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12
MOD 2
"승리는 인간이 것이고, 죽음은 인형의 몫. 그런데 죽음의 권리마저도 결국엔 인간에게만 있다."
...개소리.
인간 대신 죽어 주지 못하면, 뭣하러 인형이 있어?
인간이 죽는 건 다 인형이 일을 똑바로 못 해서야.
게다가, 인형은 죽음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해.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도 모르고.
AK-12, 네 임무는 2시간 후 이 지점을 통과하는 소대의 섬멸이야.
목표 소대는 인간 12명. 한 놈도 빠짐없이 사살해.
응.
타타탕!
피부, 혈액, 지방, 근육, 골격, 내장...
인간의 신체는 이런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이란, 인체의 일부를 잃는 것.
피부를 많이 다치거나, 피를 너무 흘리거나, 근육이 한계 이상으로 찢어지거나, 뼈가 나쁜 방향으로 부러지거나, 중요한 내장이 터지거나...
인간이란, 이토록 연약한 존재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이토록 낮은 문턱 하나뿐이다.
약속 시간에 맞춰 AK-12와 AN-94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
긴장했어?
응... 지휘관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니,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된다.
그런 걱정을 할 바엔 차라리 그 사람이 얼마나 버틸지나 내기하자.
"얼마나 버틸지"라니?
우리 두목 노릇은 절대 편하고 즐거운 일이 아니잖아.
뭘 걸 건데?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날렵하게 2층에서 뛰어내렸다.
이번에 쇼가 가격을 꽤 쳐 줬거든, 내기할 거면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 버틴다로 걸지.
당신이 안젤리아 지휘관인가? 미안하다, 방금은――
그럼 우리는 뭘 걸까?
쇼가 좋은 보드카 어따 숨겼는지, 알지?
내가 이기면 가서 죄다 쌔벼 와.
...그건 쇼의 숙소에 하나뿐인 금고에 있어.
우린 비밀번호 몰라.
난 알지, 000000.
......
좋아.
여성은 흡족스러운 듯 눈이 가늘어졌고, 그제서야 AK-12는 이 사람이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자기소개를 해야지? 코드네임 "안젤리아", PMC 그리폰의 지휘관이야.
앞으로 너희의 훈련은 내가 담당한다, 쇼도 이미 권한 이전해 놨어.
알았다.
그럼 우리 프로필도 봤겠네. 어떻게 생각해?
안젤리아는 벌써 꺼내 든 전술 태블릿으로 훈련 내용을 짜면서 답했다.
꽤 강하고, 호흡도 제법 잘 맞고.
적어도 너랑 AK-15보단 훨씬 낫네.
물론 성능 자체는 AK-15가 월등하지만, 너희 둘의 팀워크는 AK-15가 둘 있는 것보다 훌륭해.
단지...
......
이름이 좀 많이 구리다 야, "울프팩"이라니 촌스럽게스리.
어지간한 인형 제조사는 그런 이름 막 디폴트로 한 세트씩 붙일걸?
바꾸고 싶다면 바꿔도 돼.
나중에. 지금은 훈련이 우선이야.
지금부터 할 훈련에서 너희의 임무는,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호위하는 것.
명심해, 지금 나는 완전 비무장 상태인 인간이야. 너희 둘이 내가 목숨을 기댈 유일한 희망이지.
당신을 호위 대상으로? 하지만 이번 훈련은 실전 연습이지 않나?
안전을 위해 더미를 쓰길 권장한다.
그게 바로 훈련의 목적이야. 평생 얌전하게 말 잘 듣는 더미나 호위할 수는 없잖아?
잘 들어, 너희는 앞으로 인간이 툭하면 죽을 짓을 하는 꼴을 정말 자주 보게 될 거야.
사서 고생하기 좋아하는 지휘관이구나.
알았다, 그럼 방탄복과――
필요 없어.
바로 시작하자고.
두 인형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젤리아는 앞장서서 훈련장의 입구로 걸어갔다.
...이번 내기, 내가 지겠는걸.
......
등 뒤에 멈춘 발소리. AK-12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새 지휘관임을 알아챘다.
늦었잖아, 안젤리아 지휘관. 임무는 진작에 완수했어.
......
안젤리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12명의 병사들을 훑어봤다.
이들의 군번줄은?
임무 내용에 신상 정보 수집은 없었는데.
임무랑 관계는 없지만 다 가져와.
알았어.
어째선지는 이해 못했지만, AK-12는 명령을 따랐다.
잠시 후, 군번줄 12개가 안젤리아의 손에 쥐어졌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
...? 하지만 다 죽었는걸? 이들의 신상 정보를 쓸 일도 없을 텐데.
네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기억해야지.
......
12개의 군번줄이 짤랑여, 다시 AK-12의 손바닥에 놓였다.
알아 둬, AK-12. 이게 죽음의 무게야.
아주 가벼운 동시에, 엄청 무거울 수 있어.
......
AN-94에게 부축을 받으며, 중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 된 안젤리아가 한 묘비 앞에 섰다.
묘비의 주인은 "람잔"이었고, 그 옆의 비석에는 "아흐민"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안젤리아, 꽃 여기.
안젤리아는 AK-12에게서 꽃다발 두 묶음을 받아 묘비 앞에 높았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홱 뒤돌아 AN-94의 손을 쥐고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뭐라도 말하려고 온 줄 알았더니.
해봤자 못 듣는데 뭘 해.
그럼 왜 굳이 이 먼 길을 왔어? 오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잖아.
의사가 많이 걸으면서 재활 운동하래.
......
묘비 보면서 무슨 생각했어?
...멍때렸어.
그리고?
없어.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그게 무슨 의미야?
의미는 생각해내는 게 아니야, 깨달았을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거지.
AK-12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황혼녘의 한구석에 버려진 작은 묘비를 돌아보았다.
돌을 깎아 만든 묘비는 엄청 무거운 반면, 그 아래 묻힌 관은 엄청 가벼웠다.
관에 시신은 없고 옷가지만 있었으니까.
이것이 죽음의 무게인 걸까?
환상이 사라졌다.
오늘은 3차대전 종전 기념일이 아니어서, 프랑크푸르트 열사 기념비 주변은 인적이 없었다.
덕분에 AK-12는 마음놓고 진눈깨비를 맞으며 멍하니 비석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
안젤리아의 유품은 정말 손에 꼽았다.
기갑 "아레스"에서 뜯어낸 작은 파편, 갈아입을 옷 몇 벌.
그리고, 지휘관한테 요구해 받아온 "철완".
AK-12는 이미 질릴대로 살펴본 이 물건들을 또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또 살펴보면서, 어떤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내려는 듯했다.
...결국엔 대답을 안 해줬네, 안젤리아.
진눈깨비는 함박눈으로 변했다.
함박눈은 쌓이고 쌓여, 새하얀 도화지처럼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네가 만약 지금 우리의 모습을 봤어도... 여전히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예전에, 네가 산 사람은 누군가의 희생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했지...
그런데, 죽음이 뭘 가져다줬어?
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죽음에서 의미를 찾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데.
안젤리아가 하던 것처럼, AK-12는 꽃다발을 기념비 앞에 내려놓았다.
......
그친 눈은 도로의 양옆으로 하얗게 쌓였다.
한산하다 못해 썰렁한 길가를 지나, AK-12는 오래 전 장사를 접은 술집의 대문 자물쇠를 따고 열었다.
끼이이...
그녀와 함께 이 오랫동안 문이 닫혔던 술집에 빛이 들어왔고, 휘날린 먼지들이 공중에서 춤을 췄다.
AK-12는 카운터로 걸어가, 먼지가 잔뜩 쌓인 의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평소처럼, 얼린 보드카?
옆의 허공에다 중얼거리며, AK-12는 보드카와 잔 두 개를 꺼내 가득 따랐다.
나 원래 이런 거 안 마시는데... 네 얼굴 봐서 마시는 거야.
AK-12는 잔을 흔들면서 가볍게 중얼거렸다.
안젤리아, 오늘 이 지경까지 오면서 후회한 적 있어?
마인드맵 공간 안에서, AK-12는 안젤리아의 모습을 투영했다.
아직 활력 넘치던 시절의 그녀를.
후회할 게 뭐 있다고.
안젤리아가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나, 그녀 곁에 앉았다.
나랑 같이 갔으면 적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 오래 살아서 뭐해. 그냥 사는 게 고통일걸?
......
그래서, 겨우 그딴 말이나 하려고 이 술집에 왔어?
내가 기억 못할까 봐? 예전에 이 가게에서 내가 너한테 술을 사 줬잖아.
응... 겨우 몇 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게 변했네.
자꾸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 할래? 닭살돋네 진짜.
너한테 할 말이 잔뜩일 것 같았는데...
너를 본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느낌이야.
그럼 이제 가도 돼?
안젤리아.
응?
나, 이제 죽음의 의미를 알겠어.
......
안젤리아는 술잔을 만지작대다, 피식 웃고선 AK-12와 잔을 부딪히고 쭈욱 들이켰다.
그럼 그걸 잊지 말고 계속 나아가.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하지만 인형에게 죽음은 없는걸.
있어.
인류도 언젠가는 멸종하잖아? 인형도 끝이 찾아올 테지.
알코올 때문일까, 안젤리아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안젤리아.
또 뭐.
나한테 술자리 한 번 빚졌다?
......
쇼의 금고를 털었어.
비밀번호, 정말로 000000이더라.
안젤리아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남한테 빚진 술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다음 생에 양주장이라도 차려야 다 갚을 수 있겠네.
잘 됐네, 그럼 오래 살겠다.
......
웃는지 우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짓는 안젤리아는 이제 그 형체가 새어들어오는 빛에 완전히 삼켜질 것만 같았다.
...안젤리아.
응?
잘 가.
...잘 있어, AK-12.
눈을 깜빡이자, 안젤리아는 이 곰팡내와 먼지로 가득한 술집에서 사라졌다.
AK-12의 옆자리는 여전히 거미줄투성이였고, 탁상의 두 술잔엔 여전히 보드카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