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치 아카데미
F1
핼러윈으로부터 며칠 전...
인형 숙소.
핼러윈이 머지 않아, SAT8은 괴담 릴레이 모임의 준비를 위해 며칠 내내 동분서주 중이었다.
한밤중 SAT8이 휴식을 취하러 숙소에 돌아오니, F1이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 F1? 아직도 안 자?
으응... 어?
으아아! 의식의 흐름이 끊어져 버렸잖아!
어휴... 데드라인이 다가올 수록 시상이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니까...
데드라인? 그게 뭐야? 뭔가 위험한 물건 같은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그 모임 활동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 며칠 뒤에 그거 하는 거 맞지?
거의 다 됐어! 요청한 장소랑 필요한 물품들도 다 준비됐으니까, 이제 핼러윈이 오기만 기다리면 돼!
하지만, 지휘관님께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우리 지휘관 같은 사람이라면... 벌써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서 모임 도중에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확실히...
그 상황에서 나타나신다면... 깜짝 놀랄 것 같은데...
헤헤, 본의 아니게 모두를 놀래켜서 왕창 얻어맞으면 그건 참 싫은 경험이겠지? 지휘관의 무운을 비나이다비나이다~
......
핼러윈 전야.
어느 낡은 창고.
F1은 낡은 창고 안의 단말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역시 낡은 창고구나... 이 고물 설비들은 대체 몇 년이나 묵은 거야?
진작에 알았다면 시집을 좀 더 간결하게 편성하는 건데. 지금 다 녹음하려니 너무 귀찮네...
그건 그렇고... SAT8이랑 다른 애들의 괴담 릴레이가 끝날 때까지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냥 직접 가서 불러오자.
평소에 지휘관한테 좋은 선물도 못 줬으니...
어라? 창고 안에 사람이 있나? 거기 누구 있어?
아차, 지휘관인가!? 여기서 들키면 서프라이즈가 아니게 되잖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 됐다! 빨리 꺼버리자...
지휘관이 낡은 창고에 들어왔다.
아, F1이었구나.
이렇게 낡은 창고에서 뭐 하는 거니? 설마, 나 몰래 나쁜 장난이라도 꾸미고 있던 건 아니겠지?
휴우우... 안 들켰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신지?
난 그냥 새로운 소재를 찾으러 온 것뿐이야!
맞다, F1은 항상 시를 쓰지. 나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어...
크흠... 그러나저러나, 내일이 바로 핼러윈인데, F1은 따로 옷 준비 안 했어?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건 싫으니까...
몇 시간 후.
모임 활동 중 일어난 돌발사태로, F1은 전자 공간에 빠졌다.
아무래도 좋다고는 했지만...
결국엔 차려입었잖아!
나도 너무 지조가 없다니깐!
이런 거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 음유시인은 주변 환경 같은 것에 얽매여선 안 된다고!
고민하면서 F1은 홀로 전자 공간 속에서 걸어 다녔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괴담 릴레이를 하다가 SAT8이 또 놀라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려던 찰나였는데!
그다음에... 하얀 빛이 나타나서, 모두 무슨 토끼굴 속으로 빨려들기라도 한 건가?
F1은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 말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아무튼,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자.
5분 후.
그래도 여기는 그리폰 기지 내부겠지...
흐음... 아니 잠깐, 설마 여기 전자 공간인가?
F1은 자신의 통신기를 확인했다. 약간의 잡음 이외에는 정상이었다.
아 아, 아무도 안 들리나! 여기는 F1! 현재 위치는... 음, 어느 숲속.
내 말이 들린다면, 모두와 합류할 수 있도록 지시를 바란다, 이상!
F1은 통신기에 대고 목청껏 외친 후,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자전 경험은 많지 않은데,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하지만, 전자전 훈련할 땐 풍경이 다 비슷비슷한데... 여긴 경치가 꽤 좋은걸?
F1은 전자 공간 속에서, 의외로 다양하면서도 희한한 경치를 보았다.
숲과 빌딩이 공존하고, 전장의 폐허 바로 옆에선 전자의 파도가 출렁였다.
심지어는 해변까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뒤죽박죽인걸... 도시와 숲, 그리고 해변까지 한자리에 있다니.
F1이 전자 공간의 해괴한 풍경에 빠져 있을 무렵, 갑자기 통신기의 신호음이 울렸다.
F1이 부랴부랴 통신기를 켜니, 두 사람의 영상이 동시에 나왔다.
일단 진정하고, 거기서 꼼짝 말고 통신 유지하고 있어.
다른 애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야 하니까.
그래, 지금은 너한테 맡길 수밖에 없네... 꼭 모두를 찾아내야 해.
삐익.
어...? 잠깐!
뭐야... 이걸로 통신 끝이야?
설마 저마다 다른 전자 공간으로 흩어졌다는 건가?
일단 TAC과 MDR은 무사한 모양이네. 지금 나나 다른 사람들을 찾는 중이겠지...
흐음... 전자 공간이라서, 데이터와 전파가 서로에게 간섭받기 쉬우니까 이렇게 된 걸까?
음! 아무렴! 전자 공간이니까! 이런 경치도, 느닷없이 통신에 끼어드는 것도, 다 전자 공간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럼 걱정할 게 뭐 있어? 차라리 좋은 경험이라 치고, 새로운 시를 위한 영감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자!
이렇게 생각하자, F1은 다시 기운이 생겼다. 전술 패드를 손에 쥐고, 빗자루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좋구만! 전자 공간이라서 장식일 뿐인 빗자루도 타고 날 수 있다니 말이야!
빗자루가~ 바람을 헤치고~ 전자 공간을 건너면~☆
음음! 좋아 좋아! 경치가 정말 희한하네!
F1이 한참 경치를 감상하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으음?
왠지 어딘가...
잊혀진 걸까? 잊혀진 걸까?
누, 누구야!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작지만, 매우 선명한 목소리였다.
F1은 빗자루를 멈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잊혀져 버렸네. 잊혀져 버렸네.
너는... 너흰 누구야?
우리는 전자 세계의 조각.
우리는 풍경의 조각. 이 시들의 조각.
잊혀진 걸까? 시의 정령은 잊혀진 걸까?
(계속 뭐가 잊혀졌다니... 무슨 중요한 사람에게 잊혀졌다는 건가?)
나뭇가지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작고, 훅하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있었다.
잊어버렸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네.
(누구를 기다리는 건가...)
(하지만 이 공간에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은데?)
으음... 이렇게 하자! 여기, 너희에게 이 핼러윈 사탕을 주지. 원래는 모임 활동이 끝나면 지휘관한테 줄 거였는데, 어차피 잔뜩 있으니 너희에게도 나눠줄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기다리다 배가 고파지면 그것만큼 곤란한 것도 없거든!
난 계속 소재를 찾으러 가볼게! 안녕, 정령 친구들!
......
F1은 정령들과 헤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은 점점 F1의 마음을 뒤덮었다.
왠지...
F1이 숲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는 것들...
F1이 전장의 폐허 앞에 멈춰 섰다.
전부 다...
F1이 해변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밟으며, 거짓처럼 파란 전자 공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죄다 내가 봤던 풍경들이잖아!
이야, 정말 그리운 풍경들이네. 설마 내가 이렇게나 많은 전투를 겪고, 수많은 감정들을 느꼈다니...
흐음... 잊어버렸다...? 이 풍경들을 잊어버렸다는 뜻인가...
기억 안 나니? 아직도 기억이 안 나니?
작은 정령들은 어느샌가 다시 F1의 곁에 모여 있었다.
정말 실망이야... 다 본 적이 있는 장면들이었잖아? 시시해...
이래서 어떻게 새로운 시를 쓰겠어!
왜 시를 쓰는데?
왜 시를 쓰는 거야?
시를 사랑하니까!
비록 내가 겉보기엔 작아 보여도, 어엿한 음유시인이라고!
...다들 내 시를 잘 읽지도 않고, 지휘관에게도 보여준 적 없지만.
그러면 그러면.
왜 모험을 하는데?
그야 물론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서지!
...어, 어라?
기억이 나니? 이제 기억이 나니?
그랬구나... 시뿐만이 아니라, 나는 모험도 좋아해서 모험하는 거였어...
내가 그 사실을 잊었다고 알려주려 했던 거야?
기억이 나니? 이제 기억이 나니?
F1은 무릎을 껴안고, 해변에 웅크려 앉았다.
생각해보니... 꽤 오랫동안, 그저 새로운 창작만을 위해 모험을 했네...
하지만, 사실은 창작만큼 모험도 좋아해서, 임무에 나갈 때마다 엄청 흥분됐어!
전부 새롭고 소중한 경험이니까!
나는 시인일 뿐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탐험가이기도 하니까.
떠올랐구나♪
전부 떠올랐구나♪
나는, 기지의 다른 엘리트 인형들처럼, 허구한 날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 그런 건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으음... 나는 그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한 번씩 겪어보고, 다 글로 써보고 싶어. 어쩌면 언젠가 내 시를 읽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 두 가지가, 핼러윈에는 분장해야만 하는 것처럼 뻔해지는 건 싫어.
창작은 즐거워♪
모험도 즐거워♪
너희 말이 맞아...
여태까지 깜빡 잊고 있었어. 응! 정말 고마워! 갑자기 사고와 시야가 뻥 뚫린 느낌이야!
역시 그랬어.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과 세상을 알고 싶다는 감정이야말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들이야!
F1은 기뻐하며 정령들에게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때 전자 공간의 하늘에서 눈부신 광선이 내려왔다.
돌아갈 거니? 그만 돌아갈 때네.
으음? 아무래도 동료들이 날 데리러 온 모양이네...
아무튼, 정말 값진 경험이었어. 여긴 분명, 나의 시집이 형상화된 모습이겠지.
비록 익숙한 풍경이지만, 내게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럼 이젠 정말로 갈게! 잘 있어, 정령 친구들!
사건 끝나고, 깊은 밤.
그리폰 카페.
결국 올해의 핼러윈에도, 저번 때와 똑같이 나는 지친 몸을 끌고 카페에 들어섰다.
이거 무슨 저주라도 걸린 건가... 핼러윈 전날 밤이면 꼭 이상한 일이 일어나니 원...
...음? F1이니?
저 멀리서 F1이 카운터에 앉아 무언가 끄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F1은 내가 온 것을 보자, 손을 흔들곤 옆자리의 의자를 툭툭 쳤다.
이번 핼러윈에 F1은 마녀로 분장했구나.
저번에 아무래도 좋다고 하지 않았니?
흥, 결국엔 놀리러 온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아 참, F1은 평소에 어떤 시를 쓰는 거야?
네가 시를 쓴다는 건 알지만, 나도 중간중간 몇 마디밖에 못 들어봐서.
으음... 그러고 보니, 오늘 밤 모처럼 지휘관에게도 내 시를 천천히 감상시켜줄 기회가 있었는데 말이지.
오? 정말로?
... 잠깐만, "있었는데"라고?
응.
그러니까, 지휘관은 아쉽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단 말씀.
아니, 난 그런 기회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아이고 아까워라!
F1은 입을 가리고 몰래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F1은 아쉽진 않아?
응? 내가 아쉽다니, 왜?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창작이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야?
물론, 내 시를 모두가 감상해주면 좋겠지.
그렇지? 그렇지? 그럼 언제든지 내게 보여줘도 괜찮단다!
흐~응... 싫. 어.
이런 일엔 적어도 순서라는 게 있다고.
그리고, 오늘 지휘관에게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쉽지는 않아. 어차피 나~중에 또 이런 화려하고 반짝반짝하고 어쩌다 한 번인 기회가 또 올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니, F1은 참 어른스럽구나.
기지의 다른 애들이었다면, 기회를 놓쳤다고 막 울고불고 했을 텐데...
그건 아마도... 뭐든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럴 거야.
응?
오늘, 답을 찾았거든. 나도 모르게 여태껏 나를 고민하게 만들던 문제의 해답을 말이야.
그건 참 잘된 일이구나.
그렇지?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시를 쓸 때의 감정이었어. 지휘관과 나누지 못해도, 확실하게 존재하던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형식으로든 계속해서 존재하리란 걸 깨달았어... 나는 그 순간들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런 말을 들으니, 오늘은 정말 재밌고도 중요한 경험을 한 것 같구나.
아무렴! 핼러윈에는 무슨 일이든 있는 법이지!
그래... 핼러윈이니까...
......
결국, 핼러윈이 끝날 때까지 F1은 자신이 쓴 시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 있을 기회"가 또 올 거라 생각하니, 덕분에 무척 기대된다.
그 후로 F1의 독립심은 더욱 강해졌고, 매일 즐거워 보이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저 단순히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뭐,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