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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4 · 은염색 현상

아름다운 고독

세상이 소란스러운 와중, 세상에서 격리된 두 수감자가 데이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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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녀린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치고 파도쳐,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형상을 그렸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지휘관

......

희미한 아침햇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앞의 호수면 절반에는 금빛 물결이 반짝이고, 다른 절반에는 고요한 산등성이가 비쳐 보였다... 숨쉬는 것마저 깜빡할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휘관

언제 은퇴하게 되면 꼭 이런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매일 배 타고 낚시하면서 지내야지...

그러다 피곤하면 풀밭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천국이 따로 없네...

루니샤

......

뒤의 기척에 이미 눈치를 챘지만, 지휘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귀를 쫑긋 세우고, 수풀의 지저귐 속에서 저 멀리 나무 바닥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익숙한 기운이 등뒤에 도착할 때까지.

지휘관

이제 투영 좀 꺼 주지 않을래?

루니샤

미리 은퇴 후 생활을 체험하는 것도 좋지 않나요?

지휘관

달콤한 꿈은 길을 잃게 만들어.

아무래도 현실을 마주하고 있어야 식욕이 더 생기더라.

루니샤

그럼 그러죠.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실사를 방불케 하는 홀로그램이 꺼졌다.

방 안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버려진 창고로 보이는 장소. 어두운 실내에 비행기 부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휘관

프랑크푸르트 공항?

루니샤

시장하신가요?

지휘관

이번엔 뭘 준비했어?

루니샤

애플파이랑 브레첼이요.

루니샤

...그리고 사과주도요.

루니샤는 지휘관을 등지고 애플파이와 빵을 썰었다.

지휘관은 내친 김에 방 안을 훑어봤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지휘관은 자신을 지켜보는 감시카메라를 응시했다.

니토

이 내용은 거의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띠, 띠.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다만 어느 니토도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침착한 인형의 목소리

<color=#00CCFF>지휘관님,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대접받고 계신 건 알고 있으니.</color>

들어본 적 있는 소리지만, 잠시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니토를 해킹했던 인형과 일행인 것은 확신했다.

침착한 인형의 목소리

<color=#00CCFF>지금 이 요양원의 방어체계를 완전히 파악했고 침투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color>

<color=#00CCFF>지휘관님, 시간을 좀 더 벌어주시길 바랍니다. 힘드신 건 알지만 지금 다른 수가 없습니다.</color>

<color=#00CCFF>제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건,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뿐이군요.</color>

전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지휘관은 설마 또 이렇게 404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지금 아무리 썰렁한 농담이라도 감지덕지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갑자기 감시 카메라의 램프가 두 번 깜빡여, 지휘관은 눈을 부릅떴다.

계속 관찰할 틈도 없이 루니샤가 지휘관 앞으로 걸어왔다.

루니샤

식사하시죠.

지휘관은 식탁 앞에 끌려와 감시 카메라를 등지게 됐다.

단순히 네트워크 불안정이었을까? 지휘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루니샤

왜 그러시죠? 입에 안 맞나요?

지휘관

입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네가 잘 알 텐데.

루니샤

......

루니샤가 지휘관에게 술을 한 잔 따랐다.

루니샤

빨리 드세요.

지휘관

이 다음은 스케줄이 어떻게 돼?

루니샤

다 드시면 알 거예요.

루니샤의 잠잠한 얼굴에선 더 이상의 정보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지휘관이 식사를 즐기는 사이에, 루니샤가 말끔한 옷 한 벌을 지휘관 옆에 놓았다.

루니샤

저는 냄새를 못 맡지만, 슬슬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지휘관

......

루니샤

여기엔 목욕 시설이 있으니까, 이따 쓰시고 갈아입으세요.

지휘관

윌리엄이 내 얼굴 좀 보자고 했나봐?

루니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잔에 담긴 사과주를 음미했다.

이에 지휘관도 더 물어보지 않고 빠르게 접시를 비웠다.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휘관이 루니샤 앞으로 돌아왔다.

지휘관

다 갈아입었어. 이제 윌리엄을 보러 가면 되지?

루니샤

......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루니샤가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은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발그레하고, 시선도 흐리멍덩하며, 손에 쥔 술병이 빈 것을 눈치챘다.

지휘관

그걸 다 마셨어?

루니샤

네...

지휘관은 머리를 긁적이고, 타올을 한 장 가져와 루니샤에게 덮어줬다.

지휘관

윌리엄은 어딨어?

루니샤

왜 자꾸 그 사람만 찾아요?

지휘관

......

루니샤

봐봐요,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누구죠? 저잖아요.

지휘관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푹 자.

루니샤

왜 저한텐 관심을 안 주시는 건데요!

지휘관

......

너 왜 그래? 난데없이 혼자 병나발을 불고 말이야.

그리고 내 옷차림은 왜 갑자기 신경 쓰는 거야?

루니샤

같이 있어 주셨으면 해서요.

지휘관

며칠 동안 쭉 같이 있었잖아.

루니샤

아뇨, 이렇게 말고...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커플처럼요.

지휘관

......

루니샤

보통 사람들은 데이트하기 전에 몸 단장을 깨끗이 하고...

그 다음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거라고 해서...

그래서 지휘관님도...

지휘관

......

루니샤

지휘관님...

지휘관

응.

루니샤

저랑 데이트해요.

지휘관은 한숨을 뱉고, 루니샤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지휘관

그래, 어떤 "데이트"를 하고 싶니?

근처에 어디 괜찮은 곳 있어?

루니샤

뭐예요, 저 술 취했다고 지금, 여기 위치를 캐내보겠다 이거예요?

지휘관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데이트를 하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서 어울려주고 싶다는 거지.

루니샤

여기서 하면 되잖아요.

지휘관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지저분하고 누추한 창고는 어떻게 봐도 데이트 장소론 부적절했다.

지휘관

아까 그 홀로그램 다시 써보지 그래?

홀로그램의 힘으로, 두 사람 주변에 프랑크푸르트의 한 옥상에서의 전경이 펼쳐졌다.

휘웅...! 창고 밖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은 눈앞에 승객을 가득 태운 여객기가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루니샤

비행기 타는 거 좋아하시나요?

두 사람은 어깨동무한 채로 바닥에 누웠고, 루니샤가 고개를 지휘관에게 돌렸다.

지휘관

그냥저냥, 나한텐 단순한 교통수단이야.

루니샤

전 비행기가 싫어요.

항상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가고, 싫어하는 사람을 데려오거든요.

지휘관

좋아하는 사람이랑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데?

루니샤

얘기 꺼내기도 싫어요.

지휘관

그래, 그럼 네 곁에 같이 있어주는 사람은 없었어?

루니샤

있어요, 빌이 항상 곁에 있어줬어요.

지휘관

......

루니샤

사실 전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잘 몰랐어요...

저는 감정을 항상 숨기려 했지만, 빌은 달랐죠. 저를 지켜주려고 제 감정까지 대신 표현해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걔는 항상 성질이 더럽다는 소릴 들었지만, 실은 다정한 애라는 걸 전 알고 있어요...

지휘관

...거기에 대해선 의견을 보류하지.

루니샤

한번은 제가 물 끓이고 있던 걸 깜빡하고 비행기를 보러 뛰쳐나갔다가, 냄비가 다 타고 불이 날 뻔한 적이 있었어요...

엄마는 엄청 화를 내면서 누가 한 짓이냐고 소리 소리를 질렀죠. 근데 제가 벌벌 떠는 걸 빌이 보고선, 자기가 했다고 거짓말로 자백한 거예요.

정말 엄청 심하게 두들겨맞았죠... 거기다 사흘 동안 독방 신세까지 졌어요.

지휘관

......

<color=#A9A9A9>그때 맞아죽었어야 했는데.</color>

루니샤

그 애한테 빚진 게 너무 많아요...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 스스로 술을 한잔 따라서, 머릿속의 악독한 일념을 떨쳐내려고 했다.

지휘관

그 녀석에 관한 거 말고 다른 기억은 없어?

루니샤

있죠. 예전에 야외 실전 훈련 때, SOP2와 AR-15를 데리고 겨우겨우 임무를 완수한 다음 M16 언니랑 합류하러 갈 때...

제가 그만 합류 포인트를 헷갈렸어요. 엉뚱한 비행기를 탔지 뭐예요.

루니샤

도착지에 거의 다 가서야 우리가 탄 게 시베리아 탄광행 비행기란 걸 알았죠...

M16 언니가 완전 속 터져 죽기 직전이었어요.

지휘관

하하하하... 그 표정 상상이 가네.

루니샤

AR-15는 엄청 무섭게 인상을 팍 쓰고 있고, SOP2는 혼자 신나서 떠들어대는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예요.

결국 M16 언니가 복귀할 비행기편을 물색해줬는데, SOP2가 글쎄, 자기가 파낸 커다란 광석을 꼭 가져가야 한다고 떼를 쓰는 거예요.

결국 비행기로 끌고 가서, 울면서 돌한테 작별 인사하도록 만들었죠...

지휘관

SOP2가 엄청 아쉬워했겠다.

루니샤

네...

저번에 엘모호에서 잠꼬대로 그 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휘관

......

엘모호 얘기가 나오자, 지휘관은 조용히 술을 두 잔 들이켰다.

루니샤

그땐 수복 캡슐에서 수리 중이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바로 벌떡 일어나서 그때 얘기를 쫑알거렸을걸요?

지휘관

......

루니샤

왜 그러세요?

지휘관은 루니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휘관

세 사람의 기억이 섞여 있구나.

루니샤

그런가요...

지휘관

그래, 윌리엄에 관한 건 루니샤의 기억.

AR팀과 훈련한 건 M4의 기억, 그리고 엘모호에서의 기억은 댄들라이의 것이겠지.

루니샤

......

지휘관

서로 다른 이야기인데 전혀 시점이 바뀌는 느낌이 없었어. 아무래도 그 기억들이 너의 마인드맵 속에서 한데 뒤섞여 있는 상태라고 봐야겠지.

루니샤

......

지휘관

그래서, 너는 누구야?

루니샤가 그늘로 가려진 시선을 들었다.

루니샤

당신한테는 누구인데요?

지휘관

......

지휘관이 대답하려 하는 순간, 바닥을 짚고 있던 팔에 갑자기 힘이 빠지며 지휘관은 바닥에 쓰러졌다.

눈 앞으로 다가온 루니샤의 얼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지휘관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루니샤

어쩌면 제가 원하는 건 데이트가 아니라 해답일지도요.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저도 몰라요.

어쩌면 굳이 애써서 답을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죠. 제가 태어난 것 자체가 대답일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지휘관

<color=#A9A9A9>아니야!</color>

루니샤

죄송해요, 지휘관님. 오늘도 저랑 억지로 어울려 주시느라 힘드셨죠?

안심하고 주무세요, 일어나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지휘관

<color=#A9A9A9>루니샤!</color>

덮쳐오는 졸음이 지휘관의 모든 말을 집어삼켰다.

세상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기 직전, 지휘관은 온힘을 다해 루니샤의 손을 붙잡았다.

착각일까, 마지막 의식 속에서 등 뒤의 인물이 한번 움찔하고, 길고도 미묘한 침묵에 빠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