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8
MOD 1
...그리폰 기지, 물류 창고 안.
원래 넓은 창고 공간이 잔뜩 쌓인 화물에 비좁은 통로 몇 갈래만 남았다.
형광등불 아래에는 한 명의 소녀가 운반 요정들을 데리고 바쁘게 움직였다.
혼잣말하며 체크리스트를 넘기는 소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고 자세는 구부정해, 딱 봐도 밤을 샜음을 알 수 있었다.
127, 128... 드디어 이걸로 마지막이다.
어떻게 백 개 넘게 남아있는 거지? 우리 회사에 인형이 정말 이렇게 많았나?!
카리나는 뒤돌아 할인행사 로고가 인쇄된 택배상자들을 보며 원념을 온몸에서 뿜어냈다.
3번이나 정리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수령하러 오지 않는 소포가 백 개 넘게 있었고,
소포엔 "받는 주소 그리폰" 말고는 "벨렌코"라는 ID밖에 안 적혀있었다.
하아... 새 택배가 오기 전에 그냥 마무리 짓자.
지휘관님한테도 야근 수당 더 뜯어내고.
카리나는 도망치듯이 창고 문으로 나섰다.
하지만 밖에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쨍쨍한 아침햇살과 검은 색 고급트럭...
그리고 무진장 묵직한 굉음이었다.
히익! 포... 포격!? 결국 패러데우스가 쳐들어온 거야!?
안녕하십니까! 특급 배달 주문을 받아 귀하 창고에 맡깁니다!
식품과 의류품으로 합계 33100리터, 컨테이너로 포장해드렸습니다.
기사 번호 129번, 높은 평점 부탁드리고 좋은 하루 되십시오!
택배기사는 스피커로 유창하게 말만 남기고, 바로 악셀을 밟아 트럭을 몰고 떠났다.
그 자리엔 바퀴 자국 두 줄과 컨테이너의 그림자에 잠긴 카리나만 남았다.
카리나는 한 순간 넋두리가 나갔고, 안색은 창백해졌다가 급격히 붉어지면서, 방송 채널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리폰 인형 모두 주목! 즉시 창고에 와서 우편물 수령해라! 그리고 대체 누가 벨렌코라고 ID 적힌 택배를 백 개 넘게 받고 내버려 둔 거야!
이번에도 안 오면 공간만 차지하는 거 확 던져버린다!
씩씩거리는 카리나의 호통 소리에 기지는 바로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제각자 우편물을 수령해 간 인형들 사이에도 여전히 이 영문 모를 소포의 수령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카리나가 사전 예고 대로 실행하려던 마침, 은색 실루엣이 인형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왔다.
그거, 벨렌코란 이름 예전에 들어봤어.
그럼 네 거겠네, 왜 빨리 안 가져갔어?
받는 주소랑 애매모호한 ID밖에 없으니까.
음... 그건 맞는 말이네.
이러면 까다롭다고.
택배가 수수께끼를 낸다면 쇼핑이 퍼즐게임이 되어버리잖아.
쯧, 암튼 이거 보낸 사람은 분명 추리소설에 과몰입한 힙스터가 틀림 없어!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하나둘이면 몰라, 이렇게나 많이 보냈다는 건 너와 관계가 친밀한 사람이 아닐까?
일단 내용물을 봐야 알지...
XM8은 빠르게 소포를 카트 위에 싣고 창고 문을 나서다 문틈으로 들어오던 TS12와 부딪힐 뻔했다.
앗, 진짜 앞 좀 보고 다니라고...
어라, 카리나, 내가 여기다 실험 키트를 뒀는데 어디 갔어?
내가 월급을 반년 동안 모아서 겨우 산 물건이라고!
아, 그 주황색 상자 네 거였구나.
소포 상자랑 너무 비슷하길래 XM8한테 한꺼번에 줬나봐.
아무튼 사과할게... 숙소에 가서 물어봐 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TS12는 카리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해 창고에서 쏜살같이 나갔다.
아마 그녀가 올해 들은 것 중에서 최악의 소식일 것이다.
...XM8의 숙소 밖.
XM8!
XM8 너 어딨어!
XM8!!!
버럭버럭하는 소리가 문 밖에서 울리더니, 뒤이어 문틀까지 박살낼 기세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아니까 죽은 척 하지 말고!
아우! 진짜 시끄러워! 문 안 잠궜으니까 들어와.
TS12는 바로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왔다.
한편 XM8은 높이 쌓아올린 골판지 상자 위에 앉아있고, 발밑엔 물건이 가장 많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위에는 풀어서 엉망진창 놓은 버클들과 희미하게 "위험물품" 경고 표시가 보였다...
내 실험 키트! 역시 여깄었구나! 그걸 뜯었어!?
호들갑 마, 안에 있는 후레시에 다 네 이름 붙어있는 거 봤어, 그냥 소포 뜯던 중에 살짝 본 것뿐이야.
후레시!? 그건 내 고출력 레이저 절단기라고, 초점만 맞추면 장갑판을 종이짝처럼 자를 수 있다고!
결국 그것도 힘 좀 센 후레시 아니야?
뭐,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이런 창의력 가득한 발명품을 무시할 수 있어!
지난 세기의 루비 레이저로 달을 향해 쏜 밝기도 여전히 현재 최첨단 펄스 탐조등보다 강력한 거 알아 몰라!? 게다가...
야! 너 듣고 있어? 왜 체스말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 너답지 않게 말이야.
이름을 불러도 XM8은 대답 없이 말을 내려놓고 TS12를 한번 훑어보더니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내쉬었다.
너 임마! 태도 좀 안 고칠래? 지금 너 신경써주고 있잖아!
바보가 신경써주는 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하는데?
내가 볼 땐 혼자 고민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 진짜 바보거든?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고, 둘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봤다.
결국 XM8이 더 이상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옆에 쌓인 체스판을 가리키며 설명하기로 했다.
알았어... 확실히 좀 주절거리고 싶은 게 많아, 너 한명하고만 얘기하는 거라면 괜찮겠지.
이거 보여?
어... 뭐, 너 손가락이 참 곱네.
그거 말고, 이 체스판 위에 아주 뚜렷한 알파벳이 두 개 있잖아...
아하!
TS12는 옳거니 알았다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XM8는 다시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이 체스판은 내 예전의 한 친구의 것이야, 이 알파벳도 그 사람의 이름 이니셜이고.
이건 내가 확실히 기억해.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 오래 전에 소식이 툭 끊어져서 오늘 갑자기 이런 소포를 받아서 놀랐어.
실종된 친구, 익숙한 물품, 깨어나는 기억...! 알겠다!
뭘 알았다고?
그런 시나리오 맞지? XM8 너는 사실 평행우주에서 온 인형이고.
모종의 사유로 그리폰에 워프해서 기억을 잃은 거야.
하지만 네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고생 끝에 네 기억을 깨울 물건을 보낸 거야.
그래서 너는 지금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지?
그게 무슨 삼류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야, 너 그런 거 보니?
에이 농담이야 농담.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그 친구라는 사람의 정보를 같이 조사해줄게!
너 진짜 의욕만 그렇게 앞서냐, 이 바보야, 내가 언제 조사하겠다는 말을 했어?
됐네요, XM8, 네 표정과 자세로 뻔히 다 보여.
이 일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면 안심하고 잘 수도 없는 거잖아?
나도 일단 네 친구니까, 네가 곤란해 하는 걸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XM8은 한참 고민하다, 성질마저 샷건 같은 상대를 보고 겨우 결심했다.
좋아, 하지만 서둘러야 해, 휴일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