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3
MOD 2
다음날 아침, 주방 오븐실.
삐이, 음성 메시지 재생 중...
대장 대장! 우린 지금 원정 목적지에 도착했어. 곧 신호 차단 구역에 진입할 거야.
어제 저녁 식사가 물건너가서 너무 아쉬워. 돌아가면 꼭 같이 먹자!
비켜봐 비켜봐! 저기저기 대장!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카리나가 긴급 호출을 때려서 저흰 군장도 제대로 못 싸고 차 타고 실려갔다니까요!
그래 놓고 대장은 따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기지에 남아야 한다고 하고... 아무튼 돌아가서 만나요!
나도 나도!
원정 끝나고 꼭 초콜릿 케이크——
삑. 재생 종료.
......
둘을 먼 곳으로 보내 달라고 카리나에게 부탁한 게 나라는 걸 알면 분명 불평하겠지.
그런데 낡은 소체로 되돌아온 걸 둘한테는 어떻게 설명한담...
오븐의 램프가 꺼지며, 경쾌한 종소리가 EVO3의 복잡한 생각을 끊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굵게 땋은 인형이 바쁘게 걸어와 오븐에서 고소하게 잘 익은 빵 한 쟁반을 꺼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보세요, 이게 제가 미식 페스티벌을 위해 특별히 만든 빵이에요!
향이 엄청 고소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재료를 넣은 거야?
아니요. 가장 기본적인 식사빵이에요, 밀가루, 이스트, 물과 소금만으로 반죽한 거죠.
어? 그건 그냥 밥으로 먹는 빵 아니야?
아니,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G36한테서 들었거든, M45는 그리폰에서 가장 뛰어난 제빵사라고...
그런데 식사빵만 만드는 건 조금 재능이 아깝지 않아?
걱정 마세요! EVO3 씨는 G36 씨가 알려주신 표준 절차만 따르시면 돼요. 돌아다니며 홍보하기, 그러다 가끔 카운터 보기.
잘 부탁할게요.
......
그리폰 미식 페스티벌 현장.
오늘 아니면 못 먹어요! 따끈따끈 잘 익은 꼬치구이——
바닐라 녹차 아이스크림 한번 잡숴봐! 초코맛! 딸기맛! 없는 게 없어!
호객 소리로 가득 차 시끌벅적한 장터.
음료수를 유리컵에 따르는 소리, 기름을 볶는 향기, 그리고 그릴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거친 바다처럼 뒤섞여, 식객들의 머리 위에서 파도쳤다.
그, 금방 구운 빵입니다, 와서 보세요——
EVO3는 인파를 따라 돌아다녔다. 소박한 빵은 주변의 달콤 짭짤한 미각의 향연 속에서 마치 돌멩이처럼 무미무취했다.
자신이 지고 있는 거액의 채무를 떠올린 EVO3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용기를 내어 목청을 높였다.
따끈따끈 신선한 빵 좀 드셔보세요!
그리폰 최고 제빵사 M45가 직접 구운 빵입니다! 안정적인 맛, 불후의 클래식! 꼭 한번 드셔보세요!
응? 일류 제빵사가 구운 빵?
네! 어떤 빵으로 드릴까요?
여기 바게트랑, 브레첼이랑, 치아바타랑, 베이글...
왜 다 아무 맛도 없는 식사빵이야? 어디 양념치킨 소스라도 구해와서 발라주든가 하지!
양념치킨... 이요?
무, 문제없어요! 바로 소스를 준비할 테니 취향대로 뿌려드시면——
아, 잠깐만요! 가지 말아요!——
3시간 후.
완전 리뉴얼된 식사빵 좀 드셔보세요!
양념치킨 소스, 마라소스, 체다 치즈, 초코시럽... 취향대로 곁들여 드셔보세요——
오? 입맛대로 주문받는 식사빵이야? 흥미로운걸.
네, 사랑하는 고객님, 어떤 빵을 원하시나요?
피스타치오 맛 바게트를 부탁할게, 겉에 뿌리는 거 말고 빵 안에다 소로 넣은 거.
아 그래, 피스타치오는 최상급만 쓰고, 과립 함량은 최소 20%로 부탁해.
완성품이 맛없으면 돈은 지불할 수 없어.
죄송해요, 당장 그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는 어려워요...
돌아가서 M45 씨랑 얘기해 볼게요. 아마 내일이면——
내일? 그럼 그때 보자...
깐깐한 인형은 손을 털고 미련 없이 뒤돌아 떠났다.
......
3시간 후, 녹초가 되어버린 EVO3는 절망한 얼굴로 길거리를 떠돌았다.
클래식 식사빵 특가 판매합니다, 한 개 가격에 열 개씩, 추가로 20가지 소스 팩도 드려요!
바닐라, 크림, 초콜릿, 양념치킨, 갈릭, 계란... 원하는 맛 다 있어요! 한번씩 와서 구경이라도 해보세요——
어? 그렇게 떨이로 팔면서 소스까지 잔뜩 줄 수가 있나?
혹시 유통기한 아슬아슬한 거 아니지?
안심하세요, 클래식한 식사빵입니다. 품질은 제가 백 번 보장드려요!
부디 오셔서 하나 맛 좀 보세요!
흐으음...
하나만 드셔봐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EVO3는 고객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억지로 빵을 입에 쑤셔넣으려 했다...
으아아악! 인형 살려!!!
독살 당한다!!!!
퍼억!
상대는 EVO3를 걷어차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저녁, 주방 창고.
나는 그저 빵을 하나라도 더 팔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데 왜... 계속 일을 망치고 있는 거지...
EVO3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새하얀 전등 불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어요! 기껏해야 사과하고 수당 약간 깎이는 정도지, 해고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난 지금 돈이 엄청 필요해... 최소한 빵을 1천 개는 팔아야——
......
EVO3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M45에게 와락 달라붙었다.
M45 씨! 판매량을 올릴 방법이 떠올랐어!
......?
식사빵이 잘 안 팔리는 건 외형도 맛도 너무 밋밋해서야!
맞아, 이게 근본적 문제야!
M45, 우리 창의성을 발휘해보자! 오늘 한 손님이 주문한 피스타치오 바게트라든가!
그리고 옆 가게에서 꼬치구이가 엄청 잘 팔리던데, 살짝 참고해서 바베큐빵을 만든다든가!
이걸로도 맛이 부족하면, 여기 소스랑 노른자랑 후추가루랑... 아무튼 조미료라면 이것저것 다 있으니까!
창의력만 있으면, 눈길을 끌어모을 포인트만 있으면, 분명 빵도 불티나게——
안 돼요.
왜...?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저는 가장 클래식한 식사빵만 만들고 싶어요.
M45는 안경을 고쳐쓰고 약간 섭섭한 얼굴로 일어서려 했다가, EVO3에게 팔을 붙잡혔다.
M45 씨, 식사빵 만드는 걸 뭐라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모두의 취향에 따라서 좀 개량하자는 건데 그것도 안 돼?!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지만, 계속 근본만 고집해서는 아무리 클래식한 빵도 도태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판매량을 올리려면 모두의 입맛에 맞춰줘야 해!
판매량이 전부가 아니에요.
줏대없이 대중의 입맛에만 맞춰서는 식사빵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려요.
그게 무슨 뜻이야?
M45는 EVO3의 손을 뿌리치고 무척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빵은 긴 세월 동안 주식으로서 인류와 함께해왔어요. 그만큼 더할 나위 없는 정서가 담겨있죠.
그리고 미식으로서도, 다른 빵보다 씹는 맛이 있고, 밀의 향이 풍부해요... 그 어떤 빵도 이 점을 대체할 순 없어요.
그리폰에 아무리 단짠단짠을 좋아하는 인형들이 많다 해도, 분명 저처럼 순수한 식사빵을 즐기는 분도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 순수한 맛을 원해서 찾아온 분들의 기대를, 개량이랍시고 이상한 사족을 붙여 짓밟을 수는 없어요!
......
......
저기... 표정이 왜 그러시죠?
EVO3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입술을 멍하니 살짝 벌린 채 무시무시한 침묵을 들이마시고 뱉어냈다.
저기... 제 말이 너무 심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다른 일이 생각나서...
EVO3는 한숨을 쉬고 M45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네 말이... 맞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