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의 집행인
RO635
......
숙소에서 나와, RO635는 M4A1과 함께 준비가 한창인 연회장에 왔다.
와아, 정말 멋지게 꾸며졌네요!
그럴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요?
SOP2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오다 길이라도 잃지 않을까 걱정돼요.
꾸물거린 걔가 잘못이죠 뭐. 그래도 지금쯤이면 옷 다 갈아입고 오는 중일 거예요, 잘하면 오다 AR-15랑 마주칠 수도 있고요.
그보다, 디저트가 이렇게 잔뜩인 걸 녀석이 봤다간 죄다 먹어치우려 할 텐데 괜찮을까요?
아하하, 모처럼의 연회니까 푸짐하게 준비했을 테니 괜찮겠죠... 아마도.
참, RO는 이따가 따로 할 일 있나요?
저요?
으음... 이렇게 갑자기 연회를 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죠.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업무 같은 건 잠시 내려놓고 실컷 즐기려고요.
다행이다, 마침 제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다 같이――
돌연 울린 통신기의 수신음이 대화를 끊었다.
...아, 지휘관님께서 부르시네요.
지휘관님이요?
네, 제가 모두를 위해 잔뜩 주문한 거 기억하죠?
주문... 아, 저번에 말한 그거요?
네, 술이랑 맛있는 걸 잔뜩 샀어요. 다 지휘관님이 비용을 대 주신 덕분이지만요.
지금 막 배송이 도착한 모양인데, 직접 가서 수령해야 한다네요.
아하,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무대에서 봐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거기서 할 예정이니까 꼭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네, 다녀오세요.
자아, 그럼 나도 어디...
...맘 편하게 즐긴다고 했지만, 어떡해야 잘 즐겼다고 할 수 있으려나?
......
RO635는 식탁 위에 놓인 디저트 한 조각을 집었다.
갑작스럽지만... 아주 중요한 연회니까...
......
이번 연회는 아주 중요한 이벤트야.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꼭 우리 모두에게 절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만들고 말겠어.
...그렇구나.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 연회장의 장식이 턱없이 부족해!
내가 기대했던 "휘황찬란"이나 "삐까번쩍"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든단 말이야!
어쩌다 찾아온 다시 없을지도 모를 기회인데, 대충대충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장식에 당장 예산을 더 많이 투자해야 해!
흐음...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지...
AR-15는 고개를 들어, 안전벨트를 차고 무대의 천장 지지대에 매달린 채 작업에 몰두 중인 RO635를 올려다봤다.
너 지금 거기서 뭐해?
...응? 나?
RO635는 자기 손에 들린 망치와 렌치를 번갈아 봤다.
뭐하냐니... 보다시피, 무대 조명 달고 있는데?
그거 담당 따로 있잖아.
아하하, 모두 바빠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돕고 싶어져서 그만...
무대의 조명이 제대로 설치됐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RO635는 능숙하게 지지대에서 내려와 안전벨트를 풀었다.
됐다!
아 참, 조명 효과 괜찮은지 테스트해야 되는데...
지금 테스트 중인데 완벽해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RO 씨, 덕분에 다들 다시 의욕이 생겼나 봐요!
모처럼의 연회니까, 모두 그렇게 열의를 유지해 줘. 그럼 나중에 보자!
모처럼의 연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무슨 얘기 중이었더라?
...연회 인테리어에 대해서였는데, 그냥 말 안 하련다.
너한테 얘기했다간 또 직접 하려 들 거 같아.
내가 도울 수 있다면야.
난 네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끼려 들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응? 왜?
M4한테 들었어, 이번 연회는 업무 부담 같은 거 다 내려놓고 맘 편히 즐기겠다고 했다며?
그런데 봐, 지금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닌 것 같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참 빠르게 깨닫는다.
하하하... 미안미안, 일에 몰두하니까 전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래도 이런 것도 보람차잖아? 모두를 도와주면 연회 준비 작업도 더 빨리 마칠 수 있고.
글쎄, 그래도 네가 직접 나설 필욘 없다니까. 다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서 각 사항마다 담당자가 배정된 거야.
그런데 왜 넌 할 일이 아무것도 없냐고 묻는다면, 다들 네가 이번 연회서만큼은 푹 쉬길 바라서라고.
아... 미, 미안... 그런 줄도 모르고...
으이구... 나무라는 거 아니니까 사과는 됐어.
으응, 정말 고마워 AR-15. 그래, 연회니까 즐겨야지!
좋았어! 그럼 이제부터 진짜로 마음놓고 즐겨볼――
RO, 여깄었구나. 무대 디자인 말인데...
아, 지금 갈――
으앗!?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흔쾌히 다가가려는 그 순간, RO635의 어깨가 뒤로 확 잡아당겨졌다.
이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사나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AR-15가 있었다.
어... AR-15...?
너, 당장 따라와.
뭐? 자, 잠까아아앗!?
AR-15는 RO635를 냅다 무대 뒤편의 탈의실로 끌고 갔다.
어? 야, 이게 무슨... 꺄악!? 하지 마!
......
됐으니까 가만 좀 있어!
......
......
됐으면 나와.
......
탈의실에서 나온 RO635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새옷 차림이었다.
정교한 재단과 눈부신 색채가 조화를 이뤄, 무대에서 준비 작업 중이던 인형들의 이목을 절로 끌었다.
왜, 왜 갑자기...?
왜는 무슨 왜야.
숙소에 그 드레스가 놓였길래, 네가 깜빡했나 해서 가져왔지.
지금 안 입혀 두면 이따 또 어느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을지 누가 알아?
이젠 안 한다니까!
정말로?
...가능하면.
......
너, 지금 엄청 예뻐.
으, 응... 고마워...
RO635는 반사적으로 고맙다 하면서도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시야 한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어? 방금 누가 사진 찍었어?
아아, 미안하다 RO 양!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손이 절로 셔터를 누르고 말았어!
KSVK가 큼지막한 카메라를 든 채로 껑충 무대 위로 올라왔다.
AR-15 양, 그대도 한 장!
KSVK?
장난치는 건 아닌가 보네.
그야 물론이지, 카메라부터 철저하게 준비했으니!
어...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으음? RO 양은 아직 모르나? 오늘은 연회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모두의 사진을 찍어서, 대미를 장식할 갤러리 쇼를 열려 하거든!
멋진 순간은 포착하는 대로 기념으로 남겨야 가치 있는 법이니 말이지, 음음.
그런 거야...?
그런 거다!
어... 알았어.
자아 RO 양, 그럼 당장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봐라!
응? 이, 이렇게...?
RO635가 얼떨결에 천천히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뭐야, 또 찍네?)
(사진에 어떻게 찍힐지 모르겠네... 머리 장식이 삐뚤어지진 않았으려나?)
좋아 좋아! 자 다음엔 자세를 이렇게 취해 봐라!
어어? 이, 이렇게...?
그런데 이거, 한 장만 찍는 거 아니었어?
으음~ RO 양은 마치 화보의 모델 같구나! 나도 같이 찍고 싶어졌어!
AR-15 양도 함께하지 않겠나?
벌써부터 단체 사진 찍기엔 좀 이르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AR-15도 냉큼 촬영에 끼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이렇게 모였던 게, 엄청 오래 전 일처럼 느껴져...)
(어떻게 싸워 이길지 고민할 필요 없고, 무얼 잃게 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저 어떻게 해야 멋진 자세를 잡아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니...)
(이게, 모든 부담을 내려놓은 느낌인 걸까?)
(조금... 즐겁다.)
...앗, KSVK 너 리본이 좀 느슨해졌어.
이런, 정말이군. RO 양, 난 지금 카메라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니 대신 다시 매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어?
사진을 한 장 더 찍기 전에 KSVK에게 생긴 약간의 말썽거리를 처리해 주던 와중, RO635의 시야 한구석에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들켰음을 눈치챈 듯, M4A1은 뜨끔하더니 허겁지겁 어디론가 사라졌다.
(M4 씨, 엄청 신경쓰이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봤어...)
(...아, 설마?)
연회 준비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 M4A1이 모두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말하던 것이 RO635의 뇌리를 스쳤다.
그럼 다시 준비됐겠지?
하나, 둘――
잠깐!
으음?
왜 그래?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
잔잔한 음악과 함께 연회가 한창인 마당에서, 인형들은 저마다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유쾌하게 수다를 떨었다.
응, 이 사진 좋네요.
고마워 M200, 나중에 아주 큰 사이즈로 현상 부탁할게! 나랑 KSVK의 아주 소중한 추억인데, 잘 간직해야지!
그치~?
윽... 그, 그래!
그건 그렇고 AR-15 양은 어딨지? 아까부터 안 보인다만.
아, AR-15는...
다 함께 사진 찍으려고 M16이랑 SOP2 찾으러 갔어.
그런데, 확실히 좀 오래 걸리네. 그냥 내가 갈걸 그랬나?
AR-15도 RO가 항상 뭐든지 혼자 짊어지길 원치 않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저기... RO? 어차피 기다리는 거, 우리 둘이서라도 먼저...?
저희 둘이서 사진이요? 그것도 좋네요.
괜찮을까, M200?
그럼요. 두 분, 좀 더 붙어서 서 주세요.
M200의 지시에 따라, RO635는 M4A1과 바싹 붙었다.
......후훗.
RO?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AR-15의 말대로, 뭐든지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신경쓸수록 부담만 더 커지니까요.
네, 그렇죠.
지금 이렇게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연회를 즐기는 기분도 썩 괜찮네요. 항상 무슨 일이든 참견하려는 버릇도 좀 고쳐야겠어요.
RO라면 분명 할 수 있어요.
두 인형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고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M200의 카메라 렌즈를 바라봤다.
좋아요,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펄럭!
...엥?
무한한 하늘, 저 너머로오오오!!
엄마야, 쟤 저게 뭐하는 거야!?
S, SOP2?!
웬 보라색의 그림자가 나타나, 돌풍을 일으키며 연회장의 상공을 휩쓰는 소란이 벌어졌다.
인형들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를 붙잡을 겨를도 없이 비명만 질러댔고, 화기애애하고 유쾌한 분위기의 연회는 슬슬 풀어지려던 RO635의 심정처럼 혼돈에 빠졌다.
누가 쟤 좀 붙잡아!
꺄하하하하하핫!!
잡아볼 테면 잡아 봐~라~!!
......어쭈구리?
RO?
하여간 잠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너 딱 걸렸어 SOP2!!
안일했던 마음을 떨쳐내고, RO635는 확성기와 수갑을 들고서 소란의 주범을 뒤쫓았다.
거기에 마찬가지로 SOP2를 붙잡으려 달려드는 인형들이 점점 많아져, 현장은 더욱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의 연회는 그렇게, 예측을 불허하는 돌발 사태와 함께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었다...