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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23 · 문제상자 가설

베이즈 추론

이성이 데이터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직접적인 물리적 간섭이 오히려 가장 다정한 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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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형을 만들었다. 허나 겉모습만 알고, 속은 몰랐다.

인형은 과연 인간의 모방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창조물일까?

인형의 "진화"해 온 길은 인간의 뇌를 빼고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인간 지능의 반영인 것일까?

"여태까지 사람들은 인간성을 지능으로 착각했지만, 인공지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지능의 정의를 과소평가했거나, 인간의 지능을 과대평가했다."

페르시카

뭣... 더 없어? 그게 끝이라고? <size=50>그냥 그렇게 해결했다고?!</size>

RO635

페르시카 씨, 자꾸 그렇게 들이대시면 인턴 씨가 겁먹으시니까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인턴

예에... 그게 임무를 완수할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했습니다.

확실히, PA-15를 비롯한 소대원들은 작전 능력에 부족함이 있지만, 그 적 실험기들은 인간의 행동 패턴을 그저 흉내내기만 할 뿐임이 분명했습니다.

그 때문에 실험기들은 유연성이 매우 부족했고, 거기서 승산을 찾은 겁니다.

페르시카

아니야... 아니야! 분명 더 있어! 당장 말해!

페르시카

마지막 테스트에서 네가 지휘한 인형들 모두 마인드맵에서 크든 작든 비정상적인 활동이 관측됐다고!

대네 걔네한테 뭘 한 거야?

인턴

딱히 한 거 없습니다만...? 영상 및 음성 기록도 제출한 게 전부입니다.

달리 더 의문이 있으시다면 제출한 기록과 지금 제 설명을 대조해 보심이...

페르시카

............

그래 알았어, 됐으니까 그만 가 봐.

RO635

더 지시 있습니까?

페르시카

......

RO635

페르시카 씨?

페르시카는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곤 키보드를 마구 두들겨댔다.

RO635가 눈알 굴리며 다가가니, 마침 화면에 실험 기록의 마지막 페이지가 보였다.

"본 실험의 데이터 설정은 앞의 시트에 첨부함."

"현재 인형들의 소체 파라미터 및 마인드맵 상태로 보건대, '문제상자'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의 파라미터 설정 및 루트 변화 수준 모두 그들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초과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함께가 아니고서는."

RO635

페르시카 씨, 실험 끝났습니다. 분석 결과 보고서와 원본 데이터 전부 여기다 둘게요.

페르시카

............모르겠어.

여전히 모르겠어.

그 녀석이랑 그 인턴은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인형들의 마인드맵에 이상이 발생한 거지?

왜 인형들이 갑자기 강해진 거야? 대체 인간이 인형에게 어떤 영향을 줬길래?

RO635

복잡한 문제는 머리 쥐어뜯는다고 해결되지 않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페르시카

......

드르륵!

페르시카가 의자를 밀치며 벌떡 일어섰다.

페르시카

프로필 번호 206■15■■42■■의 데이터 뽑아 와.

RO635

어... 그 프로필은 조회 요청이 통과돼야 하는데요. 지금 요청 제출할까요?

페르시카

그거 통과되려면 한세월이야, 바탕화면에서 바로가기 프로그램으로 해킹해.

RO635

또 말도 안 되는... 절차를 따르지 않고 기밀 파일을 무단으로 조회하는 일은――

페르시카

아참참, 그 인턴도 단단히 붙잡아 놔야겠다. 걔한테 협력을 구할 문제랑 실험이 아직 산더미야!

RO635

알겠습니다.

......

페르시카

빨리빨리 해, 내가 말한 프로필은?

RO635

......

페르시카 씨, 아무래도 그 프로필 뽑을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페르시카

뭐...?

RO635

그 프로필의 주인공이 곧 여기에 도착합니다.

페르시카

......헉.

M16 지금 어딨어? 빨리 불러서 문 막으라 해!

RO635

M16이라면 약 15분 전에 인근 술집에 들어갔어요.

페르시카

......

콰앙!

나름 튼튼한 실험실의 문이 주먹 한 방에 박살났다.

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빛이 실험실에 약간의 자연감을 가져다주니, 이보다 아이러니할 순 없었다.

안젤리아

오랜만이다, 페르시카.

어휴, 네 실험실은 왜 언제 봐도 돼지우리냐?

페르시카

<size=50>무슨 짓이야!!</size>

그 문짝 특수 재질이라고! 네 월급으로 몇 개월치인지 알기나 해!?

안젤리아

아까 한 방으론 문짝만 박살냈지만, 다음 한 방으론 뭐가 박살날지 모른다.

페르시카

어쩌려고, 내가 만들어 준 의수로 내 실험실 모조리 박살내게?!

그 빌어먹을 손버릇 안 고치면 다신 의수 교체 안 해 줄 거야!

안젤리아

그래서, 내 부하들은?

안젤리아의 웃음기 없는 미소에 맞서, 페르시카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옆에서 구경 중인 RO635가 봐도 페르시카의 허세는 방금 한주먹에 박살난 문짝처럼 위태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인형으로서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행동을 취했다.

페르시카

내 연구용 인형들이 뭐가 네 부하야!

635번 조수, 당장 이 손님 내보내!

RO635

<color=#FFFF00>시스템 업그레이드 중,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color>

페르시카

<size=50>야!!</size>

RO 너, 너 무슨 죽은 척이야! 내 권한도 없이 어, 시스템 업그레이드는 개뿔이!

안젤리아

얼레, 왜 그렇게 당황해?

녀석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페르시카

다, 당황하긴 누가? 그냥 실험 몇 번 했을 뿐이거든?

그리고 사람 찾는 걸 왜 나한테 물어?

네 주정뱅이 팀원을 찾는다면 술집에 가서 찾아!

안젤리아

실험이라...

네 실험실이 양지로 나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으면서 꼭 그렇게 스리슬쩍 해야겠냐?

페르시카

시끄러! 네가 과학을 알아!?

안젤리아

딴 건 몰라도 물리는 좀 알지.

안젤리아의 시선은 테이블에 위태롭게 쌓인 커피잔들에게 향했고...

커피잔들은 주먹 한 방에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페르시카

............

안젤리아

네 실험실 밖을 나서기 전의 AR팀은 네 작품이었지.

하지만 이젠 내 부하야. 내 동의도 없이 함부로 내 부하들을 건드리는 건 용서 못해.

너도 포함해서, 페르시카.

페르시카

...흥.

내가 미리 말한다고 허락 안 해 줄 거면서.

안젤리아

당연하지.

페르시카

<size=50>거 봐!</size>

안젤리아

하지만 너의 부탁이라면 고려는 해주지.

페르시카

......

안젤리아

그래도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줄 수 없어.

페르시카

그래 알았어, 문 박살낸 거 안 물어내도 되고, 다음에 의수 교체할 때 마취 제대로 해 줄게. 됐지?

안젤리아

겨우?

페르시카

엄청 양보해 줬잖아, 뭘 더...

안젤리아

너 마지막으로 밥 먹은 게 언제야?

페르시카

뭣...

RO635

27시간 전이요.

페르시카

RO 너――

RO635

<color=#FFFF00>업그레이드를 마치기 위해 다시 시작합니다...</color>

그 말을 들은 안젤리아가 불길하게 팔뚝을 까닥였다.

안젤리아

대충 8시간 뒤에 현관에서 보자.

페르시카

...응? 잠깐, 왜 8시간 뒤―― 컥!!

순식간에 성큼 다가온 안젤리아가 촙으로 페르시카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었다.

그 한 방에, 페르시카는 풀썩 쓰러졌다.

페르시카

의수... 의수 교체 안 해... 씨이.. 딴 사람 찾......

이윽고 그녀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RO635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저 바닥에 엎어진 페르시카에게 힐끗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안젤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찾아온 고요함. RO635는 페르시카의 바이탈 사인을 간단히 측정하고는 그녀의 침낭 위의 랜턴을 최소 밝기로 낮춘 다음, 실험 자료가 방치된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RO635

..."문제상자"의 세 실험이 끝났습니다.

이후 제가 실험 자료를 정리한 파일과 실험 도중 수집한 유효 데이터를 업로드하겠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카 씨는 안젤리아 씨가 AR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으로, 실험 종료를 선언합니다. 기록 완료.

간결한 녹음 기록을 마치고, RO635는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