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8
MOD 4
XM8은 벨렌코가 당겨준 의자에 다가갔다, 눈앞의 광경은 몇년 전과 한 치 차이 없이 판박이엿다.
여전히 그 익숙한 클럽, 그리고 가상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사장님?! 몇 년 동안 어디 가신 거예요?
오셨습니까, 보시 양, 벨렌코 보드게임 클럽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하고 뭐고, 저 사장님 이름마저 가물가물했다니까요!
제가 아직 여길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요!
참으로 감격입니다, 보시 양, 먼저 한 판 대국하는 게 어떻습니까?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죠.
벨렌코는 여전히 그 담담한 태도였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말 사이에 옅은 도발이 섞여 있었다.
XM8은 짜증부리며 맞은 편에 앉더니, 체스말을 한 줌 집어 판 위에 내동댕이쳤다.
제 질문에 대답해요!
XM8이 불같이 화를 내지만, 벨렌코는 말없이 말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XM8은 답변이 없자, 다시 손으로 판 위의 말을 다 밀쳐버렸다, 하지만 상대는 아랑곳 않고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열 번을 넘게 반복하더니, 드디어 벨렌코가 순환을 끊고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신가 보군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추가 조건으로 걸고 싶습니다.
보시 양이 한 판만이라도 이긴다면 그동안의 일을 모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요?
약속합니다.
좋아요, 이번엔 그쪽이 상대를 얕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요...
잠깐 몇 분만 준비하고요!
XM8은 홧김의 말을 뱉고, 몰래 TS12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비록 자신만의 실력으론 벨렌코를 쓰러뜨리기 어렵겠지만, 지금 그녀에겐 도우미가 있다.
몇 번 호출음이 울리고, TS12가 소음 속에서 통신을 연결했다.
여보세요, XM8? 일 다 봤어?
뭐 이렇게 시끄러워! 왜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너무 지루해서 널 업고 버스 정거장까지 왔지, 어차피 돌아갈 건데.
아 그래그래... 지금 그건 상관 없으니까.
빨리 나 대신 좀 검색해줘, 발레리 A 벨렌코의 과거 모든 기보가 필요해.
그게 뭔 소리야! 나 보고 가만히 자료를 뒤지라고? 열 나서 토스터가 되어버릴 거야!
애초에 넌 힘만 넘쳐나는 바보라서 달리는 토스터인 건 마찬가지잖아.
잔소리할 시간 없어! 곧 첫째판 시작하니까 빨리!
너 정말! 어휴... 그래, 끝까지 도와주는 셈 치자.
반쯤 강요하는 재촉에 TS12는 이기지 못하고 타협했다.
한편 XM8은 체스판에 전심전념을 집중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기보 알고리즘을 설치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는 인간과 같은 유연한 판단력을 원했고, 더 중요한 것은 도전 정신이었다.
벨렌코의 말대로 이런 건 알고리즘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굉장하군요, 보시 양. 실력과 정신력 모두 눈부시게 상승했군요, 겨우 10분만인데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 하진 않았다고요, 사장님.
예, 참으로 멋진 활약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귀띔해드리는데, 이제 앞으로 몇 수만에 승패가 결정날 텐데 어떻게 두시겠습니까?
벨렌코의 말이 XM8의 경각심을 일으켰다, 뭔가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고, 이제 한끗차이로 상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료 검색을 맡긴 TS12에게선 아직도 대답이 없었다.
XM8은 참지 못하고 다시 통신을 연결해 TS12를 재촉했다.
TS12! 기보 자료는!? 찾았어 못 찾았어!?
검색은 다 했는데, 그게...
뭘 우물쭈물거려? 빨리 말해.
너 지금 눈앞에 그 아저씨 모습이 좀 이상하지 않아?
내 마인드맵이 고장이라도 났을까 봐?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인데!
생김새 말고, 그러니까 어... 행동거지나 성격 같은 거 말이야.
몇 년 사이에 성격이 좀 변할 수도 있겠지... 뭐, 확실히 좀 예전과 다른 느낌이지만.
좀 자세히 설명해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면 그에 대해서 엄청 잘 알 거 아니야?
뭔 뚱딴지같은 질문이야? 벨렌코보다 네가 더 이상해!
아앙? 에이 몰라, 그냥 까놓고 말해줄게!
TS12는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XM8을 강제로 레벨2 플랫폼의 클럽에서 로그아웃시켰다.
아 너 무슨 짓이야!
일단 진정해!
방금 클럽에 접속 유저는 너 하나뿐이었어, 그건 눈치 못 챘어?
그러니까 그 "벨렌코 씨"는 서버 로컬에서 실행 중인 존재였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내 앞에 있던 게... 사전 설정된 AI 프로그램이었다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럼 진짜 벨렌코는 어디 갔는데?
사실 방금 자료를 찾을 때 덤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도 조사해봤어, 우연히 집주소까지 찾아냈고.
그런데 그 동네의 가이드 페이지가...
열사 기념 사이트가 되어 있었어...
TS12는 말하면서 촛불과 비둘기, 그리고 올리브 나뭇가지로 장식된 사이트 화면을 XM8에게 전송했다.
무수한 흑백 영정 사진이 생기를 되찾고 있는 폐허 파노라마 위에 진열되어 있고, 그 중엔 익숙한 모습이 끼어있었다.
다만 여기선 그도 군복을 입고 있었다.
[발레리 A 벨렌코]
[옛날의 그랜드 마스터, 오늘의 충열한 전사]
[고향을 지키는 싸움에서 역적과 군벌에 용맹히 맞써싸워]
[진지를 사흘 동안 사수한 끝에 목숨을 바쳤다]
[그의 용기를 기억하는 이가 없어도, 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록되리]
XM8, 속상한 이야기인 건 알지만, 이 사람이 진짜 벨렌코 씨야.
네가 안에서 만난 건 그저 그가 생전에 설정해놓은 자율 프로그램일 뿐이고.
모든 낡은 대국 AI처럼 대국이 끝나면 포맷될 거야.
마지막으로 실행 중인 AI가 사라지면 서버도 닫힐 거고.
TS12에 XM8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로 다시 클럽에 접속했다.
하지만 벨레노는 여전히 체스판을 정리하고 있었고, 방문자를 보자 다시 예절있게 고개를 들었다.
다만 이제 XM8에 눈에 그의 동작은 매우 뻣뻣하게 보였다.
오셨습니까, 보시 양, 벨렌코 보드게임 클럽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대국에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굉장하군요.
다만 한 가지 귀띔해드리는데, 이제 앞으로 몇 수만에 승패가 결정날 텐데 어떻게 두시겠습니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이 귀를 바늘처럼 찔렀다.
받아들이지 못한 XM8은 또 클럽에서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반복하며, 꼭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했다.
오셨습니까, 보시 양, 벨렌코 보드게임 클럽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셨습니까, 보시 양, 벨렌코 보드게임 클럽에...
오셨습니까, 보시 양...
아니, 사장님, 예전엔 인사가 이렇게 단조롭지 않았잖아요!
오셨습니까, 보시 양, 벨렌코 보드게임 클럽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장님...
XM8은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 바라는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벨렌코"는 유령이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실루엣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옛적 친구와의 그리움이 아니라, 아쉬움에 마침표를 찍을 작별 인사다...
기보 자료 압축파일로 만들어놨어, 보내줘?
아니... 이번 판은 약속했던 마지막 대국이야.
역시 나 스스로 그의 소망을 마칠게.
XM8은 심호흡을 하고, 벨렌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수단은 진작에 바닥 났답니다, 지금 이건 그저 배열 조합한 무수한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 이유는 승리법이 정해진 공식이 되어 버리면 의미가 없고, 인류는 극한에 도전하는 재미를 즐기죠.
불확정성과 수싸움이 가득한 것이야말로 경기의 즐거움입니다.
그렇다, XM8이 상대하는 것은 벨렌코가 설정해둔 프로그램에 불과하고, 그는 이미 모든 수를 전수했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더욱 외부의 도움을 빌려서는 안 된다, 프로그램은 오직 배열 조합밖에 못하기 때문에.
벨렌코가 보길 원하는 "극한"이란 것도 결국엔 깊은 추리 사고 끝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는 건 지금 눈앞의 잔국도 예전에 있었던 것의 변형일 뿐이란 것이다.
그 점을 깨달은 XM8은 바로 기보를 되짚으며, 그 기시감을 다시 분석했다.
사장님의 캐슬링을 끌어내면 다섯 수 후 제가 이기고, 그러지 않을 경우 네 수 후에 제가 져요...
훌륭합니다, 보시 양, 그 수를 계산하는데 단 57초 걸렸군요.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장님 본인이라면 분명 저 보고 이기라고 하겠죠...
그럼 그리 하십시오, 보시 양. 정말 멋진 승부였습니다.
"벨렌코"는 기립박수했다, 마치 자신의 마지막 염원을 이루어 기뻐하는 것 같았다.
혹은 XM8이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흡족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장님, 다음 주말에, 한 판 더 두죠...
더할 나위가 없죠, 보시 양.
XM8은 상대와 이뤄질 수 없는 다음을 기약했다, 과거 그녀가 전선에 향하는 전사들과 약속했던 것처럼.
말을 판에 내려놓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것으로 수많은 방문객들이 거쳐간 좁은 공간의 모든 아쉬움이 풀렸다.
벨렌코의 끊임없는 박수 속에서, 포맷은 빠르게 진행되어, 서버는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건...?
클럽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진 암흑 공간에 작은 불빛이 남아있었다.
XM8가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짧은 녹음 캐시 메모리였다, XM8은 망설이지도 않고 음성 파일을 받아 재생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저는 발레리 알렉산드로비치 벨렌코입니다.
아마 이것이 제 마지막 녹음이겠죠, 이걸... 보시 양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말하면서 벨렌코는 가래 섞인 쓴웃음 소리를 냈고,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포성이 울렸다.
저는 한때 끝없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결국 모두를 따라잡았습니다.
제가 사지에 나서지 않으면, 무고한 민간인들이 성하지 못한 무기를 쥐고 흉악한 살인마들과 도적들에게 맞서야 하게 되겠죠.
저는 전장에 나서는 것을 영광이나 위대함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버림받은 희생양일 뿐입니다.
결국 희생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서는 것은, 추하게 구걸하고 울고불며 자비를 애원한 끝에 어쩔 수 없이 발악하는 것입니다.
이는 절망과 고독으로 점철된 운명으로 정해진 재난일 뿐이죠.
이게 제발 우스꽝스러운 영웅활극이길 바라고, 제게 마침 현실을 뒤집을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체스판의 폰이 물러서지 않고 끝에 도달해 퀸으로 승격하는 것처럼.
캐슬링한 룩이 모든 공격을 견디면서 우뚝 서있는 것처럼.
허나 현실이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사치를 베풀어주지 않습니다.
당신만은 제외하고요, 보시 양. 원래 당신은 우리의 전쟁과 전혀 인연이 없고, 당신과의 약속은 사지에 향하는 전사들에게 얼마 없는 햇빛이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대국 약속을 몇 년이나 미루게 된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생활을 갑자기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이 수많은 희망을 담은 클럽이 평화의 시대에 문을 닫길 바랐습니다.
부디 그 무렵엔 봄바람이 죽은 이의 눈물을 거두어주고, 더는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날카로운 노이즈가 울리면서 재생이 끝나, 마침내 완전한 정적이 도래했다.
XM8은 묵묵히 녹음 파일을 저장하고 레벨2 플랫폼에서 로그아웃했다.
그녀가 눈을 뜨자, TS12의 걱정과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이 코앞에서 마중해줬다.
XM8! 너 그대로 잘못된 줄 알았잖아!
그것 참 안 됐네, 당분간 그럴 생각은 없거든.
TS12의 얼굴에 XM8의 무거운 심정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유난히도 차분한 기분이었다.
아 맞다... 오늘 많이 신세졌어, TS12.
으엑... 느끼하게 왜 그래, 성질 안 부리니까 이상하다 야!
이게 진짜...
빨리 그리폰에 돌아가기나 하자고, 내일 또 출근해야니까.
그래, 그래서 네가 소체를 나한테 내던진 동안 정거장까지 왔지.
그리고, 나도 개조 신청하려고.
뭐라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진 모르겠지만...
근데 갑자기 개조를 신청하면 엄청 엄격한 심사를 뚫어야 하는 거 알지?
나라도 가끔은 내가 프로모션할 수 있을지 시도해 보고 싶다고...
그리고, 누구 몫을 봐서도, 반드시, 꼭 통과하고 말 거야!
...3개월 후.
이걸로 체크메이트...
XM8, 멈춰! 또 훈련용 과녁을 망가뜨렸잖아!
미안, 꼬맹이 네 화력이 너무 약해서 그런 거 아니야?
뭐야!? 그러면 더미 소체를 동원할 거야!
내가 개조할 때 너한테 시달린 거 곱빼기로 갚아주겠어!
꼬맹이야, 0의 곱빼기는 여전히 0이라고...
뭐, 상관 없어...
이번엔 내가 지켜줄 거니까,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