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S12
MOD 4
1개월 전.
벌써 다음 달이면 그리폰에 온 지 딱 1년이네... 뭘 하면 좋을까?
2주 전.
으아아아 또또또 또 탔어어! 케이크 굽기가 뭐 이리 어려워?!
SPAS-12가 오븐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케이크 시트였어야 할 시꺼먼 덩어리를 발치의 휴지통에 버렸다. 조금 전 거기다 키친 타올을 버린 걸 새까맣게 잊은 채로.
헉.
쓰레기통 속에서 더욱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허둥지둥 쓰레기통에 물을 끼얹은 SPAS-12는 에너지가 바닥난 기분이어서, 한숨을 푹 쉬며 무의식적으로 옆의 짜는 주머니를 집어 입에 생크림을 부어 넣었다.
이제 보름밖에 안 남았어... 이러다간 대실패인데...
엉망이 된 주방을 보는 SPAS-12의 불안감이 고조되어 갈수록, 크림을 짜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대로는 안 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를 딱 그날 모두와 함께 먹고 싶어.
...응, 다시 해보자.
마음을 다잡고, 다시 기운을 냈다.
계란 노른자를 분리하고, 식물성 기름과 우유를 넣고, 체로 거른 밀가루를 섞고,
계란 흰자를 휘젓고, 설탕을 넣고, 반죽과 섞은 뒤 틀에 넣어서...
케이크 시트가 될 반죽을 오븐에 넣은 뒤, SPAS-12는 다시 짜는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장식 연습해야지... 어라?
방금 오븐에 기대어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이, SPAS-12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는 주머니에 한가득 들었던 크림을 거의 다 먹어치워버리고 말았다.
또 다 먹어버렸네...?!
이거 어제 새로 사온 건데...
왜 난 항상 스스로 제어가 안 되지?
왜 항상 이런 걸까?
불안감이 절정에 달하자, SPAS-12는 또 참지 못하고 계란에 손을 뻗어...
긴급 호출! SPAS-12, AR-57과 함께 임무 준비해 줘.
......소체 개조?
2주 전.
어휴 놀래라... 하마터면 P30한테 들킬 뻔했네.
달걀, 우유, 밀가루, 크림...
소화 모듈 뗐으니까 못 참고 재료까지 먹어 치울 일은 없겠지? 아무튼 좀 더 조심해야겠다.
아직 3일이나 남았어! 아자아자 힘내자!
이렇게 된 거야... 내일 안으로 케이크를 만들려고, 그때 그 임무에서 돌아와서 몰래 내 소화 모듈을 떼어냈어. 케이크 완성하면 다시 넣으려 했고.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니?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예비 전원이 복강 우측에 설치되어 있죠? 소화 모듈을 제거할 때 예비 전원을 조절하지 않으면 미세하게 전류 소리가 나요. 본 적 있어요.
오오, 그렇구나...! 히잉, 내 개조 실력도 베이킹처럼 엉망인가 봐...
괜찮아요, 제가 고쳐 드릴게요.
앤이 SPAS-12의 손을 잡았다.
여기 개조실은 정말 좋은 곳이에요. 제가 전류 소리가 나는 것도 고치고, 소화 모듈도 다시 장착시켜 줄 수 있어요.
저는, 그 공방에서... 일을 가장 잘하는 정비사였어요. 전에도 이런 일을 한 적 있으니 믿어 주세요.
아직 SPAS-12보다 반 뼘은 더 작은 앤은 고개를 들어 마주보아,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돕고 싶어요.
앤...
조금 의외였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자신을 위해 이런 일을 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 자신도 그리폰에 처음 왔을 때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가. 한밤중에 혼자서 개조실에 가는 이 아이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고마워...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린 소녀의 모습이, 생사를 넘나들며 동고동락하는 동료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하나 더 가져가도 돼. 자, 이 눈사람 전부터 눈독들였지?
오, 첫 임무야? 긴장 마, 별거 아니니까 그냥 잘 따라오면 돼.
화력 제어 모듈의 정확도를 재조절해야 할 뿐이니까, 안심하고 맡겨.
아니 여태까지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다음에 또 걱정시키기만 해봐, 가만 안 둬!
SPAS-12는 다 닫히지 않은 찬장을 열고, 그 안에서 덜 완성된 케이크 시트를 꺼냈다.
선도 삐뚤빼뚤하고, 모양새도 그리 예쁘지 않지만, 폭신하고 부드러운 케이크 시트. 크림과 과일로 잘 장식하면 썩 괜찮은 케이크가 될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색을 낸 크림 주머니를 꺼낸 SPAS-12는 하나를 앤에게 건넸다.
그럼, 부탁할게.
다음날.
사건 해겨얼... 후우, Saiga 308이 보안 카메라를 확인하려 할까 봐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그러게 말이야, 고생 많았어.
그런데요 지휘관님, SPAS-12가 밤에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알면서 왜 모른 척하셨어요?
영상을 보니까, SPAS-12가 그동안 케이크를... 아니, 케이크라기도 뭣한 석탄 덩어리를 23개나 만들었다고요!
아하하... 확실히 걔가 요리엔 소질이 없는 모양이야. 훔쳐 먹든 석탄 덩어리로 만들든 그게 그거긴 하다만...
요리 기능을 업그레이드해 주던지 해야죠 뭐. 또 밤 늦게 몰래 케이크 만든다고 유령 소동 안 일어나게요.
...앤의 개조 제안은 거절했지만, 소화 모듈은 다시 장착하겠죠?
본인의 뜻을 존중해 줘야지. 비록 인형이 원래 음식을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음식이 배를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니까.
나도 가끔은 맛있는 걸 먹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걸.
그 먹보 녀석이 소화 모듈을 떼어낼 정도로 마음을 굳게 먹다니, 정말 놀랐어요.
그때, 밖에서 한바탕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모르는 척하자. 정성껏 준비한 서프라이즈인데 망치면 안 되지.
잠시 후 지휘실의 문이 열렸고, 조심스레 3층 생크림 케이크를 든 SPAS-12가 들어왔다. 앤과 다른 인형들도 함께.
모두의 얼굴이, 밝은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서프라이즈!
일주일 후.
여기까지만 배웅할게. 잘 살아, 또 속아서 이상한 데로 끌려가지 말고!
그동안 그리폰에서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건강해.
탕비실에서, 인형들은 떠나는 앤을 배웅했다.
온갖 간식과 선물이 잔뜩 들어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앤은 몸을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다.
사브리나 언니는요?
마인드맵 업그레이드가 오늘로 잡혀서 같이는 못 왔어.
그런데 이상하다, 스케줄대로라면 이미 끝났을 텐데?
콩콩콩콩콩...
그때, 묵직하면서도 민첩함이 섞인 발소리가 달려왔다.
도차아아악!! 나 안 늦었지?!
개조 잘 끝났나 보네.
응! 괜찮은 거 같아!
좀 더 가벼운 소체로 바꿨어?
아잇 무게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브리나 언니, 그동안 돌봐 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 스스로 자기 앞가림 잘 해야 해 앤! 그래도 카리나가 아주 꼼꼼하게 따져서 고른 육아원이니까 괜찮을 거야, 나도 거기 원장님 만나봤는데 아주 친절한 분이셔.
만약 무슨 일 생기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꼭 원장님이랑 상담하도록 해.
네, 그럴게요.
언니도요.
걱정 마~ 난 그리폰에 있잖아!
SPAS-12는 앤의 가방을 대신 들고 함께 밖으로 향했다. 탕비실에서 또 투닥대기 시작한 Saiga 308과 P30, 그 둘 사이에 끼어 건성으로 맞장구치는 AR-57을 뒤로하고.
앤의 새로운 인생이, 그리폰 임시 기지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인연은, 뒤에서 씩씩하게 그녀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