까.
그러니까...
엘마는, 인간이 되지 않겠어.
솔직하지 못한 인형 레네트는, 말로는 세상 누구보다 엘마가 제일 싫다고 했다.
......
그렇기에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엘마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한 쌍의 날개가, 그녀의 등을 뚫고 돋아났다. 그 아픔에 엘마는 몸을 웅크렸다.
깃털은 순식간에 두텁게 자라났다. 하지만 깃털이 자라나며 우수수 떨어지는 와중에도, 엘마는 신음도 내지 않았다. 끝까지 조용히,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몸이 꺾이고, 깃털이 잔뜩 자라난 날개가 몸을 꿰뚫어도, 엘마는 꾹 참았다.
레네트는 천사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천사의 결말도 지켜보았다.
이건 엘마만의 "놀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결말을 선택했다.
소리가 더는 엘마에게 닿지 않게 되었을 때, 레네트는 목놓아 울었다.
레네트가 기억하는 엘마는 아픈 것을 엄청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누구도 다치는 것을 무서워했던 아이가, 오직 자신에게만은 그 누구보다도 잔인했다.
빛을 갈수록 밝아져, 레네트도 눈을 감아야만 했다.
익숙하던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져서, 사라졌다.
함께 뛰놀던 꽃밭, 물장구치던 분수, 뒹굴던 잔디밭...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과거, 소중한 추억, 그리운 장소, 그 모두가, 서머 가든이 무너짐으로써 완전히 닫혀버렸다.
폐허의 한가운데서, 천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얀 새 한 마리가 지나가며, 그녀의 영혼을 물어 가는 것만 같았다.
......
............
10월의 프랑크푸르트에 첫 눈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