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EMK1
MOD 4
2064년, S09 구역 그리폰 기지의 카페.
시끌벅적하던 인형들은 마침내 만족하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카페를 떠났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땐, 카페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달그락.
잔을 치우는 스프링필드는 드물게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그리폰에서 리엔필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스프링필드는 리엔필드에게 차를 한 잔 새로 따라 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검은 숲 작전"의 그 인형이 다름아닌 당신이었다니.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복잡한 표정이군요.
아니, 단순해. 그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데도 누가, 왜 그 일을 다시 조명했는지가.
덕분에 당신의 누명이 벗겨졌잖아요, 기쁜 일 아닌가요?
하늘과 지휘관에게 맹세컨대 그날 나는 폭주하지 않았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도 사실이야.
재심받을 필요도 없건만...
리엔필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스프링필드는 계속 말을 주저하다, 리엔필드가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그 훈장이에요?
......응.
리엔필드가 손을 펼쳐, 다시 훈장을 보였다.
한 프랑크 빌라를 떠나면서, 난 이걸 찰리에게 주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본성은 선한 아이임을 알았어.
하지만 난 교사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적어도...
적어도, 그가 가장 혐오하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당신은...
스프링필드는 또 머뭇거렸다.
...당신은 계속 자책하고 있었던 건가요?
아니, 자책이 아니야. 아쉬웠다.
찰리는 어린아이였다. 여러모로 미숙했지.
하지만 그 아이의 비난은 마땅했다. 다 맞는 말이었어.
난 그때 처벌을 받고 소체와 코어가 폐기당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IOP는 나를 기술 연구 목적이란 명목으로 회수했어.
그리고 결국 다른 형식으로 전장에 다시 서게 됐고, 지금에 이르렀지.
10년이 넘는 세월을 엄청 찰나인 것처럼 말하네요.
그것만으로도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염치없이 또 개조를 받는 것은...
나 스스로 용납이 안 돼.
......
...바쁠 텐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리엔필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지휘관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역시 거절해야겠다.
그러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훈장을 주머니에 넣은 리엔필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엔필드 씨.
그런데, 출입구 문의 손잡이에 손을 뻗는 리엔필드를 스프링필드가 갑자기 불러 세웠다.
당신에게 부쳐진 물건, 정말 그 훈장뿐인가요?
......
그걸 어떻게...?
역시 더 있었군요.
"검은 숲 작전"은 모든 인형들에게 아주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에겐 아무래도 좋은 잠깐의 화젯거리였죠.
이제와서 그날의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다시 들여다보고, 또 당신의 누명을 벗겨 준 사람이 있다곤 생각되지 않아요.
............
잠시 침묵하던 리엔필드는 여전히 망설이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카운터 앞에 돌아왔다.
스프링필드도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과자도 아직 좀 남았는데요.
......
리엔필드는 천천히 고개를 젓곤 가방에서 아직 뜯지 않은 작은 소포를 꺼냈다.
...안 뜯어봤네요?
이걸 보낸 사람에게 들었다.
이건 "찰리 루시우스"의 유품이야.
......
작은 소포는 카운터 위에 살며시 놓였다.
그가 훈장을 줘서 내게 고마워했기를 기대하진 않아.
하지만 그가 당신의 누명을 벗기고 유품도 당신에게 보냈잖아요.
그래서 이걸 열기가 싫어.
난 과거에게 쫓기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과거가 가장 미스테리한 방식으로 이렇게 내 앞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런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미스테리... 난 싫어.
스프링필드는 리엔필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식칼을 빼들어 소포의 껍데기를 주욱 그어 칼집을 냈다.
?!
제가 아는 리엔필드 씨는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피하려 하지 않아요.
자아, 진실을 밝혀내야죠?
하하하... 역시 스프링필드야.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리엔필드는 하는 수 없이 스프링필드의 "권유"를 따라 소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두꺼운 편지 봉투와 정교한 상자가 들어있었다.
리엔필드는 미간을 좁히며 편지 봉투를 살펴보고, 정교한 작은 상자를 먼저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훈장이네요?
그것이 어떤 훈장인지는 옆에서 지켜보던 스프링필드도 한눈에 알아봤다.
리엔필드는 그 새것인 용기병 훈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편지 봉투를 내려놓고 자신의 낡은 훈장을 꺼내 들었다.
똑같은 두 훈장이, 양손에 하나씩.
오직 한쪽에만 역력한 빛바랜 세월의 흔적이 두 훈장의 차이점이었다.
......설마.
리엔필드가 황급히 훈장을 내려놓고 밀봉된 두꺼운 편지 봉투를 열었다.
......!
더없이 익숙한 필기체였다.
......
2051년 X월 X일,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의 한 프랑크 빌라.
리엔필드가 가정교사로 부임한 지 갓 1주일이 되었을 무렵.
타앙!
팅.
능숙한 솜씨로 탄피를 배출하고, 찰리는 다시 총구를 높이 들어 예리한 눈빛으로 먼 곳의 과녁을 바라봤다.
훌륭합니다.
저리 꺼져, 수업이라면 찰거머리가 벌써 셋이나 있잖아.
항상 붙어다니더니 오늘은 어디다 떼어놓고 왔어?
당신도 제 학생입니다만.
몰라, 암튼 꺼지라고.
지금까지 관찰했습니다, 찰리 도련님.
보기보다 훨씬 재능과 끈기가 있더군요.
만난 지 이제 겨우 1주일이긴 합니다만, 당신에게서 확실한 전사의 소질이 보입니다.
아부해봤자거든?
왜 지도를 받을 생각이 없는지도 이해했습니다.
흥...
찰리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비결 같은 거 있음 어디 한번 말해보던가.
전사의 길에 지름길이란 없습니다.
매일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것뿐이죠.
......
찰리는 눈알을 굴렸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 아버지가 날 안 찾던데...
설마, 내가 수업 빠진다고 말 안 한 거야?
그럴 필요가 없다 생각했으니까요.
인형 따위가 아양 떨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거든?
아니오,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확고한 목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간섭하기보단,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단했습니다.
남 비위나 맞추는 건 겁쟁이들 짓이지.
......
잘못한 거 없으면 고개 숙여선 안 돼. 자꾸 그러면 아무한테도 존중 못 받는다고.
특히 전쟁에선 말이야.
전쟁에 옳고 그름이란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수업하면서 애들한테 의로운 마음이네 올바른 마음가짐이네 하는데?
......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 인정하지는 못하네.
찰리가 몸을 돌려, 리엔필드에게 실망한 얼굴을 보였다.
너는 딴 사람들이랑은 다를 줄 알았는데.
리엔필드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리엔필드가 허둥지둥 편지 봉투를 마저 열었다.
그녀에게 없는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당장 목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건... 용기병연대의 봉인...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찰리는 훈장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결국 군에 입대한 것이었다.
......!
리엔필드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손글씨는, 많이 성숙해지긴 했어도 옛 습관은 여전했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 볼 때쯤이면,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죠.
폼나는 시작 문구 아닙니까? 이거 꼭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써보네요.
이 문구를 쓸 땐 과연 어떤 기분일까 자주 상상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아무런 느낌도 안 드니 김새네요 이거.
아무튼 딴소리는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사과드립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리고 유치함으로 당신을 오해하고 박해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제 삶에서 당신보다... 아니, 당신만큼 뛰어난 스승도 다신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후회했습니다. 마지막이 그런 식이었어서.
그때 제가 말했다시피, 제 어머니는 3차 대전에 휘말려 돌아가셨습니다.
군대와는 연조차 없는, 평범하고 다정한 여성이셨죠.
그저, 마침 계셨던 그곳에서 발발한 분쟁에 휘말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쟁을 증오했습니다. 이유 없이 사람의 목숨을 갈아 넣는 전쟁을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을, 당신을 더더욱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선생님은 남들과 달랐습니다. 제가 바라던 세상이 선생님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은 건 너무 늦은 뒤였습니다.
그래도 그걸 증명하고자, 저는 입대를 선택했습니다.
꽤나 고심 끝에 주신 호의였을 텐데 죄송해요, 징병 면제권은 조던한테 양보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비쩍 말라가지고 전선에 나가면 하루도 못 버틸 게 뻔해서 말이죠.
제가 입대를 결정한 이유는, 저 혼자 몸을 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경험을 직접 보고 듣고 겪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을 겁쟁이라 매도했었죠? 그땐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랬어요.
분명 올바른 일을 했는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했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서, 당신과 같은 입장이 되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것만큼은 사과 안 하려고요.
선생님,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올바른 일을 하는 의인이지만 겁쟁이예요.
그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겁쟁이지만,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훈장을 받은 다음 직접 찾아뵙기로요.
하지만 죄송하게도 무리일 것 같네요.
지금 읽고 계시다시피, 저는 곧 올바르고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칠 거라서요.
부디 이 편지가 선생님께 무사히 도착하길 기원하면서,
당신의 옛 학생이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숭고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요 스승님, 리엔필드 선생님,
이제 그만 그 검은 숲에서 나오십시오.
......
......
뭐라고 쓰여있어요?
......시시하지만, 내겐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리엔필드는 편지를 접고 눈을 감았다. 눈앞에 또다시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끝이 안 보이는 검은 숲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야의 끝에서 내린 한 줄기 빛이 서서히 밝아져, 검던 세상을 환히 밝혔다.
그러자 그리운 빌라가 보였고, 그 너머로 그녀가 몸바쳐 지켜낸 기지, 그녀의 집이 보였다.
내 이름은 리엔필드.
1896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군의 제식 무장이었던 소총에게서 비롯된 이름이다.
나는 왕실 제6용기병연대 소속의 용기병으로서, 제67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3차 세계대전 동안, 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위해 싸워 왔고, 싸우고 있으며, 싸워나갈 것이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