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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8 · 허입자쌍

킹 대 킹

블랙홀은 끝내 증발한다.

-76-A-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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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

끊어진 팔의 상처가 지금도 욱신거린다.

윌리엄

지휘관 그놈...

그는 자신의 팔을 앗아간 인형을 딱히 원망하고 있지 않다. 애초에 고작 인형 하나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으니까.

팔 한 짝 뜯겨나간 것은 문제도 아니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됐다.

훈작사, 루련, 그 빌어먹을 훈장 수여식 따위...

이런 말썽이나 문제는 더 이상 그의 삶에 나타나선 안 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는... 지금 신세계의 아담이어야 했다.

윌리엄

......

사흘 전.

슈타지 요원

윌리엄 씨, 훈작사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절단된 팔에 대한 응급처치를 마치고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훈작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 내용은 대충 짐작이 갔지만, 편지를 들고 찾아온 요원의 체면도 있어 편지를 받았다.

한 손으로 힘겹게 봉투를 뜯었다.

그는 그것으로 불현듯 깨달았다. 앞으로 그는 오직 한 팔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물론 이것도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윌리엄

칫...

간신히 편지를 펼쳐보니, 훈작사의 친필 편지였고,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금성"을 되찾았다. ——훈작사

윌리엄

......

윌리엄의 엄지가 편지지를 구겼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고급스러운 종이에 적힌 간결한 문장을 바라봤다.

편지를 다 읽은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슈타지 요원을 바라봤다.

윌리엄

...자객은 잡았나?

슈타지 요원

최신 정보에 따르면, M16은 다방면의 포위망에 몰려 예식장 옥상까지 올라간 뒤, 궁지에 몰리자 그대로 뛰어내렸습니다.

정보 분석가의 추정으로는 300미터가 넘는 고층에서 뛰어내렸으니, 아무리 인형이라 해도 생존 가능성은 없습니다.

현재 슈타지의 각 부서 요원들이 샅샅이 수색 중이니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윌리엄

결국 놓쳤다는 거잖아.

슈타지 요원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계산한 바로는——

윌리엄

...훈작사가 그렇게 나한테 말대답하라고 보낸 거냐?

윌리엄

내가 그 해충들을 상대한 지 얼마나 됐는데, 네가 감히 그리폰 인형들의 전투 능력을 나한테 설명하려고 들어?

윌리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슈타지 요원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 시선에 상대방은 마른침을 삼켰다.

슈타지 요원

후, 훈작사께서 귀하께 다른 전언도 남기셨습니다. 귀하의 답변을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윌리엄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훈작사의 뜻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다만, 그렇게 오랫동안 치열하게 대립해 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자신과 지휘관을 화해시키겠다니... 윌리엄은 그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해충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해충일 뿐, 어떻게 해충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동안 지휘관이 망쳐놓은 일이 한둘이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루니샤마저...

그때 귓가에 다시 루니샤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니샤?

......

눈을 뜨자 루니샤가 그의 앞에 서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상은 다시 흩어졌다.

누나의 뜻은 이미 분명했다.

윌리엄

훈작사한테 전해. 원하는 대로 나가서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화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전해.

윌리엄의 시선은 요원을 향하지 않고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니샤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그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멀쩡히 남아 있는 손은 편지지를 그대로 찢어버릴 것처럼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슈타지 요원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통신 알림음이 생각에 잠겨있던 윌리엄을 깨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통신기를 바라보면서 음침하던 얼굴은 곧 미소로 바꾸었다.

통신 연결.

윌리엄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이다.

지금 그쪽 바람대로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어.

당신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일에 직접 나설 줄이야.

연맹 일은 한가한가 봐...? 아니면, 그 인간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가?

훈작사

<color=#00CCFF>지휘관과의 만남도 당연히 중요하지.</color>

<color=#00CCFF>하지만 연구 진행 상황을 보고해주길 바라네, 그리고 마사 마이트너가 남긴 유산을 얼마나 회수했는지도 말일세.</color>

윌리엄

생산 라인 복구는 순조로운 편이야.

"호수"와 "탑"의 손실은 몇 년 안에 메울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그래도 당신이 요구한 프로젝트들은 몇 달이면 정상 궤도에 올릴 수 있어.

패러데우스의 잔존 세력은... 애초에 회수할 계획이 없었어서, 조금 번거롭네.

훈작사

<color=#00CCFF>더 박차를 가하길 바라네.</color>

<color=#00CCFF>계속 약속을 이행하게, 발라드.</color>

<color=#00CCFF>우리의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 물론 좋지만, 언제든 중단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게.</color>

윌리엄

...알아.

삑.

통신 종료.

윌리엄

.......

통신이 끊기는 순간, 그의 얼굴은 다시금 어두워졌다.

...빌어먹을.

...이래선 안 됐다.

그는 당연히 패러데우스 잔당 같은 것을 수습할 준비를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직도 이런 세속의 자잘한 일에 얽매이게 될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 그 인간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윌리엄

...이건 다 네 탓이다, 지휘관.

프랑크푸르트 화이트 존, 고급 호텔 스위트룸.

문을 열자마자, 지휘관이 문을 등진 채로 창가에 서서 프랑크푸르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호텔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창문과 문이 모두 빈틈없이 가려져 있어 이질감을 풍겼다.

이곳은 평범한 이들이 꿈도 꾸지 못할 화이트존의 럭셔리 호텔이라기보다는, 정성 들여 만들어진 새장에 가까웠다. 지휘관이라는 새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윌리엄

......

윌리엄이 생각해 보니, 저 인간과 이렇게 마주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가 인정하든 말든, 저 지휘관과의 싸움은 꽤 오랜 시간 이어져 왔고, 저 인간은 처음엔 보잘것없는 하찮은 인물이 지금은 가장 거슬리는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그의 과거와 참 많이 닮았다.

만약 처음에 오버슈타인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그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그의 몸속에도 똑같은 그 더러운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좋은 밤이야, 지휘관. 만나서 반가워.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

아니면... "윌리엄"이라고 불러도 좋아.

지휘관

......

윌리엄

그 인간이 정말 너를 아끼는 모양이야, 그렇지?

이제는 더 이상 이용가치도 없는데 여전히 인내심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까지 해주다니.

지금은 프랑크푸르트는 물론 세상의 절반이 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너 하나를 위해 이런 최고급 호텔에 머물게 해주잖아.

윌리엄은 술 선반에 놓인 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윌리엄

1928년산 글렌리벳이라, 100년 숙성된 이 명주는 이 호텔조차도 구비할 수 없는 물건일텐데.

훈작사의 소장품인 걸 널 위해 일부러 여기 둔 거겠지. 그런데 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네.

윌리엄이 술을 두 잔 따르자, 진한 술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웃는 듯 안 웃는 듯한 미묘한 미소를 잔을 흔들며, 다른 한 잔을 지휘관 쪽으로 슬쩍 밀었다.

윌리엄

좋은 술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기 마련이지,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지휘관

나는 남이 따라준 술은 안 마셔, 특히 네가 따른 건 더더욱.

지휘관은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윌리엄

신중함은 미덕이지.

하지만 도청기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없고, 네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방에서라면...

그 정도 신중함은 좀 과하지 않나?

혹시 내가 술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지휘관, 우리 사이에 그런 시시한 수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윌리엄은 품에서 상자를 하나 꺼내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뚜껑을 열어서 지휘관 쪽으로 돌렸다.

상자 안에는 훈장 하나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윌리엄

받아. 축하하지, 내 광채에 기생해서 겨우 손에 넣은 조금의 명예와 성과를.

지휘관

......

지휘관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그 훈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숙이고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휘관

예전엔 내가 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널 보고 나니까, 이 훈장이 꼴도 보기 싫어지네.

윌리엄

너는 네가 체스를 두는 쪽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현실에서 넌 킹도 아니고, 룩조차도 아니야... 그저 훈작사의 체스판 맨 앞줄에 내몰린 폰일 뿐이지.

그냥 적당히 받기나 해, 지휘관. 네가 가질 수 있는 게 뭔지, 그리고...

네가 손대선 안 되는 게 뭔지 똑똑히 알아두라고.

지휘관

듣자하니, 너 자신은 나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네.

지휘관의 웃음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예민한 윌리엄의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지휘관

내가 훈작사의 장기말이라면, 너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는 우리가 "화해"해서, 자기 손으로 그어놓은 칸 안에 얌전히 머물길 바라는 거야.

지휘관이 손을 뻗어 윌리엄이 따른 술잔을 쥐었다.

잔 속의 맑은 술이 찰랑이며, 지휘관의 눈동자를 비췄다.

지휘관

우리 모두 얌전히 말을 따르는 장기말이 되긴 싫잖아?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제쳐두고, 우리끼리 새로운 판을 짜야지.

윌리엄

그게 네 목적이야?

내가 들은 바로는 네 형편이 말이 아니라던데.

네 뒤를 봐주던 건 이젠 다 없고 날개가 부러진 새랑 다를 바가 없잖아.

정말 궁금하네, 넌 도대체 무슨 배짱이 있어서... 네 손으로 부숴놓은 이 새장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윌리엄

네 원한을 풀기 위해서? 내 이 한쪽 팔을 위해서인가?

윌리엄은 헐렁한 소매를 움켜쥐었다.

윌리엄

솔직히 말해, 이 대가는 너무 보잘것없어... 네 원한이 좀 싸구려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지휘관

확실히 팔 하나는 너무 값싸지.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네가 잃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지금 여기 앉아 나랑 대화하고 있는 네가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지 않나?

윌리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지휘관.

그런 식의 암시는 현명하지도 않고, 예의도 아니거든.

지휘관

난 "그녀"를 봤어.

지휘관은 마치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한마디를 던졌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더 얼어붙었다.

윌리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술잔을 쥔 손가락 마디는 희미하게 핏기가 가셨다.

윌리엄

"그녀"라니... 너무 포괄적인 단어잖아.

우리가 아는 "그녀"는 꽤 많지 않아?

지휘관

네가 한쪽 팔을 잃은 원한마저 눌러가며 여기까지 와서 나를 떠보게 만든 그녀.

네가 지금껏 셀 수도 없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게 만든 그녀.

네가 모든 걸 바치고, 남의 것까지 바쳐도... 결국 곁에 붙잡아두지 못한 "그녀"라면, 아마 단 한 사람뿐일 텐데.

쾅!

윌리엄이 들고 있던 술잔을 탁상에 내려쳤다.

그는 지휘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도,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윌리엄

하, 지금 나한테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따위... 통제 불능의 피조물을 들먹이면서 내 반응을 떠보려는 건가?

그건 너답지 않은걸, 너라면 더 직접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이런 방식은 천박할 뿐더러, 아무 의미도 없잖아.

지휘관

나는 그냥, 네가 직접 불을 붙인 그 유성이 떨어지기 직전에... 어떤 풍경을 봤는지 네가 아주 궁금해할 것 같아서.

...아, 그렇지. 그녀가 내게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

윌리엄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남은 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윌리엄

...말해봐.

지휘관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

윌리엄의 동공이 크게 수축했다.

윌리엄

...집? 그녀는 내가 탄생시켰어! 내가 창조한 거라고!

우리는 유일한 가족이야! 우리는 분명 약속했어, 내가 바로 그녀의——

지휘관

그녀는 수없이 많은 길을 봤다고 했어.

그 길마다 발라드 폰 오버슈타인이 하나씩 있었지.

어떤 길에선 악마가 되었고, 어떤 길에선 악당이 되었고, 어떤 길에선 그저 이름 없는 평범한 소인배였지만...

그 어느 길에도... 그녀가 찾는 "빌"은 없다고 했어.

지휘관의 말투엔 어떠한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마치 그가 들은 것을 그대로 진술하는 듯했다.

지휘관

그래서 그녀는... 네가 없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어.

그곳이야말로 진짜 자기 집이라면서.

쿵!

윌리엄이 남은 한 손으로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 이번엔 그의 얼굴에서 여유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분노와 음침함으로 뒤덮였다.

윌리엄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지휘관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억누르지 못한 채 점점 높아졌다.

윌리엄

<size=50>뻥 치지 마! 거짓말하지 말라고! 네까짓게 뭘 알아!?</size>

<size=50>장기말이 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주제에! 남 뒤에 숨어있을 줄만 아는 비겁한 새끼가!</size>

<size=50>나랑 누나가 세운 계획이 얼마나 위대한지 넌 전혀 모른다고!</size>

지휘관은 여전히 자리에 반듯하게 앉은 채로, 이성을 잃은 윌리엄을 묵묵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휘관

확실히, 나는 모르지.

그 말은 마치 비수처럼 날아와 윌리엄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테이블을 돌아서 지휘관에게 바짝 다가갔다. 윌리엄의 얼굴은 분노에 일그러져 있었다.

윌리엄

<size=50>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올바른 질서를!</size>

<size=50>내가! 내가 그녀의 형태를 빚었고, 내가 그녀에게 의지를 불어넣어 줬어! 바로 나와 그녀가 함께! 이 썩어빠진 세상을 철저하게 정화할 거야!</size>

<size=50>너, 훈작사, 그리고 모든 구시대의 찌꺼기들... 전부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혀서 사라져야 한다고!</size>

윌리엄

<size=50>남는 건 나야, 나여야만 한다고! 내가 이겼다고!</size>

지휘관

......

윌리엄은 지휘관 앞에 멈춰 서서 거칠게 숨을 내쉬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훑어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 듯, 지휘관에게 소리를 지르면 캐묻기 시작했다.

윌리엄

너... 너 처음부터 이 만남을 계획했구나! 도대체 뭘 하러 온 거야!?

화해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럼, 대체 왜 여기에 나타난 거냐고!?

<size=50>날 놀리고 싶어서 왔냐?! 지금 내 꼴이 우습냐? 내가 실패한 꼬락서니가 웃겨? 아니면, 너도 나한테 바라는 게 있는 거냐?!</size>

윌리엄의 고함 앞에서 지휘관은 천천히 일어나 윌리엄과 시선을 맞췄다.

지휘관의 눈엔 승리의 기쁨도, 조롱도 없었고, 남아 있는 건 연민에 가까운 냉기뿐이었다.

상대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윌리엄의 거친 숨소리를 덮을 정도로 또렷했다.

지휘관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야.

윌리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휘관

네가... 아직도 그 "윌리엄"이 맞는지를 확인하려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치 최종 판결을 내리듯 입을 열었다.

지휘관

이제, 확인했어.

너는 윌리엄이야.

그것도... 구제불능의 미치광이지.

윌리엄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동공이 풀렸다. 이내 그의 목 깊은 곳에서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은 점점 커지고 점점 광기에 물들어가더니, 마침내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날카로운 폭소로 변했다.

윌리엄

크크큭...

윌리엄

<size=50>푸하하하하하하하!!</size>

그는 최고의 개그라도 들은 것마냥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러나 웃음 소리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멈춰버렸다.

방 안은 쥐죽은 듯이 정적에 잠겼다

윌리엄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옷깃의 주름을 정돈했다. 얼굴에 맺혀 있던 광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침착함이 자리잡았다.

그는 다시 지휘관을 향해 연민과 조롱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윌리엄

...지휘관, 그게 네가 숨겨둔 비장의 수냐?

윌리엄

"그녀가 나를 떠났다"라는 이야기를 꾸며내서 내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냐?

그래, 연기력 하나는 인정해 주지. 하마터면 정말 믿을 뻔했잖아.

윌리엄

정말 딱하네.

연기하느라고 고생 좀 많이 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넌 처음부터 잘못된 방법을 골랐어.

왜냐하면 네가 한 말은 누가 봐도 티 나는 거짓말이니까.

지휘관은 아무 말 없이, 차갑고 무거운 눈빛으로 윌리엄을 바라봤다.

윌리엄은 지휘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다시 텅 비어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

봐봐, 누나. 이 자식 정말 웃기지 않아?

누나가 한순간도 나를 떠난 적 없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잖아.

누나는 단 1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는 흡족하게 미소지으며 뒤돌아 문으로 걸어갔다.

윌리엄

장난은 그만하지?

지휘관, 너는 여기서 훈작사가 마련해준 새장을 마음껏 즐기기나 해.

나는 누나와 함께 완수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멈춰섰다. 하지만 끝내 지휘관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았다.

윌리엄

아, 그래.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직접 널 보게 되니 제법 재밌었어.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문을 열자, 문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의 실루엣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너한텐 아마 내일이 없을 거야.

말을 마친 윌리엄은 그대로 방을 떠나면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

방 안에는 지휘관 혼자 남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대지 않은 글렌리벳 한 잔이 조명 아래서 조용히 호박빛을 뽐냈다.

깊은 밤, 윌리엄은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통신이 울렸다.

윌리엄

......

그는 깊게 한숨을 쉰 뒤 통신을 받았다.

윌리엄

또 그 고철덩이들이랑 전장에 나가는 악몽 타령하면, 바로 끊을 거야.

루니샤

<color=#00CCFF>...아니야, 빌.</color>

<color=#00CCFF>이번에 연락한 건, 그냥 어릴 적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야...</color>

윌리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루니샤

<color=#00CCFF>방금 꿈을 꿨어, 꿈에서 우리는 그냥 평범한 남매였고...</color>

<color=#00CCFF>큰 저택도, 하인도 없고, 매일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어...</color>

<color=#00CCFF>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깨어나니까, 그 꿈속의 내가 너무 부럽더라...</color>

<color=#00CCFF>가끔 상상해.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color>

<color=#00CCFF>M4도, 엘리사도, 댄들라이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만 고민하는 삶...</color>

윌리엄

그런 꿈, 좀 나약하게 들리긴 해도... 달콤하긴 하네. 누나랑 내가...

루니샤

<color=#00CCFF>그러니까, 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color>

윌리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루니샤

<color=#00CCFF>내게 평범한 몸을 주면 안 될까?</color>

<color=#00CCFF>너만 괜찮다면,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너와 함께 갈 수 있어.</color>

<color=#00CCFF>멀고 한적한 시골로 가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거야...</color>

<color=#00CCFF>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안 될까?</color>

윌리엄

그렇게 될 거야, 루시.

오래전에 약속했잖아. 신세계에서 그렇게 살자고.

루니샤

<color=#00CCFF>빌,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color>

윌리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윌리엄

그만 자.

윌리엄이 막 통신을 끊으려는 순간, 루니샤의 목소리가 그의 손을 멈춰세웠다.

루니샤

<color=#00CCFF>빌——</color>

윌리엄

아무래도 지난번 수술만으로는 누나의 상태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나 보네. 아직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괜찮아, 다음 수술 날짜가 머지 않았으니까. 그때가 되면 분명히 알게 될 거야.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과연 누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는지.

루니샤

<color=#00CCFF>빌, 소원이든 약속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color>

<color=#00CCFF>알고 있어,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곁에 없었던 시간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겠지. 그건 누나인 내 잘못이야.</color>

<color=#00CCFF>하지만 난 이제 돌아왔고, 네 목적도 이뤄졌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 어릴 적처럼 지내자.</color>

<color=#00CCFF>너는 다시 그때의 작은 빌이 되고, 난 언제나 널 지켜주는 누나가 될게...</color>

<color=#00CCFF>그러니까, 더 이상 다른 사람도, 너 자신도 상처 주지 말아 줘. 안 될까?</color>

윌리엄

누나... 어릴 적부터 누나는 언제나 다정하고 착했지. 하지만 너무 순진했어.

그때 우리가 그리던 아름다움은, 그저 무지하고 순진했기에 그려낸 환상일 뿐이야. 오직 "어린이"만이 그려낼 수 있는 공허한 이상일 뿐이야.

우리가 봐온 잔혹함과 고통, 어리석음과 광기도 전부 설탕에 절여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람은... 성장해야 해.

루니샤

<color=#00CCFF>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빌...</color>

윌리엄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

지금의 누나한테, 그럴 자격 따윈 없어!

루니샤는 빌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라 몸을 움찔하며 움츠러들었다.

루니샤

<color=#00CCFF>그러지 마... 너, 지금 모습은... 너무...</color>

<color=#00CCFF>너무 무서워...</color>

윌리엄

괜찮아, 누나는 그저 몇 가지 정말 중요한 걸 아직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니까.

괜찮아, 동생인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자전거에 짓밟히던 그 감각을 동생인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때 아무런 대가도 따지지 않고 가족을 지키려 했던 누나도 내가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누나의 진짜 소원을 알고 있는 건, 바로 누나의 동생인 나야.

루니샤

<color=#00CCFF>빌, 그때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을 거야...</color>

<color=#00CCFF>네가 오해하고——</color>

윌리엄

그만해!

루니샤의 말을 윌리엄이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윌리엄

벌써 몇 년이나 지났어. 난 이제 누나를 지켜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컸어. 그리고 지금까지 그 역할을 다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그런데 누나는 지금 어떻지? 이렇게 누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감싸주는 방법조차 모르잖아, 어릴 적의 누나보다도 못난 모습이야.

동생의 보호를 받는 것도 누나의 역할 중 하나라고, 누나가 직접 했던 말이잖아.

윌리엄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고, 웃고 있는 건지 화가 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루니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루니샤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됐다.

윌리엄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우리의 이상도 지킬 거야. 그리고... 우리의 약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