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푸른 성탄절
FN57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폰 기지는 이미 크리스마스로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한편, 이번 행사의 주최 대리를 맡은 FN57은 카페에서 자신만의 화사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록 행사 주최자에게 일이 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대리로서, 이번 행사의 임무 분담은 다 마쳤어.
FN57은 크리스마스 테마로 화려하게 장식된 카페를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럽게 파티 주최 임무를 떠맡게 됐지만, 그런 예상 밖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도 나라서 가능한 거겠지.
조금 있다가 임무 진행 상태 확인하고, 시간 여유 있게 주문 제작한 드레스 수령하러 가고...
그리고 지휘관을 초대해서, 단둘이서 아름다운 Holy Night를 만끽하는 거야.
후후후... 기필코 지휘관이 날 다시 보게 만들겠어.
FN57은 상쾌한 기분으로 카페를 나섰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그날이, 다른 인형들의 말썽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
............
아니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이렇게 간단한 임무 하나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쇼핑을 보냈더니 상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지 않나, 보초를 세워놨더니 다 까먹고 어디론가 가버리질 않나... 다들 마인드맵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 뭐야...
FN57은 한숨을 내쉬며 숙소로 향했다.
그래, 모두 나처럼 훌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임무에 이 정도의 골칫거리는 정상... 이려나?
일단, 숙소에서 생각을 정리하자...
FN57이 숙소 앞에 도착하자, 때마침 크리스마스 복장을 입은 FAL 안에서 나왔다.
아, 57이구나. 안녕.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지휘관에게 데이트 신청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니?
난 지금 일하느라 바쁘거든? 누구누구 씨처럼 한가하지 않아.
그런데... 기분이 꽤 좋아 보이네?
그래, 지금 지휘관을 초대하러 가는 길이야.
지휘관과 함께, 아름다운 Holy Night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어?
호오...
꽤 자신 있나 본데?
엘리트 인형이니까, 이 정도 자신감은 기본이지. 안 그래?
내가 한창 바쁠 때 새치기나 하다니, 너 갈수록 교활해진다?
사돈 남 말 하시네.
너도 지휘관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그런 귀찮은 임무를 떠맡은 거잖아?
FAL과 FN57의 서로를 향한 그 살벌한 미소 때문에,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삐익.
통신기의 착신음이 정적을 깼다.
FP6이야?
사고가 났다고? 아...
응, 알았어. 이따가 사람 보낼 테니까, 그 일은 걔한테 맡겨.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나 보네.
그럼 나 먼저 갈 테니까 수고해.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흥. 어젯밤에 눈이 많이 왔으니까, 길 가다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기나 해.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FAL이 떠났다.
하필이면 이럴 때 FAL이 도둑고양이 짓을 하다니... 제길...
빨리 일을 끝내고 드레스를 가지러 가야겠어.
난 엘리트니까 문제없어... 오늘 밤을 차지하는 건 바로 나야!
......
............
크리스마스 이브의 난리통 속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ART556이 일으킨 소동을 처리한 FN57은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옷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째서... 어째서 일이 이렇게 많은 거야...
어머, 돌아왔구나.
어? 너 왜 여기 있어?
그야 물론, Holy Night를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 중이지.
저녁에 지휘관한테 가려고?
글쎄, 그건 아직 모르지.
그나저나, 너도 지휘관을 초대한댔지? 지휘관이 뭐래?
오늘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휘관을 보러 갈 틈이 없었어...
그래? 그것참 안타깝네...
그리고, 왜 아직도 그 옷차림이야? 주문 제작했다는 드레스는?
계속 일하느라, 그걸 받으러 갈 틈도 없었어...
정말 딱하게 됐구나... 동정심이 생길 정도야.
......
불공평해.
응? 불공평하다니, 뭐가?
G36을 대신해서 내가 모든 계획을 다 짜놨는데, 다른 애들이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구.
다른 사람들은 다들 크리스마스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마당에, 나 혼자 저 얼간이들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고...
너무 불공평해!
그건 네 욕심이 지나친 거야, 57.
모두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싶다면, 보답을 바라면 안 되지.
혼자서 즐겁게 보내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면 안 돼.
그래도... 엘리트 인형이 노력해서 그 두 가지 전부 이루고 싶어 하는 게 뭐가 잘못인데?
아직도 모르겠니? 지금 네 행동과 바람은 서로 모순됐어.
넌 겉보기엔 팔방미인 같지만, 본질은 G36이랑 마찬가지로 책임감만 너무 앞서는 녀석이야.
뭐, G36은 적어도 그런 책임을 짊어질 각오는 되어 있는 애지만, 넌 아니지.
뭐야, 지금 나한테 설교하는 거야?
대체 누구 덕분에 내가 이런 성격이 됐는데 그래...
나 때문이라고?
난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즐기면서 해. 하지만 넌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몰라.
지금의 네 꼴로는 G36처럼은 물론이고 나처럼도 되지 못해.
너 자신이 과연 어떤 인형이 되어야 할지 잘 생각해봐.
......
우리가 평소에 사이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매잖아.
자매간의 정을 생각해서, 오늘 밤이 지나가면 카페에서 같이 한잔하자.
마음만 받을게.
난 시끄러운 곳에 끼는 것보다는 혼자서 일을 즐기는 게 더 좋아.
그러니까, 사양하겠어.
......
여러 자잘한 말썽이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57은 카페에서 파티에 어울리지 않고, 혼자 텅 빈 숙소에 남았다.
시간 맞춰 겨우겨우 파티 준비를 끝냈네...
이젠 그저 먹고 마시는 일만 남았으니, 누가 또 사고 치지는 않겠지?
G36도 복귀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알아서 처리할 거야.
FN57의 손가락이 전술 패드의 화면 위를 느긋하게 가로질렀다. 그녀에게 오늘 밤은 길게만 느껴졌다.
결국 드레스를 가지러 갈 시간도, 지휘관을 꼬시러 갈 시간도 없었네...
지금은 아예 할 일도 없고...
정말이지, 최악의 크리스마스 이브야...
......
어차피 지금은 어딜 가도 시간 낭비일 테니, 그냥 나가서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FN57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카페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어디 갔지?
파티는? FAL은?
카페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FN57이 문을 열어보니, 예상과는 달리 시끌벅적한 파티는 온데간데없었다.
카페 안에는, FN57 오늘 하루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녕, FN57. 메리 크리스마스.
메, 메리 크리스마스...
지금 지휘관 혼자 여기 있던 거야? 다른 사람들은?
응, 나 혼자야.
다른 사람들은 파티가 끝나서 다 돌아갔어.
뭐? 아직 자정까지 시간이 꽤 있는데... 너무 일찍 끝난 거 아니야?
설마, 지금 뭐 꾸미는 일 있어?
하하, 역시 쉽게 속아 넘어가진 않는구나.
맞다, 먼저 이거 받아.
지휘관이 FN57에게 커다란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건... 내 드레스잖아?!
이걸 어째서 지휘관이...?
네가 너무 바빠서 가지러 갈 시간도 없다고 투덜댔다면서, FAL이 대신 가져와서 내게 맡겼어.
.........
FAL 그 녀석... 진짜...
이렇게 되면 빚이 생겨 버리잖아...
그럼 파티가 일찍 끝난 건 어째서야?
오늘 네가 파티를 준비하느라 수고해서, 모두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그래서 나랑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주려고 미리 해산한 거야.
그렇구나...
기지에는 얼간이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다시 보게 되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생각하고,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오는 게 어떨까?
아, 응. 잠깐만 기다려줘...
잠시 후, FN57이 드레스로 갈아입고 카페에 돌아왔다.
오래 기다렸지, 지휘관.
과연 57이야...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히히, 그야 당연하지.
이 기지에서 나만큼 센스와 안목이 좋은 인형은 얼마 없으니까.
그럼, 저녁 식사... 라 하긴 너무 늦었네. 같이 야식이라도 할래?
요 며칠 내내 고생했으니, 이제 푹 쉬어야지.
지휘관,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뭐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모두를 다시 불러와 줄래?
...응?
왜? 오늘 밤은 나와 단둘이서만 있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마음이 바뀌었어.
계속 열심히 일한 것도, 다 지휘관이 나만을 바라보면서 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해주길 바란 거였어.
하지만 지금은... 지휘관이 이 모습을 제일 먼저 봐준 것만으로 만족했어.
이 드레스에 내 월급이랑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그런 만큼, 더 많은 사람들한테 뽐내야 하지 않겠어?
그래... 무슨 뜻이지 잘 알았어.
지금 바로 모두를 불러올게.
응, 고마워, 지휘관.
......
그렇게 해서, FN57을 위해 모두를 다시 카페로 불러들였다.
떠들썩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올해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즐겁게 막을 내렸다.
오늘 밤, FN57은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냈을까?
크리스마스 이브의 주인공이 된 것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도도하게만 굴던 그녀가 처음으로 기지의 다른 인형들에게 마음을 열었으니.
아무튼, 올해도 참 멋진 크리스마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