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8
MOD 2
다음날, 두 인형은 기지 밖의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의외로 TS12이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왔다.
후우, 한시름 놓았네.
응? 그건 뭔 말이야?
네가 최소 2시간은 늦장부리 거나 아예 안 올 줄 알았지.
진짜 너무하다! 내가 인내심이 별로 없긴 해도, 동료를 존중할 준 안다고.
알았어, 네가 보기보다 신용성 있다는 건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도 잘 참아줬으면 좋겠네.
소포에서 보낸 장소를 발견했는데 여기서 꽤 멀리 있는 강가 도시더라.
교통비를 고려하면 장거리 열차밖에 탈 수 없어서 가는 데만 한 20시간은 걸릴 거야...
XM8은 상대방의 표정을 관찰했지만, 뜻밖에도 TS12는 여유만만한 얼굴이었다.
왜? 내가 질색할 것 같았어?
이건 몰랐지? 미리 다 준비해뒀단 말씀!
말하면서 그녀는 가방 안에서 이미 색이 바랜 SF 소설책을 한 묶음 꺼냈다.
이게 있으면 넉넉히 버틸 수 있어!
금새 소음을 울리며, 연세 많은 궤도 차량이 정거장에 멈춰섰다.
안에 승객이 별로 없어 자리를 양보할 필요도 없었다.
덜컹거리는 여정에 아침 하늘은 점점 밤하늘로 바뀌었고, 목적지도 점점 가까워져 지평선에 실루엣을 드러냈다.
무척 젊은 도시였고 특히 한 물류 회사가 눈에 띄었다...
빌딩이 잔뜩이네... 그리폰 주변보다 새로 개발된 지역 같아.
주변 사람들도 물류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있고.
이 도시에 있는 회사인지, 도시가 이 회사 건지 헷갈리겠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아직도 영업 중이네.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인형인 거 아니야?
괜한 생각 마, 할인 행사 때문이겠지.
카리나도 최근 하루 종일 창고 안에서 소포 정리하고 있잖아.
저기가 회사 입구야, 동 트기 전에 조사를 마칠 수 있을지 보자고.
두 인형이 앞의 세련된 자동문을 지나자, 으리으리한 접객 로비가 강렬한 위화감을 뿜었다.
여기가 평소 방문객이 거의 없는 물류 회사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유니온 물류 77호 지점에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두 인형 고객님.
ID를 조회하고 싶은데요, 이거 여기서 보낸 소포죠?
XM8은 운송장 번호와 벨렌코의 ID를 빼곡하게 적은 쪽지를 내밀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죄송합니다, 존재하는 ID인 것은 확실하지만, 신분을 두 분께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저기요! 여기 팻말에 우편물 조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분명 써있잖아요!
그렇습니다만, 규정상 이는 개인 정보 약관에 의거하여, 인간 고객에게만 제공됩니다, 두 분은...
그럼 인형은 자신이 받은 소포 하나 조회 못하는 거예요?
진짜 어이 없네, 님이나 저나 사회의 톱니바퀴인데, 이런 불공정하게 대우하기 있어요?
말조심 바랍니다, 인형 고객님.
인형하고 인간의 차이는 저희가 어쩔 수 없습니다.
아하, 그럼 이 으리으리한 도시에 당신의 위치는 어디쯤인가요?
제 눈에는 유니온 물류가 당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만 보이는데요.
접수원의 업무용 미소가 몇 초간 굳었다.
그리고 TS12는 조용히 XM8의 발을 콱 밟아서, 말이 지나쳤다고 경고했다.
어허, 지금 무슨 일입니까?
분위기가 일촉즉발이었지만, 팀장의 예민한 후각에 포착된 모양이다.
"마침"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접수처 쪽으로 걸어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팀장님!
두 인형 고객님이랑 뭔 말싸움을 하는 겁니까? 잠깐 가서 쉬고 있으세요.
접수원은 조용히 자리를 비키고, 미소가 더욱 견고한 팀장이 자리를 대신했다.
방금 직원의 실례에 대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회사는 인형 고객님에 대한 서비스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고객님께서 자신이 수령인임을 확실히 증명해주실 수만 있다면 조회 서비스를 제공해드립니다, 이건 인간과 인형 모두 동등하게 적용됩니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XM8이 그리폰의 인장이 찍힌 영수증 더미를 꺼내 책상에 찰싹 내리쳤다.
물류팀장은 말없이 또 미묘한 기색으로 영수증을 넘기며 살펴봤다, 아무래도 이번 고객은 그의 상상보다 준비가 철저했나 보다.
저흰 그리폰 안전계약사에서 왔어요.
이건 군수팀에서 끊어준 영수증이고요, 조회하려는 ID는 거기에 있으니까, 충분하죠?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조회해 드리겠습니다.
해당 고객분께선 3년 전 103건 물품을 이곳에 맡기셨고, 이번주 금요일 0시에 귀하 직장에 발송하기로 예약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령 확인 시간은 어제 11시 20분, 문제 있으십니까?
주소요! 보낸 사람 주소는 어디냐고요!
죄송합니다만, 기록이 없습니다, 보낸 분께서 요구하신 사항입니다.
우리 회사는 약관에 따라 해당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예에?!
정말입니다, 확인하시죠.
팀장이 모니터를 돌려 보여줬다, 위에는 잡다한 물류 내역이 있었지만 오직 보낸이의 정보는 은폐 처리되어 있었다.
결국 여기서 단서가 끊어졌다.
알았어요,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세요.
유니온 물류의 생명을 위해 봉사해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팀장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뭔 생명력이요?!
이보다 좋은 표현은 없죠.
TS12... 왜 이 도시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지 알 것 같다...
XM8는 TS12의 옷자락을 끌고 이 찝찝한 분위기의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두 인형은 두서없이 길가 벤치 위에 앉았다.
TS12는 안절부절 못해 먼곳의 운하를 바라봤고, XM8은 계속 소포 안의 체스말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떡할 거야, XM8?
...XM8?
그냥 기지에 돌아갈까? XM8!
조용히 해! 그래, 한 가지 떠올랐어.
근데 좀 시간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설명하긴 기니까, 일단 레벨2 플랫폼에 들어갈 거야.
그동안 내 소체 좀 봐주고 있어!
뭐? 지금? 어떻게?
벤치에 누울 테니까, 내 소체 잘 지키라고, 이상.
알았어?
말해두는데, 난 반 시간 이상 못 기다려.
열차 타고 올 땐 잘 참았잖아? 소설책 보면서 기다리라고!
그거 내 독서량을 꼼꼼하게 계산해서 챙겨온 거거든, 지금 계속 읽으면 돌아가는 길에 읽을 몫이 부족해져.
그런 낡은 책을 볼 바에야 그냥 내가 가면서 이야기를 지어줄게.
그리고 한 가지 알려주자면, 만약 내가 깨어났는데 인형 밀매업자에게 붙잡혀 갔다...
그럼 내 우편함에 발신 예약된 메일이 지휘관에게 24시간 내내 네가 하는 그 "첨단 기술" 실험 리스트를 읽어줄 거야!
XM8 너 치사하게 그딴 수작을 쓰냐!!!
TS12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 속에서 XM8은 자신의 레벨2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가상 데이터가 조용한 세상을 재구성했다.
거긴 썰렁한 보드게임실이었다, 방구석 창가의 체스 테이블 맞은편에 구렛나루가 하얗게 샌 노인이 앉아있었다.
테이블 구석엔 달력이 펼쳐 있지만, 날짜는 수년 이전에 머물러 있었다.
발레리 벨렌코 씨!!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그 목소리를 들은 벨렌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보시 양, 마지막 한 판 대국하자는 약속을 지키러 오신 겁니까?
그는 말하면서 원탁 맞은편의 의자를 당기고, 자신 앞의 이미 먹힌 말들을 옆에 치웠다.
판 위엔 하얀 "폰" 하나와 검은 "킹"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