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94
MOD 3
신소련 국가안전국의 어느 복도.
......
한적한 복도에 AK-15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오늘의 훈련을 마치고 일정에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
그런데, 돌연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AN-94?
AK-15가 몸을 틀어, 아무도 없을 터인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녀에 비하면 훨씬 왜소하지만 기세만큼은 전혀 뒤지지 않는 인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
쇼 박사의 사무실에서 나간 후로 너는 계속 내 뒤를 따라다녔다.
만약 더 할 말이 있다면 바로 말해라.
나와 결투해라, AK-15.
뭐라고?
너와 결투하겠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쇼 박사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타인의 질의를 용납하지 않아.
하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그녀가 틀렸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지.
1번이든 0번이든 상관없다.
내가 너만큼, 아니, 너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나는 평생을 공장에서 썩을 실험기 따위가 아니다. 나는... 나는 "늑대 무리"의 첫 번째 인형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말대로라면, 네 행위에는 더더욱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AN-94.
AK-15가 몸을 완전히 돌려, AN-94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내 성능은 모든 면에서 너를 상회한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너의 그 뭐든지 하찮게 보는 눈빛이 정말 싫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지?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거냐?
......
AK-15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았다.
정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프로토타입".
바라던 바다.
......
헉!?
......
휴면 중이던 AN-94가 눈을 번쩍 떠, 수복 캡슐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그 옆의 쇼는 말없이 AN-94를 등진 채 의자에 앉아, 손에 쥔 담배의 껍질를 까 합성 연초를 탁상에 뿌리고 있었다.
마인드맵에 이상은 없나 자가 검사나 해 봐, 미치광이 씨.
바... 박사...?
미치광이라니, 내게 하는 말인가?
...잠깐, AK-15는?
......
여전히 말없이, 쇼가 빙글 몸을 돌려 AN-94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미묘했다. 여전히 화가 난 듯하면서도 어딘가 착잡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AN-94 자신은 분명, 훈련장에서 AK-15와――
크윽...!
잘도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딴 일을 저지르고 말이야.
가슴이 죄였다.
안나 말이 맞았어.
내가 너희를 너무 사람처럼 만들었어.
앗... 아아...
기억났다.
손바닥 뒤집듯, 어른이 아이를 상대하듯, 사냥개가 산토끼를 사냥하듯, 고급품이 불량품을 압도하듯...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반전의 여지도 없이, 그녀는 패배했다.
......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소체의 성능은 물론이거니와, 전술 연산과 전투 기술까지도.
그 어떤 면도, 눈앞에 선 태산의 티끌만큼도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AN-94에겐 처음이었다. 여태껏 이기기만 했던, 남을 압도하기만 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철저하게 패배한 쓴맛을 본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
기억의 마지막 장면은, 발광하듯 AK-15에게 달려드는 자신이었다.
훈련이나 겨루기의 범주는 진작에 넘었던 그때, 그녀는 오로지 AK-15를 쓰러뜨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영원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 아아...
아아아아악!!!
쯧...!
나쟈! 쟤 전원 내려!
예, 마담.
전부 기억났다.
AK-15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소체가 행동 능력까지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파괴되어, 수복실로 보내진 것이었다.
AN-94의 마인드맵이 심각한 수준으로 불안정해졌습니다.
당분간 일과 배정을 삼가고 휴식시키는 것을 권합니다.
...그래.
쇼는 입에 문 담배꽁초를 휙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책상 위의 엽서를 집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닥쳐, 뭘 잘났다고 떠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 잘못한 거 있네. 쟤를 너무 인간처럼 만든 거.
안젤리아는 조용히 쇼의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 위의 체스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편, 쇼는 투덜대며 엽서의 명함에 적힌 두 문자를 보고 하얀 말을 움직였다.
쟤는 인형이야.
그리고 병기지.
아님 그냥 병기거나.
전술인형은 "그냥 병기"가 아니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에 가까워.
나쟈, 너 인간이야?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담.
공식 학술 자료상 인류, 학명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중 현존하는 유일한 종입니다.
인간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의 정의에 부합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인공지능이기에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 봐.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안젤리아는 눈앞의 체스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쇼도 방금 움직인 하얀 말의 수에 맞서 어떻게 검은 말을 둬야 할지 생각했다.
그녀의 상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울프팩 프로젝트의 투자자이자 쇼의 친구였다.
인형의 마인드맵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네가 만든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그치지 않아.
네 마음에 들든 않든, AN-94는 네가 만들었잖아. 그런데 이대로 망가뜨릴 셈이야?
페르시카라면 안 그럴걸?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습니다.
마담이 특출난 분야에선, 페르시카 박사도 견줄 수 없습니다.
난 지금 네 주인님이랑 얘기 중이거든?
시끄러, 집중 안 돼.
쇼.
안나.
쇼는 손가락으로 체스말을 빙빙 돌리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사격술에 훈수 둔 적 있어?
내가 너처럼 멍청한 짓을 하면 얼마든지 훈수 둬도 돼.
참견 좀 마.
인형은 무기와 같은 물건이 아니야.
일을 제대로 하고 싶으면 그 편견부터 버려.
흥, 편견?
쇼는 콧방귀를 뀌며 검은 퀸을 움직였다.
나쟈는 그녀의 수를 확인하곤 기계팔을 조종해 다른 공백 엽서에 인쇄했다.
네 말대로 하면 걔가 AK-15를 이길 수 있어?
......
AK-15는 가장 내 이상에 부합하는 완벽한 인형 병기야. 군말 않고, 전투력도 압도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 신소련 최강의 전술인형이지. 경쟁이 될 만한 것도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하지만 왜 AN-94를 그토록 "사람답게" 만들었어?
특히, 외모가 누굴...
......
걔가 평생 전장에 나설 일 없을 거라 생각해서 그랬지?
하여간 이기적이고 사심만 잔뜩인 게, 인형한테 상처나 주고 말이야.
뭔 소리래.
어쨌든 내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AN-94를 싫어하진 않는다는 것만은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젠 떠들 기운도 없다.
아무튼 대화 주제 좀 바꾸지?
안젤리아는 쇼를 보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세상에 자신보다 옹고집인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네가 위에 제출한 "돌격병" 설계 개선안, 나도 봤어. 무기 개발에 너를 따라올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 네가 만드는 건 인형이야. 인형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고.
AK-15? 확실히 무지막지하지. 하지만 녀석한텐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있어. 단지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허... 넌 아는데 난 모르는 결함이라고?
쇼가 어이없어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 눈. 아주 실용적이긴 한데, 걔가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렸어.
병사로서야 좋겠지만, 장군이 되려면 유연한 사고가 가능해야지.
아예 나중엔 총에다 AI를 달고 지휘를 맡길 거라 하지?
너도 나쟈한테 연구를 보조시키고 있으면서 뭘.
아니면, 양쪽을 동시에 만족시킬 재주가 없어서 그래?
그딴 도발이 먹힐 줄 알아?
쇼의 눈이 가늘어져, 당장에라도 안젤리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반면 안젤리아는 느긋하게 꼰 다리를 바꿀 뿐이었다.
응.
하아아... 그래, 아주 잘 먹혔다.
두고봐, 아주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AK-12한텐 다른 기능을 넣어 주겠어. 어차피 고성능은 AK-15 한 기로 충분하기도 하니.
쇼는 툴툴대며 나쟈가 기계팔로 건네준 엽서를 받아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마침 페르시카가 공개 강의하는 중이거든?
내친김에 들으면서 그 머릿속 환기 좀 해라.
꺼져.
쇼는 단박에 그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거절했다.
며칠 후.
신소련 국가안전국의 실험실.
......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온 AN-94는 매직미러 앞에 천천히 앉아, 공허한 눈으로 유리 너머의 아직 미완성인 인형을 바라봤다.
AN-94, 또 AK-15에게 도전했군요.
희미하게 깜빡이는 등불 아래로 텅 빈 방에, 귀에 익은 목소리만이 그녀의 말동무였다.
나쟈...?
아직 있었구나.
저는 마담의 작업실의 안전 관리를 담당합니다.
그리고 저는 인공지능이니, 시설의 전력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상시 가동합니다.
아까 전 훈련장에서의 일도 목격했습니다.
......
AN-94, 당신은 AK-15에게 처음 도전했을 때 소체와 마인드맵 모두 전례 없는 수준으로 손상됐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위험합니다. 지속하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나쟈, 나는 약한가?
당신이 전술인형 중에서도 강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안전국에서 가장 기대받는 신인이라 생각했다.
가장 특별하고, 언젠가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을 짊어질 강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당신이 특별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약하다.
절대적인 평가는 아니지만, AK-15를 상대로는 아무리 도전해도 매번 똑같은 결과야.
나쟈, 나는 너무나도 약하다.
쇼 박사가 옳았어. 그녀에게 나는 필요 없었다, 내가 너무 약해서 필요치 않았다.
AK-15는 예외 중의 예외 케이스입니다.
그녀처럼 강력한 전술인형은 마담 본인도 또 하나를 설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저 인형은?
AN-94가 유리의 맞은편, 눈을 감은 전술인형을 가리켰다.
그녀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백랑"은 아직 미완성 상태입니다. 그녀가 어떤 인형일지는 현재로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숨길 필요 없다.
울프팩 프로젝트의 내용은 나도 전부 알게 됐으니까. 인형은 처음부터 두 기를 만들 예정이었지?
정면 전투 담당인 "마스티프", 지휘 담당인 "백랑". 그들이 바로 "늑대 무리" 콤비. 안전국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지.
반면에, 나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어.
AN-94는 유리에 손을 대며, 저 안의 소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은 대체 무엇일까? 만들어진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AK-15가 무기라면, 그녀는 그저 쓸 곳이 마땅찮은 총일 뿐이었다.
그리폰의 인형은 아무리 약해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있을 곳이 있다.
그런데,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나, 영원히 그 안에 갇혀있어야 해.
내 창조자는 날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아.
......
박사는 AK-15를 이기지 못하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을 거야.
나는 특별하다고, 남들과 다르다고 여겼건만... 실제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어...
나는 무가치해...
AN-94...
그녀들이야말로... 쇼 박사가, 안전국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형이다.
유리 너머의 "백랑"을 바라보던 AN-94는 분함을 못 이기고 고개를 떨궜다.
나는... 무가치해...
나쟈도 더는 아무 말을 해 주지 못했다.
유리에 댔던 손을 힘주어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AN-94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용히 웅크린 몸을 떨었다.
무가치해...
......
AK-15의 존재로,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실감했다.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고, 가치 있는 점도 없다는 사실을.
쇼 박사도, 국가안전국도, 내게 기대를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내가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이런 나를, 살아있다 할 수 있을까?
내겐 너무 잔혹한 진실이었다.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면, 내가 무가치하다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