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8
MOD 3
...몇 년 전.
요즘 주문이 별로 안 들어오네, 역시 체스 파트너가 전망 없는 직업인 걸까...
아님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나? 음차해서 좀 귀엽게 "보시"라고 지은 거 꽤 기발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뭐야, 왜 내 평가 점수가 별 2개 반이 됐어?
최근 28명이나 내가 태도 불량이라고 평가를 남겼네? 대체 뭐라고 적은 거야?
ㅠㅠ, 생긴 건 귀엽던데 입이 겁나 더러워요!
저 보고 여자애랑 대화해 본 적 없지라고 물었어요... 대화해 본 적 있다고요, 정말루!
에잇, 실력 허접한 주제에 자격지심도 없는 건 대체 머리에 나사 몇 개 빠진 거야!
그리고 난 체스 파트너지, 무슨 소개팅 상대가 아니라고 정말!
XM8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댓글창을 빠르게 넘겼다.
그러던 중 수많은 혹평 중에 만점을 매긴 사람이 하나 있었다.
드디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기쁜 마음에 그 댓글을 열어봤다.
보시 쨔응 매도하는 거 너무 커여워! 중독돼서 매일 반복 재생하고 있어요, 엉엉 날 가져요 보시 쨔응!
......
............
XM8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댓글창을 닫고 기분 전환하러 바람쐬러 갈 준비를 했다.
그녀가 옷을 거의 다 입었을 때, 컴퓨터에 격식 차린 우편이 도착했다.
뜻밖에도 그건 채용제안서였다.
XM8는 궁금해 하며 위에 적힌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바로 화상 통화를 켰고, 단정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보시 씨 맞습니까?
예, 저기 저한테 보내신 그거... 채용서 맞나요?
맞습니다, 보시 씨. 제 이름은 발레리 벨렌코라고 합니다.
과거 그랜드 마스터에 입성한 적도 있지만 이젠 실력이 녹슬어서 인터넷 체스 클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온라인 체스에서 틀에 박힌 AI와는 다른 당신의 생기 있는 기풍이 제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요청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만 XM8은 이런 겉치레뿐인 말엔 당연히 시큰둥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오직...
급여는 어떻게 되나요? 자세히 얼마인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을 저희가 홀대할 일은 없습니다.
한 달에... 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벨렌코는 메일을 한 통 더 보냈다.
위에는 그가 제공할 각종 대우, 업무 시간에 계약서까지 상세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대충 훑어보던 XM8은 위의 급여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숫자는 그녀가 지금 버는 월수입의 열 배는 됐다.
과연 그랜드 마스터는 다르구나 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XM8은 급여 숫자만 보고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계약서에 쓱쓱 서명했다.
좀 더 고민하셔도 좋으신데요, 보시 씨.
그건 최소 1년 기간의 장기 계약서입니다, 안의 내용을 다 보시지 않으셨겠죠?
돈만 꼬박꼬박 내주신다면 저야 열심히 체스를 둘 거죠.
나쁜 생각 품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아저씨도 사기 안 치실 거죠?
그러십니까, 그럼 첫 달 월급을 사전에 지불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이번엔 그쪽이 좀 더 고민하시는 게 어때요?
제가 돈 받고 바로 튀면 어쩌려고요?
대국이란 원래부터 룰을 엄격히 따르는 놀이죠, 저는 진정한 플레이어가 이 정도 푼돈에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도 그렇죠?
XM8은 그런 말에 별 감상이 없었다, 그저 편한 생활을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어중간한 태도를 가지고 클럽에 가입했지만 금세 그녀는 거기서 "유명인"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XM8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곳의 손님들은 일반인보다 병사의 비중이 훨씬 높은 것이었다.
저기 사장님, 최근 우리 클럽의 고객층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사람들 다 군인이잖아요!
오히려 이제야 눈치챘다니 제가 놀랐습니다, 보시 양.
에이, 한 번 만나고 영영 안 돌아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제가 일일이 주의할 리가 없잖아요?
이유에는 관심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아니요.
또 전쟁이 터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시 양.
정말 무서운 일이죠. 그거 아십니까, 보통 인간 병사는 시가전에서 평균 15분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원래 전쟁이란 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잖아요, 희한한 일도 아니고.
정말 당신이 부럽군요, 보시 양. 당신은 인형이라 마인드맵만 멀쩡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 죽으면 그대로 끝입니다, 너무나도 연약하죠.
그럼 인형을 더 적극적으로 쓰면 되잖아요, 그러라고 전술인형이 만들어진 거잖아요?
벨렌코는 고개를 젓고 XM8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보시 양, 어떤 곳에서는 사람 목숨이 인형 하나보다 훨씬 저렴하답니다.
그러니, 그 군인분들을 상대할 땐 일부러 져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이겼다는 기분을 가지고 죽음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사장님! 이건 원칙적인 문제예요, 시합에선 페어플레이가 최우선이라고요.
그들도 군인으로서 타인이 거저 주는 승리를 달갑게 받긴 싫어할 거라 생각해요! 그건 오히려 모욕이라고요!
대신... 그들과 다음에 다시 대국할 시간을 약속할 수는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시 양.
정말 그것뿐이라면 확실히 충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비정하게 흘러갔다.
"9월 23일, 앤톤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5번 방문..."
"10월 7일, 겐나디, 발레리, 안드레프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 각자 4번씩 방문..."
"11월 28일, 아르게이, 야코프... 등 12명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 총 23회 방문..."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니기타를 비롯한 33명 모두 오지 않았다, 사장님이 말하기론 소대가 적의 포격을 맞고 전멸했다고 한다."
"그래도 치칼로프는 왔다, 한쪽 다리와 한쪽 눈을 잃었지만."
"1월 18일, 저번 달에 예약을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이 말하기론 전선 대부분 지대 신호가 차단됐다고 한다."
"왜 전장 상황을 그렇게 잘 아는 걸까."
"2월이 됐다, 왠지 클럽에 나랑 사장님 둘밖에 안 남은 것 같다..."
벨렌코는 고객 유동량에 전혀 무관심한 듯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클럽의 분위기는 더 이상 이 난감함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사장님, 저기, 여기 장사 망하는 거 아니에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십니까, 보시 양? 클럽은 항상 영업할 겁니다.
손님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으니까...
사장님, 지금 수입으론 매달 서버 유지비도 안 나오잖아요?
그것쯤 가벼운 지출이랍니다, 신경 쓸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 그런 거면 왜 직원도 저 한 명밖에 안 남은 건데요...
그건 보시 양이 가장 우수한 직원이기 때문이니까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며칠 뒤에 멀리 출장을 다녀와야 할 겁니다.
빨라도 3개월은 걸릴 것 같으니까 그동안 휴업해야 할 것 같군요.
역시나, 사실은 계속 영업하기 힘든 거죠?
걱정 말아요,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클럽 사정도 이러니까 다음 직장을 이미 구해놨다고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보시 양. 저도 이번 출장이 금방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도 다시 체스판 앞에 앉을 수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까, 저 사장님이랑은 제대로 한판 둬본 적이 없네요.
지금 어차피 손님도 없겠다, 저랑 한 판 두실래요?
빠르게 불렛으로 어때요!
그거 좋죠, 보시 양.
그렇게 바로 승낙해도 좋나요?
미리 말해두지만, 아무리 인간이 정교한 사고가 가능하다 해도 불렛이면 반응 시간이 얼마 없다고요.
사장님은 실수할 수 있지만, 저는 안 한다고요.
XM8은 자신만만하게 또 거리낌 없이 흑을 차지했다, 그녀가 체스에서 봐주는 법은 없었다.
반면 벨렌코는 매너있게 상대에게 의자를 당겨줬다, 마치 십여년 전의 현역 시절처럼.
......
폰 D5로.
폰 D5로, 체인지.
쉴새없이 움직이는 체스판 위에 첫 폰 교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판세는 점점 치열해졌다.
서로 주저없이 공세를 밀어붙였다, 원래라면 이건 XM8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겨우 5분이 지나서,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갔고, 심지어는 만회할 수 없게 되었다.
보시 양?
졌어요... 근데 실수한 곳은 없는데...
그렇죠, 보시 양, 확실히 보시 양이 큰 실수를 범하진 않았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대부분 인간 플레이어가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죠.
다만 그게 결코 빈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칫, 고작 한 판 진 거라고요.
제가 패배한 판은 모두 기록해서 정리한다고요, 얼마 안 가서 사장님의 패턴을 완전히 파악할 거예요.
XM8은 홧김에 말을 던졌다, 과연 그녀는 지고 만은 못 사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체면을 되찾을 셈이었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기보를 다 파헤치려면 얼마나 걸릴까?
124번째나?! 사흘만에 또 이런 잔국이라니, 대체 아직 수단이 얼마나 남은 거예요, 사장님!?
진작에 바닥 났답니다, 보시 양...
지금 이건 그저 배열 조합한 무수한 가능성일 뿐입니다.
거짓말! 판마다 모두 마인드맵에 기록했는데, 같은 오프닝에도 전개가 완전히 달랐어요!
인형의 연산력과 인간 두뇌의 차이는 기하급수인데, 어떻게 제가 계속 인간한테 질 수가 있죠?
분명 어딘가 잘못된 거예요!
그건 보시 양이 차가운 기보 알고리즘을 탑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보시 양의 스타일은 기계보단 살아있는 인간에 가까워요.
보시 양과 대국하는 건 불확정성과 도전으로 가득합니다, 이게 경기의 진수죠.
보시 양이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저를 쓰러뜨렸으면 좋겠군요.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알고리즘의 우세를 포기한 AI는 불완전하다고요!
하지만 인간도 이렇게 불완전한 생물입니다, 보시 양.
진작 60년 전에 세계 제일의 인간 플레이어가 AI의 알고리즘에 정면으로 맞서 패배했지만, 보드게임 경기는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승리법이 정해진 공식이 되어 버리면 의미가 없고, 이 세상은 결함을 안고서 극한에 도전하는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죠.
인류가 자동차를 발명했어도 육상 경기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요.
보시 양이 기보 알고리즘을 거부하는 이유도 자신의 소중한 취미를 간직하고 싶어서겠죠?
안 되는 일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고요! 순전히 절 놀려먹고 있어요!
저... 저는 그냥 돈이 아까워서 구독형인 알고리즘을 설치 안 한 거라고요! 그딴 영문 모를 설교 집어치워요!
XM8은 고집부리며 벨렌코의 말을 부정하며 클럽에서 로그아웃했다.
컴퓨터 앞에 돌아온 그녀가 멍하니 앉아있던 중... 통화가 들어왔다.
역시 벨렌코의 번호였다, XM8은 바로 수신 거부를 누르려했지만, 망설인 끝에 받기로 했다.
보시 양, 만약 방금 제가 했던 말이 불쾌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됐네요, 사장님. 저 지금 단단히 화났어요,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진정 못해요.
사과 말고도, 작별 인사를 드리러 전화 걸었습니다, 방금 전엔 말할 기회가 없어서...
그럼 몸조심하시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보시 양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떠나기 전에 내일 보시 양과 마지막으로 대국하고 싶습니다, 안 오셔도 상관 없습니다.
기분 따라서요!
XM8은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지만, 다음날 저녁에 클럽에 돌아왔다.
다만, 그녀가 늦게 온 모양이었다.
클럽은 깨끗하게 정돈됐고, 오직 창가의 의자 한 짝이 당겨져 있고, 그 익숙한 테이블에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XM8가 집어서 보니, 손글씨로 클럽의 로그인 주소와 패스워드, 그리고 말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보시 양.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절박했습니다.]
[보시 양이 오기를 기다리진 못했지만, 클럽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부디 언젠가 다시 테이블 앞에 마주보고 앉아 마지막으로 대국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헛소리쟁이 영감!
XM8은 삐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이 클럽에 손님이 오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좁은 가상 세계는 뭔가 아쉬움이 남아있는 듯 혼자서 유지되어 왔다.
XM8은 그 이후 때때로 이곳에 돌아와 벨렌코가 말했던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겨진 그 의자에 그 익숙한 모습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던 어느 날 그리폰에서 갑자기 택배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