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시험 풍운록
"여전히 일부 인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시험에 임하여 연달아 불합격하였다..."
[그리폰 중요 공지 - 역사 시험 불합격 인형 공개 훈계]
"G&K 문화 건설" 기본 강령에 의거, 1개월 전부터 【그리폰 역사 지식 시험】을 단계적 시행하여 기지 내 모든 전술인형이 의무적으로 통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1개월간 각 인원의 개인 일정을 고려해 매일 자유롭게 시험 일자를 선택 가능하게 하고, 불합격자를 위한 보충 시험도 마련하였으나
여전히 일부 인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시험에 임하여 연달아 불합격하였다.
이에 지휘관의 판단하에 금일부로 보충 시험 불합격자, 또는 태도가 불량한 인원을 공개 훈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하 해당자 명단――
공지판보다 커 벽 한 면의 거의 다 덮어버린 통지서.
그 앞에서, 인형들은 한데 무리지어 웅성였다.
세상에... 어떻게 시험을 10번 쳐서 죄다 0점 맞은 애가 있대?!
놀라긴 일러, 그게 한 명이 아니래.
80식은 그냥 전부 백지로 냈다더라.
그리고 카르카노 M91/38... 어... 시노랬나? 걔는 똑같은 시험지로 10번을 봤는데 한 번도 정답을 적어낸 적이 없대!
휴우... 난 진작에 통과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박제당했다간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야!
한편, 공지판에서 멀지 않은 곳.
신입 CMR-30은 조금 멀찍이서 빼곡한 명단을 힐끗 보았다.
화제의 80식과 카르카노 M91/38은 아예 이름과 사진이 명단 제일 위에 첨부되어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무, 무섭다...
CMR-30은 남들 몰래 주먹을 움켜쥐며 침을 꿀꺽 삼켰다.
......
3일 전.
메일함 열어 봐, 빨리! 역사 시험 성적 나왔대!
...60점! 딱코딱댐 통과다 아싸아!
히히히 나도 63점으로 통과~ 너보다 높게 받았다고!
대장은 몇 점 나왔어?
흥, 나야 당연히 80점 이상이겠지!
CMR-30은 자신만만하게 메일함을 열고 "시험 성적 통지서"를 클릭했다.
그러자 새하얀 페이지 중앙에 새까만 볼드체 숫자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59점.
???!!!!?!!
뭐, 뭐야 이게?!
뭔데뭔데? 나도 보여――
딸깍!
CMR-30은 잽싸게 아예 화면째로 꺼 버렸다.
크흠! 어, 어휴, 딱 1점 모자라서 80점을 못 찍다니!
와, 완벽하지 않아서 보여 주기가 좀 그, 그렇네! 그냥 보지 마!
쳇, 하여간 고고한 척 다 해요.
에이 암튼 통과했음 됐지!
진짜, 이번 시험은 뭐가 이렇게 귀찮은 건지 참...
듣기로는 지휘관이랑 카리나의 연말 평가가 걸려서 기지의 모두가 통과해야 한다더라. 합격점 못 받으면 자비로 보충 시험 신청해야 하고!
근데 돈 낭비는 둘째치더라도, 보충 시험까지 떨어지면 기지 전체에다 박제해 버린다니! 나라면 창피해 죽을 거야.
......
안 돼 안 돼!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새가 어딨어!
오늘 보충 시험이 마지막 기회야! 반드시 통과하고 말겠어!
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CMR-30은 시험장으로 향했다.
보충 시험장, 시험 시작까지 10분 전.
3차 세계대전은 2045~2051...
G&K 안전계약사 창립 연도 2053년...
쾅!
그때, 시험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복습에 몰두 중이던 CMR-30은 화들짝 놀라 노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 따가운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니, 웬 퇴폐적인 기운을 풍기는 두 형체가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보충 시험 여기지?
여기든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요, 어차피 불합격인데.
안경을 고쳐 쓰는 80식은 눈매가 짜증으로 한 층 더 사나웠고, 이는 시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을 목격한 CMR-30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거! 공지 제일 위의 걔네잖아!
뭐야... 나 쟤네랑 같이 시험 보는 거야!?
CMR-30은 속으로 신세를 한탄하며 냉큼 다시 노트를 집어 얼굴을 파묻었다.
80식은 아무도 못 봤다는 듯 그저 어깨만 으쓱하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왜 지휘관이랑 카리나는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이딴 시험, 그냥 우리 마인드맵에 쓰레기 같은 데이터만 왕창 집어넣은 다음 다시 검색하게 하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의미인데!
80식은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그녀의 묵직한 총기 가방이 바닥에 부딪혀 쿵 소리를 내었다.
집중하자... 한눈팔지 말자...
어디까지 봤더라... 아 맞아, 탈린 전투 이후 지휘관이 얻은 적 관련 중요 정보는...
그러게 말이에요. 역사 시험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식적이기만 한데.
얼간이가 쓴 게 분명한 문제 하나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뭐뭐 전투를 치르고 그리폰의 전술인형들은 어떤 수확을 얻었습니까?"
모두가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거, 다 봉급 올리려고 아닌가요?
솔직하게 적은 건데 그걸 0점 처리하다니, 순 억지예요.
......
헤에, 그런 어이없는 문제도 있었어? 난 그냥 엎어져 자서.
그냥 너도 괜히 고생 말고 나처럼 해, 어차피――
덜컹!
구석에 웅크려 있던 CMR-30은 결국 더는 참지 못했다.
백지나 내는 녀석들이 좀 조용히 못 해!?
시험 안 칠 거면 그냥 나가던가! 복습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80식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CMR-30을 훑어봤다.
그러는 너도 낙제점 맞고 보충 시험 보러 온 거잖아, 뭐가 잘났다고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흥! 난 너네랑 다르거든!?
조금만 더 잘했으면 합격이었다고! 그리고 오늘 보충 시험을 위해 사흘 내내 열심히 준비했단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높은 점수로 통과하고 말겠어! 죽어도 너네처럼 박제 안 당해!
하하하, 말 잘했다 신참! 아주 기세등등하구만!
앞문 쪽에서 들려온 시원한 웃음소리.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아닌 웬 커다랗고 네모난 기계를 든 톰슨이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의 카리나도 뒤따라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마담, 기계는 여기다 두면 되겠지?
응응! 고마워 톰슨~
전원을 여기다 꽂고...
오케이! 준비 끝!
뭐야...? 그 상자는 뭐하는 거야?
우히히... 당연히 보충 시험이랑 관계 있는 거지!
자아 설명할 테니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지난 며칠 동안 말이야, 나랑 지휘관님이 기지의 애들 말을 들어보니까 필기 시험을 정말로정말로 싫어하는 애들이 많더라?
그래서 진지하게 검토해서 낸 결론이 바로~
보충 시험의 방식을 "필기" 또는 "실기" 중 하나를 선택해 통과하기! 오늘부터 도입이야!
실기...?
그래, 실기!
시험 출제 범위 중에서 대표성 있는 4종의 전투를 엄선하고, 우리 인형 정비사 씨까지 특별 초빙해서 그 전장을 완벽하게 재현한 가상 전투 스테이지를 만들었어.
너희들에겐 진짜, 아주, 간 단 한! 전자전 훈련처럼 가상 전투에서 목표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시험 통과란 말씀!
음... 그건 재밌어 보이네. 적어도 필기 시험보단 훨씬 낫겠다.
그치그치? 전자전도 나름대로 몰입감 있고 재밌잖아~
다만, 보충 시험을 이 실기로 하려면 3인 이상의 팀을 만들어야 하거든? 그러니 지금 여기의 모두가 투표를 해야 해.
난 좋아, 찬성.
난 반대!
CMR-30이 다급함에 펄쩍 뛰었다.
카리나! 나, 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전자전 경험도 별로 없다구!
게다가, 오늘 필기 시험, 준비하느라 3박3일 잠도 안 자고 공부했는데...! 내 목숨이 달린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평범하게 필기 시험으로 해 줘!!
카리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머지 두 명에게 시선을 향했다.
...시노는?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어느 쪽이든 낙제 확정일 텐데요. 알아서들 하세요.
카리나는 마지막 희망을 눈빛에 담아 톰슨에게 향했다.
찬성 반대 기권 골고루 1표씩이군...
쯧, 역시 내가 나서야 하나.
......설마.
톰슨 너, 그냥 심부름인 줄 알았더니 너도 시험 보러 온 거였어?
어, 그렇게 됐다.
아니 내가 시험날에 몇 잔 좀 마셨더니 그만 시험지에 이름 적는 걸 깜빡했더라고...
하하, 그날 술만 안 마셨어도 진작에 만점 통과하고 쫑파티 열었는데 말이야!
마, 만점?!
굉장하다아...!
CMR-30은 경이로움에 눈을 반짝이며 톰슨을 우러러봤다.
그래서, 톰슨은 어떡할래?
톰슨은 시험장의 네 명을 스윽 둘러보곤 살짝 고민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합리적으로는야 나도 필기 시험이 편하고 좋지.
나도 우리 신참처럼 100% 통과할 자신 있으니까...
응응!
――다만.
톰슨이 갑자기 뜸을 들이며 80식과 시노를 바라봤다.
이 녀석들 머그샷이 걸려 있는 것도 꼴불견이잖아?
이 동네 고참으로서, 보스와 마담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도 내 의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필기는 무리라면 실기로 도와주겠어.
와아 톰슨 최고!
그럼 2대1대1, 다수결로 실기로 결정! 박수~
이, 이러는 게 어딨어 톰슨 선배애..!
CMR-30은 절박함과 배신감에 눈물을 펑펑 쏟을 기세였다.
신참, 울음 뚝.
그런 후배를, 톰슨이 어깨를 끌어안고 달랬다.
내가 그리폰서 몇 년이나 구르면서 무슨 꼴을 못 봤겠냐?
전자전은 일과 훈련 중에서 제일 간단한 과목이야. 너희 셋이 그냥 내 뒤에서 가만있어도 나 혼자서 다 밀어버릴 수 있어.
그치마안...
그러지 말고 자알 생각해 봐, 보스도 우리 모두가 합격하길 바라고 있잖아?
그러니까 전자전 따윈 걱정 말고 이 선배님만 믿어.
자타공인 베테랑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까지 보이니, 깍지손으로 안절부절하던 CMR-30도 결국 손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알았어, 선배 말대로 할게.
그럼 잘 부탁해, 톰슨 대장.
아아, 간만의 버스 타는 느낌... 마음껏 활약해 주세요, 톰슨 대장님.
OK~ 그럼 보충 시험 소대 결성을 정식 선언합니다!
모두, 톰슨의 인솔이랑 시스템 지시 잘 따라서 열심히 해 줘!
카리나가 기계의 뒷면에서 케이블 4가닥을 뽑아, 톰슨부터 차례대로 나눠 주며 말을 이었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이 휴대용 서버에 있으니까, 마인드맵 권한 열고 연결하도록 해.
시험 결과 나랑 지휘관님의 연말 평가에도 반영되니까 꼭 좀 잘 부탁할게!
카리나의 간절한 눈빛에, 톰슨은 씨익 웃으며 OK 사인을 취했다.
이윽고 부웅 소리를 내며 기계가 작동하자, 데이터의 홍수가 케이블을 통해 모두의 마인드맵으로 쏟아졌다.
CMR-30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의식이 허공으로 흘러가는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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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폰 중요 공지 - 역사 시험 불합격 인형 공개 훈계]
"G&K 문화 건설" 기본 강령에 의거, 1개월 전부터 【그리폰 역사 지식 시험】을 단계적 시행하여 기지 내 모든 전술인형이 의무적으로 통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1개월간 각 인원의 개인 일정을 고려해 매일 자유롭게 시험 일자를 선택 가능하게 하고, 불합격자를 위한 보충 시험도 마련하였으나
여전히 일부 인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시험에 임하여 연달아 불합격하였다.
이에 지휘관의 판단하에 금일부로 보충 시험 불합격자, 또는 태도가 불량한 인원을 공개 훈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하 해당자 명단――
공지판보다 커 벽 한 면의 거의 다 덮어버린 통지서.
그 앞에서, 인형들은 한데 무리지어 웅성였다.
세상에... 어떻게 시험을 10번 쳐서 죄다 0점 맞은 애가 있대?!
놀라긴 일러, 그게 한 명이 아니래.
80식은 그냥 전부 백지로 냈다더라.
그리고 카르카노 M91/38... 어... 시노랬나? 걔는 똑같은 시험지로 10번을 봤는데 한 번도 정답을 적어낸 적이 없대!
휴우... 난 진작에 통과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박제당했다간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야!
한편, 공지판에서 멀지 않은 곳.
신입 CMR-30은 조금 멀찍이서 빼곡한 명단을 힐끗 보았다.
화제의 80식과 카르카노 M91/38은 아예 이름과 사진이 명단 제일 위에 첨부되어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color=#A9A9A9>무, 무섭다...</color>
CMR-30은 남들 몰래 주먹을 움켜쥐며 침을 꿀꺽 삼켰다.
......
3일 전.
메일함 열어 봐, 빨리! 역사 시험 성적 나왔대!
...60점! 딱코딱댐 통과다 아싸아!
히히히 나도 63점으로 통과~ 너보다 높게 받았다고!
대장은 몇 점 나왔어?
흥, 나야 당연히 80점 이상이겠지!
CMR-30은 자신만만하게 메일함을 열고 "시험 성적 통지서"를 클릭했다.
그러자 새하얀 페이지 중앙에 새까만 볼드체 숫자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59점.
???!!!!?!!
뭐, 뭐야 이게?!
뭔데뭔데? 나도 보여――
딸깍!
CMR-30은 잽싸게 아예 화면째로 꺼 버렸다.
크흠! 어, 어휴, 딱 1점 모자라서 80점을 못 찍다니!
와, 완벽하지 않아서 보여 주기가 좀 그, 그렇네! 그냥 보지 마!
쳇, 하여간 고고한 척 다 해요.
에이 암튼 통과했음 됐지!
진짜, 이번 시험은 뭐가 이렇게 귀찮은 건지 참...
듣기로는 지휘관이랑 카리나의 연말 평가가 걸려서 기지의 모두가 통과해야 한다더라. 합격점 못 받으면 자비로 보충 시험 신청해야 하고!
근데 돈 낭비는 둘째치더라도, 보충 시험까지 떨어지면 기지 전체에다 박제해 버린다니! 나라면 창피해 죽을 거야.
......
<color=#A9A9A9>안 돼 안 돼!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새가 어딨어!</color>
<color=#A9A9A9>오늘 보충 시험이 마지막 기회야! 반드시 통과하고 말겠어!</color>
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CMR-30은 시험장으로 향했다.
보충 시험장, 시험 시작까지 10분 전.
3차 세계대전은 2045~2051...
G&K 안전계약사 창립 연도 2053년...
쾅!
그때, 시험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복습에 몰두 중이던 CMR-30은 화들짝 놀라 노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 따가운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니, 웬 퇴폐적인 기운을 풍기는 두 형체가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보충 시험 여기지?
여기든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요, 어차피 불합격인데.
안경을 고쳐 쓰는 80식은 눈매가 짜증으로 한 층 더 사나웠고, 이는 시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을 목격한 CMR-30은 눈을 부릅떴다.
<color=#A9A9A9>저... 저거! 공지 제일 위의 걔네잖아!</color>
<color=#A9A9A9>뭐야... 나 쟤네랑 같이 시험 보는 거야!?</color>
CMR-30은 속으로 신세를 한탄하며 냉큼 다시 노트를 집어 얼굴을 파묻었다.
80식은 아무도 못 봤다는 듯 그저 어깨만 으쓱하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왜 지휘관이랑 카리나는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이딴 시험, 그냥 우리 마인드맵에 쓰레기 같은 데이터만 왕창 집어넣은 다음 다시 검색하게 하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의미인데!
80식은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그녀의 묵직한 총기 가방이 바닥에 부딪혀 쿵 소리를 내었다.
<color=#A9A9A9>집중하자... 한눈팔지 말자...</color>
<color=#A9A9A9>어디까지 봤더라... 아 맞아, 탈린 전투 이후 지휘관이 얻은 적 관련 중요 정보는...</color>
그러게 말이에요. 역사 시험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식적이기만 한데.
얼간이가 쓴 게 분명한 문제 하나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뭐뭐 전투를 치르고 그리폰의 전술인형들은 어떤 수확을 얻었습니까?"
모두가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거, 다 봉급 올리려고 아닌가요?
솔직하게 적은 건데 그걸 0점 처리하다니, 순 억지예요.
......
헤에, 그런 어이없는 문제도 있었어? 난 그냥 엎어져 자서.
그냥 너도 괜히 고생 말고 나처럼 해, 어차피――
덜컹!
구석에 웅크려 있던 CMR-30은 결국 더는 참지 못했다.
백지나 내는 녀석들이 좀 조용히 못 해!?
시험 안 칠 거면 그냥 나가던가! 복습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고!
80식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CMR-30을 훑어봤다.
그러는 너도 낙제점 맞고 보충 시험 보러 온 거잖아, 뭐가 잘났다고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흥! 난 너네랑 다르거든!?
조금만 더 잘했으면 합격이었다고! 그리고 오늘 보충 시험을 위해 사흘 내내 열심히 준비했단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높은 점수로 통과하고 말겠어! 죽어도 너네처럼 박제 안 당해!
하하하, 말 잘했다 신참! 아주 기세등등하구만!
앞문 쪽에서 들려온 시원한 웃음소리.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아닌 웬 커다랗고 네모난 기계를 든 톰슨이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의 카리나도 뒤따라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마담, 기계는 여기다 두면 되겠지?
응응! 고마워 톰슨~
전원을 여기다 꽂고...
오케이! 준비 끝!
뭐야...? 그 상자는 뭐하는 거야?
우히히... 당연히 보충 시험이랑 관계 있는 거지!
자아 설명할 테니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지난 며칠 동안 말이야, 나랑 지휘관님이 기지의 애들 말을 들어보니까 필기 시험을 정말로정말로 싫어하는 애들이 많더라?
그래서 진지하게 검토해서 낸 결론이 바로~
보충 시험의 방식을 "필기" 또는 "실기" 중 하나를 선택해 통과하기! 오늘부터 도입이야!
실기...?
그래, 실기!
시험 출제 범위 중에서 대표성 있는 4종의 전투를 엄선하고, 우리 인형 정비사 씨까지 특별 초빙해서 그 전장을 완벽하게 재현한 가상 전투 스테이지를 만들었어.
너희들에겐 진짜, 아주, 간 단 한! 전자전 훈련처럼 가상 전투에서 목표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시험 통과란 말씀!
음... 그건 재밌어 보이네. 적어도 필기 시험보단 훨씬 낫겠다.
그치그치? 전자전도 나름대로 몰입감 있고 재밌잖아~
다만, 보충 시험을 이 실기로 하려면 3인 이상의 팀을 만들어야 하거든? 그러니 지금 여기의 모두가 투표를 해야 해.
난 좋아, 찬성.
<size=50>난 반대!</size>
CMR-30이 다급함에 펄쩍 뛰었다.
카리나! 나, 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전자전 경험도 별로 없다구!
게다가, 오늘 필기 시험, 준비하느라 3박3일 잠도 안 자고 공부했는데...! 내 목숨이 달린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size=50>평범하게 필기 시험으로 해 줘!!</size>
카리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머지 두 명에게 시선을 향했다.
...시노는?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어느 쪽이든 낙제 확정일 텐데요. 알아서들 하세요.
카리나는 마지막 희망을 눈빛에 담아 톰슨에게 향했다.
찬성 반대 기권 골고루 1표씩이군...
쯧, 역시 내가 나서야 하나.
......설마.
톰슨 너, 그냥 심부름인 줄 알았더니 너도 시험 보러 온 거였어?
어, 그렇게 됐다.
아니 내가 시험날에 몇 잔 좀 마셨더니 그만 시험지에 이름 적는 걸 깜빡했더라고...
하하, 그날 술만 안 마셨어도 진작에 만점 통과하고 쫑파티 열었는데 말이야!
마, 만점?!
굉장하다아...!
CMR-30은 경이로움에 눈을 반짝이며 톰슨을 우러러봤다.
그래서, 톰슨은 어떡할래?
톰슨은 시험장의 네 명을 스윽 둘러보곤 살짝 고민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합리적으로는야 나도 필기 시험이 편하고 좋지.
나도 우리 신참처럼 100% 통과할 자신 있으니까...
응응!
――다만.
톰슨이 갑자기 뜸을 들이며 80식과 시노를 바라봤다.
이 녀석들 머그샷이 걸려 있는 것도 꼴불견이잖아?
이 동네 고참으로서, 보스와 마담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도 내 의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필기는 무리라면 실기로 도와주겠어.
와아 톰슨 최고!
그럼 2대1대1, 다수결로 실기로 결정! 박수~
이, 이러는 게 어딨어 톰슨 선배애..!
CMR-30은 절박함과 배신감에 눈물을 펑펑 쏟을 기세였다.
신참, 울음 뚝.
그런 후배를, 톰슨이 어깨를 끌어안고 달랬다.
내가 그리폰서 몇 년이나 구르면서 무슨 꼴을 못 봤겠냐?
전자전은 일과 훈련 중에서 제일 간단한 과목이야. 너희 셋이 그냥 내 뒤에서 가만있어도 나 혼자서 다 밀어버릴 수 있어.
그치마안...
그러지 말고 자알 생각해 봐, 보스도 우리 모두가 합격하길 바라고 있잖아?
그러니까 전자전 따윈 걱정 말고 이 선배님만 믿어.
자타공인 베테랑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까지 보이니, 깍지손으로 안절부절하던 CMR-30도 결국 손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알았어, 선배 말대로 할게.
그럼 잘 부탁해, 톰슨 대장.
아아, 간만의 버스 타는 느낌... 마음껏 활약해 주세요, 톰슨 대장님.
OK~ 그럼 보충 시험 소대 결성을 정식 선언합니다!
모두, 톰슨의 인솔이랑 시스템 지시 잘 따라서 열심히 해 줘!
카리나가 기계의 뒷면에서 케이블 4가닥을 뽑아, 톰슨부터 차례대로 나눠 주며 말을 이었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이 휴대용 서버에 있으니까, 마인드맵 권한 열고 연결하도록 해.
시험 결과 나랑 지휘관님의 연말 평가에도 반영되니까 꼭 좀 잘 부탁할게!
카리나의 간절한 눈빛에, 톰슨은 씨익 웃으며 OK 사인을 취했다.
이윽고 부웅 소리를 내며 기계가 작동하자, 데이터의 홍수가 케이블을 통해 모두의 마인드맵으로 쏟아졌다.
CMR-30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의식이 허공으로 흘러가는 감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