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에 길 잃다
헤베 씨와 잠깐 만난 후 넬레는 화이트존에 있는 외조부를 방문하러 떠났다. 그녀 앞에 신비로운 탐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마인츠구, 헤베의 바캉스 별장 밖.
헤베가 보내준 차에서 내린 넬레는 푸르름 가득한 길거리에 서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식물이 활기차면서도 우아하게 다듬어져, 별장 울타리와 벽에 붙어있었다.
케슬러 가든 68번...
넬레는 잎사귀에 가려진 주소표를 더듬어가며 겨우 쪽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냈다.
간소한 느낌의 별장 뜰에서 날씬한 여성이 정원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넬레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인이 고개를 들어 미소지었다.
코넬리아 슈펠 씨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헤베 씨 맞으신가요?
네.
헤베는 눈웃음을 지으며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넬레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친절하게 쥐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시죠?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부탁드리는 입장이니까...
헤베는 넬레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정원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울타리를 밀고 지나가자, 푹신푹신한 잔디밭이 땅에 밟히고, 은은한 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여기 앉으세요, 코넬리아 씨.
넬레라고 부르시면 돼요.
헤베는 알맞게 끓인 홍차를 넬레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사촌언니랑 눈이 닮았네요. 맑고 깨끗한 눈동자예요,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감사합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서 사이가 엄청 좋다면서요?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같이 있었다고.
네, 언니는 항상 제게 잘해줬어요.
타지에 가서도 계속 절 걱정해주고요.
그야 그렇겠죠, 아니면 저한테 맞선 자리 알아봐달란 얘긴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
넬레는 난처해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고, 헤베는 웃으며 고용인에게 디저트를 내오라 시켰다.
넬레는 어떤 남자가 취향이에요?
그...
정의롭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
그게 끝이에요?
네...
헤베는 고민하듯이 먼산을 바라봤다.
딱 봐도 알겠네요, 연애 거의 안 해봤죠?
엣!? 그걸 어떻게 알...
하하, 저도 보는 눈이 있죠.
그런데 사촌언니한테서 들었는데, 전에 넬레 씨 집에서 화재가 났을 때 어떤 슈타지 요원이 달려와서 구해줬다면서요?
넬레 씨 언니는 넬레 씨가 그 사람이랑 썸타는 줄 알던데~
J 요원 이야기인가...?
그 사람은 그냥 갈라테아 일 때문에 얘기만 좀 해본 사이예요...
그리고 그때 절 구해준 건 미아였어요. 그 사람은 다 끝나고 와서 별 도움도 안 됐고...
갈라테아 일... 그 그레이 교수에 관한 일인가요?
예...
메이어한테서 들었는데, 예전엔 항상 그레이 교수가 잘해준다니, 그 사람 밑에서 엄청 많이 배운다니, 실험실 일도 즐겁다니 이렇게 얘기했다던데.
슈타지 요원을 찾은 건 그레이 교수가 어떻게 그런 스캔들에 휘말린 건지 조사하고 싶어서였나요?
......
전 그냥 그레이 선생님이 실험실에 남긴 연구 자료를 꺼내려고 부탁한 거였어요. 그레이 선생님에 관해선...
넬레의 심장이 불안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누구에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죠.
제가 기억하는 그레이 선생님은 언제나 정의롭고 솔직하면서 탐구심이 넘치는 분이셨어요.
그분의 어두운 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게 물려주신 밝은 면은 항상 기억할 거예요.
멋진 대답이군요.
저도 예전에 믿었던 선배한테 배신당한 적이 있어요. 지금 넬레 씨랑 비슷한 나이였죠. 그것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했어요.
아...
하지만 넬레 씨의 모습을 보니 안심했어요, 참 굳센 분이시군요.
헤베는 웃으며 자신의 태블릿을 넬레 앞에 내밀었다.
이런 좋은 사람한텐 당연히 좋은 배우자가 있어야겠죠?
당신 사촌언니 부탁대로 올해 보건부에 들어온 신참들 중에 몇 명 골라봤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 있나 한번 봐볼래요?
어으...
눈앞의 프로필들을 보면서, 넬레는 다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후배 논문 첨삭해주기가 낫지...
길고도 괴로운 식사 시간을 마치고, 넬레는 헤베를 따라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방에는 향수의 향이 솔솔 풍겼다.
넓은 방 안엔 색깔과 스타일별로 가지런히 진열된 복장, 장신구, 신발 등이 가득하여 눈이 어지러웠다.
넬레는 예전에 감기에 걸린 채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마지막 용액까지 넣었는데도 부피가 한참 모자라는데 무엇을 빼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픽한 사람들 모두 꽤 괜찮은 남자예요. 좀더 조사해보고 문제 없으면 식사 약속 한번 잡아봐요.
네... 고마워요...
그럼, 포크트 씨를 뵈러 갈 때 입을 옷을 골라볼까요?
포크트 씨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분이 아니니까, 외모에 너무 신경 쓰면 오히려 반감을 살 거예요.
네.
평소엔 어떻게 입어요?
잠옷에 실험복 걸치고 다녀요.
......
중요한 손님이 오셨을 땐 좀 포멀하게 입어요, 실험복 안에 대충 티셔츠랑 긴바지는 입어야죠.
그렇군요.
넬레는 한순간 헤베의 눈에서 한심함을 느꼈다.
넬레 씨, 혹시 맨날 실험실에만 처박혀서 사회 생활이랑은 담 쌓고 사는 거 아니에요?
네... 그건 또 어떻게...?
헤베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그리고 옅은 색의 옷장에서 간소하면서 대담한 스타일의 치마를 몇 벌 꺼냈다.
전부 넬레가 평소엔 절대 손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스타일 어울릴 것 같은데, 입어볼래요?
...네.
죽음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넬레는 치마를 받아 피팅룸에 들어갔다.
...얼마 후.
헤베는 넬레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면서 상냥하게 다독였다.
괜찮아요, 평소 치마를 잘 안 입으니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죠. 자책할 것 없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잔뜩 울상이 된 넬레는, 방금 롱 스커트를 입고 피팅룸에서 나오자마자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져 옷걸이 한 줄을 좌라락 무너뜨린 사건을 잊어버리려 했다.
후훗, 정말로 괜찮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왜요?
제가 골라준 옷이 안 맞는다는 걸 벌써 알게 됐으니까요.
사고를 친다면 여기서 치는 게 포크트 씨 앞에서보단 훨씬 낫잖아요?
위로 감사합니다, 헤베 씨...
그럼 옷은 그냥 지금 입으신 걸 다듬어만 드릴게요. 그리고 머리카락에 볼륨 넣고 가볍게 화장도 하고.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넬레 씨는 한창 젊고 예쁠 때니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포크트가 보낸 차에 넬레가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면서 헤베는 손을 흔들었다.
차가 거리를 떠난 후, 헤베가 디스크 하나를 옆의 매니저에게 건냈다.
가서 분석해.
예. 혹시 내용물이 뭔지 여쭤봐도...?
넬레의 휴대폰 데이터.
모든 대화, 메시지, 메일, 전부 확실하게 분석해.
알겠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 고속도로.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넬레는 졸음을 참으면서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크푸르트를 바라봤다.
붉은 지붕의 납작한 별장들이 넓은 도로 양옆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어 마치 깔끔하게 자른 티라미수 케이크 같았다.
이때 미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일은 잘 돼가?
헤베 씨는 만났고, 지금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이야.
그리폰이랑 슈타지하고 했던 통신 다 지운 거 맞지?
물론이지, 연락처까지 다 지웠어. 외할아버지가 혹시 뒤져본다 해도 감쪽같을 거야.
그래, 가는 동안 눈이라도 좀 붙여둬. 외할아버지하고 대화할 땐 꼭 말조심하고.
응, 헤베 씨도 그러시더라고.
교관 씨 쪽은 어떻게 됐어?
작전 개시했다고 연락한 게 마지막이었어. 다음번 연락은 아마 일이 다 끝난 다음일 거야.
그래... 그쪽도 잘 풀리면 좋겠네.
맞다, 화이트존은 대체 어떤 곳이야? 왜 검색해도 정보가 나오질 않아?
내가 아는 건 보안 등급이 엄청 높다는 것뿐이야. 자세한 건 잘 몰라.
그래서 교관 씨가 나한테 화이트존의 지형을 관찰해 달라고 하는 거였구나...
그건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안심해.
통신기를 내려놓고 넬레는 창밖을 바라봤다.
교차로 앞에 눈에 띄는 파란 표지판이 차 옆을 지나가 넬레의 시선을 끌었다.
"로엔하임 - 비스바덴 방향"
태블릿의 위치 기능을 켜서, 넬레는 자신이 동남쪽을 향해 달려서 도시 중앙부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사 아저씨, 외조부님 댁은 로엔하임구에 있지 않나요? 왜 비스바덴 방향이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디 사시나요? 비스바덴에요?
......
도착하면 아실 겁니다.
대답을 거부하는 의사가 뚜렷하게 느껴져, 넬레는 가슴에 가득한 의문을 꿀꺽 삼켰다.
차가 중앙부로 들어서는 순간, 도로 방음벽이 세워져 넬레의 시선을 단단히 가렸다.
점점 촘촘해지는 속도측정기의 주시 속에서 차량은 점차 속력을 줄였고, 차체가 도로와 함께 점점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응?
교통체증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방음벽 틈새 사이로 저 멀리 있는 하얀 건물이 넬레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도시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벽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인이 세운 장난감 블럭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넬레는 몸을 웅크리고, 지도에서 근처의 건물을 확인했다.
의사당, 법원, 행정청... 정부 기관 사무소...
...어라?
빽빽한 국회 건물들 뒤에 완전히 회색으로 칠해진 구역이 있었다, 바로 저 멀리 하얀 벽과 연결된 곳이었다.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도 그 안에는 아무런 건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요양원"이라고 적힌 작은 점 하나를 제외하고.
아저씨, 저기 하얀 건물이 뭔지 아세요?
어, 잠깐만요...?
정체된 차량 행렬 중간에서 운전기사가 말없이 차를 앞차에 바짝 붙여 일부러 방음벽으로 넬레의 시야를 가렸다.
지금 일부러...?
넬레는 잠시 침묵하다, 침착하게 다시 질문했다.
방금 비스바덴구 중심부에 하얀 벽이 있던데요, 지도상으론 의사당 북쪽이었어요.
혹시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아시나요?
아, 대충 정화격리벽일 겁니다.
거기에 요양원이 하나 있어요.
...그렇군요.
앞에 늘어선 장사진은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넬레는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자신을 틈틈이 훑어보는 것을 눈치챘다.
......
넬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하품을 하며 몰래 위성 지도 스크린샷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했다.
차량이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넬레가 태블릿을 바탕화면으로 되돌리는 순간,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저 앞의 어둠은 끝이 안 보였고, 하얀 전등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인터넷 신호는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자신의 안경 렌즈가 태블릿 화면을 반사하는 것을 의식한 넬레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얼마나 더 걸리나요...?
눈 붙이고 계십시오, 거의 다 오면 깨워드리겠습니다.
넬레는 눈을 껌뻑이고 더는 묻지 않았다.
몇 번이고 커브를 도는 동안 터널 안은 단조로운 엔진 소리만이 가득했다.
넬레는 졸음에 저항하면서, 침침해진 눈을 슬며시 감았다...
슈펠 씨, 일어나십시오.
도착했습니다.
으음...
운전기사는 비몽사몽 상태인 넬레를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까지 데려다주곤 떠났다. 넬레는 자신이 들어온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떠나고 나서야 넬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고, 긴급 연락 수단도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머리 위의 모서리엔 빈틈없이 감시카메라가 달려서 넬레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
도르래가 레일 연결부 사이를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안전 손잡이를 잡은 채로, 넬레는 엘리베이터가 어떨 땐 수평으로, 어떨 땐 수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짐가방 속에 갇혀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긴 이동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겨우 열렸다.
올라오는 멀미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넬레는 천천히 걸어나와 주변을 신중히 둘러봤다. 왕래하는 사람들 모두 경비복 아니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코넬리아 슈펠 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으니, 엘리베이터 옆의 군용 인형이 그녀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포크트 씨의 인형 집사입니다. 손야라고 불러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손야는 넬레가 들고 있던 짐가방을 건네받아 로비 1층의 보안 게이트로 걸어갔다.
가방과 외투를 바구니에 넣으세요.
주머니를 전부 비워주시고, 금속이나 전자제품도 모두 꺼내서 여기에 두세요.
......
넬레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고, 신속하게 모든 물건을 손야의 지시대로 정리하여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게 변화를 느낀 컨베이어 벨트가 천천히 움직여 바구니를 보안검사기 안으로 옮겼다.
이쪽으로 가셔서 노란 선 뒤에 서세요.
앞에 있는 까만색 보안 게이트를 보고, 넬레는 침착하게 걸어갔다.
삑. 깜빡이던 램프가 초록불이 됐다.
제복 차림의 경비단 병사가 스캐너를 들고 넬레를 위아래로 샅샅이 스캔했다.
됐습니다.
자, 카메라 보시고. 아~ 하세요. 고개 한번 끄덕 하시고. 눈 깜빡이세요...
양손 엄지를 이 위에 올리세요.
......
됐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십시오.
넬레는 서류의 타이틀을 가볍게 훑었다——
「화이트존 개인 방문 접수증」, 「화이트존 개인 방문객(D형) 비밀유지계약서」...
이것들 다 서명해야 하나요...
이따 안내인이 자세히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중 이 비밀유지계약 1.1항을 특히 유의하십시오. 화이트존을 이탈 후 화이트존 내부의 상황과 보고 들은 것을 일절 외부에 누설하지 말 것. 이를 위반할 경우 즉시 국가안전법에 의거하여 처벌합니다.
......
가슴 속의 의문을 전부 눌러두고, 넬레는 빠르게 이름과 날짜를 적었다.
경비단 병사는 서류를 슬쩍 한 번 훑어보고, 능숙하게 처리한 다음 앞을 가리켰다.
저 끝까지 가서 문 열고 들어가십시오.
가림판으로 나눠진 통로 끝에는 두꺼운 금속 문이 벽에 박혀 있었다. 병원의 수술실이 떠오르는 비주얼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빠르게 마치고 나오십시오.
저기... 이 뒤엔 뭐가 있죠?
아무도 넬레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손야는 혼자 전용 통로로 나갔다.
콜록콜록...
단단히 밀폐된 컨테이너 안에서, 넬레는 차가운 내벽에 기댄 채 연달아 기침을 했다.
방금 소독실에서 받은 생물 검사 풀코스와 마지막의 소독액 샤워를 떠올리니 목구멍이 벌렁거렸다.
...쓰시겠습니까?
손야가 쟁반을 꺼냈다. 목캔디와 의료용 마스크, 멀미약이 놓여있었다.
그녀 옆에 있는 커다란 골판지 박스에는 넬레가 보안검사 때 제출한 외투와 휴대품들이 아무렇게나 쑤셔넣어져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넬레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품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다시 백 안에 넣었다.
단말기엔 여전히 신호가 전혀 없고, 화면 위엔 검은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화이트존에선 모든 촬영 장비 반입을 금지합니다.
화이트존에서 나가실 때도 다시 휴대물품을 검사할 것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몇 가지 해도 돼요?
말씀하십시오.
전 그냥 외할아버지를 뵈러 온 건데 저렇게 많은 검사랑 소독까지 해야 해요?
화이트존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십시오.
......
넬레는 컨테이너와 함께 흔들렸다.
중력과 관성의 변화를 보아, 그들이 탄 컨테이너는 지금 산골 도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돌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화이트존은... 대체 어떤 곳이죠?
블랙존, 레드존, 옐로우존, 그린존의 개념은 알고 계십니까?
네, 그건 알죠.
붕괴 입자 오염 수준에 따라 구분한 거잖아요. 그린존이 현재 가장 깨끗한 구역이고.
그리고 그린존에선 마인츠구의 오염 수준이 이미 인류가 정화할 수 있는 한계라고 알고 있어요.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한계는 오염 수준이 0인 완전한 청정 상태죠. 그것이 바로 화이트존입니다.
그런 건 불가능해요.
외부 공기와 수원지로부터 완전히 격리하지 않는 이상은...
손야가 미소지었다.
바로 그겁니다.
잠깐...
기나긴 흔들림 속에서 넬레는 해답을 알아냈다.
지상에 있지 않으면 당연히 외부 공기를 접하지 않을 테고...
네, 수자원도 전부 지표에서 정화를 마친 다음에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지하에 도시를?
대체 얼마나 예산을 쏟아부어야...
정화보다는 새로 짓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
넬레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탐구자 특유의 흥분이 가슴 속에서 부풀었다.
전체 대사 보기 (198줄)
프랑크푸르트 마인츠구, 헤베의 바캉스 별장 밖.
헤베가 보내준 차에서 내린 넬레는 푸르름 가득한 길거리에 서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식물이 활기차면서도 우아하게 다듬어져, 별장 울타리와 벽에 붙어있었다.
케슬러 가든 68번...
넬레는 잎사귀에 가려진 주소표를 더듬어가며 겨우 쪽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냈다.
간소한 느낌의 별장 뜰에서 날씬한 여성이 정원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넬레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인이 고개를 들어 미소지었다.
코넬리아 슈펠 씨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헤베 씨 맞으신가요?
네.
헤베는 눈웃음을 지으며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넬레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친절하게 쥐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시죠?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부탁드리는 입장이니까...
헤베는 넬레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정원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울타리를 밀고 지나가자, 푹신푹신한 잔디밭이 땅에 밟히고, 은은한 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여기 앉으세요, 코넬리아 씨.
넬레라고 부르시면 돼요.
헤베는 알맞게 끓인 홍차를 넬레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사촌언니랑 눈이 닮았네요. 맑고 깨끗한 눈동자예요,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감사합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서 사이가 엄청 좋다면서요?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같이 있었다고.
네, 언니는 항상 제게 잘해줬어요.
타지에 가서도 계속 절 걱정해주고요.
그야 그렇겠죠, 아니면 저한테 맞선 자리 알아봐달란 얘긴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
넬레는 난처해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고, 헤베는 웃으며 고용인에게 디저트를 내오라 시켰다.
넬레는 어떤 남자가 취향이에요?
그...
정의롭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
그게 끝이에요?
네...
헤베는 고민하듯이 먼산을 바라봤다.
딱 봐도 알겠네요, 연애 거의 안 해봤죠?
엣!? 그걸 어떻게 알...
하하, 저도 보는 눈이 있죠.
그런데 사촌언니한테서 들었는데, 전에 넬레 씨 집에서 화재가 났을 때 어떤 슈타지 요원이 달려와서 구해줬다면서요?
넬레 씨 언니는 넬레 씨가 그 사람이랑 썸타는 줄 알던데~
J 요원 이야기인가...?
그 사람은 그냥 갈라테아 일 때문에 얘기만 좀 해본 사이예요...
그리고 그때 절 구해준 건 미아였어요. 그 사람은 다 끝나고 와서 별 도움도 안 됐고...
갈라테아 일... 그 그레이 교수에 관한 일인가요?
예...
메이어한테서 들었는데, 예전엔 항상 그레이 교수가 잘해준다니, 그 사람 밑에서 엄청 많이 배운다니, 실험실 일도 즐겁다니 이렇게 얘기했다던데.
슈타지 요원을 찾은 건 그레이 교수가 어떻게 그런 스캔들에 휘말린 건지 조사하고 싶어서였나요?
......
전 그냥 그레이 선생님이 실험실에 남긴 연구 자료를 꺼내려고 부탁한 거였어요. 그레이 선생님에 관해선...
넬레의 심장이 불안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누구에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죠.
제가 기억하는 그레이 선생님은 언제나 정의롭고 솔직하면서 탐구심이 넘치는 분이셨어요.
그분의 어두운 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게 물려주신 밝은 면은 항상 기억할 거예요.
멋진 대답이군요.
저도 예전에 믿었던 선배한테 배신당한 적이 있어요. 지금 넬레 씨랑 비슷한 나이였죠. 그것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했어요.
아...
하지만 넬레 씨의 모습을 보니 안심했어요, 참 굳센 분이시군요.
헤베는 웃으며 자신의 태블릿을 넬레 앞에 내밀었다.
이런 좋은 사람한텐 당연히 좋은 배우자가 있어야겠죠?
당신 사촌언니 부탁대로 올해 보건부에 들어온 신참들 중에 몇 명 골라봤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 있나 한번 봐볼래요?
어으...
눈앞의 프로필들을 보면서, 넬레는 다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color=#A9A9A9>차라리 후배 논문 첨삭해주기가 낫지...</color>
길고도 괴로운 식사 시간을 마치고, 넬레는 헤베를 따라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방에는 향수의 향이 솔솔 풍겼다.
넓은 방 안엔 색깔과 스타일별로 가지런히 진열된 복장, 장신구, 신발 등이 가득하여 눈이 어지러웠다.
넬레는 예전에 감기에 걸린 채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마지막 용액까지 넣었는데도 부피가 한참 모자라는데 무엇을 빼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픽한 사람들 모두 꽤 괜찮은 남자예요. 좀더 조사해보고 문제 없으면 식사 약속 한번 잡아봐요.
네... 고마워요...
그럼, 포크트 씨를 뵈러 갈 때 입을 옷을 골라볼까요?
포크트 씨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분이 아니니까, 외모에 너무 신경 쓰면 오히려 반감을 살 거예요.
네.
평소엔 어떻게 입어요?
잠옷에 실험복 걸치고 다녀요.
......
중요한 손님이 오셨을 땐 좀 포멀하게 입어요, 실험복 안에 대충 티셔츠랑 긴바지는 입어야죠.
그렇군요.
넬레는 한순간 헤베의 눈에서 한심함을 느꼈다.
넬레 씨, 혹시 맨날 실험실에만 처박혀서 사회 생활이랑은 담 쌓고 사는 거 아니에요?
네... 그건 또 어떻게...?
헤베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그리고 옅은 색의 옷장에서 간소하면서 대담한 스타일의 치마를 몇 벌 꺼냈다.
전부 넬레가 평소엔 절대 손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스타일 어울릴 것 같은데, 입어볼래요?
...네.
죽음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넬레는 치마를 받아 피팅룸에 들어갔다.
...얼마 후.
헤베는 넬레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면서 상냥하게 다독였다.
괜찮아요, 평소 치마를 잘 안 입으니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죠. 자책할 것 없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잔뜩 울상이 된 넬레는, 방금 롱 스커트를 입고 피팅룸에서 나오자마자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져 옷걸이 한 줄을 좌라락 무너뜨린 사건을 잊어버리려 했다.
후훗, 정말로 괜찮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왜요?
제가 골라준 옷이 안 맞는다는 걸 벌써 알게 됐으니까요.
사고를 친다면 여기서 치는 게 포크트 씨 앞에서보단 훨씬 낫잖아요?
위로 감사합니다, 헤베 씨...
그럼 옷은 그냥 지금 입으신 걸 다듬어만 드릴게요. 그리고 머리카락에 볼륨 넣고 가볍게 화장도 하고.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넬레 씨는 한창 젊고 예쁠 때니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포크트가 보낸 차에 넬레가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면서 헤베는 손을 흔들었다.
차가 거리를 떠난 후, 헤베가 디스크 하나를 옆의 매니저에게 건냈다.
가서 분석해.
예. 혹시 내용물이 뭔지 여쭤봐도...?
넬레의 휴대폰 데이터.
모든 대화, 메시지, 메일, 전부 확실하게 분석해.
알겠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 고속도로.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넬레는 졸음을 참으면서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크푸르트를 바라봤다.
붉은 지붕의 납작한 별장들이 넓은 도로 양옆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어 마치 깔끔하게 자른 티라미수 케이크 같았다.
이때 미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color=#00CCFF>일은 잘 돼가?</color>
<color=#00CCFF>헤베 씨는 만났고, 지금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이야.</color>
<color=#00CCFF>그리폰이랑 슈타지하고 했던 통신 다 지운 거 맞지?</color>
<color=#00CCFF>물론이지, 연락처까지 다 지웠어. 외할아버지가 혹시 뒤져본다 해도 감쪽같을 거야.</color>
<color=#00CCFF>그래, 가는 동안 눈이라도 좀 붙여둬. 외할아버지하고 대화할 땐 꼭 말조심하고.</color>
<color=#00CCFF>응, 헤베 씨도 그러시더라고.</color>
<color=#00CCFF>교관 씨 쪽은 어떻게 됐어?</color>
<color=#00CCFF>작전 개시했다고 연락한 게 마지막이었어. 다음번 연락은 아마 일이 다 끝난 다음일 거야.</color>
<color=#00CCFF>그래... 그쪽도 잘 풀리면 좋겠네.</color>
<color=#00CCFF>맞다, 화이트존은 대체 어떤 곳이야? 왜 검색해도 정보가 나오질 않아?</color>
<color=#00CCFF>내가 아는 건 보안 등급이 엄청 높다는 것뿐이야. 자세한 건 잘 몰라.</color>
<color=#00CCFF>그래서 교관 씨가 나한테 화이트존의 지형을 관찰해 달라고 하는 거였구나...</color>
<color=#00CCFF>그건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color>
<color=#00CCFF>안심해.</color>
통신기를 내려놓고 넬레는 창밖을 바라봤다.
교차로 앞에 눈에 띄는 파란 표지판이 차 옆을 지나가 넬레의 시선을 끌었다.
"로엔하임 - 비스바덴 방향"
태블릿의 위치 기능을 켜서, 넬레는 자신이 동남쪽을 향해 달려서 도시 중앙부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사 아저씨, 외조부님 댁은 로엔하임구에 있지 않나요? 왜 비스바덴 방향이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디 사시나요? 비스바덴에요?
......
도착하면 아실 겁니다.
대답을 거부하는 의사가 뚜렷하게 느껴져, 넬레는 가슴에 가득한 의문을 꿀꺽 삼켰다.
차가 중앙부로 들어서는 순간, 도로 방음벽이 세워져 넬레의 시선을 단단히 가렸다.
점점 촘촘해지는 속도측정기의 주시 속에서 차량은 점차 속력을 줄였고, 차체가 도로와 함께 점점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응?
교통체증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방음벽 틈새 사이로 저 멀리 있는 하얀 건물이 넬레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도시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벽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인이 세운 장난감 블럭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넬레는 몸을 웅크리고, 지도에서 근처의 건물을 확인했다.
<color=#A9A9A9>의사당, 법원, 행정청... 정부 기관 사무소...</color>
<color=#A9A9A9>...어라?</color>
빽빽한 국회 건물들 뒤에 완전히 회색으로 칠해진 구역이 있었다, 바로 저 멀리 하얀 벽과 연결된 곳이었다.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도 그 안에는 아무런 건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요양원"이라고 적힌 작은 점 하나를 제외하고.
아저씨, 저기 하얀 건물이 뭔지 아세요?
어, 잠깐만요...?
정체된 차량 행렬 중간에서 운전기사가 말없이 차를 앞차에 바짝 붙여 일부러 방음벽으로 넬레의 시야를 가렸다.
<color=#A9A9A9>지금 일부러...?</color>
넬레는 잠시 침묵하다, 침착하게 다시 질문했다.
방금 비스바덴구 중심부에 하얀 벽이 있던데요, 지도상으론 의사당 북쪽이었어요.
혹시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아시나요?
아, 대충 정화격리벽일 겁니다.
거기에 요양원이 하나 있어요.
...그렇군요.
앞에 늘어선 장사진은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넬레는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자신을 틈틈이 훑어보는 것을 눈치챘다.
......
넬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하품을 하며 몰래 위성 지도 스크린샷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했다.
차량이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넬레가 태블릿을 바탕화면으로 되돌리는 순간,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저 앞의 어둠은 끝이 안 보였고, 하얀 전등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인터넷 신호는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자신의 안경 렌즈가 태블릿 화면을 반사하는 것을 의식한 넬레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얼마나 더 걸리나요...?
눈 붙이고 계십시오, 거의 다 오면 깨워드리겠습니다.
넬레는 눈을 껌뻑이고 더는 묻지 않았다.
몇 번이고 커브를 도는 동안 터널 안은 단조로운 엔진 소리만이 가득했다.
넬레는 졸음에 저항하면서, 침침해진 눈을 슬며시 감았다...
슈펠 씨, 일어나십시오.
도착했습니다.
으음...
운전기사는 비몽사몽 상태인 넬레를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까지 데려다주곤 떠났다. 넬레는 자신이 들어온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떠나고 나서야 넬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고, 긴급 연락 수단도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머리 위의 모서리엔 빈틈없이 감시카메라가 달려서 넬레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
도르래가 레일 연결부 사이를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안전 손잡이를 잡은 채로, 넬레는 엘리베이터가 어떨 땐 수평으로, 어떨 땐 수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짐가방 속에 갇혀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긴 이동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겨우 열렸다.
올라오는 멀미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넬레는 천천히 걸어나와 주변을 신중히 둘러봤다. 왕래하는 사람들 모두 경비복 아니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코넬리아 슈펠 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으니, 엘리베이터 옆의 군용 인형이 그녀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포크트 씨의 인형 집사입니다. 손야라고 불러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손야는 넬레가 들고 있던 짐가방을 건네받아 로비 1층의 보안 게이트로 걸어갔다.
가방과 외투를 바구니에 넣으세요.
주머니를 전부 비워주시고, 금속이나 전자제품도 모두 꺼내서 여기에 두세요.
......
넬레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고, 신속하게 모든 물건을 손야의 지시대로 정리하여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게 변화를 느낀 컨베이어 벨트가 천천히 움직여 바구니를 보안검사기 안으로 옮겼다.
이쪽으로 가셔서 노란 선 뒤에 서세요.
앞에 있는 까만색 보안 게이트를 보고, 넬레는 침착하게 걸어갔다.
삑. 깜빡이던 램프가 초록불이 됐다.
제복 차림의 경비단 병사가 스캐너를 들고 넬레를 위아래로 샅샅이 스캔했다.
됐습니다.
자, 카메라 보시고. 아~ 하세요. 고개 한번 끄덕 하시고. 눈 깜빡이세요...
양손 엄지를 이 위에 올리세요.
......
됐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십시오.
넬레는 서류의 타이틀을 가볍게 훑었다——
「화이트존 개인 방문 접수증」, 「화이트존 개인 방문객(D형) 비밀유지계약서」...
이것들 다 서명해야 하나요...
이따 안내인이 자세히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중 이 비밀유지계약 1.1항을 특히 유의하십시오. 화이트존을 이탈 후 화이트존 내부의 상황과 보고 들은 것을 일절 외부에 누설하지 말 것. 이를 위반할 경우 즉시 국가안전법에 의거하여 처벌합니다.
......
가슴 속의 의문을 전부 눌러두고, 넬레는 빠르게 이름과 날짜를 적었다.
경비단 병사는 서류를 슬쩍 한 번 훑어보고, 능숙하게 처리한 다음 앞을 가리켰다.
저 끝까지 가서 문 열고 들어가십시오.
가림판으로 나눠진 통로 끝에는 두꺼운 금속 문이 벽에 박혀 있었다. 병원의 수술실이 떠오르는 비주얼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빠르게 마치고 나오십시오.
저기... 이 뒤엔 뭐가 있죠?
아무도 넬레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손야는 혼자 전용 통로로 나갔다.
콜록콜록...
단단히 밀폐된 컨테이너 안에서, 넬레는 차가운 내벽에 기댄 채 연달아 기침을 했다.
방금 소독실에서 받은 생물 검사 풀코스와 마지막의 소독액 샤워를 떠올리니 목구멍이 벌렁거렸다.
...쓰시겠습니까?
손야가 쟁반을 꺼냈다. 목캔디와 의료용 마스크, 멀미약이 놓여있었다.
그녀 옆에 있는 커다란 골판지 박스에는 넬레가 보안검사 때 제출한 외투와 휴대품들이 아무렇게나 쑤셔넣어져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넬레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품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다시 백 안에 넣었다.
단말기엔 여전히 신호가 전혀 없고, 화면 위엔 검은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화이트존에선 모든 촬영 장비 반입을 금지합니다.
화이트존에서 나가실 때도 다시 휴대물품을 검사할 것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몇 가지 해도 돼요?
말씀하십시오.
전 그냥 외할아버지를 뵈러 온 건데 저렇게 많은 검사랑 소독까지 해야 해요?
화이트존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십시오.
......
넬레는 컨테이너와 함께 흔들렸다.
중력과 관성의 변화를 보아, 그들이 탄 컨테이너는 지금 산골 도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돌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화이트존은... 대체 어떤 곳이죠?
블랙존, 레드존, 옐로우존, 그린존의 개념은 알고 계십니까?
네, 그건 알죠.
붕괴 입자 오염 수준에 따라 구분한 거잖아요. 그린존이 현재 가장 깨끗한 구역이고.
그리고 그린존에선 마인츠구의 오염 수준이 이미 인류가 정화할 수 있는 한계라고 알고 있어요.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한계는 오염 수준이 0인 완전한 청정 상태죠. 그것이 바로 화이트존입니다.
그런 건 불가능해요.
외부 공기와 수원지로부터 완전히 격리하지 않는 이상은...
손야가 미소지었다.
바로 그겁니다.
잠깐...
기나긴 흔들림 속에서 넬레는 해답을 알아냈다.
지상에 있지 않으면 당연히 외부 공기를 접하지 않을 테고...
네, 수자원도 전부 지표에서 정화를 마친 다음에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지하에 도시를?
대체 얼마나 예산을 쏟아부어야...
정화보다는 새로 짓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
넬레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탐구자 특유의 흥분이 가슴 속에서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