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94
MOD 4
............
아 뭐야 진짜, 왜 점수가 저번보다 떨어진 건데?
이동 과녁은 변수가 크니까 점수에 기복이 생기는 거야 당연하지.
하루이틀 고생한다고 발전하겠어?
그래도 무슨 비결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
사격 자세가 너무 경직됐다.
민수용 인형이 막 사격 통제 모듈을 장착했을 때 흔히 겪는 문제지.
매뉴얼 수치에만 의존하면 네 소체의 성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엑, AN-94?!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자, 두 인형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 큰 소리 안 내도 들린다만.
어, 아, 미안, 그냥 깜짝 놀라서...
너 우리한테 먼저 말 건 적 없잖아.
...사실 저번 훈련 때 보고 말해 주고 싶었다.
티스, 너는 단독 행동 시 모든 방향을 감시하려고 주변을 지나치게 신경쓰더군.
그래서는 오히려 주의력이 분산돼 빈틈이 생기고 만다.
그런 식으로 당하고 싶지 않거든 그 버릇부터 고치도록.
오오...
......
왜 그러지, AK-47?
아니 그냥, 네가 갑자기 이렇게 친절해지니 신기해서.
무슨 일 있었어? 뭐야,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그래?
별것 아니다. 어차피 내가 이런다고 너희와 나의 차이가 좁혀지진 않으니.
그리고... 정말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도 기분이 나아질 테고 말이다.
응? 기분이 나아진다니?
아... 말했다시피, 별것 아니다.
그저, 이제 나도 패배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졌다고? 네가?? 정말로???
시모노프는 연기 교과서에 나올 법한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뛰는 것 위에 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하~ AK-15 말이구나? 최근 들어 항상 걔랑 둘이서 연습하던데.
오우, AK-15. 그럼 이해했어.
듣자하니 AK-12도 엄청난 실력자라던데.
정말 걔네가 그렇게 대단한가...? 저번에 임무 하나 거하게 망쳤다잖아.
뭐라고...?!
이번엔 AN-94가 화들짝 놀랐다.
아, 너 아직 못 들었구나? 저번에 걔네 둘이서 임무에 나갔는데, 보호 대상인――
네에 이야기는 거기까지~ 나머지는 자매끼리만 하게 해 줄래?
——!?
AK-12?!
당돌하게 대화에 끼어든 것은 감은 눈과 신비로운 미소를 띠는 인형, 울프팩 프로젝트의 핵심 AK-12였다.
AN-94, 잠깐 얘기할 시간 있지?
AK-12는 AK-15와 전혀 달랐다. 설렁설렁한 태도로 훈련장에 들어온 이 인형은 체격적으로도 AN-94와 별로 차이나지 않았고, 압도적인 기세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순간, AN-94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감지했다.
......
오~ 기록보다 성적이 훨씬 좋은데?
...꾸준히 훈련한 덕분이다.
하지만 AK-15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해.
......
AN-94는 뒤돌아 무기를 한쪽에 내려놓고, 조금 어질러진 탁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AK-47 일행이 나간 뒤, 훈련장엔 AN-94와 볼일이 있다는 AK-12만 남았지만, 정작 AK-12는 뭐하러 온 것인지 설명하질 않았다.
그래서 상대의 의도를 추측하며, AN-94는 탁상 위의 각종 탄약을 분류하고, 탄피와 쓰레기를 모으고, 불발탄 같은 불량품을 처분하고, 탄통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자료에서 본 거랑 달라도 너무 다른걸.
네 마인드맵의 변화는 쇼의 예측도 뛰어넘었어. 그거 엄청난 일이다? 알아?
그건 박사가 내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랄 것도 없다.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이다.
왜?
...나는 무가치하니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
풉,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 말에 AK-12가 거리낌없이 박장대소했다.
...웃긴가?
뭐야, 웃기려는 말 아니었어? 어색한 분위기 깨려고 던진 유머인 줄 알았더니만.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그럴 리가~ 그냥 네가 놀리는 거 얼마나 잘 참나 보려는 거지.
......
훈련용 총까지 깨끗하게 닦아 제자리에 거치한 다음, AN-94는 고개를 들어 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AK-12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증명이니까.
그래서... 나 같은 쓸모없는 인형을 무슨 일로 찾아왔지?
나, AK-15랑 관뒀어.
......뭐?
난데없는 의아함이 거부감을 이겨, AN-94은 껄렁한 표정의 AK-12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농담, 하지 마라.
농담 아닌데? 해보니까 난 AK-15랑 하나도 안 맞더라고. 임무 수행에 지장이 갈 정도로 안 맞아.
그래서, 내가 걔를 버리기로 했어.
AN-94는 어이가 없어 무의식 중에 입까지 벌렸다.
그녀는 AK-15의 강함 때문에 잔혹한 진실까지 맛보았는데, 대뜸 자신 앞에 나타난 AK-12는 AK-15를 버리겠다니.
하지만 그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 일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지?
자리에 앉은 AK-12는 아까부터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언제 떴는지 모를 눈으로 AN-94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AN-94가 마침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자, 겁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그 "늑대의 눈" 특유의 안광을 번뜩였다.
자신이 쓸모없다고?
그럼 내가 기회를 줄게, AN-94. 난 지금 파트너가 필요해.
AK-12가 AN-94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로 네가 필요하다고.
......
울프팩 프로젝트. 신소련 국가안전국이 발의하고, 저명한 방산업 기술 전문가 사만다 쇼 박사가 주도한 안전국의 엘리트 전술인형 개발 계획.
계획된 최고급 엘리트 전술인형은 코드네임 "AK-15"와 "AK-12",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2인조는 안나 빅토르브나 최를 지휘관으로 지정, 그녀의 인솔하에 위험한 각종 긴급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원래 계획은 그러했다.
......
팔디스키 잠수함 기지의 지하 통로.
저 위의 지상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묵직한 굉음은 지하까지 희미하게나마 들릴 정도였다.
AN-94는 말없이 그녀의 대원과 지휘관을 뒤따르면서, 신중하게 그들의 종적을 지웠다.
우리만으론 아레스 상대 못 하는 거 알지?
모르겠냐? 쇼가 만든 물건인데.
생겨먹은 건 둘째 치더라도, 실용성만큼은 소련 제일이라고.
하지만 예고르가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의 지원군이 그놈보다 먼저 와서 우리와 합류할 거야.
작전을 구상할 시간은 있는 셈이지.
그거 좀 자세히 설명해 줄래, 안젤리아?
아레스를 상대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알아?
녀석을 정면에서 견제할 병력이 최소 1개 소대, 자기가 뭘 하는지 빠삭한 폭파 담당이 최소 3명은 있어야 해.
이게 다 있더라도 제일 중요한 건 특공 담당이지. 뭐 그건 내가 맡는다 쳐, 전방은 어떻게 할 거야?
전술인형 2개 소대가 와도 그 쇳덩어리 괴물 앞에선 한 방 감이야.
...견제는 내가 맡을 수 있다.
안 돼, 너 혼자선 감당 못해.
아무리 대단한 인형이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야.
아, 알았다...
AN-94가 안 되면 AK-15는 어때?
...누구?
——!?
AN-94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AK-15. 네 전 파트너 말이야.
AK-15가... 여기 왔다고?
응, RPK-16이랑 같이. 자, 네가 원하는 폭파 전문가도 생겼다.
안젤리아는 뒤돌아 자신의 두 부하를 바라봤다.
걔네 둘까지 추가하면 승산은 얼마 나와?
기뻐해 안젤리아, 0%에서 1%로 상승했어.
...불가능에서 한번 해볼 만해졌단 뜻이네?
뭐든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머리가 부러워 죽겠다 진짜.
아무튼 맞아, 그 왕고릴라가 버텨 준다면야 가능성이 생겨.
그런데... AK-15가 이제 전선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건가?
AK-12 덕분에 나도 지난 2년 동안 저쪽이 어땠는지 잘 몰라.
그래도 듣기론 RPK-16이랑 죽이 잘 맞는다더라, 누구누구 씨랑은 다르게 말이지.
......
곧 이리로 올 테니 준비 잘해 둬.
...알았다.
AK-15는 탄약을 아끼는 습관이 없으니 아마 탄약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일 것이다.
방금 지나온 탄약고에서 찾아보겠다.
AN-94는 고개를 저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
주변 지형 살펴보고 올게.
넌 작전 세울 준비해.
여부가 있겠어요 보스~
먼지가 쌓인 탄약고에서, AN-94는 7.62 구경 탄약을 보이는대로 모았다.
...폭발물도 있군.
어쩌면 쓸 곳이 있을지도...
AK-15가 온다.
그 생각이 다시 들자, AN-94는 손이 점점 느려졌다.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마음이 놓여지는 것은 확실했다.
절망이나 마찬가지인 이 상황에서, 그렇게나 강력한 지원군은 틀림없는 구원이었다.
AK-12와 안젤리아의 말대로, AK-15 덕분에 계획에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
......
하지만...
AK-15는 본디 AK-12의 파트너였다.
둘은 충돌한 끝에 화해하지 못하고 갈라섰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다.
만약 AK-15가 AK-12와 화해하기를 받아들인다면, AK-12는...
AK-12는... 역시 더 강한 파트너를 원할까?
AN-94가 할 수 없는 일을, AK-15는 할 수 있다.
결국엔 대체품이었으니까.
"AN-94"를 필요로 한 것은, 역시――
AN-94~
A, AK-12? 왜 여기에...
이제부터 우리만으로 아레스를 상대하는데, 총알만 가지고는 턱도 없으니까지.
폭발물이 잔뜩 필요해서 혹시 있나 보러 왔더니...
역시 너는 세심하다니까~
아... 그래,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AN-94를 보며, 묘하게 싱글벙글한 AK-12는 그녀 곁에 다가갔다.
난 널 누구의 대체품으로 본 적 없어.
그 녀석이랑 어울리지 못한 건 내 문제야. 넌 그냥 훌륭한 파트너고.
......!
어, 어떻게...
너랑 콤비가 된 지 얼마나 됐더라?
...쇼 박사가 실종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AK-12는 씨익 웃으면서 AN-94의 등을 찰싹 때렸다.
어떡하면 그 녀석을 이길지 생각할 것 없어. 애초에 그 왕고릴라랑 힘싸움하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라고.
너는 너야, AN-94. 네겐 너만의 장점이 있어.
너 자신이면 돼. "다른 AK-15"가 되려 할 필요 없어.
나만의... 장점? 정말 그런 게 있을까?
그 녀석을 여기다 하루 종일 냅둬 봐, 폭발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나.
......
내 파트너는 오직 너뿐이야, AN-94. 바로 너뿐이라고. 알았지?
AK-12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툭 던지며 문으로 향했다.
두 녀석들 곧 도착하는데 안젤리아가 나더러 마중하래. 얼른 챙기고 돌아가자――
파트너~♪
......
알았다.
......
AK-12가 세운 계획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AK-15 같은 규격 외의 전력이 있어도 성공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번 상대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AN-94?
앗...?!
아... 그냥, 작전 계획을 복기 중이었다.
그러게요, 선배는 우리한테 다짜고짜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킨다니까요.
성공하더라도, 우리는 아마 전멸하겠죠.
우리가 전멸하더라도 성공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난... 성공조차 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우리의 상대는...
...AK-15보다도 강력한 상대다.
AN-94는 저 앞에 서 있는 AK-12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계속 안 좋은 말만 했지만요, 제가 봐도 지금으로선 이게 가능성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게다가, 작전의 관건도 AK-15가 아닌걸요.
뭐?
AK-15의 역할은 정면에서의 견제뿐이에요.
그녀가 5초를 버티든 10초를 버티든, 결과는 똑같아요.
아레스와 정면으로 맞붙어서, 쓰러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다 당신에게 달렸답니다.
나에게...?
AK-12 선배에게, 당신은 AK-15보다 뛰어나요.
결정적인 타이밍이 올 때까지,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특공 역할을 맡은 AK-12 선배를 지켜야 해요.
그녀가 결정타를 꽂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전부 당신이 그녀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렸어요.
......
선배님은 당신을 무척이나 신뢰한답니다, AN-94.
AK-12...
아 참, 마지막으로 얼굴 좀 보여 줄래요?
......?
...네, 이제야 의욕이 솟네요.
함께 힘내봐요~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
...알았다.
돌격 준비 완료.
AN-94는 길게 숨을 내쉬고, AK-12의 옆에 다가섰다.
RPK-16의 말이 맞았다.
어떡하면 자신이 AK-15처럼 될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다. AK-12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그녀는 "AN-94"가 되어야 한다.
AK-15에겐 AK-15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AN-94는 AN-94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AN-94"다.
......
......
...후우.
명상을 끝마친 AN-94가 고개를 들었다.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뭐가 부족하단 거지?
AK-15? ...손에 그건 뭔가?
파일벙커, 슈타지의 대장갑 무기의 일부다.
발사기는 망가졌지만, 탄약만으로도 쓸모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
그런데, 방금 뭐가 부족하다 한 거지?
...내가 입으로 말했나?
그래.
AN-94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씩씩한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AK-12가 그녀를 심연에서 끌어내 구원해 주었고, 무가치하지 않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분명 AN-94를 비춘 빛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AN-94가 자신의 빛으로 그녀에게 보답할 차례다.
AK-12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AN-94니까.
나는... 너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AK-15.
......
우린 이제 팔디스키에서보다 훨씬 가혹한 난관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가 이 난관을 넘으려면, 각자의 역할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겠지.
그러니, 나는 더 이상 AK-15라면, AK-12라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지 않겠다.
...오직, "AN-94"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강구하겠다.
...지휘관이 부른다.
——가자.
AN-94가 천천히 일어나며 옆에 뒀던 총을 집어 들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문짝과 벽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앞장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