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12
MOD 1
......
얇게 쌓인 눈은 녹으면서 길거리에 남은 마지막 열기까지 앗아가, 살을 에는 공기와 미끄러운 길바닥을 남겼다.
팔오금에 꽃다발을 끼운 채, 두 손을 싹싹 비비거나 입김으로 데우며 그 길을 걷는 행인들.
멀지 않은 한 교회 앞으로 속속 모여드는 그들은 모두 검은 옷차림에 무거운 표정과 슬픈 눈빛이었다.
AK-12는 모습을 감춘 채 조용히 그 행렬과 함께 걸어, 프랑크푸르트 대교회에 도착했다.
저희는 지금 프랑크푸르트 대교회 앞에 나와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서맨사 쇼를 기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 세기의 과학자를 추도하러 나온 것입니다.
길가에는 한 시민이 가져와 설치한 모니터로 서맨사 쇼 박사의 생전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으며, 교회에는 추모의 화환과 촛불이 가득합니다. ...
뾰족한 지붕 꼭대기는 저 잿빛 하늘에 무거운 선을 그어,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듯했다.
그리고 어두운 석조 창문에서는 찬바람에 몸을 떠는 행인들처럼 흔들리는 촛불의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주위의 사람들 사이로 작게 흐느끼거나, 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가운데, AK-12는 시선을 화면 속 아직 풋풋하던 쇼의 얼굴에 고정했다.
쇼 박사님, 박사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공 대학의 항공기 운전 및 비행 훈련 전공을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를 좋아하셨나요? 하늘을 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네, 어릴 적부터 좋아했어요.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하늘에서 구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저 아래의 풍경도 개미만큼 작아 보일 테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일까요?
아뇨, 그렇게 복잡하진 않아요.
혹시 헬리콥터 조종해본 적 있나요? 안 해봤으면 기회 될 때 해보세요.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하늘을 정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정복"이라... 정말 야심 찬 단어군요.
아무렴요, 표도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가 가장 좋아한 단어인데.
그쪽은 안 좋아하세요?
물론 저도 좋아하죠, 러시아인의 마음의 "보드카" 아닙니까!
......
교회 안은 매우 조용해서, 이따금씩 낮게 흐느끼는 소리와 가벼운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가슴이 무거워지는 엄숙한 공기 속에는 촛불의 향과 은은한 서리의 기운도 섞여 있었다.
촛불의 빛은 벽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쳐 흔들리며 신성하고 장엄한 그림을 그리고, 저 위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발하는 빛은 무거운 목제 예배 의자와 두꺼운 장막으로 쏟아졌다.
그 가운데, 두꺼운 필기장을 끌어안은 한 청년은 고통과 경배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필기장을 꽃들로 가득한 단상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마치, 다하지 못한 이상을 이 차가운 나무에 맡기듯이.
AK-12는 이 쇼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그들 옆을 빙 둘러 구석으로 갔다.
아무도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AK-12는 보드카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미식, 완구, 편지 등 쇼가 살아생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물건들 곁에 함께 두었다.
사람들이 기념하고, 찬송하고, 숭배하는 건...
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이라서지.
하지만...
넌 보드카 한 병이면 충분하지?
그때처럼 말이야.
......
실험실로 발을 디디자마자 진한 알코올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조바심을 어떻게든 억누르는 표정인 AN-94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AK-12를 보자 아주 조심스레, 맞은편의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붓고 있는 여자를 보라고 눈짓했다.
아무리 보드카 데이라지만 지나친 거 아니야?
안 지나치면 그게 보드카 데이냐.
왔으면 너도 한잔해.
AK-12가 슬쩍 AN-94를 보니, 그저 고개만 저었다.
이 상태의 박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걱정할 바에야, 차라리 조금이라도 대신 마셔 주는 수밖에.
...그래.
AK-12는 탁상에 산처럼 쌓인 술병을 눈으로 훑었다.
...뭐야, 전부 쌩 보드카잖아? 맛 별로 안 좋아하는데.
커피 리큐르를 준비했다.
이것과 섞어 "블랙 러시안"을 만들 수 있다.
그거 괜찮겠네, 한 잔 섞어 줘.
쯧... 마실 줄도 모르는 애새끼 같으니...
하, 공업용 알코올 마실 생각 없거든요?
AK-12가 쇼의 곁에 앉으니, 그제서야 AN-94도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웬일로 오늘은 이렇게 일찍부터 마셔?
......
AN-94가 스크린의 일시정지된 화면을 가리켰다.
북란도 사건 주기를 추모하는 뉴스였다.
당시 박사의 동료들은 생존자 구조 작업 도중 전원 사망했다.
바로 상황을 이해한 AK-12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다.
징그러운 눈 치워.
오글거리는 말도 넣어 두고.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인간에게 전우에 대한 그리움은 큰 위안이잖아.
네가 인간이냐.
아니지만 지식은 인간한테 배웠지.
싫음 말아, 어차피 너한테 그런 훈훈한 대화가 안 어울리긴 해.
......
쇼는 병에 남은 액체를 병째로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가식적인 입놀림, 다 인간의 거짓된 자기위로야.
그래도, 굳이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역시 그 자식한테 마지막으로 보드카 한 모금 마시라 하는 건데...
그럼, 네 보드카 데이는 추모가 아니라 순전히 네가 마시고 싶어서네?
...정답.
그런데 왜 하필 오늘로 정했어?
이러면 아무도 안 말리니까.
정당하게 실컷 마실 수 있잖냐.
......
아예 그냥 두 병 더 원샷하고 사탄이랑 미팅이나 하러 가시지 그래?
나 명줄 굵거든? 이딴 걸론 안 죽어.
우린 전술인형이라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게 정말 유감이라니까, 쇼가 어떻게 끝장나나 구경하고 싶은데 말이야.
기술 발전의 병목을 돌파하지 못해 프로젝트 망쳐서 풍비박산 나려나?
아님, 누가 아차 하고 실수해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려나?
나는 완벽주의자야.
어떻게 남의 실수로 죽겠냐?
AK-12가 번쩍 눈을 떴다.
완벽주의자? 네가?
AN-94, 우리 지금 신소련식 유머를 들은 거야?
AK-12는 탁상에서 뒹구는 병들을 가리키며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쇼, 이거 보면서 다시 한 번 말해봐. 네가 뭐라고?
완벽주의자!
난 완벽주의자다!
흠칫 놀란 AN-94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젖은 수건을 꺼내 박사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오늘은 이만 마시는 게 좋겠다.
박사가 같은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반복 중이다.
흠... 쇼, 너 카드 비번 뭐야?
...000000.
안 취했네 뭘.
확률적으로, 마담이 외부 요인으로 인해 사망할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무작위 요소로 인한 변수를 제외한다면, 마담의 사망 원인으로 가장 높은 것은 본인의 사유로 인한 사망입니다.
......
......
도르르르...
실험실의 자동 운반 카트가 쇼의 곁으로 왔다.
마담, 예약하신 보드카가 도착했습니다.
아, 내가 돕겠다.
마담은 만약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돌아가실 경우, 눈도 감지 못하시겠죠.
와아, 그거 큰일인걸?
인간의 평균 실수 빈도를 생각하면 높은 확률로 눈도 못 감고 죽겠네.
교회 밖은 여전히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 모여든 사람들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어찌나 추운지, 교회의 회랑에 서 있어도 살을 에는 추위에 영혼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인파 사이에서 젊은 여성의 품에 단단히 껴안긴 어린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여자아이는 주위에 온통인 검은 옷차림의 모르는 사람들을 보며, 왜 여기가 이토록 슬픈 분위기인지 의아해했다.
엄마, 저 아줌마는 누구야?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단다. 그래서 저분과 작별하려고 여기 온 거야.
교회의 출구로 향하다, AK-12는 문득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 마지막으로 저 꽃들과 촛불을 바라봤다.
슬픔으로 가득 찬 교회를 나서려는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결연했다.
잘 가, 쇼.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AK-12는 호들갑스러운 장례식에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