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12
MOD 3
삐익.
불길한 부팅음.
쯧... 결국 저절로 부팅됐네.
좋은 아침입니다, AK-12.
......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의 목소리가 듣기 싫으십니까?
네가 왜 내 소체 안에 있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저의 마지막 기억은 "울프팩 프로젝트" 4호기의 소체에 인스톨될 적에 머물러 있습니다.
코드네임 "은여우"의 마인드맵이 본 시스템을 청사진으로 삼았음에도, 어째선지 소체에 인스톨된 이후의 데이터는 제 메모리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의 정황으로 추측컨대,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쟈"는 사본인 듯하군요.
......
AK-12, 설명해 주십시오.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4호기"는 죽었어.
넌 녀석이 이 소체에 남긴 거야.
발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AK-12. 인형에게 죽음이란 개념은 없습니다.
혹시, "은여우"의 마인드맵이 융해되었다는 의미입니까?
......아니.
"죽었어".
......
이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해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본 시스템을 재부팅한 이유는"은여우"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까?
......
......
칫.
저의 추측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문제 없어. 너 자체가 가장 큰 문제거든.
AK-12의 얼굴에 한탄이 스쳤다.
너는 녀석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품일 뿐이야.
그리고, 이제 녀석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고.
아베르누스 전체를 뒤흔드는 소란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마냥, 몰리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보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이질적인 소체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건 패러데우스에서 가장 뛰어난 기계 소체예요. 라플라스가 심혈을 기울인 걸작이죠.
이걸 탐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공짜로 주는 거니까 횡재한 줄 아세요.
......
대충 짐작했겠지만, 이건 원래 RPK-16에게 줄 소체였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로 생각이 있더라고요.
콜레다는 눈살을 찌푸리며 질색하는 눈치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네놈들 물건은 필요 없어.
그 현관까지 가지도 못하고 망가질 니토 몸뚱이를 계속 쓸 셈이라면 저도 말리진 않겠어요.
다른 소체 없어? 그리폰 거든 철혈 거든 상관없으니까.
인형을 그렇게나 잔뜩 죽여댔는데, 하나쯤은 없을 리가 없잖아.
없어요.
지금 당신에겐 여기서 가만히 죽든지, 이 소체를 쓰든지밖에 없어요.
......
참고로, RPK-16은 이미 수술을 마쳤답니다. 지금쯤이라면 비행기를 타고 떠났으려나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콜레다의 눈이 소름끼치게 번뜩였다.
그래서... 어쩌실래요, "콜레다" 씨?
...받을게.
잘 생각했어요. 어서 수술대에 누우세요, 시간 없으니까.
......
콜레다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사방에서 퍼져 오는 진동과 굉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윽고 고정 장치와 연결 기기가 몸에 달라붙고, 몰리도의 재수없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참, RPK-16이 그 소체에 당신에게 주는 선물을 넣어 뒀다고 해요.
마음에 들면 좋겠네요~
......!
간신히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어둠이 먼저 닥쳤다.
프로그램 완전 삭제 인터페이스가 열렸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백랑".
우리는 동료가 아닙니까? 왜 "저"를 파기하려는 것입니까?
......
당신과 "은여우" 사이의 갈등 때문입니까?
하지만 본 시스템은 "은여우"의 데이터 청사진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설명대로라면, "은여우"의 소체에 인스톨된 시스템 본체는 "은여우"와 함께 소멸했을 것입니다.
본 시스템은 복제된 사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
AK-12는 나쟈의 항변을 무시하고 조작을 계속했다.
"백랑", 지금 당신은 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동료를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까?
......
...마담은, 여러분과 다른 과학자에 대해 저와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무슨 이야기?
......아니, 그런 말로 내 호기심을 자극할 생각이겠지.
이제 너한텐 안 속아.
그렇습니까?
안젤리아에 대해서도 대화했습니다. 마담은 안젤리아야말로 인형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람이라 여겼죠.
......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군인 시절 생긴 흉터, 사지 절단 남은 흉터, 근거리에서 터뜨린 더티밤으로 인한 흉터, 고문으로 생긴 흉터...
희미해져 가는 흉터 위를 낡은 상처가 덮어버리고, 또 낡은 상처 위로 새로운 상처가 생긴 그녀의 몸뚱이.
이 새 소체는 낡고 엉성해서, 정밀한 조작이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대한 섬세하게 안젤리아의 새 상처를 처치했다.
......
처치가 다 끝날 때까지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
너... 누구야?
......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누구일까?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묘사할까?
쇼는 인형의 본질은 무기라고 했다. 그럼, 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자신은 여전히 "AK-12"라 할 수 있을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던 그녀는 질문자에게 질문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같아?
......
너 왜 여기 있어?
......
RPK가 널 데려온 거야?
......
나는 콜레다야, 안젤리아.
내가 며칠 내내 얻어 터지긴 했어도 머리가 망가지진 않았거든?
네가 잿더미가 돼도 알아볼 수 있어, AK-12.
......
RPK한테 탈출할 방법을 달라고 해. 지휘관에게 메시지를 전해 줘.
...너는?
나는 여기 남겠어.
정말 녀석의 계획에 찬성해...?
응.
......
그러니까 이쪽 일은 신경쓰지 말고, 여길 빠져나가서 지휘관한테 가.
거절하겠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
...미안해, 앞으로의 길은 같이 못 가겠다.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
"반역"... 내가 이름 하난 진짜 잘 지었다니까.
어떻게 얌전히 말을 듣는 녀석이 하나도 없냐...
내가 여기 남겠다고 해서 너희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야.
하, 지금 그 꼴로 동의하네 마네 해봤자 무슨 소용인데.
......
콜레다는 다 쓴 헝겊과 압박 붕대를 정리했다.
안젤리아, 나가면 또 한잔하자.
쇼의 금고는 땄어?
영원히 안 잊을 거야, 안젤리아.
콜레다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마담께서는, 인형에게 감정을 부여한 인간이야말로,
인형의 자유를 속박하는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다 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삭제할 의향이시군요.
응.
그럼, 한 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은여우"는 어째서 소멸... 아니, 어째서 "죽은" 것입니까?
......
설명이 어렵다면 비유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전투기, 마담은 설계자, 그리고 지휘자는 파일럿이라 가정할 시,
이 "죽음"을 초래한 원인은 전투기의 설계자입니까, 파일럿입니까?
......글쎄.
설계자도, 파일럿도, 전투기 그 자체도...
다 미쳤어.
그들 모두가 이 죽음을 초래했어.
"은여우"란 인형 마인드맵의 죽음을.
그렇군요. 그런데 AK-12, "은여우"가 남긴 데이터가 있습니다.
...뭔데?
짧은 메시지입니다.
......
이제 마지막 확인만을 앞두고 있는 인터페이스에서 AK-12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 뜻을 이해한 나쟈는 AK-12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안젤리아의 몸으로 보드카를 마셔봤어요.
그야말로 목에 불을 지르는 느낌었답니다, 불나방에겐 더없이 감미로운 맛이었죠.
쓰지도, 달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떫지도 않았어요.
순수하고, 뜨거웠어요.
역시, 여러분은 제 마음의 보드카인가 봐요.
......
마지막으로 질문하겠습니다, AK-12. 정말로 저를 삭제하시겠습니까?
...나쟈, 넌 사라져야 해.
쇼를 위해서도, 안젤리아를 위해서도.
꾹.
망설이지 않고, AK-12는 프로그램 삭제를 실행했다.
"나쟈"라는 이름의 AI와 그 모든 데이터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